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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1) 썩은 고목 같은 사람이 무슨 정치를 한다고

淸山에 2011. 1. 15. 18:44
 

 

 
 
썩은 고목 같은 사람이 무슨 정치를 한다고 
 
 實錄 특별연재/民族史의 최대 사건 5.16 군사혁명 50주년을 맞아(1)
趙甲濟   
 

 

 
올해는 1961년 5월16일 朴正熙 소장이 지휘하는 군사혁명이 일어난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12세기 고려 武臣 정권 등장 이후 軍人이 권력을 잡은 것은 80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장교단 주도의 근대화가 시작되었고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다.
변화의 質과 量에서 5.16은 민족사 2000년 史上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군사혁명의 전말을 주인공인 朴正熙 중심으로 연재한다.
 
 '朴正熙 傳記'에서 관련 부분을 발췌하고 다른 자료를 보충하여 정리하였다.
 
 
 

 

 
 1959년 7월1일 朴正熙 소장은 1군 참모장에서 서울 지역을 관할하는 6관구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요사이의 수도방위사령부에 해당하는 要職(요직)이었다. 이 해 겨울, 박정희는 또 불을 냈다. 영등포의 사령부 건물 내 교육과장(과장 李洛善·이낙선) 사무실에서 난로 과열로 불이 나 사령관실, 참모장실, 고문관실, 작전정보처 사무실을 모두 태웠다. 다행히도 기밀 서류만은 건졌다. 팔짱을 끼고 불구경을 하던 박정희 소장은 관할 경찰서장이 옆에 와서 火因(화인)을 꼬치꼬치 묻자 신경질을 내면서 일격을 가해 벌렁 나자빠지게 만들었다. 안면이 넓고 수완이 좋은 참모장 김재춘 대령이 뛰어다녀 이 화재는 언론에 보도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다.
 
 서울을 衛戍(위수) 지역으로 하고 있던 제6관구의 사령관은 상당히 정치적인 자리였다. 국회의원들과 권력층의 청탁이 많이 들어왔고 언론과 접촉하는 기회도 많았다. 박정희는 이런 對外的(대외적)인 일들을 김재춘 참모장에게 주로 맡겼다. 그런 박정희도 부대 내에서 어려운 문제가 터지면 정치권에 부탁을 했다.

 

 

 
 당시 대구 출신 辛道煥(신도환) 의원은 자유당의 젊은 實勢(실세)였다.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국회의장의
총애를 받아 반공청년단 단장, 대한체육회장 서리로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묵고 있던 명동 사보이 호텔의 접수대에서 그의 방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육군 소장이 찾아 왔다는 것이었다. 신도환은 최홍희 장군이 또 태권도 협회의 분규 타결 방안을 의논하려 온
것으로 생각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들어오시오”라고 해도 가만히 있어 신 의원이 문을 열었다.
작은 키에 깡마른 소장이 서 있었다. 눈매가 날카로웠다. 

 
 <위 사진은 어느 싸이트에서 퍼옴>

 박정희는 방으로 들어와서 “6관구 사령관 박정희”라고 인사를 하더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부대에서 영관급 장교들이 부정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는데 그 사건은 자신과는 무관하니 선처해 달라는 취지였다. 
 
 
 

 

 
 신도환은 기분이 나빴다. 태도도 당돌할 뿐 아니라 부하의 잘못을 상관이 책임질 생각은 하지 않고 혼자서 살
길을 찾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자신은 대구가 제2의 고향이라
대구 출신인 신 의원을 찾아왔다고 했다.
 
신도환 의원은 듣기 싫은 말을 해주고 박정희를 돌려보냈다. 그 뒤 신도환은 대구에 있는
2군 사령관 崔榮喜(최영희) 중장에게 “박정희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최 중장은 “아주 청렴한 군인이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도환은 그 뒤 군 수뇌부 인사를 만나면 최영희 장군의 인물평을 전해 주면서 박정희를 두둔했다고 한다.
신도환은 4·19 뒤 고대생 습격사건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5·16 뒤 소급 입법으로 신설된 혁명재판소에 의해서 법정 구속되어
 20년형을 선고받고 8년 10개월을 복역했다.
 
 1959년 가을 박정희는 자유중국 정부의 초청을 받고 여러 장성들과 함께 대만을 방문했다.
이들 장성은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인사를 한 뒤 ‘서대문 경무대’로 불리던
이기붕 국회의장 집에도 찾아갔다고 한다
 
 

 

 
(이낙선 증언).
대만 시찰에서 돌아온 박정희는 이런 불평을 했다. 
  “경무대엔 군 통수권자가 계신 곳이니 응당 가서 인사를 올려야겠지만 서대문엔 뭣 하러 안내한단 말이야.
국회의장이 군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 썩은 고목 같은 사람이 무슨 정치를 한다고.
팔팔한 새 나무를 심어도 꽃이 필까말까 하는 땅인데….”
 
 참모들이 “각하, 그만하십시오”라고 말리자 박정희는 내뱉듯이 말했다.
 
 “내가 군복을 벗으면 될 것 아니야.” 
 
 

 이 무렵, 즉 1960년 월간잡지 <思想界(사상계)> 1월호에 장교들을 자극하는 논문이 한편 실렸다.
미 상원 외교분과위원회가 콜론 연구소(Colon Associates Institution)에 의뢰하여 작성한
 ‘미국의 對(대)아시아 정책’이란 題下(제하)의 논문이었다.
장교들이 관심을 가지고 읽은 부분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다른 나라의 예대로 군사 지배가 정당을 대체하는 사태가 있을 수 있는가.
그 가능성은 당분간 희박하다. 현재 한국군에는 정치적 신망이나 조직력을 가진 군인이 없다.
육군엔 야심가는 많이 있으나 지금까지 육군은 정부의 주인이 아니라 그 도구에 불과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자유당 정부, 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군부 조종 기술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政敵(정적)이 될 만한 사람은 실각당했고 강력한 독립성을 가진 지휘관은 냉대받았다.
만일 정부가 완전히 실패하게 되면 언젠가 한 번은 군부 지배가 출현하리라는 것은 확실히 가능한 일이지만
가까운 장래에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계속)
 
 
 
 
산 - 테너 박세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