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관심 세상史

마르틴 루터는 왜 16세 연하의 수녀와 결혼했나?

淸山에 2017. 8. 31. 13:12






마르틴 루터는 왜 16세 연하의 수녀와 결혼했나?

 [중앙일보] 입력 2017.08.31 09:16 
  

기자백성호 기자


마르틴 루터는 고민했다. 고해성사를 하는 이들이 갈수록 줄었다. 이유를 알아봤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면죄부(면벌부) 때문이었다. 루터가 살던 시골 도시 비텐베르크에서는 면죄부를 살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이웃 도시까지 가서 면죄부를 구입해 왔다. 그들은 더 이상 고해성사를 하지 않았다. 면죄부를 가졌으니 죄에 대한 벌을 이미 면제받았다고 여겼다.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교회의 정문에 '95개 논제'를 붙이며 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교회의 정문에 '95개 논제'를 붙이며 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루터는 당시 가톨릭 사제이자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였다. 그는 도무지 수긍이 가지 않았다. 면죄부 판매 수익은 교황청이 로마의 베드로성당 건축비로 사용했다. 아니면 대주교가 되기 위한 고위 성직자의 뇌물 자금 등으로 쓰였다. 루터는 문제를 제기했다. 처음부터 교회를 엎어버릴 생각이 아니었다. 신학자였던 그는 “신학적으로 토론이나 한번 해보자”며 손을 들었다.   


루터가 대자보를 붙였던 비텐베르크 교회의 정문. 지금은 철문에 '95개 논제'가 새겨져 있다.

루터가 대자보를 붙였던 비텐베르크 교회의 정문. 지금은 철문에 '95개 논제'가 새겨져 있다.


나는 비텐베르크로 갔다. 그곳에 루터가 살았던 성당이 있었다. 루터 당시에는 함께 토론하고 논쟁할 거리가 있으면 교회 정문에 ‘대자보’를 붙이는 전통이 있었다. 그럼 지나가던 사람들이 읽고서 즉석에서 토론의 장이 열리기도 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도 성당의 정문에 라틴어로 ‘대자보’를 붙였다. 이른바 ‘95개 논제’였다. 그날이 ‘종교개혁 500주년’의 기점이 되는 날이다. 
 
나는 ‘95개 논제’를 일일이 읽어보았다. 수도원에서 15년간 생활하며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하느님(하나님)’에 절망하던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수도원 꼭대기 탑방의 화장실에서 ‘사랑의 하느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주창했다. 루터는 그 눈을 갖고서 95가지 물음을 던졌다. 


비텐베르크의 교회의 내부. 앞에 꽃다발이 놓인 곳이 마르틴 루터의 묘이다. 루터는 이곳에 잠들었다.

비텐베르크의 교회의 내부. 앞에 꽃다발이 놓인 곳이 마르틴 루터의 묘이다. 루터는 이곳에 잠들었다.


‘95개 논제’를 읽다가 나는 적잖이 놀랐다. 루터가 겨눈 것은 ‘500년 전의 유럽’이었다. 그런데 마치 ‘오늘날의 한국 교회’를 겨눈 것처럼 루터의 창은 매섭고, 또 날카로웠다. 루터는 ‘95개 논제’에서 이렇게 역설했다. 
 
“부자보다 더 부유한 교황이 왜 자신의 돈으로 거룩한 베드로 교회를 건축하지 않고, 훨씬 더 가난한 신자들의 돈으로 건축하는가?” 
“평화가 없는데도 그리스도의 백성에게 ‘평화, 평화’라고 말하는 모든 예언자들은 사라져라.”
 “십자가가 없는데도 그리스도의 백성에게 ‘십자가, 십자가’라고 말하는 모든 예언자들은 사라져라.”
 
5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오늘날 교회에도 ‘말로 하는 평화, 말로 만든 십자가’가 넘친다. 중세 때만 교회 건축으로 승부를 걸었던 게 아니다. 지금도 일부 목회자는 영성의 갈무리 대신 교회의 건물을 올리며 승부수를 던진다. 신축 과정에서는 예산 집행의 투명성 등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도 이 모두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성전’이라며 집행된다. 


멜란히톤은 루터의 절친한 친구이자 종교개혁 동지였다. 비텐베르크에는 멜란히톤의 묘도 있다.

멜란히톤은 루터의 절친한 친구이자 종교개혁 동지였다. 비텐베르크에는 멜란히톤의 묘도 있다.
 

