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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1월 1일 월요일 오전 11시에 김포에서 비행기를 타고 홍콩으로 출발하는 날이다.
이 시간을 맞느라 새벽에 눈 뜨고 따뜻한 물로 세수를 하였다.
아침 식사는 밤새 들뜬 마음에 제대로 먹었는지 모르겠고 모든 짐은 차에 실어 방안의 처에게 떠나면 곧 만나겠지라는 인사와 아직 쿨쿨 자는 아들 종효의 얼굴을 보고, 이제 장인, 장모님의 인사마저 하였으니 처삼촌이 운전하는 차가 흑석동의 한강 바람을 뒤에 남기고 강변도로를 통과하며 김포가도로 달렸다. 11월 초의 그 시간 차가운 기온마저 서린 어둠에 공항 도착의 불빛은 환하게 찬란하고 마중까지 나온 작은 누나와 함께 김경준 사장님 내외를 만났다.
처음 맞는 비행기 탑승이라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니 아저씨(김경준 사장님)의 안내로 탑승 수속 끝내 여권과 탑승권 그리고 출국 수속 전표에 해당 내용 기입하여 준비가 다 되었으니 아직 시간의 여유로 아저씨를 만나러 온 분(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뉴질랜드 공장에 이미 와 있던 박지현의 아버지)과 공항 커피숍에서 대화를 나누고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 하여 공항에 온 누님하고도 마지막의 인사가 이제 정말로 공항 밖의 일이 되고 출입국 입구로 들어설 때는 떠나는 사람들만의 움직임이라 나는 아저씨 내외의 움직이는 대로 면세구역 상점 지나 탑승 대기 모임 소파에 앉아 창밖을 보니 햇살은 밝게 내리는 빛에 반짝이는 비행기의 실체가 보인다.
잠시 후 안내 방송에 따라 비행 탑승의 절차가 있었다.
킁킁거리는 가슴의 심호흡에 한 발자국씩 걸으니 대한항공 안내원의 상냥한 인사와 함께 좌석의 위치를 알려 준다. 생전 처음의 비행기라 미리 알은 정보로 짐의 무게에 신경을 썼고 나머지 둘러맨 가방 짐에도 무거운 짐이 가득했으니 비행기 선반에 그것을 올려놓았다.
지정 좌석에 앉고 벨트를 걸치도록 방송이 나와 이제 비행기 엔진의 소음이 크게 울리니 서서히 이동한다. 신기한 모습을 느끼며 창밖의 모습은 활주로 쪽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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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찬 광음과 함께 쏜살같은 속도의 비행기가 어느덧 삐익 소리와 함께 비행 타이어가 접히고 계속 상승의 하늘은 푸른 색상이 가득했으니 고도 진입에 작은 창밖의 아래는 서해안 바다와 서울의 끝머리가 벗어난 해안가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망망대해만 보일 때쯤 느슨히 벨트 풀도록 방송과 함께 자유로운 움직임이 허용되었다.
신기한 모습의 창밖이 보이며 승무원분은 나의 첫 비행 탑승을 이해한다고 이야기해 준다.
몇 시간 만에 홍콩에 닿는 기내 방송 따라 홍콩 항만과 공항의 모습이 펼쳐져 도착 수속 또한 호기심에 익혀가며 나왔다.
공항에는 몇 개월 전 서울의 명지한의원(사장님 소유) 개업에서 본 옥남(김경준 사장 딸)이가 마중 나왔고 시내의 한 호텔에 여장을 풀어 함께 외출하였다.
어쩌다 영화에 나오는 홍콩의 모습이 있었는데 실제 그곳에 보이는 광경을 실감한다.
아저씨의 사업 친구분 초대로 저녁 식사는 어떤 중국음식점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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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특유의 내외장식과 큰 둥근 테이블 하나에 안내 받아 앉아 한국에서 온 두 분 그리고 중국 거래처 분도 합석으로 나온 음식은 전형적 중국 음식의 순서대로 서빙되었고 5-6가지 음식에 약간 기름지고 향료 내음이 입에 잘 맞지 않았으나 열심히 중국차 마시면서 배를 채웠다.
야경의 불빛도 울굿붉긋 간간히 들려 오는 중국 음악은 귓전을 홀려 놓는다.
하루 일박 후 호텔 체크 아웃 하여 저녁 늦은 시간 출발의 뉴질랜드 비행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낮 시간 잠시의 여유를 가지고 나는 하모니카 Shop에 들렀다. 중간 크기의 하모니카 하나를 구입했다. 앞으로 외로운 고향생각 사무치면 이것으로 달램을 해야지.
저녁 시간 출발 비행기 Cathay Pacific Airways Ltd. 의 탑승 수속을 마쳐 비행기에 들어가니 김경준 사장님과 얼마 동안 동행하실 한국인 두 분, 친구인 옥이 Kim도 만났다. 옥이킴 사장은 얼마 전 한국에서부터 안면이 있어 반가웠다.
긴 비행의 시간에 따라 그분은 뒷좌석의 다섯 개 의자가 공석인 것을 알고 그 모두에 잠을 잘 수 있게 준비까지 하신다.
컴컴한 밤 시간의 출발이 하늘을 나는 비행체안에 나는 점점 멀어져 가는 한국과 또 다가올 새 세상 뉴질랜드가 오버랩되어 잠을 청했다.
저녁 식사도 제공 받았고 이제 느긋한 쉼으로 들어 얼마나 지났는지 하얀 동트는 대양의 망망대해 위에서 안내 방송이 들린다. 잠시 후 중간 기착지 Port Moresby에 닿는단다. 이곳은 파푸아뉴기니의 수도로 일부에는 얼마 전까지 식인 습관의 인간도 있었다고 한다.
