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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 安益泰(1906 ~ 1965) 환상적 교향곡 - 한국 환상곡

淸山에 2010. 7. 25. 19:00
 

 

 

 

 

안익태 安益泰(1906 ~ 1965) 환상적 교향곡 - 한국 환상곡

 

 

 

 

안익태 安益泰(1906 ~1965)

 

 

이어듣기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태극기]

 

 

1. 환상적 교향곡 '한국환상곡'
Fantsic Symphonia "Korea Fantasy"

 

2. 강천성악

 

3. 논개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에 대하여
한국 환상곡(Symphonic Fantasia "Korea)은 우리 민족의 영광과 수난을 함께 묘사한
대서사시로 크게 네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첫번째는 한국의 전통음악을 토대로 한 서정적인 부분으로,
서두에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전 관현악의 울림으로 장엄한 고조선의 개국을 알리고,
이어서 아름다운 조국 강산을 묘사하는 서정적인 멜로디가 흐르고 거기에
우리의 민요가락이 여러가지 악기소리로 나타나 평화를 사랑하는 순박한
한민족의 심성을 묘사한다.


때때로 타령조의 멜로디가 섞이면서 농민들의 춤사위를 표현하기도 한다.
*두번째는 일제의 압제하에서 신음하는 조국의 암울한 모습을 묘사한 부분으로,
이토록 평화롭던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을 이 강산을 침노한 일제에게 짓밟혀,
곡상은 무겁고 침통하게 흐르고 만다. 평화롭던 민족의 가락은 끊어지고 일제에
항거하는 투쟁은 계속되나 수많은 애국 지사들의 죽음으로 진혼의 슬픔이 계속된다.


*세번째는 드디어광복의 기쁨을 맞는 애국가의 합창부분으로, 이 부분에서
안악태선생은 자신이 작곡한 애국가를 1절부터 4절까지합창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애국가가 조를 달리하며소리 높이 울려 퍼질때 그감격은 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마지막으로 네번째는 6.25 동란으로 인한 처절한 동족간의 싸움을 묘사한 부분으로
한반도는 6.25 동란으로 인한 전화에 휩싸이게 되고 선율은 또다시 슬픔으로 바뀐다.


전통 아악의 정취가 울려 퍼진 뒤에 드디어 "무궁화 삼천리 나의 사랑아,
영광의 태극기길이 빛나리. 금수강산 화려한 나의 사랑아"하고 외치면서
만세 소리와 함께 한국환상곡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한국환상곡은 안익태 선생이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착상하기 시작했고
필라델피아 음악학교를 졸업할 때(1932년) 1부가 완성되었지만 연주되지 못했고,
독일로 건너가(1936년)애국가를 작곡한 후 후반부에 애국가를 합창으로 삽입하여
에이레의 더블린에서 비로소 초연(1938년) 되었다.


한국환상곡에는 선생의 스승인 리하르트 쉬트라우스의 조언이 많이 포함되어있고,
해방까지는 합창부분까지만 연주되어 오다가 6.25 동란이후 제4부(전쟁부분)를 추가시켜
현재의 곡으로 완성시킨 것이다.


1938년 "더블린"에서 초연한 이래 선생은1939년 로마교향악단 연주에서 역시
한국환상곡을 공연했고 같은해에 베오그라드 라디오 교향악단,
불가리아 필하모니에서도 연주했는가 하면 1940년에는 부다페스트 필하모니,
1941년에는 쮸리히와 하노버, 1942년에는 베를린 필하모니와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필하모니, 1943년에는 다시 베를린 필하모니와 마드리드 심포니,
다시 1944년에는 로마와 파리등에서 총 15회에 걸쳐 한국환상곡을 무대에 올린바 있다.


*선생은 해방된 조국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초빙,
음악을 활성화 시키고 바람직한 오케스트라 운동을 통해 음악의 생활화를
국민속에 심으려고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일은 세계적인 지휘자로서
활약하던 안익태 선생이 조국의 오케스트라를 위해 일하지 못하고 가신 점이다.


청중의 입장에서 본다면 안익태선생의 멋진 지휘를 좀 더 분명히 느끼고 싶은
마음 간절했을 것이다.


그는 비록 조국을 떠나 있었어도 자신이 지휘봉을 들때마다 한국환상곡을 연주,
이 지구 상에 분명히 한국이 있음을 밝혔고 어느곳에서나 우리의말로 애국가를
소리높여 외치도록 하였다.


그가 이탈리아를 방문 당시 독재자 무솔리니 치하에서 "한국환상곡"을 연주하려고 하자
일본 정부는 압력을 가해 안선생을 추방하도록 했는가 하면, 그는 가는곳마다
일제의 마수가 끈질기게 따라 다니며 그를 못살게 굴었다.


생전에 그가 그렇게도 염원하던 조국에서의 생활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이역의 하늘 아래서 눈을 감긴 했어도 그의 예술적 유산들은 지금도 우리곁에
남아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


한 많은 조국의 역사와 우리 민족의 슬기로운 얼, 그리고 정의와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한민족의 힘찬 의지를 담아 작곡한 "한국환상곡"은 조국에 바치는
사랑과 충성의 표증이며, 스페인에 살면서도 끝까지 한국 국적을 고수한 선생의
투철한 한국 국민으로서의 신념은 우리민족 모두에게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애국가 연혁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는 대한제국 애국가로서 1902년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에 의해 작곡되엇다.


