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나의 이야기

나의 어머니!

淸山에 2011. 1. 14. 12:51
 

 

 

 

 
 
 
나의 어머니!
 
 

 

 

 

철이 들고 나서도
엄마라고 불렸으며 쉰이 넘은 지금도
다 큰 자가 조금 부끄럽기는 하지만 그 말을 자주 쓴다.
 
우리는 낳아지면서 부터 시작하여
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그 인연을 끊을 수 없으리라.
세상의 모든 어머니 중에서 나의 어머니에게 향한 나의 어머님!
 
어린 시절이었다.
좀처럼 혼나지 않았던 내가 엄마의
꾸지람을 듣고 집을 나가 정처 없이 헤매다 한
 밤중에 살며시 들어왔을 때 이것이 그 품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고향에서 한양 대처로 나갈 때 정거장까지 새벽길 같이 하여준 어머님은
마음속에 무엇을 가지고 계셨을까?  어린 막내아들 보내면서 얼마나 마음 좁아 하였을
 것인가 헤아려 본 것은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 느꼈으니 그 아들의 시절에는 한양의
새 모습 기대에 부풀어 있어 옆의 어머님 동행에 별 의미를 몰랐었다.
 
훌쩍 세월이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사십 년 지나 이제 반백의 머리로 어머님 뵈오니
그때의 엄마는 구십을 넘은 모습이여 불편한 거동의 어머님이시다.
만나 뵈러 오는 날도 고향 땅에 닿아 알려 주었다 한다.
정거장에 내려 버스에 실려 있을 즈음에야
막내아들이 온다는 얘기 하였는데
어머님의 마음속에는 언제
오느냐 하는 말씀만
누누이 하면서
기다렸단다.
  

 

나의 어머니!
 
남매 두었지.
예. 아들하고 딸이지요.
아들은 괜찮지만, 딸은 조선사람한테 여의 야 하는데
예. 요즈음은 한국사람도 많아요.
 
이 밥 더 먹어
츠암내 어머니 드시라니깐
아녀 난 되었다
이거 드십시요 그래야
아녀 하면서 입이 열리어 받아 드신다.
이렇게 몇 차례 실랑이 끝나니 그릇의 밥이 다 비 인다.
내 어려서 그랳단가 지금은 위치가 바뀌고.
 
   

 

첫날 여기 컴퓨터가 안 되니 답답하였고
다음 날 저녁에는 잠시 마실을 피시방으로 옮겼는데
컴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전화가 울린다.
어머니가 나를 찾는단다.
더 앉아 있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 같으면 누워 계셔야 할 어머님!
이 야밤에 조심해야지 하면서 무서운 세상이니 내가 집에 돌아와서야
잠결에 드신 어머님이시다.
사남삼녀를 키우면서 힘들지 않게 닥치는 일 다 받아낸 어머님!
주위에 어렵고 불쌍한 사람 보이면 우리 식구 많은 것은 아랑곳없었다.
 
  
  
어머니한테 들은 얘기다.
열일곱의 처녀로 마전 시골에서 한밭(대전)의
 돌다리(지금의 석교동) 남씨 양반집으로 시집을 와서 보니
끼니가 걱정이라 그날부터 힘든 일 마다하지 않았다 한다.  큰 형님 낳고
일본으로 건넜으니 어머니가 아버지 설득하여 떠난 것이며 나고야에서 한참 지나
토요하시라는 도시에서 또 시골로 오십 리길 가니 그곳이 간베였다.  여기서 오 남매를 더
두고 부지런히 일하였단다.  해방이 되고 한국으로 나왔으니 몇 년 후에 내가 태어난
곳은 지금이 대전이다. 안 생길 것을 낳았다 하니 내 운명도 야릇하다.
 
 
작년 팔월에는 큰 누님이 태어나 자란 곳을 그리워하기에 그의 아들이 답사차 가는
길에 나도 동행하여 그 살던 곳을 기적적으로 찾아 카메라에 담아 온 것이 있었다.
누님의 동네 친구들도 만나고 너무나 모처럼 일본말로 대화하는 것 옆에서 보니
이것도 어머님의 품과 같은 것이더라. 
 
한국에 나온 어머님은 또 가족 먹이고 집안 형제들
돌 보느라 쉴 새 없었다 하며 일찍이 배웠던 자전거로 사오십 리
시골 길을 자전거로 달려 쌀 한 가마 싣고 다니는 것은 보통이었다 할 만큼
그때 당시로는 파격적이었다 한다. 
 

     

 

내가 초등학교 오 학년 봄이다.
대전을 바라보는 보문산 중턱에 당고모님과
어머니가 절을 세우셨다. 얼마 지나자 고모님과 마찰이 생기고
그 절에서 어머니가 나오시더니 이때의 상처에서 방황하더니만 계룡산에 칩거
하시더니 끝내는 무속 종교에 빠지고 오랜 시간 후에는 실성 한 듯 같이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것은 옆에서 누가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있었으며 형님 누님도 더
만류하지 못하고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만 믿고 세월만 보낸 적이 있었다.
 
  
 
그 후부터는 점차 좋아지셨지만 나라 구국을 위한 기도라 하면서 전국의 명산
방방곡곡 찾아 순례하는 얘기는 귀가 아프게 듣고 어머님 자신 얘기로는
나라를 위해 조상을 위해 엄청난 일을 한다 하며 천기 누설할 수 없어
그 정도만 알으라는 얘기 듣는 즉시 나는 한 귀로 내 보내고
지난 적이 엇그제 같았다. 지금의 어머님을 보건 데는
십여 년 전부터는 대구 형님 집에 머물면서
가돌릭에 귀의하여 이제는 식사 전에
성삼위일체 십자 손 모양 하며
기도하는 것으로 고개
숙이며 아멘 한다.
나의 어머니!
 

2004 07 어느 날
 
 
 
 

아래의 사진은 1945년 까지 부모 형제가 살던 곳을

2003년 여름에  큰 누님 가족과 답사차 다녀가면서 확인하여 찍은 사진

간베역에서 부터 어렵사리 큰 누님의 기억을 더둠으며 방향을 잡고 마침네 그 집을 찾다

 

1945년까지 부모 형제가 살던 간베의 길

 

 1945년까지 부모 형제가 살던 집 터 (그때 집은 헐리고 새로 지은 것)

 

 

 

 

 

 부모 형제가 살던 간베의 거리

 

 부모 형제가 살던 간베역

 

 
 

우리 어머니 - 오문옥 詩. 이안삼 曲 - 이안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