어쩌면 루터가 겨눈 것은 ‘500년 전의 유럽’이 아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 안에 도사린 욕망일지도 모른다. 반 천년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면죄부’를 갈망한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대신 ‘천국행 티켓’을 구매하고 싶어한다. 이런 욕망을 과연 중세의 교회만 이용했을까. 요즘도 적지 않은 교회가 자기 십자가를 생략한 채 공짜 구원만 강조하며 ‘현대식 면죄부’를 팔고 있는 건 아닐까.     


비텐베르크 교회 내부 루터의 묘 앞에 꽃다발이 놓여 있다.

비텐베르크 교회 내부 루터의 묘 앞에 꽃다발이 놓여 있다.


비텐베르크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설교단 아래 루터의 묘가 있었다. 거기에 루터가 잠들어 있었다. 나는 루터의 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묘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루터가 ‘95개 논제’는 순식간에 퍼졌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혁명 덕분이었다. 수천 부의 사본이 유럽 전역에 퍼졌다. 독일 시골 도시의 보잘 것 없는 사제 교수가 써붙인 종이 한 장이 ‘중세의 뇌관’이 됐다. 대자보를 써붙인 지 3년 후였다. 교황 레오 10세는 1520년 6월 15일자로 루터에게 교서를 발송했다. 일종의 ‘파문 경고장’이었다. 교황은 “멧돼지 한 마리가 주님의 포도밭을 짓밟고 다닌다”며 루터의 저술을 불태우게 했다. 그리고 41개 항의 오류를 지적하며 60일 안에 ‘95개 논제’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루터는 맞받아쳤다. 교황의 교서를 참나무 아래서 태워버렸다. 공개적인 장소였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았다. 그건 가톨릭 사제였던 루터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순간이었다. 나는 비텐베르크 입구의 그 참나무를 찾아 갔다. 독일 사람들은 지금도 ‘루터의 참나무’라고 불렀다.  ‘저 나무는 보았겠지. 교황의 교서를 태우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던 루터의 심정을 말이다.’


루터는 대중이 보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교황의 교서를 불에 태운 뒤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루터는 대중이 보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교황의 교서를 불에 태운 뒤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예수 이전의 구약 시대에도 제사장이 있었다. 이스라엘 12지파 중 레위족만 성막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그들은 양을 키우지도 않고 농사를 짓지 않아도 제물을 받는 특권층이 됐다. 예수 당시에도 유대 제사장 그룹은 그랬다. 중세 유럽에선 가톨릭 성직자들이 그랬다.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서만 말씀을 듣고, 기도를 했다. 종교 안에 존재하는 일종의 ‘계급’이었다.   


루터가 교황의 교서를 불태웠던 참나무. 잎이 나오면 아름드리 나무가 된다.

루터가 교황의 교서를 불태웠던 참나무. 잎이 나오면 아름드리 나무가 된다.


그런 시대에 루터는 혁명적 주장을 했다. 이른바 ‘만인 제사장론’이다. 나와 예수, 나와 하나님 사이에 어떠한 징검다리도 필요 없다고 했다.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도 신을 만날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직접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 너도 제사장이고, 나도 제사장이다. 그렇게 만인이 제사장이라고 했다. 그게 루터의 정신이다. 그럼 오늘날은 어떨까. 성직자와 평신도, 그 사이에 아무런 문턱이 없을까. 행여 오늘날의 목회자가 그 옛날의 제사장이 돼 있는 건 아닐까. 
 
교황은 루터를 파문했다. 그리고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 소환했다. 항복을 받아내고자 했다. 루터는 고민했다. 콘스탄스 공의회에 갔다가 화형을 당한 종교개혁가 얀 후스의 처지가 될지도 몰랐다. 루터는 결국 보름스로 갔다.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루터는 "양심에 반하는 행동은 구원을 위협하는 일"이라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루터는 "양심에 반하는 행동은 구원을 위협하는 일"이라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나는 버스를 타고 보름스로 갔다. 프랑크푸르트와 하에델베르크 사이의 도시였다. 비텐베르크에서 보름스까지는 500㎞였다. 제국의회는 루터에게 ‘철회’를 요구했다. 루터는 당당했다. 황제와 제후와 추기경들 앞에서 “나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을 수 없다. 저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는 한, 어떠한 것도 취소할 수 없고 그럴 의지도 없다. 양심에 반해 행동하는 건 구원을 위협하는 일이다”라고 일갈했다. 


보름스의 공원 광장에 있는 종교개혁 기념비. 마르틴 루터와 얀 후스, 위클리프, 프리드리히 제후, 멜란히톤 등 종교개혁가들의 동상이 모여 있다. 암흑의 중세에 그들은 진리를 향한 밤길을 일러주는 별이었다.

