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말년
1978년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로 제9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어 5선에 성공했다.
한편 말년까지도 미국의 의구심은 여전했던 듯하다. 남로당 출신 박갑동의 증언에 의하면 국민에게는 독재자 소리를 듣고, 미국한테는 공산주의자로 의심받고, 북조선에게는 친일파로 매도되어 완전히 사면초가에 몰렸다고 한다.[47]
한편 박정희는 김영삼을 위선자로 보고 경멸하였고 독재정권을 혼내준다며 미국의 세계전략에도 불리한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들고 나온 미국대통령 지미 카터도 경멸하였다.[48] 그는 또 이 카터와 미국의 힘을 믿고 자신에게 도전한다고 본 김영삼을 더 경멸했다.[48] 또한 핵개발 등의 문제와 인권 문제 등으로 미국과 마찰을 빚었으며 인권 외교를 내세운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갈등 등으로 정권의 기반은 더욱 크게 흔들렸다. 박정희는 1979년에 들어와서는 카터와 김영삼에 대한 이런 경멸감을 정책으로 표현하면서 갈등은 심화되었고, 카터의 방한을 앞두고는 통역을 담당할 의전수석 최광수에게 인권 좋아하시네를 영어로 어떻게 통역할지에 대해서 미리 생각을 해두라는 지시를 사전에 내리기도 했다.[48]
[편집] 10·26 사건
- 이 부분의 본문은 10·26 사건입니다.
10·26 사건은 1979년 10월 26일,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 부장이던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 등과 당시 대통령 박정희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 등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박정희대통령시해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참석 후 귀경하여,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가수 심수봉, 한양대생 신재순을 도우미로 불러 연회를 하던 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저격당하였고 곧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오후 7시경 과다출혈로 급서(急逝)하였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 만 62세였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대통령을 살해했다고 주장했으나, 권력간 암투에서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차지철에 밀리는 상황에서 충동적으로 일으킨 범행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당시에 박정권의 핵개발과 관련된 것, 그리고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된 점 때문에 미국정부가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
[편집] 약력
- 1917년 - 출생
- 1926년 - 구미공립보통학교 입학.
- 1931년 - 둘째 형 박무희의 아들 박재석이 9세로 구미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하면서 함께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49]
- 1931년 - 누이 박재희가 상주의 토목업자 한정봉과 결혼하다.[50]
- 1932년 - 구미공립보통학교 졸업, 대구사범학교 입학.
- 1936년 - 3년 연하의 김호남과 결혼
- 1937년 - 대구사범학교 졸업, 문경보통학교 교사 부임.
- 1937년 - 장녀 재옥 출생
- 1938년 - 부친 박성빈 사망
- 1940년 -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입학.
- 1942년 - 신경군관학교를 졸업, 일본육군사관학교 57기로 편입학.
- 1944년 -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관동군 견습사관 과정을 거쳐 만주군 보병 제8단에 소위로 임관.
- 1945년 - 한국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
- 1946년 -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 사관학교의 전신) 2기생으로 입학. 12월 졸업, 소위 임관.
- 1946년 - 10월 대구항쟁 중 셋째 형 박상희 사망
- 1948년 -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남로당 가입 등 좌익 활동 혐의로 체포.
- 1949년 - 육군본부 전투정보과장[51]
- 1949년 - 모친 사망
- 1950년 - 한국전쟁의 와중에 육군소령으로 복직.
- 1950년 - 김호남과 이혼
- 1955년 - 제5사단 사단장.
- 1957년 - 제7사단 사단장.
- 1959년 - 육군 제6관구 사령관을 지냄.
- 1960년 - 1월에는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12월에는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지냄. 둘째 형 박무희 사망.
- 1961년 5월 16일 -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장면 정권을 무너뜨림.
- 1961년 5월 18일 - 군사혁명위원회 부의장(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명)
- 1961년 7월 -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 1962년 - 3월 22일 윤보선의 사퇴로 대통령 권한대행, 7월 겸임 내각 수반
- 1963년 - 윤보선을 15만 표 차로 누르고, 대통령 당선.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취임.
