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朴正熙 照明

박정희는 제2의 광개토대왕

淸山에 2009. 9. 3. 13:45
 
 
 

 

 
 

박정희는 제2의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은 영토를 넓혔고, 박정희는 해외시장을 개척했다.
최성재   
 
 
[광개토대왕에 열광하는 한민족]
 
 한국인은 너나없이 한민족 최고의 정복군주 광개토대왕에 열광한다. 싸우면 반드시 이겼고 침략 당하면 반드시 복수했던 광개토대왕에 열광한다. 국토를 한껏 넓혔던 광개토(廣開土)대왕에 열광한다. 당당히 황제의 깃발을 휘날리며, 광개토대왕은 기병과 보병과 수군을 자유자재로 동원하여 동서남북 어디든 폭풍처럼 달려가 누구든 아작내 버렸다.
 
시련과 극복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한(恨)의 역사를 가슴 조이며 조용조용 읽다가, 잠시나마 정복과 군림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신바람의 역사를 낭랑하게 읽노라면, 한민족은 누구나 가슴이 시원해진다. 따라서 이 열광에는 남북이 따로 없고 동서가 따로 없다. 좌우도 따로 없고 빈부도 따로 없다. 그러나 열광하는 속셈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심지어 음흉한 자도 있다. 감히 광개토대왕을 입에 올릴 자격도 없는 자들이 국민을 호도하고 국가를 구렁텅이로 몰아넣기 위해 광개토대왕의 깃발을 가로채어 신들린 듯 흔드는 자들도 있다. 
 
 
[박정희는 제2의 광개토대왕]
 
 역사는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시간이 지났다고 절로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는 것도 아니고, 이해 관계가 없다고 역사의 의미가 절로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특히 제일 중요한 역사의 숨은 그림 찾기 곧 역사에서 현대적 의미 찾기 문제가 가장 어렵다. 한국인은 광개토대왕은 너무 위대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감히 그에 비길 만한 지도자가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 따로 현실 따로'이다. 아니다! 그 못지않은 위대한 지도자가 바로 우리 시대에 태어났다. 그가 바로 한국인의 영원한 대통령 박정희다.   광개토대왕을 의도적으로 띄우는 자들일수록 박정희라면 이를 간다. 스스로 엉터리임을 증명한 셈이다.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요, 보고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임을 자인한 셈이다.
 
 
[광개토대왕 당시의 시대 상황]
 
 광개토대왕(재위 391~413)을 이해하려면 먼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그 때  중국은 남북조(南北朝) 시대였다. 한나라가 망한 후 당나라가 태평천하를 이룰 때까지 중국에는 약 400년간 제2의 전국(戰國)시대가 이어지는데, 광개토대왕은 그 한가운데의 시대에 활약했다. 제갈공명의 최대 라이벌로 사해에 이름을 떨친 사마중달의 후손이 조조의 위(魏) 왕조를 뒤엎고 진(晉)을 세워 잠시 천하를 통일한 적이 있지만, 이내 망하고 양자강 이남으로 쫓겨났다. 그것이 남조의 동진(東晋)이다. 광개토대왕은 지리적 거리 때문에 동진과는 다툴 일이 없었다. 그의 라이벌은 서북쪽에 있었다.
 
 
[북위의 탁발규와 유연의 사륜 대칸]
 
 북조에서 마침내 대영웅이 등장했다. 그가 바로 저 무시무시한 탁발규(拓拔珪)다. 대흥안령산맥의 선비산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고 하여 선비족(鮮卑族)이라 불렸던 동이족의 일파에서 향후 중원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는 일대 호걸이 등장한 것이다. 탁발 선비족의 규는 386년(광개토대왕의 아버지 고국양왕 3년)에 북위(北魏 386~534)를 건국하여 황제에 등극했다.
 
