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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名文-6 / 倦怠 (李箱)

淸山에 2010. 10. 7.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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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名文 시리즈-6 / 倦怠(李箱)

     <출처=인터넷 월간조선 2006.5>
지는 것도 倦怠어늘 이기는 것이 어찌 倦怠 아닐 수 있으랴?
편집자注: 이 글은 1963년 문원각에서 나온 ‘한국수필문학전집’의 李箱편에서 일부 발췌했다. 金相沃씨 추천.
 
  李箱
월간조선 
  僻村(벽촌)의 여름날은 지리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東에 八峰山(팔봉산), 曲線(곡선)은 왜 저리도 屈曲(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西를 보아도 벌판, 南을 보아도 벌판, 北을 보아도 벌판, 아아 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限이 없이 늘어 놓였을고?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 먹었노?
 
  農家(농가)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左右로 한 10여 호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壁,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은 호박넝쿨,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다.
 
  어제 보던 대싸리나무, 오늘도 보는 金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흰둥이 검둥이.
  해는 100도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내려쪼인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 炎暑(염서) 계속이다.
 
  나는 아침을 먹었다. 그러나 무작정 널따란 白紙(백지) 같은 ‘오늘’이라는 것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면서, 무슨 記事(기사)라도 좋으니 강요한다. 나는 무엇이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연구해야 된다. 그럼- 나는 崔서방네 사랑 툇마루로 將棋(장기)나 두러 갈까? 그것 좋다.
 
  崔서방은 들에 나갔다. 崔서방네 사랑에는 아무도 없나 보다. 崔서방의 조카가 낮잠을 잔다. 아하, 내가 아침을 먹은 것은 열 時나 지난 後니까, 崔서방의 조카로서는 낮잠 잘 시간에 틀림없다.
 
  나는 崔서방의 조카를 깨워 가지고 將棋를 한 판 벌이기로 한다. 崔서방의 조카와 열 번 두면 열 번 내가 이긴다. 崔서방의 조카로서는, 그러니까 나와 將棋 둔다는 것 그것부터가 倦怠(권태)다. 밤낮 두어야 마찬가질 바에는 안 두는 것이 차라리 나았지- 그러나, 안 두면 또 무엇을 하나? 둘밖에 없다.
 
  지는 것도 倦怠어늘 이기는 것이 어찌 倦怠 아닐 수 있으랴? 열 번 두어서 열 번 내리 이기는 장난이란 열 번 지는 이상으로 싱거운 장난이다. 나는 참 싱거워서 견딜 수 없다.
 
  한 번쯤 져 주리라. 나는 한참 생각하는 체하다가 슬그머니 위험한 자리에 將棋 조각을 갖다 놓는다. 崔서방의 조카는 하품을 쓱 한번 하더니, 이윽고 둔다는 것이 딴전이다. 으레 질 것이니까, 골치 아프게 수를 보고 어쩌고 하기도 싫다는 思想(사상)이리라.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將棋를 갖다 놓고는, 그저 얼른얼른 끝을 내어 져줄 만큼 져주면 이 常勝將軍(상승장군)은 이 압도적 倦怠를 이기지 못해 제출물에 가버리겠지 하는 思想이리라. 가고 나면 또 낮잠이나 잘 작정이리라.
 
  나는 부득이 또 이긴다. 인제 그만 두잔다. 물론, 그만 두는 수밖에 없다.
  일부러 져 준다는 것조차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왜 저 崔서방의 조카처럼 아주 영영 放心狀態(방심상태)가 되어 버릴 수가 없나? 이 질식할 것 같은 倦怠 속에서도 仔細(자세)한 승부에 구속을 받나? 아주 바보가 되는 수는 없나?
  내게 남아 있는 이 치사스러운 人間利慾(인간이욕)이 다시없이 밉다. 나는 이 마지막 것을 免(면)해야 한다. 倦怠를 인식하는 神經마저 버리고, 완전히 虛脫(허탈)해 버려야 한다.…(下略)
입력날짜 : 2006-05-09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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