- 1963년 - 제2대 민주공화당 총재
- 1965년 -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는 한일협정 타결.
- 1967년 - 윤보선을 다시 누르고 6대 대통령으로 재선.
- 1968년 - 여운형 추모회 고문.[51]
- 1969년 - 3선 개헌을 통과시킨 후 1971년 김대중을 가까스로 이기고 3선에 성공.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 파병.
- 1972년 - 국회 해산 및 계엄령 선포. 그해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10월 유신).
- 1973년 - 김대중 납치사건.
- 1974년 8월 15일 - 광복절 기념식에서 재일동포 문세광의 저격 시도로 영부인 육영수 사망(육영수 저격사건).
- 1975년 - 인혁당 재건 사건.
- 1976년 8월 - 칠백의총 주변 기념관, 주차장, 관리사무소 등 기타시설 건립 지시[52]
- 1977년 - 12월 78년부터 서울을 제외한 전국 국민학교 학생에게 교과서를 무상으로 지급하는 제도를 확정
- 1978년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관.(68년 박종홍의 건의를 받아들여 추진)
- 1978년 - 9대 대통령에 선출
- 1979년 - 남민전(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관련자 검거, 크리스찬아카데미 관련자 검거
- 1979년 10월 26일 -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10·26 사건)으로 사망
[편집] 사상
박정희는 교사시절 민족주의적이었다는 제자들의 증언이 있으며, 일본인 교사와의 마찰로 교직에서 해임된 뒤에는 만주군 장교로 활동하였고 광복 후에는 사회주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형 박상희의 죽음이라는 견해와 박상희의 죽음 이전에 자발적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밝혀진 것은 없다. 광복 직후 남조선노동당에서 활동하다 적발되어 일시적으로 직급박탈을 당하였다가 복귀하기도 하였고 그 뒤 전향을 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미국은 박정희의 남로당 행적에 관해여 그의 사상을 의심하기도 하였으며 제5대,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윤보선에게 사상공세를 당하기도 했다.[53]
박정희는 소학교 당시 기독교 교회에 다니기도 했다. 동급생이었던 한성도에 따르면 "박정희와 저는 처음에 유년 주일학교에 나왔다. 구미 보통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교회에도 나가게 되었다. 일요일 오전 9시부터 10시까지 하는 주일학교에 열심이었다. 소년들이 막 코흘리 개의 때를 벗을 무렵 성경책과 찬송가를 들고 한복차림으로 교회에 모여들던 시절이다. 우리가 제일 먼저 배운 것이 기도하는 법이었지요" 라고 하였다. 박정희는 무신론을 주장했던 사회주의 활동도 하였다. 1962년6월초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최고위원들과 함께 김포로 가서 모심기를 할때, 논두렁에 앉아 쉬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말했다. 한 기자가 기독교에 귀의할 것을 권유하였으나[49] 나는 원래가 유신론자입니다. 하늘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를 내려주시고 게으르게 앉아서 놀기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를 안주시는 것이라며 퉁명스럽게 대답한 일도 있었다.[49] 그러나 박정희가 종교적이거나 신앙적이었다는 기록은 없다. 박정희는 종교를 갖지 않았다. 외부에는 불교로 알려진 것은 불교신도인 부인 육영수 여사의 영향을 받아 친불교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54]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박정희가 종교적인 활동을 했다는 자료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1972년 지폐 도안을 놓고 기독교 등 종교계와 갈등하기도 했다. 만원권 지폐가 처음 도안됐는데 한국은행에서는 만원의 주인공으로 석굴암의 불상(앞면), 뒷면이 불국사로 정하였고, 박정희의 친필 서명까지 하였다. 새로 발행된 만원은 그의 재가를 얻어 발행공고까지 냈다. 그러나 기독교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여론에서도 특정 종교를 두둔할 수 없다며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자 만원권의 주인공은 세종대왕으로 교체되었다.[55][56][57] 1974년 12월 11일에는 청와대 참모들 앞에서 천주교계에 대해 불평하기도 했다.[58] 또한 불평을 털어놓은 뒤에 "교회에서 정치에 간섭하면 우리도 교회에 간섭할까?"라는 농담을 했다.