그는 398년 평성(지금의 산서성 대동시)으로 천도했다. 중원의 사슴을 잡으려는 포석이었다. 북위의 도무제(道武帝 재위 386~409)는 그렇게 북조 최강의 국가를 탄생시켰다. 광개토대왕 8년의 일인데, 고구려로서는 다행히도 북위의 수도는 고구려와 더 멀어졌다. 북위는 건국한 지 불과 53년 만에 3대 황제 태무제(太武帝)에 이르러 화북을 통일한다(439). 고구려의 장수왕 27년의 일이다. 그 후 북조(北朝)는 왕조가 바뀌긴 하지만 더 이상 분열되지 않고 힘을 비축하다가, 수나라에 이르러
 남조(南朝)까지 병합하여 중원을 재통일한다(589).
 
 북위의 서북쪽 몽골초원에는 또 다른 영웅이 등장했다. 그가 바로 사륜(社崙) 대칸(재위402~410)으로 402년 대제국 유연(柔然 402~555)을 건국한다. 광개토대왕 12년의 일이다. 맞수는 이 유연과 북위였다. 이 두 제국은 10여 차례에 걸쳐 큰 전쟁을 벌였다. 다행히 이 두 제국은 광개토대왕의 고구려와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았다. 그 사이에는 연(燕)과 거란족이 있었다. 모용외, 모용황, 모용성 등의 낯익은 이름은 바로 이 연나라의 왕들이다. 광개토대왕 이전에 고구려를 가장 빈번하게 침략하여 고구려를 수 차례 거의 멸망 직전까지 이르게 한 나라가 바로 연나라다. 전연(前燕), 후연(後燕), 북연(北燕) 등으로 이름은 바뀌지만, 이 연도 대단한 나라였다. 전성기 때는 수도를 오늘날 북경이나 석가장 부근에 두고 화북을 호령했다. 광개토대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 때(342)는 전연의 건국 왕 모용황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고국원왕의 어머니 태후와 그의 부인 황후를 비롯하여 5만 명을 포로로 잡아가고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신까지 가져갔다. 당시 화북의 패자(覇者)였던 전진(前秦)이 대신 고구려의 원수를 갚아 주었지만, 연나라는 그 후에도 계속 요동과 요서에 똬리를 틀고 고구려를 괴롭혔다.    
 
 
[광개토대왕은 외교의 달인이자 조직의 귀재]
 
 그러니까 광개토대왕의 시대에 동아시아에는 4대 제국이 있었다. 양자강 이남의 동진, 화북의 북위, 몽골초원의 유연, 만주와 한반도의 고구려--이 네 나라 중 가장 강한 나라는 북위와 유연이었는데, 이 두 제국은 죽기살기로 싸웠다. 유연은 점점 약해졌고 북위는 점점 강해졌다. 그래서 북위가 마침내 고구려보다 엄청 더 크고 인구는 수십 배 많았던 화북을 통일한 것이다. 고구려는 강대국 북위와 유연, 동진과 모두 사이좋게 지냈다. 광개토대왕은 군사만이 아니라 외교에도 능수능란했던 것이다. 그런 안정된 외교의 방어막을 친 다음에,  광개토대왕은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이불 삼아 평생 전장을
누볐고, 가는 데마다 압승을 거뒀다.
 
 광개토대왕이 신라의 요청으로 5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와 왜(일본의 왜가 아니라 백제의 왕족이나 귀족이 세웠을지 모르는 가야 지방의 왜가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일본에서 1천 명의 군사를 끌고 오기도 대단히 어려웠을 텐데, 삼국사기를 보면 왜가 수시로 신라를 침범하기 때문이다.)를 쳐부수고, 마음만 먹었다면 삼국을 통일할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후연이 고구려의 배후를 기습하여 황급히 광개토대왕은 군사를 돌릴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연나라는 여전히 강했다. 이 때 고구려는 700리의 땅을 빼앗겼다. 물론 광개토대왕은 지고는 못 사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어서 그 다음해에 후연의 숙군성을 쳐서 빼앗았다(401). 
 
 광개토대왕은 조직의 귀재였다. 그 이전에는 5개 부족이 각기 군대를 보유했지만, 그는 이를 중앙으로 일원화했다. 이를 나타내는 말이 광개토대왕비의 '왕당(王撞 왕의 깃발)'과 '관군(官軍 왕의 군대)'이란 말이다. 왕권을 대폭 강화했던 것이다.
 
