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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3) 5·16 주도 세력은 最强의 개혁 집단

淸山에 2011. 1. 18. 10:20
 

 

 
5·16 주도 세력은 最强의 개혁 집단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3)/ 한국군 장교들은 미국 여행을 통해서 전술학뿐 아니라 조직, 경영, 기술을 배웠고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고 ‘돼지우리 같은’ 조국을 개혁해야 한다는 울분을 품고 귀국하기도 했다.
趙甲濟   
 

 

 
 인사참모 朴泰俊 대령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 아래의 참모진은 참모장 黃弼周(황필주)─金容珣(김용순) 준장, 인사참모 朴泰俊(박태준) 대령, 작전참모 金景沃(김경옥) 대령, 헌병부장 金詩珍(김시진) 대령, 비서실장 윤필용 중령, 공보실장 이낙선 소령 등이었다. 모두 그 전에 박정희와 함께 근무했거나 육사 시절 제자였던 ‘박정희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5·16 뒤에도 박정희 대통령을 측근에서 보좌하게 된다. 육사 6기 출신인 박태준(前 자민련 총재) 대령은 육본 보임과장이란 要職(요직)에 있다가 박정희에 의해서 발탁되었다.
 
 “어느 날 내 방에 오시더니 어깨를 툭 치셔요. ‘어쩐 일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내정되었는데 함께 내려가자’는 거였습니다. 그러시면서 사령부 창설에 따른 참모진 및 요원 편성을 해보라고 했어요.”
 
 박태준 대령은 25사단에서 연대장, 참모장을 지낼 때도 몇 차례 당시 1군 참모장 박정희 소장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었다. 박정희가 본부사령직을 제의하기에 “그건 밥장사 아닙니까”하면서 거절한 적도 있었다. 박태준 自民聯(자민련) 전 총재는 박정희와의 운명적인 만남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육사에서 생도 교육을 받을 때 그분은 중대장으로서 포병술을 강의했습니다. 삼각함수도 가르쳐 주시고요. 중대장 훈시를 들으면서 강인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무언가 꽉 차고 무거운 분이란 느낌이 왔습니다. 이상하게도 저의 視野(시야)에는 그분만이 들어와요. 어린 소견으로도 많은 장교들 속에서 그분만이 반짝반짝하는 것 같고 어쨌든 눈에 자주 뜨이는 거예요. 그분이 내무 사열을 하러 실내로 들어오면 어떤 氣(기)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모셔보니 ‘아, 이 분은 이 정도 자리에 있을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단박에 할
수 있었습니다.”
 
 박정희 사령관은 軍紀(군기) 담당이기도 한 박태준 대령에게 “후방부대는 일선과 멀리 떨어져 있고 對民(대민) 접촉이 많으니 적절한 훈련을 통해서 규율을 확립하라”고 지시했다. 박정희는 또 박태준에게, 軍需司(군수사) 예하 부대와 부산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체육대회를 동대신동 운동장에서
개최하도록 했다. 
 
 

 

 
박 사령관은 여야 정치인들의 청탁에 대해서는 원칙에 의해서 처리했다. 합리적인 부탁이면 야당 의원이라도 들어주고 무리한 청탁은 묵살했다. 자유당 실세 의원의 친척이 관련된 軍內(군내) 부정사건도 철저하게 수사하도록 했다. 수사 책임자가 머뭇거리자 “자네는 사실대로 수사해. 책임은 내가 지는 거야”라고
했다. 그 자유당 의원이 항의차 사령관실을 찾아오자 몇 시간이고 기다리게 해놓고는 끝내 만나 주지도 않고 돌려보냈다.
 
 박태준 대령은 그때 한국군 안에서 자라나고 있었던 새로운 엘리트 집단을 대표하고 있었다. 미군 보병학교와 행정학교에 두 번 유학하여
현대적 전술학뿐 아니라 조직관리학을 배운 그는 1956년에 수색에서 국방연구원
(현 국방대학원의 전신)이 개교하자 국가정책 담당 교수가 되었다.
 
 그때 교수부장은 柳炳賢(유병현·합참의장, 주미 대사 역임) 대령, 경제 정책 담당 교수는 李勳燮(이훈섭·철도청장 역임) 대령과 崔永斗(최영두·군정내각통제실 요원) 대령이었다. 이 학교는 고급 장교들에게 국가전략, 경제, 행정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시각을 제공했다.
 이들은 5·16 뒤 국정 운영에서 이때 얻은 지식을 활용할 수 있었다.
 