보름스의 공원 광장에 있는 종교개혁 기념비. 마르틴 루터와 얀 후스, 위클리프, 프리드리히 제후,

멜란히톤 등 종교개혁가들의 동상이 모여 있다. 암흑의 중세에 그들은 진리를 향한 밤길을 일러주는 별이었다.

 
보름스 제국의회가 끝나자 루터의 목숨은 경각에 달렸다. 작센의 제후였던 프리드리히가 루터를 숨겨 주었다. 루터는 산악지대인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지냈다. 수염을 기른 채 기사 신분으로 위장했다. 사람을 일절 만나지 않고 골방에서 10개월간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루터가 숨어 지냈던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 성. 지금도 웅장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루터가 숨어 지냈던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 성. 지금도 웅장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나는 아이제나흐로 갔다. 버스로 10분 정도 산길을 올랐다. 울창한 산 속에 바르트부르크 성이 나타났다. 웅장했다. 성 안으로 들어갔다. 루터가 지냈던 골방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가 썼던 책상과 의자, 벽난로도 있었다. 벽에는 루터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여윈 얼굴에 수염을 기른 루터. 그의 눈빛에서 ‘양심을 향안 의지, 진리를 향한 의지’가 읽혔다.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루터가 숨어 지냈던 골방. 이곳에서 루터는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루터가 숨어 지냈던 골방. 이곳에서 루터는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아이제나흐에서 수염을 기른 채 기사로 위장했던 마르틴 루터

아이제나흐에서 수염을 기른 채 기사로 위장했던 마르틴 루터


루터는 이곳에서 편지도 썼다. 편지 말미에는 ‘광야에서’또는 ‘밧모 섬에서’라고 적었다. 광야는 예수가 40일간 금식하며 악마와 싸웠던 곳이다. 에게해의 밧모 섬은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썼던 감옥이다. 그러니 이 성의 골방이 루터에게는 감옥이자, 광야이자, 신의 음성을 듣는 곳이었다. 당시 루터는 육체적 고통과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 와중에 독일어로 성경 번역을 했다. 1534년에 출간된 루터의 신ㆍ구약 독일어 성경은 무려 50만 부 넘게 팔렸다.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

 
성에서 나와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루터는 수녀원에서 탈출한 16세 연하의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했다. 사제 출신과 수녀 출신의 만남, 둘은 종교개혁의 동지였다. 루터에게도 오점은 있었다. 1525년 독일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루터는 무력진압을 강하게 주장했다. 무려 10만 명의 농부들이 학살됐지만 루터는 제후들 편에 섰다. 봉건적 시대 상황과 얽힌 루터의 한계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지를 순례하며 생각했다. 종교는 늘 개혁을 요구한다. 예수 당시에도 그랬고, 루터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왜 그럴까. ‘종교의 이름으로’ ‘진리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관철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그 명분이 되고, 수단이 된다. 버스 창 밖으로 날이 저물었다. 순례의 마지막에 나는 루터의 어록을 묵상했다. 
 
“우리의 권능이 들어올 때 하나님의 권능이 나가고,
   우리의 권능이 나갈 때 하나님의 권능이 들어온다.” 

 
그러니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채울 것인가?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성교회 정문에 붙인


 면죄부 판매에 대한 항의서,

 '95개조 반박문'의 일부다.

 
                                        

자신의 <95개조 반박문>에 반하여 면죄부 판매 설교사

                                                테첼이 작성한 <106개조 반박문>을 들고 대항하는 마르틴 루터

 

1. 우리의 주이시며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신자들이 전 생애에 걸쳐 참회하기를 원하셨다.

  

2. ‘회개’라는 말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전에 의한 참회, 곧 사제의 직권으로 집행되는 것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3. 참회는 내적인 회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육신의 정욕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다. 

 

4. 형벌이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동안 계속되는 것처럼 참된 회개도 우리들이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5. 교황은 그 직권이나 교회법에 부과된 징벌 외에 벌하거나 용서할 권리가 없다.

  

7. 하나님께서는 그의 대행자인 사제의 권력에는 전적으로 복종하면서도 그밖의 다른 모든 일에 대해서는 겸손할 줄 모르는 자의 죄를 결코 사하시지 않는다.

  

8. 참회에 관한 교회 법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부과되는 것이며, 죽은 사람에게는 법의 어떤 것도 부과할 수 없다.

  

10. 임종을 맞이한 자에게 연옥 문제를 내세워서 속죄를 보류하는 사제들의 행위는 잘못된 것이며 무지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11. 종교상의 벌을 연옥의 벌로 변경시킨 '가라지'는 확실히 감독들이 잠자는 동안에 심겨진 것이라고 보인다.