 
[광개토대왕과 탁발규의 죽음]
 
 광개토대왕은 너무도 아까운 나이인 39세에 붕어한다. 그와 쌍벽을 이루던 북위의 황제 탁발규도 일찍 죽는다. 천하에 더 이상 적이 없게 되자, 그는 폭군으로 돌변했다. 친모의 동생 곧 이모가 너무 예쁘다고 이모부를 죽이고 그녀를 아내로 삼은 것은 옛날이고, 이제 심심하면 사람을 죽였다. 얼굴빛이 변하거나 호흡을 거칠게 하거나 걸음걸이가 이상하거나 말씨가 보통과 다르다는 이유로, 속에 품은 악한 마음이 드러난 것이라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아무나 때려 죽이곤 했다. 그는 이모이자 황후인 하 부인을 죽이려 하다가, 그녀와의 사이에 태어난 16살 망나니 아들한테 암살 당한다. 40세 안팎이었다고 한다. 망나니 아들은 궁성으로 돌아온 태자한테 주살 당한다.
 
 
[박정희의 시대상황]
 
 이제 박정희 대통령으로 넘어간다. 광개토대왕은 시대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여 강자와는 사이좋게 지내고, 도움을 청하는 약자를 돕거나 원수에게 빚을 갚거나 만만한 자들을 신하로 삼거나 하면서 영토를 계속 확장하고 조공을 넉넉히 받고 인구를 꾸준히 늘렸다. 당시에는 그를 보고 침략자라고 욕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시대의 도리요, 시대의 언어요, 시대의 사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그는 한국이 처한 상황을 누구보다 정확하고 예리하게 파악했다.
 
 일제시대와 2차대전과 6·25 사변을 빼놓고는 박정희 시대를 이해할 수 없다. 세계적으로 한국은 미국의 날개 죽지에 들어가 있었다. 반면에 북한은 소련과 중공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2차대전이 끝나자마자, 미국은 그 전까지 당연시했던 승전국의 권리를 깨끗이 포기하고 콜럼부스 이후 약 400년 지속된 서구 제국주의의 피 흘림 시대를 끝냈다. 서구 제국주의란 월등한 무력으로 약소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미국은 독일과 이태리와 일본에게 배상금을 물리지도 않았고, 그들을 식민지 삼지도 않았고 그들이 지배하던 식민지도 빼앗지 않았다. 대신 안보 우산을 펼쳐서 소련과 중공의 제국주의 군홧발로부터 지켜 주고, 그 모든 국가가 자립할 수 있게 도와 주었다. 1,200만 군대를 150만으로 줄였다. 군대로 식민지를 다스리지 않겠다는 가장 확실한 물증이었다. 
 
 
[제국주의의 시대에서 자유무역의 시대로]
 
 미국은 자신의 날개 죽지에 들어온 국가들을 식민지 삼는 대신 그들에게 자유민주와 시장경제를 소개하고 가르쳐 주면서 자유무역을 장려했다. 박정희가 정확히 파악한 것은 바로 이런 국제 정세다.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죽지에 품어주는 것은 위험에 처했을 때이다. 그 외에는 데리고 다니면서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고 먹이를 쪼아먹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윽고 병아리가 스스로 먹이를 쪼아먹을 정도가 되면 더 이상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도 그러했다. 이제는 영토를 빼앗는 정복의 시대가 아니라 상품을 팔고 사는  상생(相生)의 시대다. 남보다 부지런히 배우고 남보다 부지런히 일해서, 가격이든 품질이든 디자인이든 남보다 매력적인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여 먼저 자신이 쓰고, 쓰고 남은 것은 팔고 부족하면 산다. 세계 시장은 무한히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누구든지 정복할 수 있다.
 
