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나의 이야기

055b 사람의 삶에 인생무상 외 2편 추가

淸山에 2025. 10. 3. 16:02

 

055b 사람의 삶에 인생무상

근래에 들은 이야기이다(2024 1 26).

 

예전 일식의 ‘송죽’ L사장이 Birkenhead지역의 주유소에서 임시 판매원에 있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일찍이 나의 사업체 한국상사 식품점 옆에 일식의 초밥집을 오픈하여 영업이 좋아 Mission Bay지역에 분점까지 열었던 교민이다. 

 

나는 1997 IMF 사태로 모든 사업을 접고 지금의 거주지로 이사 와 그의 이후 소식을 몰랐는데 근래에 이런 만남에서 유학생 영어 학원까지 사업체를 넓히다가 그로 사업부도를 맞고 지금에 이르뤘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의 ‘K신문’운영자 Y은 Lee와의 명예훼손 관계로 법정 최종 패소에 신문사 폐쇄 이후 이렇다할 어떤 사업 번창 없이 무소식이던 그가 2주 전에 잠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는 소식도 들었다.

 

이곳 뉴질랜드의 오클랜드 지역에서의 교민들간의 삶인데도 이런 인생무상이 겹치는 일상사에 지나 온 일들이 떠 올랐다.

 

이곳 교민들 중에 최초의 사고는 1989년 경인가 싶다.

이곳은 섬으로 이뤄진 뉴질랜드라 잠시만 차 운전하면 온통 낚시가 잘 되는 곳이 있다.

당시의 교민들은 무료한 이곳 생활에 낚시에 열중인 교민의 Lee가족이다.

 

지금의 나의 집 근처에 살았으니 하루에 몇 차례 만나고 지냈다. 그런데 저녁 늦도록 Lee는 집에 돌아 오지 않아 평소에 그가 잘 간다던 Muriwai바닷가에 그의 빈차가 세워저 있어 분명 사고로 추측하여 그날 밤새 헬기와 해경의 탐색을 하였지만 결국은 죽은 몸도 찾지 못하고 첫 교민 사고사 장례를 치웠다.

 

그들 가족은 그 몇 해 전에 무작정 뉴질랜드 방문으로 와 많은 어려움을 이겨 그의 처 봉제 기술로 영주권을 얻은 교민이었고, 그 얼마 후 이런 사고를 당했으니 호사다마라고 교민들에는 커다란 경종이 되었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바다 낚시로 목숨 잃은 몇 교민(Yoo)이 있어, 그 사고 후 남은 가족들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도 여러 명의 한국인이 낚시에서 바다에 빠져 죽은 사건이 있었으니 조심할 것은 잊지 말아야겠다.

 

또 Kim 이라는 젊은 교민이 있었다. 배 선박에 근무 중 뉴질랜드에 불법으로 체류하고 이후 몇 해 고생 끝에 영주권을 얻은 교민이었다. 노동비자로 연명 끝에 영주권을 받았지만 그 후 차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었다.

 

나에게는 사업도 접어 오로지 교회 생활이 대부분 이었으나

교회의 교인들이 또 병사로 혹은 나이 늙어 자연사의 경우 등 어떤 이유로 죽는 경우가 자주 지켜 보았다.

이들 중에는 나이의 젊고 늙음을 뛰어 넘는다.

 

젊은 나이에 병으로 고생하고 삶을 마감하면 남은 가족에 어린 아이들도 있었다.

이역만리 이곳 뉴질랜드에 둥지 툴고 새 삶의 활력이 붙었겠지만 어느 때 이런 몸의 고통에 결국은 삶을 떠났으니 이들 죽음에 가까이 지켜 본 나는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선하다.

 

고향 친구 김명선이와 카톡 대화를 많이 하다 보니

명선이의 충남고교 동창 중에 녹용 사업가인 Lee 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갑자기 머리가 띵하더라.

 

그들 형제로 동생 Lee가 있어 Christchurch에 살며 녹용가공업에 열심이었던 것을 알아 그의 형도 Albany지역 공장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이 대전 출신이란 것도 명선이를 통해 들었으니 그들 형제는 나의 나이와 비교하여도 한 살 위와 아래가 되기에 대전 출신이면 연결이 아주 가깝다고 할까?

 

아무튼 녹용 사업가 Lee의 죽음도 이곳 교민 신문을 통해 기억하여 그 기사를 명선이에 보냈더니 그 사진을 보고 맞다고 인관 관계는 이렇게 얼키고설켜 있음을 알았다.

 

두 해 전에 고인이 된 이정남 태권도 회장은 나의 뉴질랜드 이민 생활에 첫 해 부터 가까웠었다.

그런 분이 이제 나이의 세수에따라 2023 5 10일 죽음이니 향년 87(1936 2023) 였다.