공항 밖 철망 너머 원주민들이 위에는 옷도 걸치지 않은 채 우리를 응시하는 눈빛이 특이하였다. 한 시간 정도 대기 시간이 지나 비행기는 다시 오클랜드로 향하여 날아오른다.
총 열 몇 시간의 비행이 끝나 뉴질랜드 해안선이 보이니 가슴의 쿵쾅거림이 요동치고 아 저곳이 나의 새 삶처가 될 푸른 목초지가 펼쳐진 저공 비행에서 활주로에 닿는 귀청의 울림은 큰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도착 비행기 안에 농어성 공항 직원이 들어와 잠시 동안 검역Spray 를 양편으로 흘려 뿌리니 이것이 검역 절차의 시작 11월 3일 수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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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짐 검색대에서도 까다로운 검색이 있었는데 이런 검역이 뉴질랜드의 환경 보호에 철저히 지켜야 하는 그 무엇을 보여 준다. 근처의 국내선 비행기 탑승으로 모든 짐을 Trolly 에 올려 날랐다.
조금 작은 기체의 비행기에 앉아 Dunedin 까지 날아 늦은 오후에 도착하였으며 마중 나온 John Scandrett와 직장 동료 Peter Townsend가 차 2대를 가지고 왔다.
우리 일행이 4명에 친구분 2명이니 더니든 시내의 녹용 공장에 들러 큰 짐은 내려놓고 공장 내부를 확인하였다.
새로 건축한 공장이라 아직 마지막 점검이다. 이곳에서 박지현 젊은 친구를 만났다. 그는 1년 전에 이곳에 온 김 사장님 친구의 자제로 며칠 전 김포 공항에서 이야기 나눴던 그분의 자제가 됨을 알게 되었다.
이제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는 Rent Car 한 대를 빌려 Wagon Type Car에 나는 뒤편 짐칸에 앉았다. 모두 6명이 출발하였다.
Dunedin – Balclutha – Gore – Lumsden(210km) – Mossburn – Garston – Kingston – Queenst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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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310km 의 주행 거리였다(두루 돌아야 하는 코스가 많아 실제 주행 거리는 900km 정도 나왔으니) 드네딘에서 최종 목적지에 가는 길은 여러 편이 있었음에도, 38년이 넘는 지금도 기억이 남는 것은 뒤 짐칸에 앉아 모든 지나는 마을 도시 마을 지명을 메모지에 적었었기에 가능하였다.
중간에 어디 들렸다 움직여 5시간가량 후에 도착한 퀸스타운은 아름다운 호반에 위치하여 정말로 매력 넘치는 도시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시내 중심가의 호텔에 여장을 풀고 호숫가의 산책에 앞뒤 편은 높은 산봉우리에 하얀 눈 덮여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11월 초의 시기적으로 봄이라지만 찬 바람은 속살이 춥도록 여였다. 이런 기후를 나중에는 알았지만 이 때는 아마도 변덕이 심한 봄인가 했었지.
더니든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몇 차례 사슴 농장을 보고 그들이 커다란 녹용을 꽃피우며 뛰어노는 모습에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녹용 건조인데 일맥상통의 관심이 고조되어 그 많은 정보를 머리에 담으려 노력했었다.
다음 날은 근처의 큰 사슴 농장주 초청을 받아 그의 농장에 들어섰다. 철조망 높이 울타리 둘러진 그곳 입구부터 철로 몇 가닥이 놓여 있어 그곳을 통과하여 진입한다.
나중에 알은 것이지만 이런 철로 조각은 농장 안쪽의 가축들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한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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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이 농장의 사슴뿔을 자르는 시간이라 그 과정을 본다. 사슴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양편이 조여진 목재 틀 안에 가둬두고 전기톱으로 녹용이 쉽게 빠르게 잘리니 그곳에서 흐르는 피를 양주에 섞어 마시기로 하였다.
이렇게 방문한 대부분이 한 잔 혹은 두 잔을 마셨는데 따스한 온기마저 있는 사슴 피가 목줄을 타고 내릴 때 한국에서는 큰 보약으로 생각하느라 여기서는 돈도 내지 않고 마시는 기회를 가진 것이다.
농장 주인은 의아한 생각으로 바라본다. 우리 한국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를 그는 이해한다. 그리고 냉장고에 녹용을 보관하는데 가득한 녹용을 보며 김 사장님은 동업 회사 Wilson Neil Ltd. 를 통하여 생녹용 구입을 하고 이 모든 생녹용을 이번에 새로 지은 공장에서 건조하도록 양방 합의를 본 것이다.
농장주는 냉장고에 보관한 산돼지 고기 반 토막을 선물로 줘 차에 실고 더니든으로 돌아와 공장 냉장고에 넣어 보관하였다.
이런 긴 여정의 여행이 끝나 모텔에 머물 곳을 정한 우리 일행은 이제 건조 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한국에서 홀로 이곳에 온 박홍식 사장(김경준 사장님 처의 친정 조카)이 합류하여 새로 지은 공장의 첫 작업이 시작되는 날 아침, 모텔에서 식사를 마치고 지현(사장님 친구분 아들 젊은이)이의 운전으로 공장에 닿고, 물론 밖에 보일러 시동을 걸어 공장의 뜨거운 열을 말들어 놓고, 어제 꺼내 놓은 냉동 생녹용의 건조대를 커다란 찜통에 들여 넣었다.