 한국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일제시대와 6·25와 자유당 정부와 민주당 정부를 거치면서 한국인은 이제 자존심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 자기 모멸과 무차별 증오와 무한 불안에 시달렸다. 무엇보다 자존심과 자신감을 되찾아야 했고, 무엇보다 증오를 버리고 불안에 떨지 말아야 했다. 무엇보다 선명한 목표로 전 국민이 하나로 뭉쳐야 했다. 박정희는 국민의 불안을 단 한 마디로 날려 버렸다. 그것은 바로 '반공이 국시다!' 아무나 데모하고 아무나 경찰서를 습격하고 국민학생과 경찰도 떼를 지어 길거리로 뛰쳐나가는 상황에서는 절로 6·25의 악몽이 되살아나게 마련이었다.
 
 
[안정과 단합과 해외 시장 개척]
 
 '반공'이란 깃발 아래 전국민이 일시에 불안을 떨치고 하나로 뭉쳤다. 그 다음은 점령할 고지가 정해져야 한다.  '잘살아 보세!' 이 한 마디로 누구나 올라야 하고 오르고 싶은 고지가 정해졌다.
 '수출이 제일이다!', 이것은 세계 시장을 정복하는 대장정을 알리는 진군 나팔 소리였다.   광개토대왕이 군사조직을 일원화하듯이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 역군을 물샐틈없이 조직하였다. 대통령의 깃발 아래 대통령의 수출 군대가 일제히 세계로 뻗어가기 시작했다. 매년 수출이 40%씩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처음에는 미국으로 달려갔지만, 곧 이어 공산권 외에는 어디나 달려갔다.
 
나중에는 공산권에도 들어갔다. 박정희 시대나 오늘날이나 시장이 곧 옛날의 영토요 식민지다. 절망밖에 남은 게 없던 한국은 박정희 때 구축한 시장을 중심으로 거침없이 뻗어나가 한 세대도 안 되어 중계 무역국을 빼면 당당히 세계 10대 무역국으로 올라섰다. 세계 10위의 경제 식민지 보유국이 되었다는 말이다. 자, 광개토대왕과 박정희 대통령 누가 더 많은 영토를 정복했는가. 더군다나 박정희가 개척한 영토는 상대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정복한 엘도라도다.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달성한 광개토대왕과 박정희]
 
 박정희 대통령은 노동자의 임금과 중소기업의 이익이란 형태로 부를 선진국 못지않게 골고루 분배한 기적도 낳았다. 낮을수록 분배가 잘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1960년대에 0.279, 1970년대에 0.283으로 같은 시기 미국의 0.393, 0.399보다 월등히 나았고, 일본의 0.336, 0.333보다도 나았다. 서독의 0.275, 0.249에 약간 뒤떨어졌을 뿐이다. 한국의 지니계수가 0.300을 넘긴 것은 1980년대 이후다. 1980년대에 0.307로 악화되었지만 노조 설립 자유화 후에 0.293으로 떨어졌다가, 외환위기 이후엔 0.310을 넘어섰다. 꼭 친북좌파가 아니더라도, 상상으로 말하길 좋아하는 한국의 대다수 지식인이 알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로, 박정희 시대에 분배 상황이 제일 좋았다.
 
 광개토대왕은 호태왕(好太王)이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서 '好'는 성군(聖君)이란 의미다. 기존의 고구려 백성만이 아니라 새로 편입된 땅의 백성도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살게 해 줬다는 뜻이 담겨 있다. 박정희 대통령도 그랬다. 새로 생긴 어마어마한 부를 누가 독점하는 게 아니라 누구나 노력한 만큼 골고루 가져가게 했다. 더불어 그는 소련과 중공의 손아귀에 쥐어서 무력으로 다시 한 번 한국을 정복할 생각만 굴리면서 탁발규의 말년처럼 자국민을 마구 때려죽인 김일성과는 정반대로, 극히 일부의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는 것 외에는 한민족 역사상 가장 풍부한 자유를 보장했다. 특히 개인의 자유는 정치적 자유 외에는 비상계엄 체제 아래서도 거의 무한정 허용했다. 

            
  광개토대왕을 흠모한다면서 박정희 대통령을 증오한다면,
그 자는 역사를 왜곡하고 악용하는 음흉한 인간이다. 그 자는 탁발규와 김일성과 김정일을
몰래 사모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2007. 10.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