 

여기까지 글은 이미 오래 전에 지었고,

며칠 전(2025 4 17) 이정남 회장의 사모님에 카톡 문자 문안을 보냈다.

 

이제 둘째 딸 집에서 함께 잘 지내고 있다며,

근황을 답글로 받았다. 이제 곧 그이 2주기 추모 날이 가깝구나(장례식이 2023 5 10).

 

인생사 왔다 가는 길이라 적지 못해 그렇지 주위에 그런 분들이 많다.

 

특별히 내가 자주 찾던 장례식장

Henderson Morrisons Funerals그리고 North Shore Memorial park 두 곳이 한국인의 단골이었다.

 

이곳Morrisons Funerals은 전형적인 장례식장이고

Shore Memorial park은 묘지와 함께 있어 이곳은 그 묘지명으로도 한국인 혹은 중국인인가 구별이 된다.

 

한국인이면 대강 아는 분들로 포함되었다.

 

이곳의 교민 중에 장래의 가족 무덤을 미리 구입하여 사후에 묻힐 곳을 만들어 놓은 교민들을 여러 명 보았다. 하기야 이곳에 본인이 묻힐 그런 계획인들 어떤 면으로 미리 그리움으로 달래며 남은 삶을 살겠지만.

 

나의 아버지도 그랬으니 이해가 간다.

오십 년도 훨씬 머언 시절 대전 호동 산 언덕에 윗대의 조상 묘가 많아 추석 명절 때 아버지와 형제 그리고 사촌 형님과 함께 찾아 다녔으니 그 때 어느 조상님 산소 잔디에 앉아 아래를 내려 보더니 이곳이 마음에 드신다고 했기에 그 위치에 아버님의 묘를  만들었었다.

 

내가 한국에 살 때 몇 차례 그곳을 찾았으니 기억은 선명한데 뉴질랜드로 이민 떠난 후 2000년 이후 쯤에는

석교동의 어느 곳을 전체 조상들의 납골당으로 만들어 그 납골당에 남씨의 모든 자손이 모였으니, 관리와 편의를 한 곳으로 만들어  고성 남씨 경자 자손 후손들은 대부분이 이곳에 있다하여도 틀리지 않겠다.

 

그 당시의 대부분 조상 묘 땅은 현재 시세로 팔아 납골당 등 그 후손들에 골고루 분배도 하였단다.

 

대전만 하여도 그 토지 가격대가 괜찮아 조상 덕을 톡톡히 그 자손이 받는 셈이지.

 

한참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가 어려울 1950 - 1980년까지에 각 후손들의 삶에도 어렵기는 비숫했는데, 2000년 이후부터의 산업화와 수출 주도의 경제가 활력이 붙어 지금은 세게 10위 경제대국으로 꼽히니 대한민국 전체로 봤을 때도 얼마나 다행이던가? 자랑스럽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의 이승만, 박정희의 정책과 그 경제 수립의 결과에, 그 이후의 어느 대통령이던간에 큰 기여는 했다만 특별히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은 길이 남을 것이다.

 

부정하지 말지어라!

괜한 종북 좌파들이여!

참으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세계에 떨치는데 앞장 서자!

 

각 사람의 삶에 인생무상이지만

적어도 작은 업적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무엇으로 작은 족족을 남길지 깊이 생각해 봐야겠다.

 

056a 그 오래 전의 TV 방송에도 관심이 된 것은

 

러브인아시아 KBS 프로에 오늘은

 

두 살에 헤어진 첫째 아들 방영 그 후에 그를 한국으로 10년 만에 데려 오는 과정을 보았다.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2시간 거리의 작은 도시에서 살고 있던  다비드(13)를 데려 오는 2009 KBS 프로에 최기섭, 마르따 가족이 갑자기 한국에 오면서, 2살의 다비드는 친정에 남기고 유아 다희(10)만 데리고 한국에 왔다. 그리고 주희(4) 딸을 더 낳아 사는데 마르따는 언제나 파라과이에 남겨 둔 아들 다비드가 눈에 걸렸다.

 

새 아버지인 최기섭의 배려로 처의 전 자식 한국의 생활 적응에  스페인어 사용에서 한국어로 또한 모든 학업을 한국어로 하여야 할 다비드에게는 어려운 과정이 많을 줄 안다. 그래도 차차 적응이 있었겠지만 이 프로는 2009 6 23일 방영하고 이제 재 방영으로 나왔으니 세월이 한참 흘렀다.

 

최기섭(49), 마르따(32), 최다희 (11), 최주희(5), 다비드(13), 훌리오(외삼촌)

의 당시 모습에서 지금 2025년은 16년의 경과가 되는데 그 아이들이 이제 성인이 되었을터,

 

내 옛날 삶 속에 파라과이는 1965년 이후 남미의 여러 나라로 이민 가는 소식이 많았었다.