[편집] 좌익 의혹
강원룡의 증언에 의하면 쿠데타 직후 박정희의 군사 혁명을 이데올로기로서 좌익이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고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인 데다, 6개 혁명공약의 제1항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이라고 못박았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차츰 그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언론에 보도됐고 윤보선이 선거에서 이 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라고 한다.[53] 당시 5·16 쿠데타가 일어날 무렵 북한은 군사·경제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소련, 중공과 군사동맹도 맺고 있었고, 4·19 혁명 이후 북한에서는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했으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기에 공산주의라고 하면 다들 무척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들어 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고 보았다.[59]
[편집] 여성 편력증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유성온천에서 젊은 여성에게 술시중을 받고 있던 박정희가 갑작스레 방문한 육영수 여사에게 "서울에 있으라면 있을 것이지 왜 내려 왔어"라며 술잔을 던진 일화가 있다.[60] 박정희의 '채홍사(기생을 징발하는 관리)'였던 박선호 중정 의전과정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는 주로 주간지 표지 사진이나 TV시청에서 (여성을) 골랐으며, 경호실장 차지철이 TV 보다가 30%쯤 골랐고, 궁정동 안가를 다녀간 연예인은 1백여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또한 임신해서 낙태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61] 또 1970년 '정인숙 피살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그녀의 남겨진 아들에 대해서 박정희 전 대통령 또는 정일권 전총리가 아버지라는 이야기가 떠돌기도 하였다. [62]
[편집] 외교관계
[편집] 통일 문제
박정희의 통일관은 선개발 후통일이었다. 경제개발을 통해 국력을 신장시킨 뒤 통일하자는 것이었다. 조갑제에 의하면 '박정희는 집권 3년째인 1963년에 쓴 저서『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피력한 조국 근대화란 목표와 자조-자립-자주-통일의 단계적 방법론을 죽을 때까지 견지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63] 미국의 닉슨 대통령의 닉슨독트린정책으로 베트남전쟁포기와 중국과의 관계개선, 주한미군의 부분적 철수및 동아시아에서 냉전기류의 해체경향의 영향을 받아 남북간의 관계를 모색하고 경제적 현실을 고려하여 '선건설 후통일' 정책에서 평화통일 3원칙을 통해 북한을 실체를 인정하고 남북간의 대한 경직된관계에 개선하여 '선평화 후통일' 정책으로 바뀌어 현재까지도 통일정책의 기본원칙이 되고있다.[출처 필요]
[편집] 대미관계
개인적으로 그는 미국에 대한 증오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48]
[편집] 사후 영향력
국무총리로 재임 중이였던 최규하는 헌법에 따라 박정희 사후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전두환은 박정희를 부정하였다. 박정희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헌법에서 소위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하였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하고 하나회 계열에 부정적인 공화당 실세들을 권력형 비리 혐의로 엮어서 제거하였고, 박정희의 시대를 부정과 부패, 비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정의사회 구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하였다.[64] 1987년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 조치에 반발하여 6월 항쟁이 일어난 후,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의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다시 실시되었고, 하나회 계열을 제외한 공화당 출신 세력들도 활동을 개시하기 시작했다.[64]
전두환 정권 시절에 몰락했던 공화당의 주요 세력들은 6월 항쟁 이후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을 중심으로 결집하였으나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였으나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등 민주당 출신 정치인들과의 불협화음으로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자유민주연합은 2006년 일부는 한나라당과 통합하고 일부는 국민중심당을 거쳐 자유선진당으로 내려오고 있다.