30초 정도를 높은 기온의 찜 기운에 쪄 곧장 밖에 꺼내 식히고 또 다시 스팀 찜통에서 찌는 방법이 세 차례 진행되면 그동안 녹용 가죽이 터진 것을 찾아 준비한 끈으로 잘 동여매는 작업을 또 열심히 서둘러 이제 건조실로 이동하여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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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8개 이상의 건조대 생녹용을 위 과정을 거쳐 끝났을 때 점심시간이 되는기라. 숙소로 돌아와 점심 식사 마치면 또 공장으로. 건조실에서 커다란 선풍기의 바람 쏘임으로 광음이 짙은 건조실은 습기가 잘 빠지도록 하였으니 하루에 몇 차례 건조 과정의 녹용 상태가 이뤄질 때 잘못으로 썩는 부패가 생기기도 한다.
이런 부패 손실 없도록 하는 것도 건조의 순익계산에 들어 있어 이런 모든 과정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처음 겪는 내 마음속도 희비의 엇갈림 속에 뉴질랜드의 봄 시절은 여름으로 지나가고 1월 말이 되자 이윽고 김 사장님 내외는 한국으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그동안 녹용의 건조도 초도 분량 나오며 선적의 건재 녹용 가지 절단으로 만들어 한국 바이어의 주소지로 항공 배송이 되는기라. 이렇게 계획된 생녹용의 모든 건조가 이뤄지면 수입처의 주문이 곧 25kg 박스 4개가 100kg 되어 수출된다.
드네딘 공항에서 떠나는 아저씨 내외의 모습이 사라질 때 우리는 차를 타고 공장으로 돌아 왔다. 시간도 지난 느긋한 막바지에 박 사장님과 지현이 나 셋이 Queenstown, Wanaka 등의 유람도 다녀왔다.
4월 말 쯤이 되자 박 사장님도 출국하기로 남아 있는 건재 녹용은 탁송될 분량을 준비해 놓고 연락을 받으면 보내기로 약속해 놓고 떠났으니 이제 남은 지현이와 나는 모텔의 숙소를 나와야 했다.
그간은 공장의 비용으로 숙식 숙박이 되었지만, 이제는 우리의 힘으로 살아야 하니 앞이 캄캄했다. 지현이는 나와 몇 살 아래의 젊은이로 시내의 한 곳에 방을 Rent하여 지내기로 하였고 대부분의 비용은 같이 부담해야 했지만, 지현이의 사정이 나보다 넉넉하여 그가 비용 되는 것이 많았다.
나는 한국을 떠날 때 정부 규정 한도의 금액이 US$1,500.00 정도에서 대구 형님이 특별히 미화를 구입하여 찔러 준 돈 합쳐 약 $3,000.00을 소지품 깊숙이 보관하여 이것이 나의 전 재산이 되니 얼마나 아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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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이 아버님은 김 사장님의 친구로 녹용 판매에 큰 거래를 가진 분인데 전 년도에는 그의 부탁으로 이곳에 데려와 함께 했지만 금년에는 동업이 깨져 그도 얼마 후면 떠나야 했느니라.
아무튼 함께 하는 동안에 그의 여유 재정에 멀리 크라이스트쳐치까지 원거리 다녀올 수 있었다. 김 사장님 이름으로 차 한 대가 있어 주유 비용만 빼고는 언제든 이동이 가능했었다.
몇 개월 함께 하는 동안도 그리움으로 나눴는데 이제 지현이도 홀로 CH로 떠나게 되어 이제부터 나 홀로의 싸움이 되었다. 우선 숙소도 렌트에서 나와 공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저렴한 곳이 있어 난민자들이 이용하는 학교에 등록하여 매일 아침 그 학교에 가 학생들과 친교를 맺고 이들은 베트남, 캄보니다, 라오스, 폴란드의 난민자들이고 이 중에 타일랜드 유학생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차량 제공을 함께해 주니 자연스레 그들의 숙소에 초대받아 그들 끼니마다 함께 먹는 기회가 많았다.
이들 5명은 모두 한 집을 통 채로 얻어 방을 나눠 부담 절감하니 식사는 각자의 준비로 지내고 나와 의기투합 잘 맞는 친구가 주로 나의 식사를 만들어져 그 혜택이 컸었다.
차량이 필요하면 내가 제공해 주니 상호 상부상조였다. 이들은 오타고 대학에 등록한 학생들로 석사, 박사 학위 준비과정을 가지고 있었다.
홀로 공장에 숙소를 두고 있기에 규정이 까다로워 회사에는 내색하지 못하게 하여 낮에는 그런 흔적을 남겨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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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농어성 담당 직원이 공장을 찾아 매 방문의 검역 등을 살펴 언제나 공장 내부는 깔끔한 상태를 유지 해야 했다.
퀸스타운에서 얻은 산돼지 반 토막의 고기는 때때로 일부는 칼로 잘라 타일랜드 친구에 주기도 하였고. 그동안의 큰 식사 재료로 맛있게 먹었다.
공장 안의 의자가 잠자리로 될 때 창가의 커튼을 통해 들어 오는 달빛은 고향 그리움에 눈물도 맺히는데 한국의 추석 명절 저녁 나는 한국의 집에 전화를 돌렸다.
공장 전화에서 다이얼 돌리면 국제전화가 곧바로 이뤄지는 것을 알아 시도하였다. 물론 비용은 자동적 회사 관리비용으로 나가지만.
서울의 집 처와 전화로 그리움을 나누니 이곳으로 함께 할 그날이 새삼 기다려진다.
당시의 뉴질랜드 돈 가치가 미화에 별 차이 없어 환전하여도 별 도움이 안 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미화를 여간 아낀게 아니었지만 조금씩 축난다.