당시 우리나라에 초빙되어 서양식 군악대를 창설하고 각종악기와 음악이론등을
지도하는 등 우리나라 양악의 기초를 세우는데 크게 공헌했던 에케르트는
고종 황제의 홍범14조에 따라 국가를 작곡했으나 이 노래는 일반 대중이
부르기가 쉽지않아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그런데 이후 일제 침략기에 현재의 애국가 가사가 일반 국민들사이에
널리 불려지기 시작했는데 일설에서는 윤치호님이 작사했다는 설이 있으나
정확한 작사자는 알수가없다.이 노래는 특히 8.15 광복을 맞아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랭사인"의 곡에 맞추어 애창되었고 자유와 독립,조국광복의 감격을 고취시켜주었다.


현재의 애국가는 안익태님이 1936년 6월 독일의 베를린에서 유학중 완성한것인데
1948년 8월15일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동시에 대한민국 국가로 정식 명명되었다.
안익태님은 이 애국가를 자신의 코리아환상곡의 후반부에 삽입하고
외국에서의 연주회 때에도 반드시 우리말로 부르게 하였다.

 


▶안익태선생님에 대하여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 선생은 1906년 12월 5일 여관을 경영하는 중류가정의
셋째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선천적으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안선생은 6세 때에 동네의 예배당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에 이끌리어 집안 몰래 교회에 나가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고
특히 교회에서 풍금(올겐)을 만져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
안선생의 인생을 결정짓게 된 중요한 동기중의 하나였다.


또 하나의 동기는 이듬해에 큰형이 동경에서 사다준 바이올린이었는데,
이 바이올린은 그로 하여금 더욱 음악에 매혹되게 했을 뿐 아니라
6개월을 연습한 후에는 찬송가를 연주할 수 있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1914년 평양 종로보통학교에 입학하자 학교 취주악대에서 부는
트럼펫 소리에 매료되어 아버지를 졸라 트럼펫을 손에 넣게 되었고 그 후부터는
학예회 때마다 으례히 한 손에는 바이올린을 또 한 손에는 트럼펫을 들고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1918년 숭실중학에 입학하자 교장은 그의 음악적 재능에 탄복한 나머지
곧 바로관현악단에 입단 시켰고 2학년이 되어서는 음악부장이 되어
매주 한번씩은 집에 있는 축음기를 학교로 가져가 음악감상회를 여는 등
그의 음악활동은 열도를 더해갔다.


이러한 안 선생의 음악적 재능을 본 형님은 이번에는 '첼로'를 사다주어
여름방학 때에는 서울로 올라와 캐나다 선교사로부터 첼로의 주법을 익혀
첼로까지 연주하게 되자 그의 인기는 솟을 대로 솟아 각 교회를 순회하면서
성가를 연주하는 등 바쁜 생활의 연속이었다.


안 선생은 어릴 때부터 자존심과 정의감이 강해 숭실학교에서 당시
친일교사를 배척하는 주동자가 되었으며, 이로인해 정학처분을 받게되자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나서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안 선생은 왜경의 쫓김을
받게되었고 결국 당시 숭실학교 교장이었던 '마우리' 박사의 도움으로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하여 일단 위기를 넘긴 후 박사의 주선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유학 길에 오르게 되었다.

 


◈ 지휘자로서의 안익태 ◈


안익태 선생의 음악수업은 동경국립음악대학에서 첼로를 전공함으로서 시작되었고
첼로 수업은 미국의 신시내티 음악대학에서도 계속 되었다.


그러나 1932년 신시내티에서 가진 첼로 연주회를 끝으로 안 선생은
아무래도 세계적인 첼리스트가 되는데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한 나머지
지휘와 작곡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결국 1932년 필라델피아 음대로 옮긴 안선생은 관현악 전반에 걸쳐 연구하게 되었고
특히 '레오폴드 스토코브스키'가 이끄는 필라델피아 교향악단의 공연은
그에게 있어서 산 교육이 되었다.


1935년 커디스음악원으로 옮긴 안선생은 이곳에서 세계적인 지휘자이며
작곡가이기도한 '프리츠ㆍ라이너'로부터 작곡과 지휘를 본격적으로
사사 받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스토코브스키'의 권유로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의
연습단원으로 입단 지휘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후 유럽으로 건너간 안선생은 1936년 뷔엔나에서 역시 세계적인 지휘자인
'펠릭스 바인가르트너'문하에 들어가 베토벤의 교향곡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할 수있었다.


'바인가르트너'를 떠난 안익태 선생은 다시 이번에는헝가리로 건너가
리스트 음악원에 특별연구생으로 입교 '졸탄 코다이'로부터 작곡을,
그리고'에르네스트 도나니' 교수로부터는 지휘법을 배우기에 이르렀다.


특히 '코다이'의 민족음악에 대한 열정은 안선생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그 후 안선생의 작품 속에서 풍겨 나오는 한국적 분위기도 바로 '코다이'의
민족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안 선생이 세계 유명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했고 세상 떠나기까지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다거나
또는 후원자의 덕택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선은 그 자신이 결단을 내린 것과 같이 역시 그는 연주가보다는
지휘자로서의 능력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으며 이러한 잠재 능력을 그는
세계 최고의 지휘자이며 스승들인 '레오폴드 스토코브스키'를 비롯해서
'프리츠 라이너', '바인가르트너', '코다이', '도나니' 그리고
'리하르트 쉬트라우스'를 통해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4. 구 황실애국가

 

5. 올드랭사인

 

6. 애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