  

21. 그러므로 교황의 면죄부로써 사람이 모든 형벌로부터 해방되며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선전하는 면죄부 판매 설교자들은 모두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

  

22. 사실상 교황은 연옥에 있는 영혼에 대해서 어떤 형벌도 사할 수 없다. 이 형벌은 교회 법에 의하여 현세에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27. 연보궤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학설을 설교하는 것이다.

  

30. 누구든지 자기 참회의 진실성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데 하물며 남의 죄가 완전한 사면을 받았는지 어떻게 밝힐 수 있을 것인가.

  

31. 진실로 회개한 사람이 드문 것같이 면죄부를 진심으로 사는 사람도 드물다. 말하자면 그러한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다.

  

32. 면죄부 증서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믿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다.

  

33. 교황의 면죄부가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가장 귀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특별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36. 어떠한 그리스도인이든 진심으로 자기 죄에 대하여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은 면죄부 없이도 형벌과 죄책에서 완전한 사함을 받는다.

  

45. 가난한 사람을 보고도 본체만체 지나가버리고 면죄부를 사기 위해서 돈을 바치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7. 면죄부를 사고 안 사는 것은 자유로운 일이요 결코 그것을 사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2. 면죄부로 구원받을 것을 신뢰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 비록 판매위탁자가, 아니 교황이 그 증서에 대해서 자기 영혼을 걸고 보증한다 하더라도 그렇다.

  

53. 면죄부 설교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교회에서 잠잠해지도록 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교황의 적이다.

  

54. 만일 설교하는 데 있어서 면죄부에 대한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시간 또는 보다 더 긴 시간을 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부정을 행하는 것이다.

  

71. 교황의 사죄권을 반대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고 추방당할 것이다.

  

72. 그러나 면죄부 설교자들의 해롭고 뻔뻔스러운 말에 대항하는 사람은 축복을 받을 것이다.

  

76. 그와 반대로 우리는 교황의 면죄부가 가장 작은 죄도 없이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79. 교황의 문장을 화려하게 찍은 십자가상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똑같은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80. 이와 같은 가르침이 사람들 가운데서 선포되는 것을 묵인하는 감독과 교구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83. 이미 구원받은 사람을 위한 기도는 옳지 않은데, 왜 죽은 사람의 장례식이나 해마다 제사를 계속하는가? 또 무엇 때문에 교황은 그런 목적으로 교회에 바친 기부금을 돌려주지 않으며, 기부금을 취소하기를 허락하지 않는가?

  

86. 오늘날 제일 큰 부자의 재산보다도 더 많은 재산을 가진 교황이 성 베드로 성당을 세우는 데있어 가난한 신자의 돈 대신 자기의 돈으로 얼마든지 세울 수 있지 않는가?

  

88. 교황이 만일 각 신자에게 지금 하루에 한 번 주는 사면과 은총의 참여를 하루에 백 번 준다고 한다면 얼마나 더 큰 축복을 얻게 되겠는가?(면죄부에는 그것으로 한 번만 사죄된다고 표시되어 있다.)

  

89. 교황이 면죄부로써 돈보다도 영혼의 구원에 관심을 두었다면, 무엇 때문에 그는 오래전부터 주어 오던 면죄부에 대한 교서를 정지시켰는가?

  

92.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평안도 없는데 "평안, 평안" 하고 부르짖는 예언자들은 다 물러가라.

  

93.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십자가, 십자가" 하고 부르짖는 예언자들은 축복을 받을 것이다.

  

94. 그리스도인은 형벌이나 죽음이나 지옥을 통해서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지런히 훈계받아야 한다.

  

95.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위안에 의해서보다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더 의지하도록 해야 한다.