타일랜드 친구가 대학 기숙사 생활도 저렴하여 이용해 보라는 조언을 준다. 하여 그 기숙사 담당자를 만나 숙소 배정을 받았다.
단칸의 방에 침대와 샤워 시설 책상이 있었고 주방은 공동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아침 식사 제공만 받는 조건에 들어 학생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다.
이들은 뉴질랜드 각 지역에서 공부하러 온 남녀 학생으로 나이로 치면 나와 한참 차이 나는 젊은이지만 개방적 그들 특유가 있어 나는 쉽게 함께 동화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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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초 경이 되자 각 대학의 시험 기간도 끝나 각 학과별 여름 종강이 시작하여 어느 날을 정해 기숙사 학생들을 위한 큰 잔치 시간이 있어 나에게도 참석할 기회가 있어 함께 잘 즐겼었다.
1983년의 새봄 11월 초순경 서울에서 김경준 사장님 부부와 박 사장님이 오셨다. 이제 새 Season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도 대학교 기숙사 생활에서 모두 함께한 모텔의 시간으로 돌아오고 예전 같이 녹용을 구입하여 가공을 하는 공정에 이제 손발 움직임도 민첩하게 작업 과정이 순조롭다.
사슴은 이른 봄부터 숫 사슴만 뿔이 자라 48-51일째 잘라 내야 좋은 녹용이 된다. 이 시일이 지나면 차차 굳어지며 늦도록 남으면 녹각으로 자연 떨어져 나간다. 이런 생태에 이곳은 10월 말이나 11월 초부터 생 녹용 구입과 가공의 Peak Season이 된다.
이곳 뉴질랜드는 1860년대 이전까지 사슴이나 멧돼지가 없었는데 영국인들이 찾아오면서 유럽의 사슴 혹은 돼지 몇 마리를 야생에 방목하게 된 것이 뉴질랜드 전역에 새끼가 늘어 야생이 되었다.
심지어 이런 사슴과 멧돼지들이 농가에 침입하여 피해가 크다 보니 사냥으로 잡게 허락하였단다. 귀한 수요처가 있으면 이런 곳도 찾아오듯이 김경준 사장은 오랫동안 녹용 한약재 수입으로 홍콩을 다니게 되어 결국 뉴질랜드의 사슴 녹용이 많이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사업가들이 이런 기회를 흘려보내지 않듯이 결국은 1975년경 초창기에 이곳 뉴질랜드를 처음 찾은 분이 김경준 사장이시다.
녹용을 구입하려니 업자가 따로 있던 것이 아니고 소문 소문 들어 사냥에서 잡은 사슴의 각종 녹용을 가져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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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상품이 될 만한 좋은 것을 가격으로 주는 금액으로 생녹용을 샀으며 나머지는 버리고 갔단다. 버려진 것들도 잘 가공하여 홍콩 혹은 한국으로 수출함으로 좋은 이윤을 가지게 되었다. 소문은 사람을 부르게 되었고 김 사장 혼자 일이 힘들어 잘 아는 분을 동행하여 Wanaka에서 녹용 가공 작업을 하였고 동행하였던 이성방 사장은 이곳에 남게 되었는데 이듬 해는 독립하여 Christchurch 에 공장을 차려 사업을 하는 경쟁자가 되니 아무나 함부로 데려오지 못하였단다.
소문으로 한국인 중국인들이 이곳에 생산 처리 시설을 만들어 가고 결국 1982년 드네딘에 공장을 설치하여 나도 이곳에 올 수 있었다.
조건은 어떠한 경우에도 내가 배신하지 않을 것으로 간주하였음이라. 이후에 이연수, 박정환, 안정실, 옥이킴, 등의 한국 사업자가 정착하였다.
이때의 생녹용은 직접 농가에서 구입도 되는데 경매에 보내면 적절한 가격대가 형성되는 것으로 농부들이 볼 때 유통 구조가 이쪽으로 몰리게 되었다.
아무튼 김 사장의 동업 내용은 Wilson Neil 회사에 생 녹용 물건의 구입을 맡겨 이 부분의 가격 농간으로 회사와 다툼이 자주 생겼다.
즉 녹용 1kg에 NZ$80.00에 농장에서 구입한 것을 NZ$90.00로 영수증 조작 작성하여 김 사장에 보이면 분명 이런 가격이 잘 못 일 것으로 추측하기만 하였는데 결국은 이듬 해 증거를 잡을 수 있었다.
어느 농장에서 구입하였는지 영수증이 있어 그 이후 그 농장 주인을 만나 이야기 하는 중에 농장주가 받았던 금액과 상당히 차이 난 것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 과정의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 편에 남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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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녹용 건조 중이라 오전 시간 함께 공장에 찾아 상태 점검하고 상품의 건조가 끝나자 김 사장님 내외도 한국으로 떠났고, 박 사장님과 나의 곧 오게 될 가족 함께 머물 집을 하나 렌트로 얻었다.
나는 가족이 이곳에 오는 절차를 기다리게 되었다. 내 기억으로 가족은 2월 초순경에 서울(김포) – 홍콩 기착하여 홍콩에서 하루 머물고 다음 날 오클랜드 비행기로 오는 마중으로 나는 드네딘에서 새벽 비행기 타고 오클랜드에 와 국제 공항에서 기다렸다.