 국방연구원이 문을 열고 첫 시험기 과정(Pilot Course·6개월)에 학생 겸 강사로 참여한 사람이 李漢彬(이한빈·
부총리 역임)이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부흥부에 들어가 예산국장으로 내정되어 있었던
이 씨는 젊은 장교들의 熱意(열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한빈은 당시 미국 육군에서 개발한 ‘기획예산제도’(Program Budgeting System)를 우리 육군이 받아들여 적용하려 하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이 기획예산제도는 예산 편성에 생산성과 효율성 개념을 도입한 것이었다. 그때까지 우리나라 예산 편성은 부서별로 예산을 나누어 갖고는 무엇을 구입하는 데 얼마가 소요된다는
평면적인 계산만 하고 있었다. 
 
 

 


군에서 도입한 기획예산제도는 어떤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얼마의 돈을 투입하면 얼마의 성과가 나오는가를 따져 예산을 짜고 계획─실행─확인 과정을 통해서 그 사업의 進度(진도)를 제도적으로 검증하도록 했다. 이 선진 기법은 5·16 뒤 군에 의해서 우리 행정기관에 도입되고 각 부처에 기획실장이란 자리가 만들어져 기획예산업무를 총괄하게 된다.
 
 이한빈은 국방연구원과 거의 동시에 세워진 육군 군수학교에 출강하여 최고급 지휘관들을 상대로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배운 미국식 조직 운영에 대한 강의를 했다. 그는 이것이 계기가 되어 5·16 뒤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박태준 전 총리는 ‘당시 군대의 행정 수준이 民官(민관) 부문보다 훨씬 선진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때 민간 관료들의 행정은 일제 시대의 방법을 답습하여 법대를 나온 사람들이 법을 기준으로 하고 있었지만 군대에선 미군 제도를 받아들여 행정 전문가가 시스템을 통해서 조직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4·19 계엄령 직후 나는 부산 시청 통제관으로 근무했는데 공무원들의 낙후성을 목격하고 놀랐습니다. 군대에서는 한글 타자기를 써 요점 위주로 문서들을 작성하고 있었는데 공무원들은 펜대로써 ‘首題之件(수제지건)에 대하여’로 시작되는
유장한 글을 쓰고 있더군요.”
 
 젊은 군대의 한글 타자기와 노쇠한 관청의 펜대. 그 상징성만큼이나 당시 한국군 장교단은 양과 질 모든 면에서 奇型的(기형적)으로 급성장하고 있었다.
약 70만 대군이 정부 예산의 약 30%를 쓰고 있었으니 이 집단에서
지도층이 배출된 것은 당연했다. 
 
 

 

  
創軍(창군) 이래 1960년 말까지 육군에서 渡美(도미) 유학한 장병(대부분이 장교)의 누계는 7049명이었다. 미국 보병학교 유학생이 1551명,
포병학교가 1202명으로 가장 많았다. 장교들이 다녀온 학교의 이름만 살펴보아도 이들이 무엇을 배우고 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참모학교, 화학학교, 이어서 공병, 군의, 병기, 병참, 통신, 부관, 경리, 軍宗(군종), 기갑, 정훈,
헌병, 고사포, 수송, 심리전, 항공, 여군, 군수, 법무학교.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으로는 최초로 미국을 방문한 백선엽 장군(왼쪽에서 셋째)이 1953년 5월 포트베닝의 미 보병학교에 들러 유학 중이던

국군 지휘관들을 격려하고 있다. 미국의 강력한 휴전 의지에 따라 정전협정 체결을 코앞에 뒀던 한국은 신속한 병력 증강으로 휴전 뒤의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이 한국군 장교들은 미국 여행을 통해서 전술학뿐 아니라 조직, 경영, 기술을 배웠고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고 ‘돼지우리 같은’ 조국을 개혁해야 한다는 울분을 품고 귀국하기도 했다. 외무부 공무원보다도 한국군 장교단의 渡美(도미) 유학자 비율(약 10%)이 더 높았다. 1953년의 경우 우리나라의 민간인 외국 유학자
수는 모두 613명이었는데 이 해 장교 유학자는 983명이나 됐다.
 