출처 : www.pasteve.com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1. 만유의 주님이시며 영원한 지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회개하라고 선포하신 그 골자는 성도들의 생애가 참회의 요소가 있어야 함을 의미하노라
2. 이 증인은 하나님께 드리는 성례전적 참회(Sakra- mentlishen) 곧 제사의 직권으로 수행하는 속죄의 고백이 있어야 함을 선언하노라
3. 오늘의 선언은 내적인 회개만을 뜻한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는 법이다. 만약 육신의 내적인 회개가 정욕까지도 정복하지 못한다면 그 회개는 무가치한 것이다.
4. 그런 이유로 성도가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는 한 참회의 가치는 무용이며 징계 또한 계속될 것이며 성도의 생명이 끝날때까지 괴로움은 계속될 것이다.
5. 교황은 그 직권으로 교회의 권위를 이용해서 징계나 그 어떤 벌도 용서할 권세를 갖지 못한다.
6. 교황은 하나님께서 저희를 사하였다는 것을 선언 혹은 시인하는 이외에 그 어떤 죄라도 사할 힘이 없다. 그는 그 자신에게 주어진 사건에도 부족을 느껴야 하며 오히려 업신여김(Verachten)을 당하게 될 때 그 죄 자체도 그대로 잔재하여 있는 것이다.
7. 하나님은 그의 대행자인 제사의 권력에는 전적으로 복종하면서도 그 밖의 다른 모든 일에 대해서는 겸손할 줄 모르는 자의 죄를 결코 사하시지 않으신다.
8. 교회 법은 징계를 전제로 할 때 그것은 산자에게만 부과되는 것이며 임종에 처한 사람에게는 어떤 부담이나 교회의 규정에 적용해서는 안된다.
9. 그러므로 교황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께서는 죽음과 곤고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교황은 오히려 자비를 베풀면 되는 것이다.
10. 죽음을 맞이하는 자에게 연옥문제를 내세워서 종교상의 속죄를 응용하는 제사들의 행위는 아주 무지하고 어리석은 행위인 것이다.
11. 성경적인 죄의 적용을 연옥의 죄로 변질시키는 가라지 같은 행위는 감독들의 잘못임을 지적하고 싶다.
12. 전례의 법대로 한다면 종교상의 벌은 회오의 증거로서 사면의 뒤가 아니라 전에 부과되었던 사실임을 알아야 한다.
13. 임종에 처한 자는 죽음으로써 자유롭게 되며 교회 법령의 여러 요구에 대하여 이미 죽은 것이 되고 그 법령의 형벌에서 정당하게 자유 해방된다.
14. 회개치 않은 죄인이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렀을 때 그 사람의 심령상태는 오직 공포를 초래할 것이며 그 불완전이 크면 클수록 공포도 또한 클 것이다.
15. 여기에 불안과 공포는 연옥의 고통을 뜻하며 그것은 곧 절망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6. 천국과 연옥과 지옥의 차이점은 구원의 확실성과 절망에 이르는 상태와 절망의 상태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17. 연옥이란 공포의 장소이며 그곳은 공포의 감소로도 해석할 수 있다.
18. 이상의 지적들이 성경적 근거로서나 이성의 증거로서도 증명할 수 없는 것 같이 보인다.
19. 구원의 예정성에 대하여는 확실한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으나 연옥의 영들에 대하여는 그 어떤 것으로도 증명할 수 없다.
20. 교황이 모든 죄의 문제에 있어서 완전사면을 공포할 때 그는 죄를 사면할 자격을 갖지 못한다. 다만 그 자신에게 지은 문제에 대해서만 용서적 사면을 의미해야 한다.
21. 말씀을 선포하는 자가 교황은 인간의 모든 죄의 문제를 사면해 줌으로써 형벌로부터 용서함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은 잘못된 행위이다.
22. 교황은 지옥에 있는 영혼에 대하여 그 어떤 형벌도 사할 수 없다. 죄 문제로 인한 형벌은 오직 성경적 방법으로서 현세에서 사함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23. 모든 죄의 문제로 사면이 가능하다면 그는 완전한 사람이어야 하며 그 수는 극히 제한된 숫자일 것이다.
24.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벌로부터 해방된다는 무제한하고 어마어마한 약속에 의하여 버젓이 사기당하고 있는 것이다.
25. 교황의 내세관의 잘못으로 인해 감독 교구 목사들까지도 그 영향력으로 잘못 되어가고 있다.
26. 천국의 열쇠를 핑계삼는 일은 아주 잘못 되었으나 영혼들에게 사죄를 가르치는 일은 잘한 점이다.
27. 연보 궤안에 넣은 돈의 소리가 때그랑 날 때마다 지옥에 간 영혼이 해방된다는 말은 인간의 학설에 지나지 않는다.
28. 성도들이 헌금한 돈이 연보궤 안에서 땡그랑 소리를 낼 때 그 행위는 탐욕에 가득찬 행위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성직자의 대속의 기도도 불가능하며 하나님의 선한 뜻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29. 마치 성 세베린과 파스칼리스에 관한 전설의 기록과 같이 연옥에 있는 모든 영혼이 그곳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는지 어떠한지를 누가 알것이가!
30. 누구든지 자기 참회의 진실성에 대해서도 알 수 없는데 하물며 그가 지은 죄에 대해서 완전히 사면을 받았는지를 위의 행위들이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31. 진실로 회개한 사람이 귀한 것 같이 면죄증을 사는 사람도 사실은 거짓의 행위로 그리한 것이다.
32. 면죄증서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친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다.
