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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에 올린 글 정리하면서 이제 이후의 줄거리를 어떤 면에 치중할까 생각해 보았다.
그간의 사업을 모두 정리하여 집에 들어오니 만사 편한 마음이었다. 이때가 1999년 8월 18일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모든 짐을 옮기고 이것으로도 감사하였다.
남들은 한국의 IMF 사태 이후 이루던 사업 부도로 쫄딱 망한 분도 있고 서로 얽힌 싸움에 별의별 사고 사건이 다 터졌는데 나는 성격에 누구를 등쳐 먹거나 피해 주는 것을 싫어하여 내 혼자의 손실 손해로 끝났다.
오직 한 분 롯데면세점에서 녹용 구입으로 안정실 사장에 약 $4,000.00 정도 완불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허지만 그는 큰 재정의 넉넉한 여유가 있던 분이고 녹용 업자들 사이에 이런 돈 떼이는 것의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 나의 처지에 한 번 시도한 것이 더 드릴 것이 없다는 말로 끝냈으며 한참 세월 흘러 공항 대기실에서 그 안정실 사장 가족을 본 일이 있었다.
옛날의 일로 간략히 인사만 하여 헤어진 일로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았다.
위 글에 쓰였듯 사업 모두 정리한 이후 나는 교회 생활을 다시 시작할 이야기로 가족 모두 불러 이야기 하였다.
처는 어느 교회에 가느냐 물어 온다. 우리에 인연이 되는 오클랜드한인교회에 간다고 말하자 처는 조금 실망의 빛을 보인다.
*** ***
다른 교회면 괜찮을 텐데 왜 하필 이 교회인가의 이야기다.
그래도 우리가 처음 다녔던 교회이며 그 정이 남다른 교회이지 않을까? 이렇게 설득하여 가족 모두 함께 다시 교회의 예배 참석하는 시작이 되었다.
우리가 처음 다녔을 때 이 교회는 시내의 오래된 교회를 빌려 사용하였는데 교인들 수 늘어남에 새로운 위치의 건물을 매입하여 교회로 꾸며 새 성전(22 Edmonton Rd. Henderson) 봉헌 예배 시간 1999년 7월 11일에 나는 참석하여 옛 교우들을 만났었다.
이것을 인연으로 다시 이 교회의 장옥윤 목사를 만났다.
우리 가족으로 말하면 이 교회의 창립 주 멤버가 되어 이 교회의 창립 역사 기록에도 들어 있는바 또 열심으로 봉사하였다.
이 시절만 하여도 교회 교인들이 큰 예배당을 가득 메운 약 600여 명의 교인수가 되었다. 오클랜드 지역 초대 한인교회이며 이 명칭도 내가 지었고, 또 당시의 청빙 목사 장옥윤 목사도 내 건의로 불러온 것이다.
이 과정의 모든 노회와의 교섭도 내가 주 역할 하여 그 당시의 관계 된 서류를 나중에 집에서 꺼내 보니 이것들이 아주 귀중한 본 교회의 역사가 될 줄이야.
교회의 새 생활은 유익하고 또 감사의 시간이 되었다. 많은 봉헌으로 각종 일에 열심을 다 하였고 맡은 바 소임을 충실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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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래전 장 목사에 소원한 일을 계기로 교회의 발걸음 없었을 때 내 사업처에 찾아와 여러 번 간곡히 불렀던 일도 있었다.
하물며 나에게 우리 교회의 첫 장로로 세울 계획도 제안하였지만 나는 나의 한 번 결심에 발을 끊었다. 이유는 내 사업 열심히 하고 그 때 돌아 오겠단 답만 주었다.
이렇게 내가 받은 실망의 아픔을 장 목사가 이해하였을까? 몇 년 전 내가 사업에 몰두할 적의 일이다.
김형주와 함께 차 2대로 한국 여행객을 멀리 웰링턴까지 안내하고 Palmerston North에서 그 손님들 공항편으로 헤어지고 김형주와 각각 차 운전하고 오클랜드로 돌아오는 길목의 시간이다.
점심 시간에 타우포에서 캔터키 치킨 구입하여 이제 한적한 휴게 장소에 머물어 점심 먹을 계획 말하고 차를 계속 오클랜드 쪽으로 운행 하였다.
조용한 휴게 장소를 물색해야 하는데 처음 곳을 찾으니 여러 사람들이 가득하여 하나 더 가자고 또 차를 운전하여 떠났다.
그런데 이즈음에서 차 사고가 났다.
피곤함에서 졸음 운전으로 차가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건너편 차선 넘어 낭떠러지 급경사에 걸려 눈을 뜨고 정신이 바짝 든 것이다.
뒤 따라 오던 김형주가 어 어 하는 찰라 이 사고에 차를 세우고 나를 살핀다.
*** ***
다행히 다친 것은 없었고 내 운전 차량의 하부 밑바닥이 땅바닥에 부딪쳐 떨어저 나간 부분도 있고 차량의 앞 타이어는 한 개가 터져 버렸다.
휴! 얼마나 이것에도 다행인가? 이곳은 대형 트럭들 나무 싣고 움직이는 지역인데 이런 차에 부딪혔다면 큰 인명 피해가 생길 것에 이 정도로 감사해야 했다.
이 시간 차를 뺄 방법이 없어 김형주가 몰던 차를 이용하여 도움받을 곳을 찾다가 길옆에 세워진 불도저를 발견하고 그 운전자에 요청하니 그는 불도저를 가지고 사고 지역에 왔다.
그리고 내 차를 끈 묶어 도로에 꺼내 주었다. 이에 감사를 표하고 타이어 터진 상태로 차를 몰고 Hamilton까지 어렵게 왔다. 이곳의 정비소에서 차량 타이어 교체하고 안전하게 집에 돌아온 것은 늦은 밤 시간이 된다.