 이 도미 유학 장교들이 매개한 미국의 선진 방법론에 의해서 국군은 한국 사회의 최강 집단에서 선진 집단으로 질적인 변모를 하면서 거대한 개혁 에너지의 분출구를 찾고 있었던 것이고, 박정희는 이 잠재력을 정권
장악과 국가 개조에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
 
 친구 黃龍珠의 격려
 
 육사 8기 출신으로서 1960년에 특무부대 중령이었던 全在球(전재구)의 경우 12년의 복무 기간 중 1년 7개월을

교육받는 데 보냈다. 미국에 가서 보병학교에서 6개월, 정보학교에서 2개월, 귀국해선 陸大(육대)에서 6개월,
그리고 원자력학교에서 2개월간의 교육을 받았다.
 
 1950년대 후반 주한 미군에 핵무기가 도입된 것과 보조를 맞추어 한국군에선 核戰(핵전)에 대비한 원자력 교육이 실시되고 있었다. 대학에 원자력공학과가 설치되기 전이었다. 民官(민관)부문에선 아직 재교육이란 개념이 도입도 되기 전에 장교들은 끊임없이 교육을 받으면서 자신의 기능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한국군에 미국식 행정제도를 도입하는 데 지도적 역할을 한 사람으로 꼽히는 金雄洙(김웅수) 소장은 5·16 쿠데타 때 6군단장으로서 박정희에 협조하지
않았다가 옥살이를 한 뒤 미국에 건너가 워싱턴 가톨릭 대학에서 교수(경제학)로 근무했다. 건양대학교(충남 논산 소재)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군의 질적, 양적 팽창이 5·16의 한 원인이었다고 말했다.
 
 “1960년 당시 한국의 대표적 조직체는 군대, 경찰, 정당, 행정부서였습니다. 정치와 행정조직의 생산성은 퍽 낮았습니다. 경찰은 서열 질서를, 군대는 무기를 가진 강력한 조직이었습니다. 도미 유학 장교들이 많은 군대는 국제화되어 있었고, 미 고문관들은 국군의 각 부대에 조직관리 기술을 전수했습니다. 도미 유학 장교들은 민주주의를 배우러 간 것은 아니지만 서구 선진 사회의 작동 원리를 배우고 왔습니다. 국방연구원은 장교들에게 정치·외교·경제를 가르치게 되었는데, 정부 고관들의 강의 수준에 대해서 이 장교들은 ‘저 정도밖에 안 되나’ 하는 생각을 가지면서 ‘우리가 하면 훨씬 잘 하겠다’는 자신감을 갖기도 했지요. 한국군 장교단은 점차 정치화되어 갔는데 이를 억제해야 할 정치가 제 구실을 못 하니 군대가 나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1960년 육본 정보국에서 근무하던 육사 8기 李永根(이영근·유정회 총무 역임) 중령은 “장교들은 영내에서 점심을 굶고 ‘不食米(불식미)’라는 전표를 모아 쌀로 바꾸곤 그릇도 마땅치 않아 군용 地圖(지도)에 받아서 집으로 가져가곤 했다. 미국에 군사 유학까지 다녀온 장교가 쌀이 부족해 군용 파카의
털 달린 안감을 시장에 내다 팔아야 살던 시대였다. 울분이 절로 솟았다”고 했다.
 
 1960년 육군 연감에 따르면 이 해 복무 중 각종 사고로 죽은 군인은 1347명이나 됐다. 요사이 군 사고 사망자 비율보다 3~4배나 높았다. 死因(사인)별로는 근무 중 순직사 45명, 病死(병사) 378명, 자살 251명. 이 해 탈영자는 1만 6787명이나 되었고 월북자는 12명, 월북 기도자는 6명. 軍紀(군기) 위반으로는 무임승차가 많던 시절이었다. 1956~1960년 사이 강원도 화천 3사단 포병중대의 행정병으로 근무했던 姜鎬昌
(강호창·인천 거주)은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와 이렇게 증언했다.
 