서울 홍콩 거쳐 오는 가족의 도착 시간이 여유 있어 어떻게 오클랜드 시내까지 나갔는지 그 경로는 기억 없지만 시내 Queen St. 중심가에서 바닷가 항구로 나오고 또 멀리 하버 브리지의 모습도 멀리에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도착 시간에 맞게 공항으로 돌아온 나는 출국장 앞에서 기다림에 눈을 노치지 않는데 이윽고 트롤리 밀고 나오는 처의 모습과 또 옆에 아장아장 걸어 오는 종효가 눈에 띄인다.
긴 여정으로 서울 홍콩에서 하루 머물 때는 옥남이 주선으로 아는 숙소에 머물렀고 또 오클랜드로 오는 비행기 탑승하여 그 시간 나오는 모습은 근 1년 5개월의 지남이 흘렀었다.
공항 출국대에서 나오는 자 중에 처와 종효가 있는데 종효는 벌써 크게 자랐다. 얼마만이던가?
긴 세월 헤어짐에서. 이제 합쳐진 가족의 만남에 뛸 듯이 반가웠고 드네딘으로 내려가는 일 만 남았다. 무거운 짐과 종효에 환승의 비행까지 겹쳐 처는 여행에 피곤하였단다.
할 말이 많았지만 이렇게 눈으로 보는 것으로도 만족한다. 드네딘 공항에 닿아 박 사장이 차를 운전하여 미리 구해 놓은 South Dunedin지역의 연립 주택으로 갔다. 2개의 방 구조에 박 사장이 출국하기까지 함께 거주하였다.
이제부터 한 가족 모두가 새로 시작하는 뉴질랜드의 삶이 시작되었다.
처의 음식 솜씨로 박 사장님의 입맛에는 적응하기 어려웠겠지만 몇 개월의 공장 녹용 건조 후 그도 한국으로 출국하게 되어 이제부터는 우리 가족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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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네딘 곳곳에 차를 몰아 구경하고 이곳의 생활을 익히는 가족에 나는 더없이 기뻤지만, 처에게는 또 그 만의 외로움이 있었으니 그게 Home Sick이었다. 그간 사귀어 온 타일랜드 친구 만나 아국의 그리움을 갖게도 또 영어 학교에 등록하고 영어 공부도 열심으로 하였다. 언어와 관습을 익혀야 하니깐.
새로 이사하여 월세로 얻은 집은 빈터가 넓어 밭으로 가꾸었다. 어떻게 깻잎 씨앗을 구해 심었고 작은 온실이 있어 전 주인이 심은 방울 토마토의 수확에 큰 재미로 입맛을 사로 잡았다. 종효는 근처의 초등학교에 들어가 이곳 생활에 익숙해지고.
가족과 함께하는 이민 생활은 활력이 붙어 행복이 넘치는 나날이었다. 처에게 이곳 생활에 익숙하도록 차 운전하여 곳곳을 들려 보았고 그간 사귀었던 친구들 만나 함께 이야기 나누는 기회도 즐거우니 나에게 뉴질랜드 이민에 뼈 묻을 각오는 새로웠다.
한국에서 까마득히 먼 뉴질랜드에서도 또 가장 아래의 남성에 있는 Dunedin이란 도시에 나의 가족이 첫 가족으로 슈퍼에 가면 고기 파트 곳간에 소고기 뼈를 한 봉지 주문하고 일반 쇼핑 다 하고 돌아 오면 50센트의 가격표 붙인 커다란 비닐봉지의 물건을 준다. 이것으로 국물을 우려먹으면 우리 입맛에 맞는 사골도 되고 육개장도 만들어 먹는다. 뼈에 붙은 고기 살도 얼마나 많은지 50센트 가격으로 볼 때 거저 얻은 것 같았다.
이즈음 드네딘 신학대학에 온 장옥윤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곳에 온 지 몇 개월 되었고 곧 가족도 오게 된단다. 뉴질랜드 장로교단의 장학 초청으로 석사 박사 코스 중이라 한다. 한편으로 이곳까지 한국인 선원 탑승한 화물선이 오는 줄 몰랐었는데 신문을 통하여 어선도 들어오고 또한 화물선도 간혹 들어옴을 알았다.
장옥윤 목사와 함께 배에 찾아가 그들 선원의 큰 대접도 받고 왔다. 선원의 말을 들어 보니 한국인 화물 배가 많이 찾아 온단다. 집에 돌아 올 때는 그들 배에 실렸던 한국의 식품 여러 가지를 얻어 올 수 있어 정말로 큰 횡재가 된 셈이다. 아울러 이들 배가 전 세계를 다니기에 들어가는 항구마다 한국인의 식품 부식 납품으로 큰 사업하시는 교민이 많음도 알려 준다.
내 귀에 솔깃한 정보들. 나중에 이것이 나의 사업 영역이 될 준비가 되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한국 어선이 드네딘 항구에 들어왔다. 뉴스를 통해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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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몰고 그 배를 찾았다.
그 배가 필요한 부식이 필요하여 내가 그 주문을 받았다.
주문받은 물품 준비로 여기 저기 바쁘게 움직여 결국 $5,000.00 정도 금액의 부식 납품이 되었는데 이익금도 $1,500.00 정도 되어 기분은 하늘 날 듯이 좋았고 아울러 선원들이 귀국할 때 선물로 녹용. 꿀 구입의 추가 개인 주문까지 받아 내 손에 떨어진 수익은 모두 $3,500.00 이상이었으니 내가 미치지 않겠는가?
당시 나의 월 생활비는 $500.00 정도로 허리를 조이고 살았었다. 아울러 어선에 있던 생선을 여러 가지 몇 박스 얻어 왔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속담처럼 꿩 먹고 알 먹는 식이 되었구나. ㅎㅎ
이렇게 내가 바라볼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 이런 배가 자주 있으면 좋겠는데 나에게는 아직 기회로 보고 이들을 찾게 될 연구를 하였다.
