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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의 黨爭과 요사이의 권력투쟁

淸山에 2009. 9. 3. 13:25

 

 

조선조의 黨爭과 요사이의 권력투쟁
사소한 데 목숨을 거는 것이 가장 큰 공통점이다.
趙甲濟   
 李重煥이 쓴 「擇里志」란 책에는 조선왕조의 정치가 어떤 운용원리를 갖고 있었느냐에 대한 재미있는 기록이 나온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나라가 삼공육경(三公六卿)을 두고 있지만 언론과 여론을 중시하고 어떻게 하면 지도자가 구설수에 오르지 않고서 체면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여러 법규를 두고 오로지 논의로써 政事를 삼고 있다.
 
  그리하여 내, 외직의 임명과 파직은 삼공에게 시키지 아니하고 오로지 이조(吏曹)에 귀속시켰으며 이조의 권한이 무거워질까 염려하여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三司)관리의 임명과 해임권은 이조판서에게 돌리지 않고 오로지 郎官에게 맡긴 까닭으로 이조의 정랑,좌랑이 또한 언론과 감찰의 권능을 주장하였다. 삼공, 육경이 벼슬은 비록 높고 크다고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떳떳치 못한 일이 생기면 전랑(銓郞·정랑과 좌랑을 가리킴)이 문득 三司의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고관들을 논박하게 하였다.
 
  조정의 풍속이 염치를 숭상하고 名節(명분과 절의)을 중하게 여기는 까닭에 한번 탄핵을 받으면 부득불 벼슬을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기 때문에 전랑의 권한이 바로 三公에 겨눌 만하였으니 이것이 대관과 소관이 서로 유지하고 上職과 下職이 서로 견제하여 삼백년 동안 大權奸, 즉 대신으로서 정권을 죄지우지한 이가 없고 신하의 세력이 커져서 제어하기 어려웠던 근심이 없었던 까닭이다.
 
  이는 조선개국을 할 때 고려시대의 君主가 弱하고 臣下가 强했던 폐단을 거울삼아서 보이지 않게 그것을 막으려는 장치를 숨겨둔 것이었다. 이렇기 때문에 三司 가운데서 이름과 덕이 있는 자로서 엄밀하게 뽑아서 銓郞으로 삼게 하되 또한 스스로 후임자를 천거하게 하며 이조판서에게 귀속되지 않게 하였으니 인사권을 중하게 여겨 하나같이 公論에 붙이고자 함이었다. 한번 전랑을 지내면 참으로 다른 잘못이 없는 한 또한 쉽게 영의정, 우의정, 또는 판서 등 公卿에 오를 수가 있다. 그러므로 명예와 利益이 함께 갖추어져 있어 연소한 新進이면 바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여기서 吏曹銓朗이란 자리가 조선조의 정부에선 핵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는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관료들의 임명권을 吏曹, 즉 총무처 같은 부서에 맡겼다. 이렇게 되면 이조의 힘이 또 너무 세어질 가능성이 있으니 三司, 즉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인사는 지금으로 말하면 국장급인 吏曹銓郞에게 전담하게 하여 상부를 견제하도록 했다는 뜻이다.
 
  사헌부는 지금 우리 식으로 말하면 검찰과 감사원이고 司諫院은 관리들의 잘 잘못을 공론화하는 기능이 있는 만큼 언론 기능일 것이고 弘文館은 서울대학의 교수나 학자로 비견될 수 있다. 신진기예의 패기 있는 선비들이 맡게 되는 이조전랑의 직위는 비록 정오품(정랑)아니면 정육품(좌랑)의 높지 않은 직급이었지만 언론과 검찰, 그리고 명분의 기능을 장악한 三司를 통제하고 있었으므로 장관급인 판서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도 만만하게 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전랑은 후임 전랑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이 요직을 누가 차지하느냐가 권력의 장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므로 당파싸움도 吏曹銓郞의 쟁탈전이었다는 시각이 있다. 이조전랑은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출신이므로 남을 비판하고 잡아넣는 이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따라서 어느 재상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이 三司를 동원하여 규탄하고 조사할 수도 있어 상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곤 했다.
 