박정희의 친딸인 박근혜 역시 육영재단, 정수장학회 등을 운영하다가 1998년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하였으며, 지금까지 한나라당의 중심적인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새로 창립된 민주공화당의 총재 허경영은 자신이 박정희의 비밀 정책보좌관이었다고 주장하며 '제2의 박정희'를 자칭하였다.(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 참조)
정당 외에는 뉴라이트 계열 정치운동단체들이 박정희 집권기를 일부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뉴라이트 계열의 교과서포럼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가 짙은 현행 국사 교과서 대신, 박정희 정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수록된 자신들의 교과서로 바꿀 것을 주장하고 있다.[65] 그러나 뉴라이트의 시장만능주의와 박정희가 추진했던 국유화 정책은 상당부분 모순점을 안고 있다.
[편집] 평가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현재 다방면에서의 이해당사자들이 존재하므로 명확한 설정이 어렵다는 맹점이 있다.
조갑제는 박정희의 지지 기반은 '침묵하는 서민대중'이었으며 이들 속에서 박정희는 항상 영웅이었다고 보았다.[63] 또한 박정희는 봉건적 잔재와 싸웠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63]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은 “장사하는 사람을 제일 낮춰 본 사농공상의 시대에 상업국가론은 혁명이었다”며 “박 전 대통령은 농업국가로부터 상업국가, 즉 무역국가로의 대전환을 이뤄 대한민국을 흥융하게 했다”고 평가했다.[66] 조갑제는 “박정희는 자신의 선천적 조건인 가난과 작은 체구의 문제를 극복하고 38명의 급우들을 통솔하는 데 상당한 능력을 발휘한 것 같다.”라며 “박정희 급장의 통솔 방식이 대통령 박정희의 통치술로 발전한 것”이라는 평가를 내린다.[67]
1999년 조갑제와 대담한 노태우에 의하면 박정희 주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인용, 나라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일해도 국민이 알아주질 않아 배신감을 느꼈으며 朴대통령이 유신으로 나간 것도 그런 동기가 깔려 있다고 보았다. 민주주의라는 교과서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박정희를 독재라고 비난할 수 있겠지만, 수준이 높아진 상태에서 민주주의를 하기도 어려울 것이며, 그보다 훨씬 못한 시절에 야당 주장대로 민주주의식으로 했다면 나라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68]
김정렴의 증언에 의하면 경제적으로는 검소하였다고 한다. 넥타이, 만년필, 전기면도기 세 가지를 빼고는 모두 국산을 사용하였으며 국산 넥타이를 매면 마디가 잘풀려서 상공부에 넥타이에 대한 특별지시까지 했으나 풀리지 않게 하는 납처리 기술을 로열티를 지불하고 도입할 처지가 못되어 생전에 국산 넥타이를 마음껏 매보지 못했다고 한다.[45]
최상천은 “피도 눈물도 예의도 없는 냉혈동물의 망나니짓을 지도력이라고 치켜세우는 데는 말문이 막힌다. 사적이익을 위해 일본에 봉사한 친일파의 수준이 아니라 모든 생각과 의식이 철저히 일본화된 천황주의자 " 라고 하였으며[69][70], 진중권은 자신의 저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전반에 걸쳐 조갑제의 박정희 전기를 파시즘적인 소설이라고 평했다. 노회찬은 박정희의 경제개발독재를 빗대어 사회주의정책이라 평가하기도했다.[71] 한편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박정희의 5·16 군사 정변을 ‘구국의 혁명’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72]
이 외에도 박정희의 친일 행각에 대한 평가도 다양하다. 특히 박정희의 만주군 행적과 창씨개명에 대해 논란이 있다. 박정희는 사망하였지만, 당시 이해관계 당사자들이 현재 생존해 있는 시점에서 아직은 박정희의 공과나 치적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편집] 경제 개발과 민주주의 탄압
박정희는 통일의 길을 조국 근대화에 있고, 근대화의 길은 경제적 자립이며 자립은 통일의 첫 단계라고 보았다. 이후 근대화를 통해 개발독재의 정당성을 확보하여 낙후한 조국을 구제하겠다는 목표을 가지고 국가재건사업을 추진한다. 박정희는 재임 기간 중 민족 중흥의 기치 아래 경부고속국도 건설, 수출 증대, 소득 증대, 저축 장려, 식량 자급 자족 실현, 새마을 운동 등을 통한 인프라 구축으로 일제 침략기와 6.25를 거쳐 황폐화된 한국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과 조국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강준만, 진중권, 한홍구 등 진보적인 학자들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군사 정변으로 전복한 집권 과정,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탄압, 극심한 반대자 인권 탄압 등에 대해서 부정적·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현대, 금성, 삼성 등의 여러개 중소기업이 재벌과 대기업으로 성장하고 포항제철로 대변되는 중화학 공업이 중추 산업으로 등장했다.
