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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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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철학기행
클라우스 헬트 지음, 이강서 옮김, 효형출판 펴냄
원제는 <트렙푼크트 플라톤(Treffpunkt Platon)>. 독일어 '트렙푼크트'는 길이 만나는 곳 또는 약속 장소나 모이는 곳을 의미합니다. 이 제목은 모든 철학이 플라톤에서 만난다는 의미를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철학 탄생의 비밀… 열쇠는 '정관사'!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한다는군요. 이번 <지중해 철학기행>은 김태완 박사가 서평을 하셨습니다. 아래 사진과 목차는 라라와복래가 추가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어렵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참 기분좋은 일이다. 여행을 하다가 큰 기대도 없이 들어간 허름한 밥집에서 그 지역의 깊이 곰삭은 맛을 맛보는 것은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오랜 세월이 흘러 문득 그 근방을 지나다가도 그 맛이 생각나고 그 정취가 떠오른다. 좋은 책도 그렇다. 별 기대도 않고 집어 들었다가 끝내 밤을 꼴딱 새워버린 경험이 더러 있지 않은가!
근래에는 나이가 좀 들어서인지(?) 웬만한 책을 봐서는 그리 흥이 일지 않는다. 가끔씩 서점에 들러 제호에 이끌려 몇 장 넘겨보고는 '뭐, 그저 그렇고 그런 책이군' 하거나 '이런 책을 쓸 바에야 차라리 쓰지 않는 것이 낫겠군. 종이가 아깝네' 하고, 나도 책을 두어 권 낸 주제에 눈 밝은 사람이 나를 뒷전에서 꾸짖을 것은 생각도 않고, 뇌까리면서 책을 내려놓고는 했다.
그만그만한 책들이 그만그만한 제호를 달고서 날마다 쏟아져 나와서 내용을 꼼꼼히 훑어보기도 전에 지레짐작으로 두어 장 넘겨보고는 내려놓게 된다. 정말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하는' 격이다. 그래서 억울한 책이 얼마나 많을까? 그런데 간만에 거의 추리소설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철학사 책을 읽었다.
'큰 책은 큰 악'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책의 도덕적인 선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책이 크면 그만큼 더 골칫거리라는 말이다. 읽기도 힘들고 들고 다니기도 힘들 테니까. 그런데 <지중해 철학 기행>(클라우스 헬트 지음, 이강서 옮김, 효형출판 펴냄), 이 책도 650쪽이 넘는, 참 두툼한 책이다. 들고 다니며 읽기에는 꽤나 골칫거리이다.
더구나 철학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닌가? 그런데 내용도 무게도 무거운 책이지만 그 골치를 이겨내고 읽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정말 재미있다. 철학책이 재미있으면 얼마나 재미있을라고? 내가 남의 책 광고나 해주게 생겼나? 그런데 재미있다. 좋은 책은 어려워도 읽어야 한다. 좋은 책이라면 큰 골칫거리라도 읽어야 한다. 그래서 배우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조금이라도 이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좋은 책이면서 재미도 있다면 금상첨화. 무엇을 더 바라랴!
그래도 이 책이 어렵다고 한다면? 아무리 쉬운 말로 풀고 이야기 형식으로 꾸민다 해도 어려운 것은 어려운 것이다. 저자도 말했듯이 '이발소의 소크라테스'나 '에피쿠로스와 거위 간 파이'로 말랑말랑하게 엮어낸다고 해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나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쉽게 이해될까? "아름다운 것은 어렵다(chalepa ta kala)!" 어려움을 이겨내고 책을 읽어보라. 그러면 분명 아름다움을 느낄 것이다.