  그러면 중앙정치를 언론과 검찰 및 감사 기능을 장악한 銓郞이 독단할 수 있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전국에는 여러 학파로 형성된 선비집단이 고을의 서원들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갈래의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퇴계 이황파, 남명 조식파, 율곡 이이파 식으로 이런 집단은 고매한 주자학자들을 중심으로 뭉쳐 있어 학설에 따른 인맥편성이라고 오해하기 쉽지만 실은 地緣, 學緣, 血緣이 중첩된 인맥구조였다고 한다.
  이들은 서울과 지방에서 서원을 중심으로 끈끈한 집단을 형성하여 과거제를 통해서 서울에 인재를 공급하는 저수지 역할을 하는가 하면 서울에 진출한 자기 인맥을 통해서 현실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書院에서 전국에 돌리는 통문이란 것은 요사이로 말한다면 시국선언문 같은 것이다. 山林이라고 불리던 在野 선비사회에서 여론이 되어 이것이 중앙의 성균관을 통하거나 직명상소나 복각 상소의 형태로 조정에 알려지고 때에 따라서는 큰 영향력을 끼쳤다.
 
  조정에 참여한 고관들도 존경받는 대학자들을 監主라 하여 높이 받들어 모심으로써 지방 在野 지식인 사회가 제도적으로 중앙정치에 관여하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렇게 보면 조선조의 정치에 主役으로 등장했던 세력은 전제권을 가진 왕을 비롯하여 행정권을 쥔 의정부, 언론과 검찰 기능을 쥔 三司, 그리고 이 三司를 통제하여 최상층부를 견제하는 이조전랑을 필두로 하는 젊은 세력, 그리고 중앙을 견제하고 조종하기도 하는 지방의 서원중심 선비집단으로 다양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행정과 감시기능, 상하간,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이런 상호견제 때문에 조선조에서는 고려무신정권 때의 최충헌과 같은 실력자가 나타난 적이 없었다. 조선조가 이런 상호 감시 견제 장치를 제도화한 것은 고려 때 王權이 쇠퇴해지고 신하들이 강력해진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런 부작용을 막아보려고 했던 것이다. 즉 신하들끼리의 견제를 촉진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한다는 뜻이 숨어 있었다. 요사이의 용어로 말하자면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하여 어용언론과 정보, 감사, 검찰 기능을 키워서 관료집단이나 정당의 권한을 약화시킨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초 의도했던 것과는 반대로 이런 조선조의 정치제도는 강력한 신하도, 강력한 왕도 없는 말하자면 君弱臣弱한 상황을 만들었다. 그 결과로 나라는 부강하지 못하고 군대는 힘이 없어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권력을 여러 관료집단 사이에 분산시켜놓으니 끝없는 당파싸움이 계속되었다.
 
  이런 당파싸움은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는 그런 지리한 싸움이었다. 그 예로 현종과 숙종 때의 당쟁사례를 들 수 있다.
  효종이 죽자 효종의 어머니 慈懿大妃(자의대비)가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상복을 1년간 입어야 하느냐, 2년간을 입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조정에서 대두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절에 대한 서적을 참고로 하여 이런 문제를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책에도 大妃의 상복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래서 영의정 정대화 등 원로대신이 의논하여 자의대비가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잠정적으로 결정했다. 서인의 거두 송시열도 1년상에 동의했다. 원래 효종은 次男이었다가 형이 죽는 바람에 세자가 되어 왕이 된 경우이므로 어머니 자의대비는 차남이 죽을 때 하는 식으로 1년간만 상복을 입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西人들과 늘 대립하던 南人들이 들고 일어났다. 남인의 윤선도는 서인들이 1년상을 주장하는 것은 죽은 효종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효종의 형 소현세자의 아들을 정통으로 삼으려는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되면 1년상이냐, 2년상이냐 하는 문제는 단순한 장례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정권의 향방이 걸린 정치투쟁이 된다.
 
  이 논쟁에서 1년상을 주장한 西人들이 이겨 2년상을 주장했던 南人들은 실각당하고만다. 우리나라의 정치싸움의 한 특징은 喪服 논쟁과 같은 사소한 문제를 정치적인 사건으로 확대시킨 다음에 死生결단하고 싸운다는 점이다. 어느 나라이든 당쟁도 있고 권력투쟁도 있지만 그런 싸움의 명분과 주제가 우리나라와는 다르다.
 