33. 교황의 사면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의 은총이라고 설득한 사람을 모든 이들은 특별히 징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34. 그 이유는 사면의 은총은 인간에 의하여 정해진 예전적인 사죄행위의 형벌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35. 연옥에 가 있는 자들의 영혼을 신부의 중견적 역할을 통해서 드려진 사면장의 이유로 그들은 참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비성서적 교리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36. 진심으로 회개한 모든 크리스천들은 면죄증서 없이도 형벌과 죄책에서 완전한 사함을 받는다.
37. 중생한 성도는 죽은 자나 산 자나 면죄증 없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회의 모든 영적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다.
38. 하나님의 사면 선언이 교황에게 부여됐다면 교황이 주는 사면은 결코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39. 면죄증에 대한 관대한 생각과 참다운 회개의 필요성을 동시에 사람들에게 권장한다는 것은 유능한 신학자에게 있어서도 매우 어려운 것이리라.
40. 참다운 회개는 징계를 달게 받는다. 그러나 면죄증에 대한 놀라운 사실은 징계를 등한시하고 슬픔을 가지려하는 행위까지도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41. 사도계승과 교황 사면증을 받게 하는 행위를 선한 일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알도록 설교해서는 안된다.
42. 교황의 지도가 면죄증을 미끼로 해서 그것을 자선 사업인양 교훈한 것은 교황의 잘못된 의도임을 크리스천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3. 불쌍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행위는 면죄증을 사는 것보다 더 선한 일이라는 것을 모든 크리스천에게 교훈해야 한다.
44. 면죄증으로 인간은 선하게 되지 못하며 사랑의 선한 행위로만이 형벌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이다.
45. 오직 면죄증을 위하여서는 교황에게 돈을 바치고 가난한 자에게 관심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음을 크리스천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6. 딤전 5장 8절의 교훈 같이 경제생활이 어려운 가족을 위하여서는 필요한 것을 저축할 수 있어도 결코 면죄증 때문에 낭비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모든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7. 면죄증에 대한 판매 행위는 그 어떤 개인에게는 자유로운 행위일지 모르나 그것을 성도들에게 강요해서는 결단코 안된다.
48. 경건의 신앙생활은 교황에게 면죄증을 사는 일보다 그 개인을 위해 훨씬 좋은 행위인 것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9. 교황의 면죄증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옳은 행위이다. 그러나 면죄증 문제로 하나님께 두려움을 갖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임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0. 들으라. 교황은 당신의 면죄증을 위해 설교자들의 행상행위를 묵인한다면 그것은 양의 가죽의 살과 뼈로써 성 베드로 성당이 지어진다는 사실은 차라리 그것을 불태워 재로 만드는 것이 나을거라고 크리스천들에게 교훈함이 좋지 않겠는가?
51. 교황 사제자들의 잘못 때문에 많은 돈을 빼앗긴 자들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을 팔아서까지 갚아주어야 하리라.
52. 교황 자신도 면죄증서로 영혼을 구원받지 못할 것이며 그 행위 자체도 헛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53. 모든 교회에서 면죄증 문제가 묵인된다면 그렇게 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적이 되는 것이리라.
54. 말씀을 증거하는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보다 면죄증 문제를 더 깊게 다루는 행위는 부정을 행하는 것이다.
55. 교황의 의중이 그 어떤 의식이나 행위 따위가 복음보다 앞서지 못한다는 사실을 찬양한다면 그것은 바른 의사임에 틀림없다.
56. 교황의 면죄 사건은 아직까지 교회나 그리스도인에게 표시되어 지지도 않았고 알려지지도 않고 있다.
57. 위의 행위들은 현세적 보화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할진대 오히려 면죄증 판매인들은 이것을 쌓아 두고자만 하고 있다.
58. 위의 잘못된 행위들은 항상 속사람과 겉사람에게 은총과 십자가와 죽음과 지옥에 관한 교훈을 혼돈시키고 있을 것이다.
59. 성 로렌티어스는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보배라고 말했지만 그는 그 시대 그 당시에 사용되었던 어의에 따라 말한 것이다(St. Laurentius는 258년 순교했다).
60.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써 주어진 교회의 열쇠는 장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61. 왜냐하면 형벌의 면죄와 교황관리의 유보사건을 위하여는 교황의 능력에 적용된다고 봄이 좋다.