1997년 일어난 외환 위기 IMF 구제금융사건 이후, 박정희의 경제 정책에 대한 일부 비판적인 견해가 일었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 정책은 중소기업간 성장의 불균형을 야기했고, 박정희는 아시아 각국의 독재자들과 같이 일본과 구 소련을 모방한 관료주의 경제정책으로 산업전체를 독점하는 개발독재 형식의 정실자본주의의 양상을 띄고있었다. 미국 경영자들은 주주가치를 창출하는데 매진하는동안 , 아시아 경영자들은 현대 군벌들의 비위를 맞춰줘야 했다. 그 결과 경영자들은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자회사 분사나 합병 파트너 모색 등 재빨리 대처할 자유나 탄력성을 갖지못하고, 대기업과의 정경 유착으로 인한 한국 재벌의 관치금융 , 통제금융 의 의존적 총체적 부실이 결국 한국 경제의 부실로 이어져 외환 위기의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는 해석이 있다.[73]
그 외에 박정희 시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학자로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김수행이 있다. 그는 공저인 《박정희 체제의 성립과 전개 및 몰락》에서 경제학적 분석을 통해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높은 착취율에 기반한 것이며, 실제 국민생활의 개선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상지대학교 교수인 홍성태도 박정희 시대의 경제정책을 '토건국가'적인 정책이라고 비판하였으며, GNP 성장위주의 정책 속에서 "저임금-저곡가 체제", "자연을 마구잡이로 이용하고 파괴하는 착취체계"의 이중의 착취 위에 건설된 것으로 평가하였다. 아울러 개발을 위해 그의 독재가 필연적인 것도 아니었으며, 경제정책은 독재의 구실일 뿐이었다고 비판한다[74]
세계은행 이사회에 한국에 관한 기조연설자로 초청된 김정렴은 " 강력한 정부주도의 '수출지향적 공업화 경제정책'으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김정렴에 의하면 박정희는 조국의 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꿈과 미래상을 비전으로 국민에게 제시하였고 '잘살아 보자'고 호소하며 국민의 단결을 고무하였으며, 박정희시대의 한국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고 마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미르달이 정의한 '경성국가'였다 "며 평가하며 "덩샤오핑은 한국을 최빈국에서 중진국 선두주자로 끌어올린 박 대통령 집권 18년간의 실적을 높이 평가했다" 덧붙였다.[75] 한편 임기말 그는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반체제 인사들과 민주화 운동가들을 탄압하였으며[출처 필요] 집권초에는 국가보안법을 개정발표하였다. 반국가활동의 규제를 위해 반공주의를 공고히 한다는 명분 아래 민주주의 발전을 유보시켰다는 비판이 있다.[출처 필요]
[편집] 2000년대 이후의 평가
[편집] 국내
2000년대 들어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리고 있다.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룩한 대통령, 민족 중흥을 실현한 통치자 등의 긍정적인 평가와 시대에 편승한 기회주의자이자 독재자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양립하고 있으며 이러한 의견 차는 대한민국의 진보주의와 보수주의를 나누는 하나의 상징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원한관계와 이해관계에 의한 상반된 평가가 상존하고 있으며 일부 언론에선 박정희의 구체적 친일 행적을 취재, 보도하여 박정희가 친일파인가에 대한 논란이 다시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정치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러 언론의 여론조사에서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대통령으로 꼽히고 있다.[76] [77][78]
건국 60주년 기념 KBS여론조사 중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업적을 많이 남긴 대통령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물음에서는 역대 대통령중 성별, 연령대, 지역, 직업, 소득, 교육수준을 초월하고 모든 부문에서 지지율 1위를 기록하기도 하여 눈길을 끌기도 하였다.[79][80]