  국가의 나아갈 방향이나, 외교정책, 경제정책, 또는 종교적 신념과 같은 國政의 큰 줄기를 놓고 싸우는 것은 좋다. 그러나 지금 한나라당처럼 사소한 문제에 목숨을 걸고 싸움을 계속하면 서로 원수가 되는 代價로 국가와 국민들에게 돌아갈 이득은 없는 것입니다.
 
  효종의 죽음 직후에 있었던 상복 논쟁, 그 14년 후 효종의 왕비 장씨가 죽자 이번에도 논쟁이 시작되었다. 장씨의 시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장씨를 큰 며느리로 대우하여 1년간 상복을 입을 것인가, 9개월간 입을 것인가로 西人과 南人이 대립하게 되었다. 송시열이 영수로 있던 西人은 전처럼 효종의 왕비를 작은 며느리로 대우하여 자의대비가 9개월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南人들은 1년을 주장했다.
 
  이번에는 현종이 14년 전의 논리를 바꾸어 南人 편을 들어주었다. 송시열을 위시한 西人들은 숙청되고 南人 세상이 되었다. 상복논쟁은 예절에 관한 논쟁으로 끝나야 마땅한데 정치적 숙청으로 연결되었다. 이런 때의 주자학은 무슨 철학도 종교도 학설도 아닌 권력투쟁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道學정치, 즉 도덕정치를 내세운 주자학이 현실에서는 도덕이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당쟁을 유발한 것이다. 주자학의 논리나 학설들이 실천논리로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남을 함정에 빠뜨리고 제거하는 무기로 악용되었기 때문이다.
 
  어제의 집권자가 오늘은 역적으로 몰리어 죽고, 어제의 역적이 복권되어 오늘은 권좌에 오르게 되는 일의 일상적인 반복이 바로 조선조 당쟁이었다. 조선조의 黨爭이나 권력투쟁에 불을 당기고 이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앞에서 언급한 이조전랑과 三司, 즉 오늘의 언론과 비슷한 기능을 가졌던 사간원, 오늘의 검찰 감사 기능과 비슷한 사헌부, 오늘의 대학사회와 비슷한 기능을 가졌던 홍문관이었다.
 
  이들은 남의 약점을 확대하고 폭로하고 근사한 규탄의 명분을 만들고 하는 데는 천재적 소양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나중에는 승진하여 우의정도 하고 영의정도 하니 그런 이들의 국가운영이 생산적이고 건설적이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언론이나 감찰기능이 국가에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이것은 보조적인 기능이어야 한다. 국가의 주된 기능은 역시 국방, 외교, 행정, 경제인 것이다. 조선조에서는 이런 기능보다도 언론이나 감찰기능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정치가 남을 비판하고 잡아넣고 모함하고 선동하는 비생산적이고 부정적이며 소극적인 모습으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정치도 조선조의 당쟁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언론과 검찰의 칼자루를 잡고 政敵이나 기득권층을 공격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前 정권시절에 당했던 사람들이 많다. 한 5년 지나면 지금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번에는 칼자루를 잡고 지금 칼자루를 잡은 사람들을 골탕먹이고 있을지 모른다.
 
  정치와 司正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언론이고 검찰이고 지식인들(교수 및 소위 시민단체)이다. 옛날의 서헌부, 사간원, 홍문관 사람들처럼 남의 약점을 캐고 들추고 따지고 가리는 데는 선수들이지만 나라를 건설하고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상대방을 관용하는 자세는 부족한 사람들이다.
 
  조선조 당쟁과 요사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政爭 사이엔 중대한 공통점이 있다. 당쟁이나 정쟁의 중요한 主題는 과거 들추기이다. 과거에 있었던 사건의 해석을 달리하여 과거에 자신들을 탄압했던 사람들을 골탕먹이는 보복의 공식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니 항상 정치의 주제는 미래나 현실이 아니고 과거가 된다. 이런 과거지향적인 정치판에서는 나라를 건설하고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발상이 도대체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다. 김영삼 정권 때 있었던 소위 역사바로세우기나 사정, 개혁, 그리고 두 전직 대통령 구속은 모두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을 재조명한다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고 이루어진 司正도 소위 북풍사건이니, 환란사건이니, 또는 휴전선 총격요청설이니 하여 모두 과거가 주제가 되었다.
 