62. 교회의 참 뜻은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과 복음이 되는 것이다.
63.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되는 이런 일들 때 증오의 사건이 있음을 지적한다.
64. 이와 반대로 면죄증의 사건은 항상 나중된 것을 먼저로 하기 때문에 모순이다.
65. 돈 많은 사람들 때문에 옛날부터 전해오는 복음의 가치는 사람들이 낚던 그물에 비유된다.
66. 그러므로 면죄증 사건 역시 오늘날에 와서도 재물 많은 사람들을 낚는 그물에 비유된다.
67. 사실인 것처럼 가장 시키는 면죄증 설교자들은 이것이 가장 큰 은총이라고 소리 높여 부르짖는 것이다.
68. 하나님의 십자가의 은총은 면죄증이 아무것도 아님을 교훈시키고 있다.
69. 감독들 교구 목사들은 사도 계승의 면죄의 대리자가 아님을 적의를 갖고 받아들일 의무가 없다.
70. 성직자들의 의무는 교황이나 자기들의 꿈을 설교해서는 안된다.
71. 사도 계승의 면죄의 진리에 반대하여 말하는 자는 추방과 저주를 분별해야 한다.
72. 다른 한편 면죄증 설교자들의 잘못되고 뻔뻔스런 말에 대항하는 자는 복을 받을지어다.
73. 교황은 어떤 방법이든지 면죄증 판매를 방해하는 사람에 대하여는 분노로써 책망할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다.
74. 그것을 구실삼아 거룩한 사랑과 진리를 방해하려고 기도하는 사람에 대하여는 교황은 심한 의분을 나타내어야 하리라.
75. 하나님을 능욕한 죄까지도 면죄증으로 사할 수 있다는 교황의 발언은 정신나간 발언들이다.
76. 우리들의 주장은 교황의 면죄증은 아무리 작은 죄라도 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77. 베드로가 교황이라고 할지라도 면죄증과 같은 그 이상의 은총은 줄 수 없다.
78. 현 교황이나 또는 다른 어떤 교황도 사실 면죄보다 더 큰 은총(고전 12장) 즉 가르치는 은사와 능력 혹은 병 고치는 은사는 가지고 있다고 본다.
79. 교황의 팔로써 사용되는 십자가상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똑같은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십자가를 모독한 행위다.
80. 위의 가르침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묵인된다면 이것은 감독과 교구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책임을 져야한다.
81. 잘못된 면죄증 설교나 비방은 교황의 존경에 대한 것으로 응용되지만 그 반대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쉬운 일은 아니다.
82. 베드로 성당을 지식 위하여 보잘 것 없는 돈의 가치를 높이는 교황의 행위가 위대하면 왜 연옥을 비우지 못하는가?
83. 구속 받은 사람을 위한 기도는 부당한 일인데 무엇 때문에 죽은 사람의 장례식이나 연기제를 계속 하는가? 또 무엇 때문에 교황은 그런 목적으로 교회에 바친 기부금 취소를 명령하지 않는가?
84. 경건치 못하면서도 하나님께 잘못을 범하고 있는 자를 돈으로 인하여 경건에 이르도록 하는 행위를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경건한 영혼에 대해서는 그 자신이 구속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교황 자신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85. 회개의 가르침은 교회에서 오래 전에 사라졌고 이제는 면죄증 덕분으로 구속된다는 사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86. 제일 돈 많은 자들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진 교황이 가난한 자들이 내는 돈으로 하지 않고 자기의 돈으로 성 베드로 교회당 쯤은 세울 수 있지 않는가?
87. 속죄함 받은 자들에게 무엇을 구하려고 또한 무슨 영적 은혜의 참여를 추구할려고 하는가?
88. 교황이 신자들에게 사면과 은총의 참여를 지금 하루에 한번씩 행하는 것을 하루에 백번 실행 한다고 한다면 교회는 더 큰 복을 받겠는가?
89. 면죄증의 효과가 돈보다도 먼저 영혼의 구원을 생각하였다고 한다면 왜 중지했는가? 그와 같은 능력을 가졌음에도 말이다.
90. 교황은 수많은 세인들의 예리한 반기에 대해서 떳떳하게 이유를 들어 해결하지 않고 오히려 이런 일들 때문에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신자들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는가?
91. 면죄증이 교황의 바른 정신에 따라 의도 되었다면 오늘의 이러한 어려움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92. 택함받는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불안도 없는 상태에서 평안만을 부르짖는 예언자들의 외침은 모순이요 잘못이니 떠날지어다.
93.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십자가를 강조하는 자에게 복이 있을지어다(겔 13:10, 렘 6:14,8:11, 살전 5:3).
 94. 모든 신자들은 형벌이나 죽음이나 또 지옥 같은 고통을 통해서라도 오직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따르도록 해야 한다.
95. 이와 같이 하여 크리스천으로 하여금 보다 많은 값진 고난을 통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는데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게 할지어다. 