하나라도 더 알고 죽자
1980년대 초 대학에 들어와 서양 고대 철학사 강의를 주로 거스리의 <희랍 철학 입문>으로 입문하였다. 표지가 너덜너덜하여 창호지로 덧씌워가며 열심히 읽었다. 고전을 전공하지 않는 인문 학생들을 위한 교양 강의를 책으로 만든 것이라고 했는데도 참 어려웠다. 그렇지만 강의를 따라가기 위해, 대학원 입학시험 준비를 위해, 여러 번 되풀이 읽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 책은 고대 헬라스의 철학을 탈레스부터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깔끔하게 잘 정리한 책이다. 그런데 이런 책을 우리나라 대학생들 가운데 교양으로 읽을 사람이 있을까?
거스리의 책이 일종의 전공서적이라면 <지중해 철학 기행>은 그야말로 인문 교양서다. 지중해 지역을 따라가면서 그 지역에 연고를 가진 철학자와 철학 사상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하여 공간으로는 헬라스의 밀레토스에서부터 에스파냐의 세비야까지, 시간으로는 탈레스 때로부터 16세기 르네상스까지 서양의 철학사를 서술해간다.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등 고대와 중세 서양의 철학사를 수놓은 밤하늘의 별과 같은 철학자들의 철학 사상을 그들과 관련한 일화를 이야기하지 않고서도 이렇게 재미있게 소개하다니! 이 책을 읽고 얻은 것이 무척 많지만 두어 가지만 집중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 책의 부제(副題)처럼(원서에서는 원래의 제목인) '모든 길은 플라톤으로' 통하니까 말이다.
이 책의 저자는 무뚝뚝하게 자기 할 말만 했지만 소크라테스에 얽힌 일화 하나가 떠오른다. 친구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이다. 소크라테스는 서양 철학을 상징하는 철인답게 웬 일화가 그렇게도 많은지. 일화의 성격상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런 이야기다. ▶소크라테스(기원전 470경~399)
소크라테스가 사형 판결을 받고 사형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그날 아침이 되었다. 같이 사형을 받기로 되어 있는 사형수 한 사람이 참 구슬프게도 자기 고장의 노래인지 시인지를 읊조렸다. 너무나 의미심장하고 애절한 내용에 감동을 받은 소크라테스가 다시 한 번 읊어달라고 졸랐다.
그래서 사형수가 심드렁하게 무엇 하러 그러느냐고 물었겠지. 소크라테스 왈, 너무도 좋은 내용이라 배워보려고 그런다고. 어이가 없어진 사형수 왈, 참 댁도 딱하시오. 금방 죽을 사람이 배워서 무엇 하게요? 그러자 우리의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말했단다. "죽기 전에 하나라도 더 알고 죽으려고요."
참 우스개인지 일화인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촌철살인이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한 말은 참 경건하고 진지한 공자님 말씀이다. 그러나 죽기 전에 하나라도 더 알고 죽으려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빙충맞아 보이기도 하고, 가끔씩은 현실적인, 너무도 현실적인 마누라한테 바가지도 긁히고 구정물도 뒤집어쓰고, 아름다운 미소년과 미소녀를 보면 사족을 못 쓰고 달려가 구경하고, 낫살이나 먹고 점잖지 못하다는 핀잔에 머리를 긁적거리며 의뭉을 떠는, 딱 소크라테스의 말이다. 그런데 철인이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다 통하는가? 도가 통한 사람들끼리는 과연!
왜 헬라스에서 철학이?
아마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지? '사람은 나면서부터 알고자 한다'고. 헬라스 사람들은 앎 자체를 알려고 했단다. 그렇지. 공자도 배우고 때마다 익히면 즐겁다고 했지만, 배움이라는 것,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지. 그리고 그걸 알려고 하지도 않으셨고. 그런데 헬라스 사람들은, 배움,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려고 하고 궁금하게 여겼단다. 그리하여 고대 헬라스에서는 마침내 학문(철학)이라는 것이 생겨났단다.
헬라스에서 학문이 생겨난 아주 중요한 까닭 가운데 하나로서 이 책의 저자는 고대 언어 가운데서 이 언어에만 독특한 정관사에서 찾는다. 물론 다른 요인도 여러 가지 들고 있지만. 정관사나 부정관사는 인도유럽어에 속하는 언어에는, 몇 나라 말을 제외하고는 대개 발달해 있다. 그런데 처음으로 이런 정관사를 고안해낸 사람들이 고대 헬라스어를 쓰던 사람들이었단다. 정관사를 발명한 언어에 주어진 공로의 월계관이 바로 학문(철학)의 발생이었던 셈이다.