  조선조 당쟁의 또 다른 공식은 政敵을 모함할 때 동원하는 죄목이 거의가 역모였다는 점이다. 역모라고 해야 왕을 선동하여 자신들의 모함에 이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고 역모죄로 걸어야 상대방을 철저하게 말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사이 정치의 문법으로 말한다면 정치적 경쟁자들을 反정부, 反국가, 反민주, 그리고 부정부패혐의로 거는 것이다.
 
  이런 역모설에 대해서는 애당초 진실을 가리는 조사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권력을 잡은 쪽에서 정치적 목적을 설정해놓고 고문을 하여 자백을 받아내려고 하는데 증거주의나 法治는 아예 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정치사건 수사와 재판도 마찬가지였다. 거의가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수사하고 재판하는데 결론을 미리 정해주는 사람은 대통령과 그 주변의 힘센 사람들이었다.
 
  숙종은 이런 당쟁을 의도적으로 이용하여 王權을 강화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처음 등극했을 때는 南人들이 집권하고 있었다. 숙종6년 왕은 南人의 영수 허적이 조부의 시호, 즉 죽은 뒤에 공덕을 기리는 이름을 맞아들이는 잔치를 벌이는 데 그날 마침 비가 내렸다. 숙종은 허적에게 유악, 즉 비가 새지 않도록 기름을 바른 천막을 빌어주도록 배려한다. 그런데 이 천막이 이미 허적에게 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가 안새는 천막은 군수물자로서 개인이 사사롭게 사용해서는 안되는데 허적은 자신의 권력을 과신한 나머지 이를 남용했다가 숙종의 노여움과 경계심을 촉발하게 된다. 숙종은 이를 계기로 하여 南人들을 대거 숙청하여 귀양보내고 사형에 처한 다음 西人들을 중용했다. 이 사건은 경신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경신換局이라고 한다. 換局이란 왕이 직접 나서서 정계개편을 했다는 뜻이다.
 
  경신환국 9년 뒤 숙종은 장희빈에게서 난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는데 西人계열의 老論측 대신들이 반대한다. 화가 난 왕은 老論의 거두인, 여든살이 넘은 송시열을 유배보낸 뒤 죽이는 등 老論 사람들을 대거 숙청하고 南人들을 등용한다. 1689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기사換局이라 부른다.
 
  다시 그 5년 뒤 이번엔 갑술換局이 일어나는데 중전이 된 장희빈에게 정이 약해진 숙종이 장희빈과 내통하고 있던 남인들을 숙청하고 다시 서인측의 노론과 소론사람들을 등용한 것이다. 그 7년 뒤인 1701년 이번에는 강등된 장희빈을 죽이려고 하는 숙종에 대하여 반대론을 편 서인측 小論이 숙청되고 왕을 편든 같은 서인측인 老論이 정권을 잡았다. 서인들끼리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장희빈의 아들이 숙종이 죽고나서 왕이 되는데 이가 경종이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정권을 잡고 있던 노론측에서는 왕의 건강을 문제삼아 왕의 동생인 연잉군, 즉 뒤에 영조가 되는 사람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하고 세자로 하여금 왕을 대리하여 政事를 보도록 하라고 왕을 압박한다.
 
  이 틈을 타서 그 동안 政界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소론이 음모를 꾸민다. 소론은 왕의 편을 드는 것처럼 하면서 세자에 의한 대리청정을 주장하는 노론의 네 대신이 실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무고하여 노론들을 축출하고 다시 정권을 잡았다.
 
