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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천국을 만들겠다'는 左派 지식인이 바로 악마!

淸山에 2017. 7. 24. 11:45






'지상천국을 만들겠다'는 左派 지식인이 바로 악마!

루소와 마르크스를 통해본 左派 지식인의 僞善(위선)

朴承用     
 


      〈Socrates consistently maintains that he knows nothing, and is only wiser than others in knowing that he knows nothing but he does not think knowledge unobtainable.
소크라테스는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보다 현명할 뿐이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Even if it were proved to me that Christ was outside the truth, and it was really so that the truth were outside of Christ, then I would still prefer to stay with Christ rather than with truth.(Dostoevsky)
그리스도의 말씀이 진리를 벗어난 것으로 판명되더라도, 진실로 진리가 그리스도의 말씀 밖에 있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 진리보다는 그리스도 편에 있겠다.
 
What is to be insisted upon is that the poet must develop or procure the consciousness of the past and that he should continue to develop this consciousness throughout his career. (T.S. Eliot)우리가 주장하는 바는 詩人은 傳統(전통)을 발전시키거나 具備(구비)하여야 하고 그의 詩作(시작)을 통해서 전통을 계속 발전시켜야한다는 것이다. 〉
 

지식인이란?

지식인들은 인류의 스승이 되기를 좋아한다. 지식인들은 인류의 미래를 豫見(예견)하는 선지자나 시대를 앞서가는 先覺者(선각자)로 자처하는 경우가 많다. 지식인들은 항상 인류와 노동자와 민중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들이 일반사람과 접촉하는 일은 드물었다. 지식인들의 대부분은 중산층 이상의 계층에서 나오며 일반 사람들을 동등한 친구로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섬겨야하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중산층을 부르주아로 취급하여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지식인들은 그들이 인민을 대표한다는 생각에 무한의 매력을 느낀다. 지식인들은 일반적으로 非폭력적이지만 폭력에 매력을 느끼는 경향도 있다.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는 공산 테러리스트들을 옹호하였다. 그는 20세기 최악의 살인마 스탈린도 예찬했다.
 
지식인들은 그들의 지식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모든 행동과 사상을 지도할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오만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연의 법칙과 대대로 물려받은 지혜와 종교에 등을 돌린다. 가장 영향력이 큰 지식인일수록 종교에 도전적이며 무신론자나 無정부주의자가 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력 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진 神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인간은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며 誤謬(오류)의 가능성이 있으며 전지전능의 완전한 존재는 神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아무리 위대한 인간이라도, '神에 근접하는 神人'(demigod) 일지라도 치명적인 인격적 결함 (비극적 결함, tragic flaw)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특히 계몽시대 이후 성직자 대신 사회적 스승의 자리에 오른 현대의 지시인들은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과거의 집단지혜와 전통과 조상들의 경험수칙을 선별적으로 수용하거나 완전히 거부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대담무쌍하게도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그들이 사회적 병리를 진단할 수 있고 자신들만의 知性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 세속적 지식인들은 사회구조는 물론, 인간의 습관까지도 변형시킬 수 있는 공식을 고안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영웅은 神命을 무시하고 天上의 불을 훔쳐서 인간 세상에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였다.
그들은 이전의 지식계급인 성직자들과는 달리 神의 從僕(종복)이거나 神의 통역자이기를 거부하고 그들 자신이 神이 되거나 神의 兄(형)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들 세속적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사상이나 신념에 오류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자신들을 그 누구의 통제나 간섭도 받을 필요가 없는 절대적 존재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들은 천상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고 머리 숙일 데가 없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사상의 호로 자식’과 같은 존재로 전락했다. 

 



영국의 역사학자이며 저술가인 폴 존슨(Paul Johnson)은 자신의 저서인 《지식인(Intellectuals, 1988)》에서 이들 현대 지식인들의 악마적 특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지식인은 주로 인간의 생존조건에 바탕을 둔 現實(현실, reality)과 遊離(유리)된 이상주의를 유아독존적으로 강변하는 좌파 지식인이다. 이들은 루소(Rousseau), 칼 마르크스(Karl Marx), 입센(Ibsen), 톨스토이(Tolstoy),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브레히트(Brecht), 버트랜드 러셀(Bertrand Russsel), 사르트르(Sartre), 촘스키(Chomsky) 등 현대의 정치 경제 문학 사상 등 다양한 분야에서 至大(지대)한 영향을 끼친 지식인들이다.
이들 중 루소와 마르크스에 대한 폴 존슨의 비판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 두 지식인이야 말로 1억의 인류를 학살하며 20세기 현대에 極惡(극악)의 재앙을 끼진 공산주의의 원조이며 좌파 지식인들의 우상이기 때문이다. 
 