IMF 사태 이후 김영삼, 김대중 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한 반발로 박정희의 인기는 높아졌는데, 이를 '박정희 신드롬'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상지대 경제학과 교수 조석곤은 이러한 박정희 신드롬을 '박정희 신화'로 평가하며, 일종의 영웅사관이라고 비판한다.[81] 성공회대 조현연 교수도 "독재자 박정희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신화 속의 허구"라 비판하며, "청산해야 할 독재통치 18년"으로 평가한다.[82] 주체적 민족사관에 입각하여 조국근대화를 촉진시키고 경제개발과 민족의 정신혁명 등을 이룩하는데 힘을 기울였다는 평가도 있다).[83]
이들은 박정희 신드롬을 비판하면서, 박정희의 업적이라고 알려진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그들에 의하면,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은 민주주의의 성장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후퇴를 가져왔다. 또한, 박정희가 서민적이고 검소한 대통령이라는 주장 역시, 각종 비리 의혹사건, 3분 폭리사건, 장준하가 폭로한 3분 밀수사건, 전두환 정권 때 밝혀진 김종필의 200억대 부정축재 사건 등으로 볼 때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박정희 신드롬이 "개발독재의 단맛을 독점해온 사회 곳곳의 수구적 보수세력과 특히 그들과 결탁된 조중동 보수언론"이 부추긴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출처 필요]
박정희 신드롬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바 있는 강준만은 월간말의 투고글에서 IMF 사태 이후의 박정희 신드롬을 조선일보, 조갑제, 군사독재의 후신들 등에 의한 박정희 미화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박정희에 대한 해외의 긍정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김재홍 동아일보 논설위원의 《박정희의 유산》이라는 책을 인용하며, "(3선 개헌 직전인 1970년) 한국의 로비스트가 미국의 영향력 있는 대학 교수 겸 프리랜서에게 박정희의 얼굴을 타임지 표지사진으로 게재하게 주선해 주면 5만 달러를 제공하겠노라고 제의"하는 등 박정희에 대한 해외의 호의적인 반응의 원인을 진단하고 있다.[84]
이에 대해 백낙청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박 전 대통령 식의 경제 개발은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었지만 박 전 대통령은 경제성장의 유공자이며 경제성장을 이룩하지 못한 다른 나라 독재자가 많다는 점과 한국처럼 극적인 성장을 이룩한 일은 더욱이나 드물다는 점에서 박 전 대통령을 경제성장의 유공자라면 유공자로 볼 수 있으며 민주화 진영이 (그간) 박정희 개인이나 그 시대 경제 분야에 대해 소홀한 면이 있었던 게 사실”이라며 “한국 경제가 박정희 시대에 이룩한 괄목할 만한 성과에 대해, 그리고 전제적이며 포악했지만 유능하고 그 나름으로 헌신적이었던 ‘주식회사 한국’의 최고경영자(CEO) 박정희에 대해 충분히 인정을 안 해준 것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동시에 “군사문화와 대대적 환경파괴에 근거한 박정희 시대의 발전은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었다”며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국민들로부터는 (민주화 등) 다른 욕구가 나온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경제적 성공이 그의 권력을 도리어 잠식했다”며 박정희 시대에 대한 객관적인 평과를 강조하였다. [85][86]
이런 상반된 시각에 대해 박정희를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던 조희연 교수는 직접 경험한 ‘역사적 박정희’와 박정희 신드롬과 같은 현상으로 포착되는 ‘현대적 박정희’의 간극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박정희 시대의 폭압성과 국민적 저항을 강조하는 비판 일색의 기존 담론을 성찰하고 극복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진보 담론이 강조하듯 박정희 체제는 폭압적이었지만, 최근 ‘대중독재론’의 지적처럼 새마을운동의 지지자들이 보여 주는 ‘열광’도 함께 존재한다”며 “미국에 의존적이면서도 민족주의적 측면이 존재하고, 경제정책조차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며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볼 것을 지적했다.[87]
[편집] 해외