  1722년 남인출신 목호룡이란 사람이 이번엔 노론측 네 대신의 아들, 조카들이 과거에 경종을 시해할려고 공모했다는 고발을 해 왔다. 요사이 말로 하면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되어 노론들을 상대로 한 일대 수사선풍이 불게 된다. 귀양갔던 노론 네 대신은 서울로 불려와서 약사발을 마시고 죽는가 하면 관련자들은 모조리 처단되었다. 법에 의하여 사형된 사람은 20여명이고 수사과정에서 맞아죽은 이가 30여명, 친척이란 이유로 죽은 이가 13명, 유배된 이는 백열네 명이나 되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명, 연좌된 사람은 백일흔세 명.. 신임사화로 불리는 이 정변으로 老論이 숙청된 이후 정치는 小論이 독점하게 된다.
 
  조선조의 당쟁은 이처럼 어제의 역적이 오늘의 권력자가 되고 오늘의 권력자가 내일은 역적이 되며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고 어제의 적이 오늘은 동지가 되는 식으로 아무런 기준도, 원칙도 없는 권력투쟁 그 자체의 끝없는 추구와 모함과 죽임과 복수의 연속이었다. 권력을 놓는다는 것은 유배나 죽음을 의미하는 이런 정치풍토에서는 합리적인 논쟁이나 토론이 불가능하다.
 
  문제는 이런 조선조 당쟁이 오늘날에도 그 모습을 약간 바꾸어 우리나라에서 되풀이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신문과 방송에서 보고 읽는 정쟁기사나 역사물 드라마에서 보는 당쟁과 궁중암투는 등장인물의 복장이 달라졌을 뿐 그 속성은 똑 같다. 모함하기, 과거들추기, 복수, 자체분렬의 연속, 사소한 것에 목숨걸기, 용서없기. 그리고 안보 외교 무시. 외국에서 권력투쟁의 주제는 국방과 외교정책인 경우가 많다. 조선조에선 이게 정쟁의 주제가 되지 않았다. 이것이 조선조 당쟁과 요사이 당파싸움의 가장 큰 공통점이다. 조선조나 요사이 정치인들은 국방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조선조는 사대주의 정책을 썼다. 국방과 외교를 중국에 의존했다. 상비군도 중국을 믿고 아주 작게 유지했다. 조선조의 당파싸움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의 정치인들은 국방과 북핵문제 같은 것들은 미군한테 맡겨놓고 오로지 감투싸움에 열중한다. 이명박씨와 한나라당은 대통령이 되고나서도 국방, 외교, 이념, 친북청산, 전교조, 민노총, 법치문란 같은 데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게 비극이다. 공동체의 생존문제가 걸리지 않는 쟁점을 걸고 싸우니 치사하게 싸우는 것이다. 黨爭의 美學이 없는 것이다.
 
  조선조 시절 당파싸움의 최종적인 결론을 내는 사람은 왕이었다. 왕이 아무리 약하더라도 일단은 그 왕의 명령에 의하여 누가 죽든지 귀양가고 살아남든지 이기든지 했던 것이다. 지금의 정쟁에서 조선조의 왕 역할을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가 궁금하다. 조선조에서는 모든 권력의 원천은 임금이었듯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권력의 원천은 국민이다. 국민이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선택하므로 이론상으로는 국민이 왕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일상적인 국가정책에 대한 최종결정권자는 아니다.
 
  일상적인 업무에서 조선조의 왕과 같은 大權을 쥔 사람은 대통령과 국회이다. 대통령이 소속된 정당이 국회를 지배한다면 대통령이 왕이라고 비교해볼 만하다. 즉, 조선조의 왕이 했던 역할을 지금은 국민, 대통령, 국회가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민주시대의 왕인 우리 국민들이 지난 50년간 발휘해왔던 정권창출과 교체의 기능은 대강 이러했다.
 
  대한민국 국민이란 이름을 가진 대왕은 1948년엔 이승만파에게 정권을 주었다. 이승만파가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켜가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승만파가 너무 오만해지고 무능, 무력해지자 대왕은 1960년에 화를 한번 벌컥 내어 이승만을 추방하여 태평양상의 한 섬으로 유배를 보내고 장면을 영의정으로 하는 민주당파에게 정권을 맡겼다. 민주당이란 이름 그대로 민주주의를 한번 잘 해보란 뜻이었다.
 
