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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스키타이 미술공예의 신비
제국의 빼어난 조형문화… 어찌 야만ㆍ변방인가
기원전 수세기 동안 북방 유라시아 대륙을 풍미하던 스키타이의 문화, 특히 휘황찬란한 미술공예의 신비에 관해서는 아직껏 많은 수수께끼가 입방아를 찧고 있다. 필자는 일찍이 서구문명 중심주의에 의해 문명권에서 소외된 북방 유목기마민족 문화를 하나의 새로운 문명권으로 설정하면서 그 중심에 서 있는 스키타이 문화에 관해 각별한 관심을 가져왔다. 그 현장 몇 곳을 돌아보기는 했지만, 유물을 종합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기회는 종시 차려지지 않았다. 그러던 차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스키타이관을 찾게 된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박물관 내의 미술전시관들은 관람객들로 붐비지만, 웬일인지 이 스키타이관만은 한산한 편이다. 덕분에 유물을 꼼꼼히 살펴볼 수가 있었다.
이러한 유물과 더불어 몇 가지 기록에 의해 스키타이 정체가 점차 밝혀지고 있다. <구약성서>에서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들을 활과 창을 잡고 말을 탄 채로 줄지어 엄습하는 잔인한 북방 민족으로 묘사하고 있다. 같은 시기 아시리아의 설형문자 점토판에 새겨진 에사르하돈 왕(기원전 681~669년 재위)의 연대기에는 그들을 ‘이슈구(쿠)자이’라고, 그리고 기원전 7세기 후반부터 스키타이와의 교역을 시작한 그리스인들은 그들을 ‘스키타이’ 혹은 ‘스키테스’라고 부른다. 그러나 스키타이인들은 스스로를 ‘스콜로텐’ 혹은 ‘슈크’라고 칭한다. ‘이슈구(쿠)자이’나 ‘스키타이’는 이러한 ‘스콜로텐’이나 ‘슈크’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금제 여자 얼굴상(옷 장식용, 기원전 4세기, 사진 왼쪽). 금제 남자 얼굴상(옷 장식용,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의 시조와 인종 및 본향에 관해서는 이견이 구구하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명저 <역사>에서 스키타이의 시조에 관해 두 가지 전설을 전하고 있다. 하나는 타르기타오스란 시조인데, 그의 아버지는 태양신 제우스이고, 어머니는 보리스테네스 강(현 드네프르 강)을 낀 땅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헤라클레스가 드네프르 강 연안에 있는 울창한 삼림지대인 힐라에아에 살던 사녀(蛇女,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뱀)와 동거해 낳은 셋째 아들 ‘스키테스’가 바로 스키타이 시조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상징적인 전설에서 공통되는 점은 시조의 출현이 드네프르 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인종과 관련해서 전해오는 신명(神名)이나 인명, 지명 등을 감안하면 스키타이어는 인도-유럽 어족의 인도-이란 어군 중 동이란 아어군(亞語群)에 속한다. 따라서 그들은 비록 인종적 혼합을 많이 겪어왔지만, 원초적 인종은 이란인의 한 계통이라는 데 견해가 모아지고 있다.
스키타이의 본향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은 동쪽으로부터의 서진설이다. 이 설에 의하면 그들은 아락세스 강(현 볼가 강) 동쪽에 살다가 중앙아시아의 일족인 마사게타의 공격을 받자 강을 건너 흑해 북안에 진출한다. 그러자 원주민 킴메르인들은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도망친다. 도망치는 그들을 추격하던 끝에 근동 지방에 이른다. 당시 여러 세력들 간에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는 혼란한 상태를 틈타 스키타이는 근동지방을 손쉽게 장악하고 28년간이나 통치한다.
▶스키타이 무사들의 전투 장면을 새긴 금제 빗(기원 전 4세기)
이러한 시조나 인종 및 본향을 가진 스키타이의 형질적 용모는 대체로 우람한 체구에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턱수염이 더부룩하다. 키는 계층에 따라 다른데, 상층부는 비교적 큰 편(176~180㎝)이나 평민은 중위(약 164㎝)에 머문다. 귀를 덮는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헐렁한 통바지에 버선 모양의 가죽 단화를 신고 전개형(카프탄·앞이 트인 형)의 짧은 상의에 허리띠를 졸라맨 모습은 흡사 고구려인의 옷맵시를 연상케 한다.
스키타이 왕국은 왕족 스키타이가 다른 스키타이(유목이나 농경 스키타이)를 통솔하는 부족 연맹적 성격이 짙은 왕국이다. 말 위의 궁술가들인 스키타이는 가재도구를 실은 차를 집으로 삼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목기마민족이다. 그들의 기동력이나 전투력은 당대의 어느 누구도 따라잡을 수가 없으며, 사회 전체가 군사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라면 그들을 공격한 어떤 적도 그들로부터 도망갈 수 없고, 그들이 피하고자 하면 어느 누구도 그들을 붙잡을 수 없다는 점이라고 자탄 어린 지적을 한 바 있다. 징병제를 근간으로 한 각 부족에게는 기마 전사단이 조직되어 있으며, 부족장은 언제나 진두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전투를 지휘하며 퇴각은 애당초 불허된다.
◀철검과 금제 칼집(기원전 7~6세기, 사진 왼쪽). 길이 41.4㎝의 금제 말머리 꾸미개(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의 무사정신과 승전욕, 그리고 형제애는 남다르다. 무사가 첫 번째 적을 죽이면 적의 피를 마시는 특별 의식을 거행하며, 살해된 적의 머리 가죽을 벗겨서는 무두질해 손수건이나 옷감으로 쓰기도 하고 말고삐에 매달아 과시하기도 한다. 그들은 손가락을 자르는 엄숙한 서약을 통해 의형제 관계를 맺고 상호 충절을 확인한다. 스키타이의 무사 정신이나 사회의 군사적 성격은 마구와 기마 전술용 무기가 발달한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스키타이관에 전시된 유물 중에는 이를 증명하듯 안장, 가죽 등자, 청동제 갑옷, 짧은 활, 방패, 쌍날이 달린 아키나케스형 단검 등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스키타이의 종교의식은 토테미즘적이고 샤머니즘적이다. 그들은 자연현상을 의인화한 신과 동물을 숭배한다. 그러나 신을 위한 신전이나 조상(彫像)을 세우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전쟁신 아레스는 각별한 의미가 부여된다. 마른 장작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꼭대기에 아레스의 상징인 오래된 철검을 꽂는 의식을 매해 치른다. 종교적 의례로서의 희생이나 순장 흔적도 곳곳에서 보인다.
◀청동제 투구(기원전 7세기)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알려고 하지 않았지만, 스키타이는 인류에게 실로 풍부하고 값진 문화유산을 남겨놓았다. 그 가운데서 으뜸가는 것은 단연 신비의 경지에 이른 미술공예다. 조형 기법이나 소재, 문양, 용도, 그리고 외래문화의 영향 관계에 따라 미술공예사를 세분해 5기로 나누기도 하고, 또는 전ㆍ후 2기로 대별하기도 한다. 5분법은 기원전 8~7세기를 1기, 6세기를 2기, 5세기를 3기, 4세기를 4기, 3세기 이후를 5기로 나누는 분법이다. 2분법에서 전기는 기원전 8~5세기로 5분법의 제1·2·3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아시리아와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주요 유물들이 쿠반 강 유역에 널려 있다. 후기는 기원전 4세기 이후로 5분법의 제4·5기에 해당하며, 주로 그리스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드네프르 강 유역에 유물이 집중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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