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관심 세상史

일본에 원폭 투하

淸山에 2009. 9. 3. 13:30

 

 

《지난해 7월 일본에서는 나가사키 출신의 국방부 장관이 “원폭 투하는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그 문제로 끝내 장관직을 사임해야만 했다. 이처럼 미국의 원폭 투하 결정은 일본 정계에서도 여전히 민감한 현재적 쟁점이다.

또한 36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의 관점에서도 냉철한 시각으로만 바라보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패전 확실한데 왜 미국은 굳이 원폭투하 했을까

태평양전쟁이 막판으로 치닫던 1945년 8월, 미국은 B-29 폭격기를 이용해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15급kt(킬로톤·1kt은 TNT 1000t의 폭발력) 원자폭탄 ‘리틀 보이’와 21kt급 ‘패트 맨’을 투하했다. 원폭 투하로 인해 히로시마에서 14만 명, 나가사키에서는 7만 명이 숨졌다. 부상 및 방사능에 노출되어 생긴 유전자 변형으로 대를 이어 고통받는 사람 역시 수만 명에 이른다. 엄청난 사상자 수에 놀란 일왕은 8월 15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였고 15년 동안 지속된 태평양전쟁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의문의 대상이 되는 것은 ‘왜 미국은 일본의 패전이 확실한 상황에서 원폭투하라는 극약처방을 내린 것일까’이다. 원폭 투하 결정은 과연 전술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었나, 아니면 고사 직전의 일본에 대한 가혹한 보복성 처사였던 것인가. 이 문제에 관하여 다른 시각이 나타나게 된 배경에는 핵무장 반대 운동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원폭 투하가 낳은 참상이 널리 알려지고, 냉전 구도 속에서 강대국들의 핵무기 개발 경쟁이 더욱 뜨거워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핵무장을 반대하는 운동이 더욱 활발해진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특히 피폭국인 일본과 유럽의 운동가들은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가 과연 불가피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들의 주장을 살펴보기에 앞서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가 정당한 것이었다는 입장을 살펴보자. 1945년 6월 18일 해리 트루먼 당시 미 대통령이 출석한 가운데 일본 본토 상륙작전에 관한 미군 합동참모본부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본토 상륙작전을 감행했을 때 발생할 미군 사상자 예상치가 논의됐다. 육군과 해군의 여러 전문가 및 고관들은 다양한 예측을 내놓았지만 최소한 25만 명의 미군이 전사·부상·실종당하고, 전쟁이 16개월 이상 더 연장될 것이라는 예측이 제기되었다.

제2차 대전에서 실제 미군 총사망자 수가 약 30만 명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당시의 미국으로서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부담이었다. 그런 점에서 원폭 투하를 주장했던 사람들이 내세운 강력한 근거는 만약 미국이 계획했던 일본 본토 상륙작전이 그대로 진행되었다면 원폭으로 인한 사상자보다 훨씬 많은 생명이 희생될 것이라는 점이다. 즉 미국의 일본 본토 상륙작전은 그 규모나 시일로 보아 수백만 명의 일본인이 희생되었을 것이며, 미군 사상자 또한 수십만 명에 이를 것이라 예상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원폭 투하가 결과적으로 불필요한 희생을 줄인 것이고 당연히 정당성을 갖게 된다.

원폭 투하를 주장한 사람들의 또 다른 이유는 당시 일본의 전쟁 양상을 중요한 요인으로 꼽는다. 미국은 1945년 2월 일본 본토 가까이에 있는 이오지마 섬에 상륙했고, 4월부터는 오키나와에 상륙하려고 했으나 일본인들은 15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감수하면서 처절한 저항을 한다. 게다가 일본은 전세를 되돌려 놓고자 그 유명한 가미카제() 공격을 실행한다. 이와 같은 방식의 일본의 저항은 재래식 군사 수단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고, 그러 면에서 원폭 투하는 정당성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과 달리 원자폭탄 투하가 부당했다고 보는 사람들은 다른 근거를 제시한다. 먼저 이들은 2차 대전의 주범인 독일이 핵폭탄을 개발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미국이 알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히틀러와 나치스는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완전히 패색이 짙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미국이 핵폭탄을 만들기에 충분한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마련한 1945년 5월에는 독일이 항복을 하자 정작 독일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명분이 없어져 버렸다. 그렇지만 원자폭탄을 사용하겠다는 야심을 버리지 않은 미국은 아직 항복하지 않은 일본을 희생양으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원폭 투하가 부당하다고 보는 이들은 또 다른 이유로, 미국이 원폭을 투하하기로 한 결정이 전쟁을 빨리 끝내서 더 이상의 인명 살상을 막겠다는 인도적 동기보다는 원자폭탄이라는 새로운 무기의 성능을 실험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이러한 주장의 중요한 근거는 미국이 원폭의 엄청난 살상 능력을 이미 잘 알고 있었음에도 가장 많은 인명이 살상될 수 있는 곳에 원폭을 투하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원폭 투하의 목표로 잡힌 도시들은 수도인 도쿄를 제외한 주요 군사·산업 시설이 있는 곳이었는데, 그 가운데도 특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선정된 이유는 인구밀집도가 높아서 인명 살상력을 테스트할 수 있고, 산과 같은 지형적 장애물이 적은 평야라서 그 파괴력이 미치는 범위를 알기에 가장 좋은 곳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이 원자폭탄의 위력을 충분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당시 핵개발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과학자들이 핵폭탄의 파괴력을 보고 핵무기에 반대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리학자 레오 질라드는 독일보다 먼저 핵폭탄을 개발해야 한다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끈질기게 설득했으나, 최초의 핵폭탄 실험을 본 뒤 핵폭탄을 투여하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또, 맨해튼 프로젝트를 지휘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유명인사가 됐지만, 핵폭탄으로 받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는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내 손에는 피가 묻어 있다”고 말해,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그 얼간이를 다시는 이곳에 부르지 말라”는 책망을 듣기도 했다. 또한 원폭 투하가 아인슈타인에게 미친 영향도 엄청났다. 그는 자신의 이론이 낳은 이 엄청난 재앙에 놀라 2차 대전 종전 후 바로 원자폭탄 사용을 반대하는 과학자들과 함께 원자력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핵무기 개발과 사용을 중지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느낀 죄책감은 그가 한 말에서도 엿볼 수 있다. “만약 독일이 원자폭탄을 성공적으로 생산해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나는 결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을걸세, 결단코!”