1999년 8월에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있던 인물 20인」에 오르기도 하였다. 타임은 박정희에 대해 “비록 독재적 성향을 가졌지만 한국의 최장수 대통령으로 집권하면서 경제적 약체 국가를 산업강국으로 변모시켰다고 ” 평가했다. 타임이 선정한 인물들 중에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와 타고르, 중국의 마오쩌둥과 쑨원, 일본의 히로히토와 모리타 아키오, 싱가포르의 리콴유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밖에도 베트남의 호치민과 티베트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선정되었다.[88]
싱가포르에서는 리콴유 전 수상이 박정희에 대해 "아시아에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위대한 세 지도자로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와 중국의 덩샤오핑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를 꼽고 싶다, 오직 일에만 집중하고 평가는 훗날의 역사에 맡겼던 지도자"라고 평가하며 그를 극찬하였으며[89] 독일 정부 국정교과서에서는 박정희를 "강력한 손으로 남한을 농업 국가에서 산업 능력을 가진 국가로 이끌어낸 지도자"로 평가하며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에 대해 타 국가들의 경제성장 과정과 비교하여 '기적'으로 평가하였다.[90]
2004년,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박정희를 언급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KBS 박권상 사장에게 KBS가 제작한 ‘영상 실록’ 가운데 박정희 편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으며 박정희에 대해 “박 대통령의 평가는 후세가 할 일이지만 그 시대, 그 환경에서는 유신인지 뭔지 그런 길밖에 없었다. 민주화도 무정부적인 민주화는 좋지 않다”며 박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했고 2002년에는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을 평양에 초청하여 영화 ‘실미도’의 소재가 된 청와대 습격사건에 대해 사죄하며 “한국을 방문하면 박 대통령 묘소를 찾아가겠습니다. 그것이 예의입니다”라고 말하였다.[91]
또한 하버드 대학교의 에즈라 보겔(Ezra Vogel) 교수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에 대해 각각 "중화학공업 정책 이후 그가 폭력을 사용하고 나라를 경찰국가로 만들었을 때 우리는 매우 화가 났고 흥분했었다. 하지만 동시에, 박정희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한국도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하며 동시에 "큰 발전을 이룩한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그 변화를 가능케 했던 독재적인 리더가 있었다. 1920년대 일본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그랬고, 대만과 한국이 그랬다. 중국은 덩샤오핑 치하에서 발전을 이뤘다. 모두 독재적이었고, 중앙집권적이었다. 먼저 민주화부터 하라는 미국인들의 충고는 성공하지 못했다."며 개발독재의 불가피성을 지적했다.[92]
기미야 다다시는 박정희를 복잡한 과정이 들어있는 민족주의 사상을 가진 인물로 정리했다. 그는 박정희가 사회주의자인(또는 한때나마 사회주의자였던) 일부 인물을 경제적으로 미국에서 자립하고 공업화하는 데에 등용했다고 기록했다.[93]
박정희에 관련된 사항은 2008년 현재 정확한 규정이 어려우며 핵개발 등의 비화와 미국과의 갈등 등은 아직도 베일에 쌓여 있다.
[편집] 가족 관계
- 증조부 박이찬
- 조부 박영규(朴永奎, 1840년 음력 1월 8일 ~ 1914년 양력 2월 24일)
- 부친 박성빈(朴成彬, 1871년 ~ 1938년 9월 4일)[13]
- 모친 백남의(白南義, 1872년 ~ 1949년), 본관은 수원
- 형 박동희(朴東熙, 1895년 ~ 1967년) - 형수 김동금(1894~1962), 여산송씨(1911~?, 1남 1녀는 여산송씨생)
- 형 박무희(朴武熙, 1898년 ~ 1960년)
- 조카 2남 1녀 : 박재석(1922~?, 국제전기 회장 역임), 박재호 등
- 누나 박귀희(朴貴熙, 1902년 ~ 1974년) - 매형 은용표(殷龍杓)
- 조카 3남 2녀 : 은봉남(殷鳳男, 1918~1994), 은희만(殷熙萬, 은지원의 부친)
- 형 박상희(朴相熙, 1906년 ~ 1946년)
- 형 박한생(朴漢生, 또는 박한희(朴漢熙) 1910년 ~ 1928년?)[94]
- 누나 박재희(朴在熙, 1913~1996) : 매형 한정봉(1892~?)