僞善의 天才 루소

루소(Rousseau)는 이런 반역적 현대 지식인의 始祖이고 元型(원형, archetype)적인 인물이며 영향력이 가장 큰 지식인이었다. 그는 현대적 프로메테우스의 모든 특징을 결합한 첫 번째 지식인이었다. 즉 자신은 기존 질서를 완전히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자신이 창안한 원칙에 따라 사회전체를 밑바닥부터 개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이러한 개조는 정치적인 방법으로 성취할 수 있고 인간 행동에 있어서 본능과 直觀(직관)과 충동의 역할이 至大하다고 확신하였다. 루소는 프랑스 대혁명 10년 前에 죽었지만 다수의 同시대인들은 루소가 대혁명과 舊체제(ancien regime)의 전복에 원동력을 제공하였다고 믿었다.
 
루소는 사회가 자연의 원시 상태에서 도시적 세련된 문명사회(sophistication)로 진화함에 따라서 인간은 부패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인간의 자연스러운 이기심은 훨씬 더 사악한 본능으로 변형되었으며 이로 인해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려는 허영심에서 서열의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돈과 권력을 추구하게 되었으며 이런 과정에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이기심은 경쟁적이 되고 탐욕스러워 졌으며 타인을 형제로서가 아니라 경쟁자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칼 마르크스의 사상적 스승이었다.
 
루소의 이런 思想은 현실을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였더라면 實證的(실증적) 근거가 전혀 없는 완전한 허구이며 루소 자신의 비뚤어진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경쟁은 자연의 모든 생명체가 운명적으로 피할 수 없는 생존조건이라는 것은 현대 진화생물학자나 인류학의 이론을 빌릴 필요조차 없는 실재(reality)이다. 경쟁을 惡으로 보는 이런 시각은 루소로 하여금 자연히 사유재산권을 사회악의 원천으로 보게 하였다. 그는 재산과 재산의 획득을 위한 경쟁이 타락한 인간문화를 낳았으며 그는 사회적 공작(social engineering)에 의해서 이런 문화를 개선하고 전적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의 견해는 사회적 공작에 의해 기존사회를 평등사회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지배계급인 부유층과 특권층은 국가로 대체해야 하며 국가는 모든 국민이 복종하기로 계약을 맺은 總意(총의, General Will)의 집행기관이 된다. 총의는 항상 옳기 때문에 국가는 조직적인 문화적 공작을 통해서 국가에 대한 복종이 본능적이고 자발적이 되도록 국민을 교육시키고 세뇌시켜야 한다. 국가는 아버지이고 국민은 아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는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新人間을 창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교육을 독점하여 아이들은 물론 성인들도 국가가 원하는 類型(유형)의 인간을 양육해야 된다. 이것은 조지 오웰의 《1984》의 소름끼치는 전체주의 국가의 원형이 된다. 그리고 《1984》이 현실화된 것이 오늘날의 북한이고 소련이었고 과거의 중공이었다.


루소는 후안무치한 위선자였다. 그의 도덕적 허영심은 狂氣(광기)에 가까웠다. 그는 자신은 비열한 감정은 전혀 나타낼 수 없는 至善(지선)의 사람이라고 공언하였다. 그는 도덕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나는 너무나 우수한 인간이어서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내 자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미워할 수가 없다… 나는 증오의 열정을 결코 가진 적이 없으며, 질투와 사악함과 복수심이 내 마음에 들어온 적이 없다… 가끔씩 화는 내지만 결코 교활하지도 않고 결코 원한을 품은 적도 없다” 등등의 낯 뜨거운 自讚(자찬)의 말을 수시로 하고 다녔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에게 자주 원한을 품고 간교한 술수로 원한을 풀곤 하였다. 그는 무수한 여인들을 농락하고도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않았던 일종의 괴물이었다.
 
루소는 자신이 인류의 친구라고 공언한 최초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인류 전체를 사랑하였지만 사람들 개개인들과는 수시로 싸움을 自招(자초)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동거하는 여인을 하인처럼 혹사하고 학대하였고, 그 여인이 낳은 자식 다섯 명을 모두 고아원에 보내 죽게 하였다. 그는 유아독존적 이기주의자여서 자신에 대한 증오는 진리와 도덕에 대한 증오와 동일시하였다. 그래서 그는 敵에 대한 형벌은 아무리 가혹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敵들을 사악한 괴물이라고 간주하고 이들은 지옥에 영원히 가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틈만 나면 인류애를 나팔 불고 다니는 者가 반대세력에는 무자비했던 것이다.