원폭 투하의 부당성에 대한 주장 중에는 미국의 원폭 투하가 포츠담 선언에서 대일본전 참전을 결정한 소련이 동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소련은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극동 지역 일본군과 싸워 신속하게 일본군을 밀어붙이고 있었고, 홋카이도 섬에 상륙할 작전까지 세워놓고 있었으며, 실제로 일본의 항복 이후 신속하게 한반도 이북 지역을 점령하였다. 트루먼은 이처럼 신속한 소련군의 전진에 놀라 동북아시아에서 소련의 패권이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에서 미국의 힘을 과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1945년 4월에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살해당하면서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히틀러가 자살하면서 5월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상태에서, 일본을 항복시키기 위해 원자폭탄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할 필요는 없었다는 점에서 원폭 투하가 부당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들은 미군 합동군사참모회의에서 제시된 희생자 예상 통계치가 지나치게 과장돼 신뢰하기 어렵다고 본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하 상반된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문제는 “수백만 명을 구하기 위해서 지금 당장 수십만 명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박승렬 LC교육연구소 소장

심화학습

본문을 참고로 미국의 원자 폭탄 투하 결정은 정당화 될 수 있는가에 관하여 토론해 보자.

화약에 쓰인 아세톤… 폭약용으로 개발한 암모니아 합성…

학문이란 이름으로 만들어낸 대량 살상무기

과학은 가치중립 약속을 제대로 지켜냈을까


과학은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의 의도와 결과는 항상 가치중립적이지만은 않다.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는 암모니아 합성법을 개발해서 퇴비와 천연 비료에만 의존했던 농업 식량 생산량을 6배 이상 향상시키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함으로써 수십억 명의 인류를 굶주림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그의 암모니아 합성법은 과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1918년에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하버가 처음에 암모니아 합성법을 개발한 것은 이처럼 좋은 목적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독일은 칠레에서 생산되는 칠레초석을 수입해 전쟁에 필요한 폭약의 원료로 사용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하버가 개발한 합성법을 활용하여 연합군에 대항할 수 있는 화약을 더 쉽게 만들 수 있었다.

이는 제 1차 세계 대전을 더 오래 연장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독일에 대한 하버의 충성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인류 최초로 전쟁에서 사용할 살상용 독가스를 개발한 화학자였다. 그가 개발한 염소 가스는 1915년 벨기에 전투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어 화학 무기 개발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버는 자신이 개발한 독가스가 얼마나 위험스럽고 반인륜적인가를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권은 자신이 신뢰하고 충성하던 독일 정부 지도자의 몫이라고 선언했다.

1916년에 차임 바이츠만은 옥수수에서 아세톤이라는 물질을 추출하는 방법을 개발해 영국 정부에 큰 도움을 주었다. 아세톤은 1차 대전 중 영국이 상당한 노력을 들여서 개발하고 있던 무연 화약의 중요한 성분이었다. 바이츠만은 영국 정부를 위해 무기를 생산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또한 과학자로서 자신의 업적을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후 바이츠만의 행적은 화학자라기보다는 정치가의 길이었다. 영국 정부와의 어려운 협상 끝에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을 이끌어내는 데 큰 몫을 했고, 다음 해에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어떤 과학자들은 그 의도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분명하게 표명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아인슈타인이다. 그는 루스벨트에게 미국이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해야 한다는 편지를 보내지만 막상 원폭 투하의 참상을 목격한 뒤에는 핵무기 개발에 반대하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55년에는 저명한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핵무기 폐기를 주장하는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을 발표했으며, 반전·반핵의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평생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주요 사찰 대상이 되었다.

조은정 LC교육연구소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