미국은 최선의 선택이지만 그것이 쉽지 않아 남미로 정부는 눈을 돌려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에 한인들이 찾아 어느 정도 삶이 정착되면 이들 중 또 미국으로 들어가는 계획에 중간 거점의 역할지가 되기도 했다.

 

내가 뉴질랜드에 와 살게 된 것도 그때(.고등학교)의 마음 속 꿈이 자리하면서 뉴질랜드의 기회를 곧장 내가 잡았기에 가능하였구나. 내가 이곳으로 떠날 1982년은 막 들어 선 전두환 정권의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무역 군사 외교에서 세계의 선진국과 쉽게 접촉하도록 정책 마인드를 열기로 한 시절이라 기회도 좋았고, 내 나이도 33살의 젊고 활기찬 젊은 층에 어디란들 걱정이 전혀 없었다. 다만 청각이 좋지 않은 오직 장애를 가지고도 그런 마음이었으니 청각의 비정상은 그간의 나이에 이미 초월하여 각오하였으니 무엇이 두려울게 없었으며, 대인관계의 대화에 귀에 잘 들리지 않으면 사실의 내 귀 기능을 설명하여 이해를 얻고 대화하였으니 오히려 그들의 나를 도우려는 것이 더 고마웠었다.

 

아울러 언어의 장벽은 이것을 이중으로 십분 발휘하여 나의 뉴질랜드 삶은 어떤 걸림이 되지 않았었다.

 

오늘의 방송을 보며, 내 마음에 공감이 된 것은 파라과이라는 한국의 재외 이민국으로 떠 올렸던 60여 년 전의 고국 사정이 지금은 오히려 달라진 국가의 위상이다.

 

당시는 대한민국의 경제력이 너무나 열악했으니 가난한 나라였다.

 

세계 지도를 펴 놓고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는 얼마나 멀리 떨어진 나라였을까?

기후 환경이 한국과 달라 그곳이 어떨지는 나중의 일이고 당장 한국을 벗어나면 못 살겠냐는 마음의 다짐으로 개척 정신이 살아 있었으니, 남미 이민단에 떠나는 뉴스는 부럽기만 할 때였다.

 

지금 그 나라의 환경 날씨 대외 경제 규모 등을 살펴 보건데, 어째서 그때는 그렇게 부려워 보였던가? 지금의 규모로 볼 때 감히 가려고 하지 않을 나라였는데 말이다.

 

아마도 당시의 한국에서 삶이란 고달프고 먹고 살기 힘들 때라 그러했겠구나.

 

달라진 위상으로 보니 오히려 세계의 각지에서 대한민국에 들어오려는 몸부림의 선호가 대한민국을 보여준다고 본다.

 

195367달러, 1961 91달러, 1969 239달러, 1975 608달러, 1985 2,458달러, 1995 12, 340달러, 2005 18,658달러, 2015 27, 513달러, 2025 34,642달러가 된다.

 

2020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GDP는 약 1.64조 달러로 세계 10위 경제국이다.

특히 반도체, 자동차, 선박,휴대폰 등의 제조업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대외 무역 경제력으로 본 것 말고도,

K , K 드라마, K음식 등이 화려하게 세계에 알려지고, 이제는 군사력 마저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에서 필요한 각국의 무기에 대한민국의 무기는 또 대단한 관심에 그 위력도 비교불가에 그 인접 폴란드는 육해공 전천후 각종 장비를 한국에서 수입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안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 척도로 알고 있다.

 

대한민국은 5,100만의 인구 수와 100,460km²의 면적으로 세계사의 아주 작은 나라인데

규모가 큰 나라들과 인구 수로도 커다란 나라들은 대한민국에 입이 짝 벌어지고 만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우리의 속담으로 세계인을 놀라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이제는 놀래키지 않으려 하여도 저절로 그들이 알아서 우리를 올려 본다.

 

056b 참으로 별난 세상이지!

2025 04 22일 화요일


지금과 같이 컴퓨터에 나의 일기 그리고 나의 이야기 글 작성하여 보관하는 편리함으로

20 여 년 이상 이어온 글쓰기는 이제 나에게 있어 당연한 일로 자리 잡혔다.

 

처음 컴퓨터를 익힐 때 그 어려움 등에 망설였던 그때가 지금은 제법 능숙하게 내가 하고저 하는 정도는 다 이루고 있어 왜 그때 그런 생각에 머물렀던지 오히려 이해 가지 않는듯하구나.

 

정말로 삶의 변화 등은 옛날과 다르게 엄청 빠르게 변하고 있다.