어느 날 큰 화물선이 입항하여 머물 때 배에 놀러 올라갔다. 선장 기관장 국장을 만나고 이들을 드네딘 시내 구경도 시켜 주고 집에 초대하여 식사도 대접하였다.
음식의 제공은 별로 였겠는데 배 음식과 다르 듯 가정의 음식은 무엇이라도 맛 있게 감사하다 하였고, 또 녹용이 있음을 알고 귀국 대비 구입으로 나의 부수입도 생겼다.
또한 이들로부터 한국 배에서 필요한 부식 내용의 전 세계 가격 청구서도 받았다. 이곳 뉴질랜드 가격 대비에 참고 할 수 있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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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종효는 이곳 초등학교에 다니고 적응한다. 처는 아들 하나에 만족하였다는데 나의 생각은 대가족은 아니라도 자녀 3-4명은 좋게 보았다.
그러나 나의 생각 같이 쉽게 되겠는가? ㅎㅎ. 특별한 계획 없었던 어느 날 처가 임신이 되어 이제 불가피 견디어야 하는데 입덧이 엄청 심하여 어디 먼 거리 차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또 한국의 입맛 나는 음식 생각에 힘들어 하였다.
부식 재료가 없는 뉴질랜드이니 어찌하랴. 어느 날 한국 화물선이 이곳에 와 그 배에 놀러 갔을 때 배에 있던 여러 한국 식품을 얻어 집에 가져오니 엄청 좋아하더라.
참고로 원희가 태어난 1985년 5월 15일이란 소 재목 No 18에 자세한 글을 올려놓았다.
어느 날 이런 일도 있었다. 종효의 학교에서 학교 수익 자선 모임에 사진관 활인 티켓을 구입하였었다. 하여 사진관에 찾아 가니 한 참 후 어느 날에 약속을 잡고 이날에 오라는 말을 듣고 나왔다. 세월이 흘러 원희는 드네딘 병원에서 1985년 5월 15일 태어났다.
해산의 준비로 정기적 의사 진단을 받았으며, 예정일 대비 병원에서 숙지해야 할 사항 설명도 함께 들었었다.
예정일 가까이 통증이 커 급히 병원에 갔다. 그날 당일 의사의 진단에 입원으로 대기하란다.
나와 종효 함께 뜬 눈으로 병원에 머물 때 한 밤의 진통과 함께 딸이 순산되었다.
아 감사합니다(이즈음 교회 나가지 않았음)라고 외쳤다. 그 다음 날 퇴원이라.
이것의 일상사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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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 편히 쉬도록 하고 윈희가 자라감에 공을 들였다.
김 사장님의 배려로 또 한국에 다녀올 긴 시간 휴가도 얻었다.
나에게 5년 넘는 외국 생활이라 그 기쁨 무엇에 비교하랴.
사진 찍을 사진관 약속의 날짜 다가와 이날 사진관에 찾았다. 사진관 주인이 4명의 가족을 보더니 난감해 한다(나는 무슨 일인가 하였지만). 알고 보니 내가 약속 잡을 때 가족 3명(나, 처, 종효)에 맞추어 예약되었고 그 예상 계획에 찍을 몇 가지 사진 촬영이 기획되었는데 갑자기 4명이 왔으니 말이다.
이 사항을 이해하고 한참 생각에 들더니 촬영의 순서를 잡는다. ㅎㅎ .
먼저 4명 모두 함께 사진. 그리고 종효와 원희 함께. 다음은 종효 혼자. 원희 혼자. 이렇게 스케줄을 잡았다.
그리고 찾을 날짜 주는데 이날도 한 참 후에 오는기라. 그런데 나의 한국 방문 후의 일이라 사정을 하여 받을 날짜를 조금 앞당겼다.
그리고 모두 웃게 되었지만 이 사진도 함께 한국에 가져 가 그 경위 설명도 해 주었다. 지금도 함께 찍었던 사진 액자(A4 용지 규격보다 가로세로 6cm 이상 큰 사이즈)가 있어 이것이 지금(2018년 3월)까지 함께한 유일한 우리 가족의 큰 사진액자가 된다. (아울러 이 글쓰기 직전 2018년 2월 말, 나와 원희의 여권 재발급에 필요한 증명사진 찍을 때 사진관에 부탁하여 나 & 원희의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처가 한국에서 오면 종효와 함께 가족사진도 또 찍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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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박 사장님과 처(김의자)와 아들(박종훈) 딸(박소영) 가족이 왔다.
이때 나는 $2,550,00에 헌 차를 가족 전용으로 구입하였다. ㅎㅎ 당시의 내 처지에 큰 자금이 들었다.
이제 드네딘에는 3가족의 한국인이 있어 모두 자주 만나 지냈다.
함께 멀리 놀러 가기도 하며 때로는 집에 초대하여 함께 식사의 시간도 가졌다.
1985년의 새봄 시즌 10월 김 사장님이 오시고 또 바쁜 공장의 작업이 시작되었다.
녹용의 건조 작업을 이곳 공장을 떠나 멀리 Wanaka 공장을 빌려 내 차로 가득 쪄 놓은 녹용을 싣고 가 그곳에서 머물며 건조 작업하기로 떠났다.
Dunedin – Wanaka : 272km (3 h 22 min) 가는 코스가 3가지 있는데 모두 비슷한 거리와 시간이 든다.