이 일의 사고를 가끔 생각하면서 이렇게 다행히 구해 준 것이 누구였을까?
곰곰이 살펴보아도 답이 어려웠는데 어느 날 주님의 내 생명 구하여 주신 것을 느꼈고 나의 해야 할 일이 아직 있겠다는 뜻이 보였다.
이런 일로 교회에 곧 나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였었다.
그 후 몇 년 지나 피지에 있을 때는 거의 주일 성수로 한국인 교회에 열심으로 봉사하였었다.
이런 일 등에 주님은 나를 기억하시고 나의 더 쓰일 일을 예비하기로 나는 스스로 깨우치게 된 것이다.
아무튼 이 일 몇 주 후에 교통 벌금 딱지가 날아왔는데 그때의 사고 벌금이 된다. 그 불도저 운전기사가 신고한 것이겠지 머..
*** ***
이런 일들이 나의 교만을 잠재우고 마음 비움의 유익을 알려 준 것이 된다. 하여 내 혼자의 생각에 교회 다시 나갈 명분만 기다린 중 이때 강력히 권하여 교회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던 것이다.
나도 서서히 나이 들고 종효 원희도 크게 자라 종효는 대학 시절, 원희는 칼리지 2년 차. 처가의 장모님과 처제 숙희 영희와 광욱의 딸과 함께 이곳에 와 몇 개월 머물 경우도 있어 큰 처제의 가족과 함께 모두 여행도 한 적 있었다.
그 추억 생각이 떠올라 이 글에 옮길 때 더 아주 오랜 1986년 롯데면세점 막 개업 전에 장모님과 처가 큰 이모님이 오셨을 때 내가 이 두 분 모셔 남섬의 관광 다녀온 적이 있었다.
비행기 타고 CH에 내려 Rent 한 승합차로 Christchurch – Tekapo – Queenstown – Manapouri - Manapouri Hydro Station(Fiordland National Park)
Christchurch – Tekapo : 228km ( 2 h 51 min) Tekapo – Queenstown : 256km ( 3 h 3 min )
Queenstown – Manapouri : 172km ( 2 h 5 min ) Manapouri - Manapouri Hydro Station :
Doubtful Sound & Underground Power Station
Manapouri 까지 차로 도착하였다. 그리고 지하 수력발전소를 찾아 Cruises선편으로 몇 시간 호수를 지나갔다. 멋진 구경으로 즐겁게 돌아 온 Manapouri에서 다시 차를 타 Queenstown 숙소에 돌아와 퀸스타운 호수의 해상 선편 관광도 하였다.
다음 날 퀸스타운 공항에서 빌린 차 반납하고 비행기로 오클랜드 돌아 온 긴 여정의 관광 모든 비용도 내가 지불하여 장모님, 이모님께 즐거운 추억을 남긴 것이 지금도 새롭다.
*** ***
이후 장모님과 이모님 서울에서 뵈면 그때의 자랑이 되는지 엄청 사위 자랑이 좋았다.
내가 글을 연속 이어 가다 보니 때로는 시간 년도 별을 뛰어넘어 이전 글에 옮기지 못한 내용이 떠 올라 간간이 추억의 코멘트 삽입하여 적어 놓은 일이 자주 생긴다.
아주 오래 전의 기억에 앞 뒤 순서가 바뀌어도 줄거리 읽는 것에 어려움이 되지 않겠기를 바라며, 나의 자서전이라 부르기 뭐하지만 대단한 위인들 회고록 쓴 것을 보면 나와 별 차이 없지 않겠는가?
오늘은 원희가 며칠 아펐기에 집에서 입맛 잃은 것도 있어 밖의 외식을 하자고 데려 나왔다. 종효는 컴 게임 시간에 가지 않겠다고 집에 머물게 되었지만 한식 먹고 싶은 것 맛있게 먹고 또 Take out 로 종효 식사도 가져왔다.
차 편에 돌아오는 중 아빠가 요즘 시간이 넉넉하여 My Story 작성 중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아주 어려서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10회 이상 작성하였고 또 계속 쓸 예정을 알려 주고 이 글을 서울의 고모와 인경이에게 그리고 엄마에게 보내고 있다는 설명을 하였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더라.
원희가 한글 이해가 힘들어 Daddy’s Story(My Story) 읽기는 어려워 파악하지 못하여 아쉽기는 하지만 어쩌겠느냐?
*** ***
원희는 요즘 한국 영화 등을 인터넷으로 내려 보면서 한글 대사 내용을 많이 이해한단다. 하여 일기 쉬운 말들은 이해하겠단다.
우리 말 발음에 약간 영어같이 둥글게 나와 말이지만. 우습구나.
July 1997 in Fiji
in Devonport circa 1998
1999 at the 63 building in Seoul
Sisters, nephews and their children circa 2002
circa 2000
December 2001 at the beach with Goodi
Around 2000, the family of Dong-Woo and Korean immigrants at home
1997년 7월 피지에서 July 1997 in Fiji
1998년 경 데본포트에서 in Devonport circa 1998
1999년 서울 63빌딩에서 1999 at the 63 building in Seoul
누나 조카들과 그 아이들 2002년 경 Sisters, nephews and their children circa 2002
2000년 경 circa 2000
2001년 12월 바닷가에서 굿이와 December 2001 at the beach with Goody
2000년 경 집에서 동서 가족 그리고 교민 가족
Around 2000, the family of cousin and Korean immigrants at home
Doubtful Sound Wilderness Cruises
ManapouriUnderground Power Station
Doubtful Sound Overnight Cru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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