 <휴가 나간 사병이 안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데리러 가보면 ‘배가 고파서 못 견디겠다’고 귀대를 거부하는 판이었지요. 군단장 숯굴, 사단장 숯굴, 연대장 숯굴, 대대장 숯굴의 숯을 구워주는 데 날마다 동원되고 땔감과 건축자재용 木材(목재)를 잘라내는 데 사역을 하다가 보니 중대원 100명 가운데 부대에 남아 있는 인원은 10명 남짓했습니다. 상부에서 검열이 오면 이웃 부대에서 병력을 꾸어 와서 속여 넘기기도 했어요.
 
 많은 장교들이 도둑질로 먹고 살고 있었습니다. 화천 시내로 훈련을 나가던 우리 중대의 트럭이 낮게 드리워진 여당 의원의 선거 플래카드를 건드려 떨어뜨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부대원들은 특무대에 몽땅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풀려났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5사단에 가면 배가 고프지 않다는
소문이 퍼졌는데 뒤에 알고 보니 사단장은 박정희 준장이었습니다>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한 군대의 이런 모습은 정치의 계절에 휩쓸려 들면서 더욱 일그러진다. 이낙선의 《5·16 혁명사 증언록》에 따르면 1960년 2월에 들어가면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의 行跡(행적)이 분주해진다. 포항의 해병상륙사단장 김동하 소장과의 합의로 시작된 謀議(모의)는 포섭 범위를 넓혀 나갔다. 박정희의 증언록을 옮긴다. 
 

 

  
<동래 온천장 별관, 백녹관 숙소, 해운데 호텔 등지에서 김동하, 李周一(이주일·당시 2군 참모장) 소장, 홍종철(6군단 작전참모) 중령, 全斗烈(전두열) 대령과 만나서 혁명을 의논했다. 당시의 정세는 3·15 선거를 앞두고 군내에서도 3인조, 9인조, 비둘기작전 등 공공연한 부정 선거 지령이 군 고위층으로부터 하달되고 있었다. 청년 장교들의 구국의 일념이 高潮(고조)되고 있었다. 혁명에 동원할 부대로는 포항 해병사단, 2군 사령부 예하 부대, 김포 주둔 해병여단을 검토했으나 계획의 중심지가 부산이기 때문에 곤란이 있었다. 때마침 장도영 2군 사령관이 부산으로 내려왔다. 나는 그를 해운대 호텔로 초치하여 부패한 자유당 정권을 넘어뜨리고 군부에서 일어나야겠다는 계획을 설명하고 그의 협조를 요구하니 그는 원칙에는 찬동하면서도 그 시기와 방법에 대해서는 좀더 두고
연구하자고 다짐했다.
 
 송요찬 육군 참모총장이 도미하는 1960년 5월 8일을 거사일로 결정했다. 작전계획은 ‘이주일 참모장이 2군 병력을 지휘하여 부산을 점령하고
해병사단이 부산에 출동한다. 인천 고사포단과 김포 해병여단은 서울을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안동 36사단장 尹泰日(윤태일) 준장은 김동하 소장과 만주군관학교 동기로서 박정희보다 1년 선배였다. 그도 이 모의에 가담, 영주 점령의 임무를 받았다. 박정희와 김동하는 특무대의 감시를 피해서 경주에서 여러 번 만났다. 박정희는 경주로 놀러 가는 것처럼 위장했다. 한번은 자신의 대구사범 동기로서 부산에서 내과의사로 있던 曺增出(조증출)을, ‘육군병원 간호사들과 함께 경주로 놀러가자’고 꾀어내어 데리고 가서는 불국사에서 김동하와
밀담하는 것을 야유회로 위장했다.
 
 그때 부산일보의 편집국장 겸 주필은 黃龍珠(황용주)였다. 박정희와는 대구사범 동기인데 사회주의 서적을 읽고 독서회에 참여했다가 학교 당국에 들켜서 퇴학당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서 와세다 대학을 나왔다. 황용주와 박정희는 자주 어울렸다. 황용주는 박정희가 미국과 미군이 혁명의 가장 큰 장애가 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불어 넣어주려고 했다.
 
 “나는 미국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南美(남미)의 소소한 나라들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도 미국은 몰아붙이지 않았습니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때도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을 펴고 그 다음해에는 마음대로 반공 포로를 석방했지만 미국은 실력으로 막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해 주면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죠.” 

 
 
 
아, 나의 조국 - 정치근 시. 최영섭 곡 - 박세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