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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名文-9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申榮福)

淸山에 2010. 10. 7.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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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名文 시리즈-9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申榮福)


                                    <출처=인터넷 월간조선 2006.5>
실패와 보상과 결함과 사과의 노력들이 점철된 그러기에 더 애착이 가는 한 폭의 글을 얻게 됩니다
편집자 注: 1977년 4월 15일에 저자가 쓴 편지다. 서한을 한데 모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1988년에 출간되었다. 이 글은 '서도의 관계론'을 옮겨온 것이다. 박종만씨 추천.
 
  申榮福
월간조선 
  아버님께.
 
  내가 서도)를 운위하다니 堂狗(당구)의 吠風月(폐풍월) 짝입니다만 엽서 위의 片言(편언)이고 보면 條理(조리)가 빈다고 허물이겠습니까.
 
  일껏 붓을 가누어 조신해 그은 획이 그만 비뚤어 버린 때 저는 우선 그 부근의 다른 획의 위치나 모양을 바꾸어서 그 실패를 구하려 합니다.
 
  이것은 물론 지우거나 改漆(개칠)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상 획의 성패란 획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 관계속에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획이 다른 획을 만나지 않고 어찌 제 혼자서 字(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획도 흡사 사람과 같아서 獨存(독존)하지 못하는 반쪽인 듯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자가 잘못된 때는 그 다음 자 또는 그 다음다음 자로써 그 결함을 보상하려고 합니다.
 
  또한 行(행)의 잘못은 다른 행의 배려로써, 한 聯(연)의 실수는 다른 연의 구성으로써 감싸려 합니다. 그리하여 어쩌면 잘못과 실수의 누적으로 이루어진, 실패와 보상과 결함과 사과의 노력들이 점철된 그러기에 더 애착이 가는 한 폭의 글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얻은 한 폭의 글은 획, 자, 행, 연들이 대소, 강약, 太細(태세), 遲速(지속), 濃淡(농담) 등의 여러 가지 형태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양보하며 실수와 결함을 감싸주며 간신히 이룩한 성취입니다. 그 중 한 자, 한 획이라도 그 생김생김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와르르 얼개가 전부 무너질 뻔한, 심지어 落款(낙관)까지도 전체 속에 융화되어 균형에 한몫 참여하고 있을 정도의 그 피가 통할 듯 농밀한 상호연계와 통일속에는 이윽고 묵과 여백, 흑과 백이 이루는 대립과 조화. 그 대립과 조화와 그것의 통일이 창출해 내는 드높은 質(질)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규격화된 자, 자, 자의 단순한 양적 집합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남남끼리의 그저 냉랭한 群棲(군서)일 뿐 거기 어디 악수하고 싶은 얼굴 하나 있겠습니까.
 
  유리창을 깨뜨린 잘못이 유리 한 장으로 보상될 수 있다는 생각은, 사람의 수고가, 인정이 배제된 일정액의 화폐로 代償(대상)될 수 있다는 생각만큼이나 쓸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획과 획 간에, 자와 자 간에 붓을 세우듯이, 저는 묵을 갈 적마다 人(인)과 人(인) 間(간)의 그 뜨거운 연계 위에 서고자 합니다.
  춥다가 아직 덥기 전의 4월도 한창 때, 좋은 시절입니다.
입력날짜 : 2006-05-09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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