 



증오의 化身 마르크스
칼 마르크스는 자신을 학자이고 과학자라고 하였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학자도 아니고 과학자도 전혀 아니었다. 그는 진실을 발견하는데 보다는 진실을 선포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에게는 詩人과 저널리스트와 도덕가의 성분이 있었다. 이 세 가지 소질이 그의 엄청나게 강령한 의지(will)와 결합하여 그를 가공할 저술가 겸 예언자로 만들었다. 실로 그는 反과학적이었다. 그는 어린 소년이었을 때부터 詩를 썼고 젊은 시절에는 스스로 神의 입장이 되어서 ‘나는 인류에 엄청난 저주의 소리를 퍼붓겠노라’(I shall howl gigantic curses at mankind)라며 세상에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의 ‘현존하는 모든 것은 마땅히 멸망해야 된다(Everything that exists deserves to perish)’ 같은 詩句를 즐겨 인용하였다. 現存(현존) 체제는 거대한 재앙에 직면해 있다는 이런 종말론적 세계관은 일생동안 마르크스를 떠나지 않고 따라 다녔다. 이런 종말론은 그의 詩에 담겨 있었고 1848년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의 배경이고 《資本論(자본론)》의 클라이맥스이다.
 
간단히 말해 마르크스는 경제학자가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종말론적 작가였다. 그는 ‘최후의 심판일’(Doomsday)이 임박하였으며 ‘역사가 심판관이고 집행관은 프롤레타리아’라고 공언하였다. 이런 詩的인 斷言(단언)은 자본주의의 죽음과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믿고 싶은 급진주의적 독자들에게는 매혹적인 예언으로 들렸다. 문제는 마르크스의 ‘최후의 심판’ 개념은 객관적으로 검증된 자료가 아니고 詩的인 영감의 소산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개념은 예술적 비전이지 과학적 비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이런 詩的 비전을 학문적 전문용어를 이용하여 정교한 이론으로 표현하였다.
 
마르크스는 돈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돈이 세상의 神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서 세계와 인간과 자연이 고유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돈의 힘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고 정치권력도 金權(금권)을 섬기는 채무자의 위치로 전락하였으며 그래서 그의 도덕적 사명은 금권을 가진 有産階級(유산계급, bourgeois)의 타파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헤겔(Hegel)의 변증법을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한 쪽에는 재산과 자본과 금권을 가진 부르주아 계급이 있고 다른 쪽에는 새로운 구원세력인 無産계급(proletariat) 이 있다. 혁명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 계급을 완전히 해체하고 계급 없는 사회를 창출한다.
프롤레타리아는 계급이 아니고 계급을 해체하는 구원과 재생의 세력이기 때문에 역사도 없고 역사법칙에 지배를 받지도 않으며 궁극적으로 역사를 終焉(종언)시킨다. 이것은 유태교의 메시아 개념과 동일하다. 말세에 구세주가 나타나서 모든 악의 세력을 제압하고 1000년 왕국을 건설하여 영원 무궁토록 福樂(복락)을 누리게 할 것이라는 기독교적 종말론과도 판에 찍은 듯이 유사하다. 프롤레타리아는 메시아이고 구세주인 것이다.
 
마르크스의 종말론은 反과학적이며 實在(실재)와는 거리가 먼 허구이다. 그의 詩的인 상상력의 소산에 불과하다. 이것은 그가 현실과의 접촉이 거의 차단된 상아탑 속에서만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교정 불능의 완전한 책상 물림이었다. 세상의 그 누구도 그를 연구실이나 도서관에서 끌어낼 수가 없었다. 그는 일생동안 한 번도 공장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의 평생 동지이자 그를 평생 먹여 살린 엥겔스(Engels)도 그를 노동 현장으로 데리고 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연구나 저술에서 事實(사실, facts)은 중요하지 않았다. 事實은 그가 이미 想定(상정)한 결론을 보완하는 부수적 자료에 불과하였다.
 
그의 저술활동의 완결판인 《자본론》도 경제현상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으로서가 아니라 도덕철학의 표출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적 산업과정과 소유원칙에 대해 이성을 초월하여 거대한 분노와 증오심을 가지고 있던 한 인간의 조리가 없고 모순에 가득찬 說敎(설교)로 간주되어야 한다. 《자본론》은 자본의 순환, 특히 1860년대의 경제이론을 원칙도 없이 너절하게 늘어놓은 지루한 600페이지의 경제평론집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가 인용한 대부분의 통계자료나 事例는 5~10년 심지어 수십 년 전의 낡은 것들이고 論證(논증)에 반대가 되거나 일치하지 않는 사실이나 사례는 완전히 생략해 버렸다. 더구나 자신의 論旨(논지)에 맞추기 위해 대부분의 자료를 거두절미하거나 왜곡시키거나 압축시키기도 하였다. 이것은 의도적 속임수이고 거짓말인 것이다.
 