  그런데 장면 총리를 배출한 민주당이 老論과 小論처럼 싸우다가 분열하고 정치가 불안정한 틈을 타서 사회가 불안해지고 좌익세력이 등장하고 군대가 공산화의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군대가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잡았다. 국민들은 대체로 쿠데타를 묵인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박정희의 집권을 허용했다.
 
  국민들은 박정희란 팔팔한 머슴을 잘 부려먹었다. 부지런한 이 머슴은 조국근대화란 목표를 걸고 집안을 일으키고 돈을 모아 집안이 부유해지고 식구들이 먹고살게 된 정도가 아니라 공부도 하고 여가도 즐길 수 있을 만한 여유를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너무 오래 머슴일을 하다가보니까 자신이 집안의 주인인 줄 착각하고 오만해졌다. 그리하여 국민들이 화를 내니 이를 알아차린 그의 부하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했다. 우리 국민은 그 뒤 모든 정치인들에게 판을 제공하여 한번 민주주의를 해보라고 기회를 주었다. 이른바 1980년 봄의 이야기이다. 자유가 주어지니까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학생, 노동자, 정치인들이 자제할 줄 모르고 민주화, 임금인상, 그리고 정권교체를 일시에 요구하니 사회가 불안해지고 이 틈을 타서 정치장교들이 뭉쳐서 다시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잡았다.
 
  이때 국민들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이나 사회안정을 약속한 신군부나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고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다. 국민들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면 힘이 센 쪽으로 나라가 기울게 된다. 그리하여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때의 중화학 과잉투자를 조정하고 물가를 잡아 1980년대를 경제적 태평성대로 만들고 서울올림픽을 유치하여 사회 선진화의 한 계기로 삼았다.
 
  그러나 국민들은 빵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 빵문제가 해결되면 정신적 자유를 욕망하게 되는 것이고 그런 욕망은 민주화 요구로 나타났다. 1985년 2.12총선에서 국민들은 어용야당을 외면하고 선명야당을 지지함으로써 민주화를 우리 사회의 大勢로 만들었다. 1987년 신군부 세력도 6.29 선언을 통하여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게 되어 평화적 민주화의 길을 열었다. 그 뒤 우리나라에서는 정권이 혁명이나 쿠데타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선거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전통을 세우게 되었다.
 
  국민이 조선조의 왕과 같은 힘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선거란 기능이 있기 때문에 조선조의 당쟁과 요사이의 정쟁이 다소 다른 것도 사실이지만 많은 부분에서는 닮아 가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선거 때, 즉 정권교체기 때 줄을 잘못 서면 감옥에 가고 잘 서면 출세하는 것은 과거 조선조 때 王位계승 과정에서도 일어났던 일이다. 예컨대 세자인 광해군을 싫어하는 宣祖의 속뜻을 읽고서 광해군의 즉위를 방해했던 小北派는 광해군이 집권하자마자 숙청되었다. 숙종이 죽고 경종이 집권하자 야당인 소론은 여당인 노론이 실은 경종의 왕위계승을 저지하려고 했던 세력이라고 고발하여 노론이 숙청되도록 했다.
 
  이런 당쟁과 정쟁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는 이런 의문에 봉착한다. 우리 정치인들은 왜 정치적 동반자들을 外敵보다도, 오랑캐보다도, 일본보다도 더 미워하였던가.
 
  조선왕조의 당쟁이나 요사이의 정쟁에는 外敵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 이렇게 싸우다가는 오랑캐나 김정일 집단만 좋아하겠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대주의에 정신이 찌든 때문이고 자주국방을 포기한 때문이다. 黨爭시대에는 중국이 국방을 대신해주었고 지금은 미국이 북한을 막아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방을 大國한테 맡겨두고 권력투쟁에만 몰두하여 자리다툼만 벌이는 것 이상의 윤리적 타락은 없을 것이다. 이는 어떤 물질적 부패보다도 더한 정신적 부패이다. 자주국방을 잊어버린 지도자들은 누가 우리의 진정한 敵이며 누가 우리의 선의의 경쟁자인지를 분간할 줄 모른다.
 
  누가 敵이며 누가 동지이고 누가 경쟁자인지를 구분하는 능력은 국방, 외교 같은 것을 주제로 하여, 즉 큰 國益을 기준하여 고민해본 사람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