이런 날이면 또 새로운 기회가 되어 신나는 출장이 된다. 3시간 이상의 장거리라 중간에 몇 차례 휴식 혹은 간식을 먹고, 이제는 회사로부터 약간의 급여를 받아 내 꿈은 여러 가지 구상이 되어 행복이 가득하였다. Wanaka의 공장은 외딴 지역 홀로 있어 함께 있는 Marry 관리자와 그 아들이 있어 공장을 벗어나면 적막강산같이 허허벌판 혹은 외딴 섬 같았다.
간혹 친구 메리와 술집에 가 맥주 한 잔 마시고 오지만 그 술집에 찾아오는 손님도 무척 조용하고 주말 금요일 밤에야 여기 저기 먼 곳에서 찾는 손님들이 술 잔 기울이며 늦도록 이야기 나누는 일과가 이들 삶의 일부분이 된다. 한 번은 많은 시간 자유로워 차를 몰고 멀리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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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naka – Lake Hawea – The Neck – Makarora – Mount Brewster & Mount Victor & Mount Nerger – Haast Jackson Bay Road Total 152km ( 1 h 55 min )
위 코스로 달리는데 점차 멀리 갈수록 깊은 산속의 높은 고도를 지나며 한여름에도 정상에 하얀 눈이 쌓인 모습을 본다. 와나까에서 서쪽의 해안을 찾은 것이다.
지도를 봐도 뉴질랜드 남섬의 최남단에서 가장 서쪽 끝의 해안이 되겠지. 내가 살면서 이런 곳까지 와 볼 줄 몰랐을 그런 곳이다.
좋은 경치에 운전 기분으로 돌아오는 길 Makarora 마을(Wanaka에서 60km 거리)에서 차에 이상의 징조를 보인다.
차 보닛 위에 하얀 김이 올라온다. 차 계기판을 보니 엔진의 상태 표시가 High에 올라 있다. 이 정도에서도 차의 이상을 깨닫지 못하다니.
차를 멈추었다. 보닛 열어 보니 뜨거운 열기에 펄 펄 끊는 물이 부글 부글 소리 낸다.
나는 차를 구입하고 물론 가격이 가장 싼 차였지만 AA에 가입하여 이런 경우 어떤 대처 방법으로 편의가 있어 전화하였다. 한 참 후에 AA Towing차가 와 Wanaka까지 실어 가게 하였다.
이곳의 큰 정비소에 차를 맡겨 알아보니 엔진 과열이란다. 새 부속을 주문하여 고치게 하고 메리의 차로 공장에 돌아왔다. 며칠 후 수리 끝난 연락이 왔다. 수리 비용도 만만치 않게 지불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평소 차에 대한 문외한으로 차에 물 충분히 넣지 못하였고 또 엔진 오일의 부족을 재때 채우지 않아 결국은 엔진 과열이 되어 그 후유증에 차 고장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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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차 사용 경험으로 겨우 3년 정도 되었고 또 이런 차 상태의 점검 또한 전혀 몰랐던 것에 이런 불상사를 맞은 것이다.
아무튼 이 일 후 녹용도 잘 건조되어 모두 차에 실어 드네딘에 돌아왔다.
김 사장님이 오셨다. 1985년의 새 시즌 11월이다. 내 차에 큰 수리로 어려움을 들은 김 사장님은 차 구입에 사용하라고 $5,000.00 을 주신다.
하여 내가 모은 돈 합쳐 제법 성능 좋고 연수 좋은 Toyota 를 $11,000.00 에 구입하여 사용하였다.
장옥윤 목사의 권유로 우리 가족은 이곳의 장로교회로 안내되었고 주일 예배에 함께하고 가족 모두의 세례도 이 교회에서 받았다.
먼 후에 이 교회의 담임목사님을 오클랜드 한인교회 행사에서 뵙기도 하였는데 아마 십 몇년 후의 일이 된다.
이곳의 학생들에게 음악 악기 가르치는 제도가 있어 종효에 바이올린 배울 기회로 삼아 등록하였다.
이 기회에 원희도 작은 바이올린 함께 빌려 배우게 하였는데, 초보 배우는 순서대로 반짝반짝 작은 별의 멜로디가 나온다. 각각 치는 주법대로 여러 방법의 연주 연습이 지금도 귀에 선하다.
어느 날 연습의 아이들 다툼에 화난 나는 그들 혼내는 것으로 바이올린 잡아 벽에 부딪치기로 바이올린이 팍 부서진다. 때는 늦었으니 이것 변명하고 변상에 애먹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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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참을껄 성격 머리치고는..
이곳의 이민 생활도 몇 해 접어들 무렵, 처는 이곳 생활보다 한국의 부모형제들 생각이 많았나 보다. 창밖의 하늘에 떠 있는 달 바라보며 하염없는 생각에 젖는 망향의 슬픔이 자주 눈에 띄자 나는 걱정이 앞섰다. 우리가 이곳에 오기까지 이런 생활 잘 감당하게 어려움 참고 가는 삶이 우리의 이민 정착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함께 수고하는 노력이 부족하기도 할 이민 생활 극복 앞에 한국의 생각은 사치나 다름없어 보였다.
많이 위로도 하고 생각을 바꾸게 권유도 하였지만, 답은 잘하겠다고 한 이후로도 수시로 그런 모습이 보여 나는 화가 치밀게 되었다.
이날 화 치밀은 싸움이 결국은 처의 얼굴을 손으로 세게 때리는 상태에 이루었다. 아마도 지금것 겪어 보지 못한 나의 태도로 분하고 서글픈 마음의 울음이 집안을 어지럽게 하였다. 이날의 수습은 끝이 보이지 않도록 오랜 시간 지나야 치유의 평온이 왔을까?