《자본론》의 핵심이 되는 8章 전부는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僞造(위조)이다. 이런 진리에 대한 범죄는 네 가지 형태를 지니고 있다. 첫째 마르크스는 최신 자료가 그의 주장에 부합되지 않으면 낡은 자료를 사용하고 있다. 둘째 그는 자본주의의 전형으로서 근로조건(conditions)이 특별히 열악한 산업을 선택한다.
이 속임수는 마르크스에게 특별히 중요했다. 왜냐하면 이렇게 속이지 않으면 8章 자체를 쓰는 게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열악한 근로조건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그의 命題(명제)였다. 그래서 자본이 많이 투입될수록 충분한 이윤을 확보하기 위하여 노동자들의 처우는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가 장황하게 인용하는 증거자료는 대부분 소규모이고 非능률적이며 자본투입량이 불충분한― 도자기, 의류, 대장간, 제빵, 성냥, 벽지― 같은 산업화 이전의 전통 산업의 小企業(소기업)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상 마르크스는 산업화시대 이전의 근로조건을 취급하면서 자본이 많이 투자될수록 노동의 고통은 줄어든다는 진리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 부족으로 기계화를 할 수 없는 업체나 업종은 근로조건이 열악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이다. 그는 자본이 축적될수록 생산수단의 기계화로 인해 노동자들의 노동강도는 줄어들고 생산성 향상으로 임금이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어 근로조건이 향상된다는 ‘산업 현장’의 사실을 고의적으로 외면한 것이다.
셋째는 간혹 일어나고 있던 노동자 학대나 한 열악한 노동조건의 사례를 마치 자본주의 제도의 불가피한 현상인 것처럼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런 현상들은 악덕 기업주들의 책임이고 노동조사관들이 이들을 탐지하고 처벌하면서 이런 사례들이 감소하고 있는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넷째, 마르크스는 노동조건의 개선과 노동자 복지를 위해 영국의회가 공장관련법(Factory Acts)을 제정하고 국가기관이 이를 강력히 집행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고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교정이 불가능하며, 국가는 자본계급의 협력자라는 자신의 선입관에 병적으로 집착하였다. 사실상 《자본론》의 자료는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국가기관(검열관, 법정 등)들에서 나온 것이다. 정부는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해 책임이 있는 악덕업주들을 찾아내서 처벌하기 위해서는 이런 자료를 만들어야 하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스스로를 개혁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더라면(그래서 자료를 수집하지 않았더라면) 마르크스의 推論(추론)은 불가능하였을 것이고 그러면 그는 《자본론》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현장 연구를 할 뜻이 없었기 때문에 바르게 고치려고 노력하는 소위 지배계급의 정부가 만든 증거자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료를 왜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론》이 구조적으로 不정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이다.
 

악마는 최초의 좌파지식인

폴 존슨은 《지식인들》의 結末(결말)에서 “지식인을 경계하라”(Beware intellectuals)고 충고하고 있다:
 
〈 인류의 운명을 개선한다는 명분으로 수천만의 무고한 인민을 학살한 20세기 공산주의의 원흉들이 바로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권력에서 멀리 떼어놓아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이 집단적으로 충고하고 행동하려할 때는 특별히 의심해야 한다. 지식인들의 위원회와 회의와 연맹을 경계해야 한다. 이들의 집단이 발표하는 聲明(성명)은 믿지 말라. 이들이 정치지도자나 중요한 事案에 대해 내리는 판정은 믿지 말라. 왜냐하면 지식인들은 고도로 개인주의적이지도 않고 附和雷同(부화뇌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도 아니며 특정 행동패턴을 맹목적으로 따르기 쉬운 집단주의적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집단화 되면 이들은 그들의 가치관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형성한 집단(circles)에 극열하게 동조한다. 그래서 그들이 집단화되면 너무나 위험하게 된다. 집단화는 그들로 하여금 정통적인 관행을 만들고 주도적인 여론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고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비이성적이고 파멸적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지식인들이 습관적으로 잊고 있는 것 즉 이념이나 개념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모든 독재 중에도 사상(ideas)의 냉혹한 독재가 가장 나쁘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처럼 知的으로 겸손하고 도스토예프스키처럼 神 앞에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낮추고 엘리엇처럼 전통을 존중하고 발전시키려는 지식인은 믿어도 좋지만 그렇지 않은 어떠한 지식인, 특히 좌파 지식인은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다. 神과의 평등을 미끼로 이브를 유혹하여 에덴을 파멸시킨 최초의 좌파 지식인이 바로 악마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