핸드폰 이란 기기가 나올 때만하여도 당시는 1988년 초 였겠다.

 

내가 이곳 오클랜드로 이사와 해상 선박을 상대로 선식 등의 사업에 들었을 때

나의 삶의 수입이 이곳에 달려 있던 첫창기였다.

 

오랫만에 내가 원하던 한국 선적 혹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배가 입항하여 그들에 필요한 식품 등 물품을 주문받아 그 상품을 제 시간 빠르게 배에 납품하던 때는 핸드폰 등의 기기가 무척 귀할 때 였다.

 

당시의 예로 선식의 주문 식품을 주문 받아 항만 가까이에 있던 채소 경매장에서 필요한 채소, 과일을 구입할 때 어느 구입자는 차 바테리 크기의 전화기를 붙들고 거래처와 전화 연결하고는 실시간 가격 흥정을 하던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모른다. 즉 가격의 실시간 연락을 취하여 구입하려는 물품의 흥정은 다른 구입자들에 경쟁에서 밀리던지 구입의 포기를 하던지 등으로 선진화 된 경매 구입자들에는 그 이동식 전화기가 엄청 최첨단인냥 귀했었다.

 

나도 차차 한국인의 뉴질랜드 관광에 오면 이동식 전화기가 무척 용이하겠기에 큰 마음 먹고 전화기를 구입했다. 초창기라 손 전화기 1대 값도 비쌌지만 그 운영에 1달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나에게 관광 수입이 괜찮았기에 그 비용은 커버 되었지만 어쨌든 무척 요긴하게 사용하였다.

 

손바닥에 잘 잡히는 크기로 그 무게도 제법 있었지만 평소에 허리춤에 껴 놓던지 혹은 손으로 들고 다니며 실시간 전화 통화는 엄청 신기하였었다.

 

그때가 아마도 1994년 경 나의 핸드폰이었다.

  

지금은 집안의 어디에 있을 것이다.

당시는 이런 모양이 유행이었다.

  

핀란드 회사의 노키아가 세계의 주 시장을 장악하여

그 나라의 위상이 제법 높았었다.

 

그리고 삼성의 핸드폰이 세계에 도약하던 무렵이 2003년 경이니 내가 한국에 긴 시간 머물때였다.

나도 당시의 LG 제품으로 제법 성능 좋은 것으로 구입하여 뽑내기도 했었다.

 

이 시기부터 한국 제품이 세계의 주 무대에서 빛을 발휘하였다.

어느 순간 노키아 제품도 훌쩍 뛰어 넘던 최 강자의 자리에 머물더라.

 

IT반도체의 우수한 인재가 많아 명실상부 반도체 제품까지 제법 세계를 놀라게 하였으니 가격과 그 성능을 어느 나라가 따라 오지 못했다.

 

Samsung의 이름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Korea라는 이름은 나중에 알려진 것이고 삼성이란 제품명에 세계인은 선택에 주저하지 않았으니

정작 대한민국의 나라 제품은 나중에 알게 되었으리라.

 

이렇게 새로운 물품이 세상의 삶에 필수불가한 기기로 자리 잡히더니

이제는 당연히 그 기기는 언제나 없으면 답답하던지 혹은 공항장애에 빠질지도 몰랐다.

 

이런 등등에 컴퓨터는 먼저 생긴 제품이었는데 워낙 그 크기도 커 실생활에 꼭 필요한 사람의 전용물 기기로 자리하면서 핸드폰 보다는 그 사용빈도가 조금 떨어졌다.

 

허지만 나에게 컴퓨터는 핸드폰 못지 않게 실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그런 기기가 되었다.

 

매일 컴퓨터를 열어 제법 많은 정보를 찾아 보고, 또는 글로 적어 놓는 등에 아무튼 글 저장은 자연스레

내 컴퓨터에 들어간다.

 

나는 그런 시기에 잘 익혔던 덕분에 지금에도 그 사용에 불편함이 없었지만

같은 나이 또래 혹은 10-20년 젊은 분들에게도 컴퓨터 사용은 어려운가 보더라.

 

그런 자부심으로 지금도 때를 잘 맞아 감사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였다.

 

지금의 세상은 이런 기기와 IT산업의 새로운 기기가 나와 그 사용 방법 등 어려움은 전문가 아닌 이상

쉽지 않아 일상의 가전 제품만하더라도 그 실체 앞에서 망설이는 사람은 많더라.

 

어떤 새로운 기기에도 과감히 도전하는 자

겨우 필요한 작동만으로 만족하는 자

없어서는 어느 집단에 끼지도 못하니 최소한의 작동에 만족하려는 자

이것저것 나에게는 문외한이여 몰라도 사는데 지장 없다는 자

 

이렇게 구별되었다.

참으로 별난 세상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