- 숙부 박용빈(朴龍彬)
- 숙부 박일빈(朴日彬)
[편집] 부인과 자식
[편집] 문화에 나타난 박정희
[편집] 문학
-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박정희 일대기 형식[96]
- 이인화, 《인간의 길》 [97]
- 김진명,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1,2》
- 오원철,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 백무현, 《만화 박정희》, 박정희에 대한 비판적인 소설 겸 만화
[편집] 드라마
괄호 안은 박정희를 연기한 배우이다.
- 1989년 - 《제2공화국》, MBC (이진수)
- 1993년 - 《제3공화국》, MBC, 김상민 - 소년 박정희 역
- 1993년 - 《제3공화국》, MBC, 홍경인 - 청소년 박정희 역
- 1993년 - 《제3공화국》, MBC, 이창환 - 청년 박정희 역
- 1993년 - 《제3공화국》, MBC, 이진수 - 장년 박정희 역
- 1995년 - 《제4공화국》, MBC (이창환)
- 1995년 - 《코리아 게이트》, SBS (독고영재)
- 1998년 - 《삼김시대》, SBS (이창환)
- 2002년 - 《야인시대》, SBS (이창환)
- 2004년 - 《영웅시대》, MBC (독고영재)
- 2005년 - 《제5공화국》, MBC (이창환)
[편집] 영화
괄호 안은 박정희를 연기한 배우이다.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주요 저서
-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
- 《민족의 저력》
- 《민족중흥의 길》
- 《국가와 혁명과 나》
- 《조국 근대화의 지표》
- 《지도자의 길》
- 《한국 국민에게 고함》
- 《연설문집》
- 《수기집-나의 어린 시절》[6]
[편집] 참고 자료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70년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 김정렴, 《아, 박정희 - 김정렴 정치 회고록》(중앙M&B, 1997)
- 김성진, 《박정희 시대》(조선일보사, 1994)
- 김종신, 《박정희 대통령과 주변사람들 》(한국논단, 1997)
- 김형아,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일조각, 2005)
- 박봉현, 《박정권 19년을 해부한다》(고려출판사, 1991)
- 박정희, 《한국 국민에게 고함》(동서문화사, 2005)
- 박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향문사, 1963)
- 박정희, 《하면 된다! 떨쳐 일어나자》(동서문화사, 2005)
- 박정희, 《나라가 위급할때 어찌 목숨을 아끼리》(동서문화사, 2005)
- 전재호,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책세상, 2000)
- 오원철,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 강국 만들었나》(동서문화사, 2006)
- 유원식, 《5.16 비록 혁명은 어디로 갔나》(인물연구소, 1987)
- 이석제, 《각하,우리 혁명합시다》(1995, 서적포)
- 이한빈, 《일하며 생각하며:이한빈회고록》(조선일보사, 1996)
- 정재경, 《한민족의 중흥사상-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철학》(신라출판사, 1979)
- 정재경, 《박정희 사상 서설:휘호를 중심으로》(집문당, 1991)
- 정재경, 《박정희 실기-행적초록》(집문당, 1994)
-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 초인의 노래》(조선일보사, 1998)
- 조갑제, 《박정희의 마지막 하루》 (월간조선, 2006)
- 홍하상, 《주식회사 대한민국 CEO 박정희》(2005, 국일미디어)
- 조희연,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역사비평사, 2007)
- 진중권,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1, 2》(개마고원, 1998)
- 최상천, 《알몸 박정희》(사람나라, 2001)
- 허경영, 《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한강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