왜 정관사는 철학이 태어나는 데 산파 역할을 했을까? 정관사는 어떤 말 앞에 붙어서 그 말을 명사로 만든다. 그리하여 정관사가 붙은 말은 실체가 된다. 쉽게 말하자면 정관사가 붙은 말은 무엇이든 간에 그 무엇으로 불릴 수 있다. 자립적인 존재자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장미꽃은 붉다'거나 '말이 달린다'고 할 때 '붉다'는 장미의 속성을, '달린다'는 말의 동작을 나타내는 말로서 자립적인 것이 아니지만 장미와 말은 자립적인 것이다.
우리말로는 특별히 어느 하나를 한정해서 가리키지 않는 한 장미와 말 앞에 아무런 말이 덧붙지 않지만 영어를 비롯한 인도유럽어에 속하는 대부분의 말들에서는 the rose(la rose, la rosa, die Rose), the horse(le cheval!, il cavallo, das Pferd)처럼 반드시 관사가 붙는다. 관사가 붙는 말은 명사이다. 학문은 바로 이 명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속성을 나타내는 말에도 정관사가 붙으면 명사가 된다. 바로 이렇게 명사가 아닌 것을 명사로 탈바꿈하게 하는 것이 관사이다. 자립적 존재자가 아닌 것도 관사가 붙으면 자립적인 존재자, 추상명사가 되는 것이다. 장미꽃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이었던 '붉다'에 관사가 붙어 '붉음(the red, le rouge, il rosso, das Rot)'이 됨으로써 '붉음'은 추상명사가 되고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말 '붉음'은 형용사 '붉다'에 명사화접미사 'ㅁ'이 붙어서 명사가 된 것이지만 서양 언어에서는 그냥 앞에 정관사만 붙어서 그 모양 그대로 명사가 된다. 헬라스 사람들은 정관사 덕택에 처음으로 명사가 아닌 것을 자유로이 명사로 만들 수 있었단다. 이렇게 만들어낸 추상명사는 연관된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설명하고 규정할 수 있고, 개념화할 수 있다. 그리하여 속성을 개념화함으로써 학문이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라파엘로 ‘아테나이 학당’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나이 학당'의 중앙에서 플라톤은 왼손에는 <티마이오스>라는 책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역시 왼손에는 <윤리학>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바닥을 땅으로 향한 채 앞으로 뻗고 있다. <티마이오스>는 플라톤의 우주론을 담은 책이다. 이 책에서 플라톤은 인간의 삶이 우주적 질서에 동화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인간이 이 땅에서 어떻게 잘 살아갈 것인가를 다룬다. 그래서 이 그림은 관념과 이상의 세계를 추구하는 플라톤과 현실과 경험을 중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원한 대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 저 예지의 세계만 쳐다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에만 머물러 있었을까?
▲‘아테나이 학당’ 부분. 철학의 두 거장 플라톤(왼쪽)과 아리스토텔레스(오른쪽)가 철학자들의 무리를 이끌며 진지하게 토론하고 있습니다. 이상주의자로 만물지식의 근원인 ‘이데아’를 이야기하듯, 플라톤은 손가락을 하늘로 향하고 있으며, 추상적 형이상학에 관한 그의 저작인 <티마이오스>도 세로로 들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한쪽 발도 들고 있는 것도 보이실 거예요. 현실주의의 시초로 알려져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손바닥을 평평하게 하여 땅으로 향하게 하고 있으며 그의 저서인 <윤리학> 역시 수평으로 든 채 '무엇을 하든 우리는 땅에 발을 붙이고 있어야 한다' 는 그의 사상을 몸짓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플라톤과 달리 그는 양쪽 발을 모두 바닥에 붙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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