이 내용을 들은 누님들도 나에게 너무 잘 못 하였다고 조언한 것으로 내가 보아도 너무 과한 일에 미안한 책임이 들었었다.
몇 해 동안 합작 회사와의 동업에서 생녹용 구입 가격대가 너무 높게 나와 이번 시즌에는 단단히 벼르고 대처하였다.
사슴 농장주들을 만나보면 우리에 납품하였을 때 회사로부터 받은 금액이 낮게 되었고 회사가 우리에 넘겨준 전표에는 높게 책정된 이중 영수증 처리를 발견하여 이런 물증의 사례를 모았다.
예를 들어 생녹용 1kg = $90.00 농장 구입에서 전표를 $100.00 로 쓰면 1kg $10의 추가 부담에 보통 한 시즌 구입량이 9000 kg ~ 12000kg가 되어 금액으로 평균 $90,000.00 ~120,000.00 의 추가 비용 지출에 김 사장이 손해를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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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 이런 계산이면 3년 차에 $270,000.00 ~ $360,000.00 이상의 큰 대금이 손실되어 김 사장님의 수익은 많이 줄어가게 되었다.
이 싸움에 결국은 1986년에 갈라지는 순서가 남았다. 아울러 나의 영주권을 1986년경에 받았다. 하여 싸움을 할 충분한 명분이 다가온 것이다. 증거를 들여 보여도 Wilson Neil 회사 입장에서 선선히 물러서지 않고 증거된 몇 가지 예만 적용받아 결국 갈라지게 되었는데 회사의 Manager John Scandrette는 나에게 회사 공장을 운영하고 남아 달라는 부탁을 제안한다.
그가 볼 때는 합당한 제안으로 내가 승낙 할 줄 알았으리라. 그러나 내가 그 제안을 받으면 김 사장님이 볼 때 얼마나 분하고 괘씸하게 생각하겠는가?
이런 제안 꿈에도 생각한 적 없었으며 나는 나름의 사업 계획이 있는바 오클랜드로 올라갈 계획이다. 그리고 김 사장님께 이런 제안 받았지만 저는 오클랜드에 올라갈 뜻을 알려 주었다.
이제 제 스스로 자립하겠다고 말씀 드린것이다.
그동안에도 충분히 감사하였기에 흔쾌히 말씀드렸다.
그리고 나는 오클랜드에 올라갈 구상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하였다. 먼저 처에게 차 운전을 가르쳤다. 오클랜드 올라가 새 사업 구상대로 움직이려면 부부 각자 운전이 필수인기라. 쉽지 않았지만, 차분히 운전의 연습 과정이 있었다.
잘 배우는 중이었으며, 이제 운전 시험을 볼 직전쯤 비 오는 날, 종효를 학교에 데려 주고 운전 중일 때 앞차를 들여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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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뒤에 원희 유아용에 앉아 있어 다행히 다친 것은 조금도 없었다. 하여 차는 수리에 맡겼고 처의 운전면허 계획은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하하하. 처 운전 가르칠 때 엄청 많이 싸웠다.
그러지 말아야 하지만 차 운행 중 갑자기 돌발 위험 직전이 되면 팩 언성의 소리가 나와 배우는 처에게 심리적 갈등도 많았단다.
수리된 차는 말끔하였고 새 차와 다름없었다.
이제 우리 가족이 오클랜드로 이사할 계획에 이 차보다는 봉고 차 규격이 더 유익하기에 내 차를 팔고 봉고차 구입으로 하는데 이 방법의 유일할 길이 내 차를 Auction Market에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내가 원하는 봉고차를 구입하기로 상의하였다.
이 순서에 의해 내 차는 $12,100.00에 팔렸고 내가 원하는 봉고차는 $12,000.00에 구입하여 모든 일이 잘 되었다.
그리고 오클랜드에 머물 집 구입은 오클랜드 주요 신문 광고를 이용하였다. 2 곳에서 답장이 왔는데 이곳 친구에 물어 보니 타카푸나 지역의 한 집 Rent가 위치로 적합하다는 조언에 이곳의 예약을 해 놓았다.
이제 이사 준비하고 차에 실리지 못한 짐은 화물로 오클랜드에 보냈다.
1987년의 9월 경일까(기억으로)? 정든 드네딘의 거처를 떠나야 하는 날. 장옥윤 목사는 나의 계획 이주에 맞추어 찾아와 주님께 기도를 올려 준다. 감사의 아멘으로 차를 몰았다. 지금도 그때의 기도 모습이 선하다.
이제 다음 내용은 드네딘을 떠나서..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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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 Jong-hyo's Summer of 1981
My Son Jong-hyo with father-in-law
In Gyeongju in October 1982, with my older brother's family
circa 1985
circa 1986
in Queenstown in February 1983.
Around 1987 in Denedin with Thai friends
1982 calendar
1 November 1982 (Monday) Departure for New Zealand via Hong Kong
아들 종효의 1981년 여름
Son Jong-hyo's Summer of 1981
장인 어른과 함께 아들 종효
My Son Jong-hyo with grand father
1982년 10월 경주에서 형님가족 함께
In Gyeongju in October 1982, with my older brother's family
1985년 8월경
circa 1985 Aug
1986년 경circa 1986
1983년 2월 퀸스타운에서 in Queenstown in February 1983
1987년 경 타일랜드 친구들과 드네딘에서
1982 calendar
1982년도 달력
1982년 11월 1일(월요일) 홍콩 경유 뉴질랜드로 출발하다
1 November 1982 (Monday) Departure for New Zealand via Hong K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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