 




마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 Martin Luther's Ninety-five Theses)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인간의 죄가 완전무결하게 사하여 질 수 있고 인간이 화해할 수 있다는 루터의 복음주의적 강조는 루터로 하여금 면죄부를 판매하는 교회를 비판하게 하였다. 뉘우치는 죄인을 속죄하고 심지어는 연옥에 간 죽은 영혼의 고통까지도 덜어주는 면죄부는 고해성사의 역사와 연관된 중세적인 것이다.

 

루터는 도미니카의 면죄부 상인 죤 테첼(John Tetzel)이 엘렉토랄 색소니 부근에 왔을 때, 자신의 교구 교인들에게 돈을 노리고 면죄부를 마구 파는 폐해를 목격했다.

 

테첼은 로마의 성 베드로 사원 신축의 경비 조달과 후거(Fugger) 은행가에게 알브레히트(Albrecht)가 진 빚을 갚기 위한 쥬빌리(Jubilee) 면죄부를 팔기 위해서 마인츠 교구 호헨졸른(Hohenzollern)의 알브레히트에 의해 파견되었다.

 

루터는 면죄부에 대한 학술적 논쟁을 위해「95개조」를 준비하여, 전통대로 이를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에 있는 성문 교회 the Castle Church문에 붙였다. 이는 몇 주 내에 교회 전역으로 전해졌고, 결코 누그러질 줄 모르는 논쟁을 일으켰다.

 

 

 


 

진리에 대한 사랑과 열정, 그리고 진리를 밝히려는 소망에서 다음의 명제들은 성서신학 박사이며, 비텐베르크에서 이를 가르치던 교부 마틴 루터의 주도하에 비텐베르크에서 공개적으로 논의될 것이다.

 

‘나’ 루터는 구두로, 논쟁에 참여할 수 없는 이들은 서신으로 논쟁으로 임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4:17)고 하셨을 때, 이는 신자의 삶 전체가 회 개하는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2. 이 말씀이 고해성사, 즉 사제에 의해 집도되는 고백과 속죄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3. 하지만 이것이 단지 내적 회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내적 회개(inner repeutance)는 육신의 다양한 외적 수행을 수반하지 않는 한, 무 가치한 것이다.

 

4. 죄에 대한 벌은 자기 자신을 미워 하여도, 즉 참된 내적 회개를 하여도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된다.

 

5. 교황은 자기의 권위나 교회법의 권위에 부여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벌도 가감할 수 없다.

 

6. 교황은 하나님이 용서하셨음을 선언하신 것과 자신의 판결에 위임된 죄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죄도 용서할 수 없다. 교황의 권한을 넘는 죄는 교황의 용서로 사하여지지 않는다.

 

7. 하나님은 인간이 겸손해져서 그의 대목(代牧)인 사제들에게 복종치 않는 한, 누구의 죄 도 사하지 아니하신다.

 

8. 속죄의 법은 단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부과되는 것이다. 그 법에 따라, 죽은 자의 죄가 사하여질 수는 없다.

 

9. 그러므로 교황이 그의 교령(敎領)에서 언제나 죽음과 필요의 항목을 제외 한다면, 교황 을 통해 역사하는 성령은 우리에게 자애롭다.

 

10. 죽어서 가는 연옥을 교회법의 벌로 삼는 사제들은 무식하고 악한 이들이다.

 

11. 교회법의 벌을 연옥의 벌로 바꾸는 가라지가 감독들이 자는 동안에 분명히 뿌려졌다.( 마13:25)

 

12. 이전에 교회법의 벌은 진정한 회개의 시금석으로서 사면 후가 아니라 그전에 가해졌다

 


 

13. 죽은 사람은 죽음으로써 모든 형벌로부터 벗어나고, 교회법에 관한 한 이미 죽었으며 그로부터 해방될 권리를 갖고 있다.

 

14. 죽어가는 사람에 있어서 불완전한 경건이나 사랑은 반드시 커다란 불안을 수반한다. 사랑이 적으면 적을수록 두려움은 더욱 크다.

 

15. 이 두려움과 공포 그 자체가 바로 절망의 공포이므로 연옥의 형벌로써 충분한 것이다.

 

16. 지옥, 연옥 그리고 천국의 차이는 절망, 두려움 그리고 구원의 확신 간의 차이가 같다.

 

17.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는 두려움이 감소하여야 하며, 사랑은 증가하여야 할 것 같다.

 

18. 또 연옥에 있는 영혼이 공과(功過)의 영역 밖에 있는지, 즉 사랑을 더 입을 수 없는지의 여부는 이성으로도, 성서를 통해서만도 입증되지 않는 것 같다.

 

19. 또 연옥에 있는 영혼들 중 모두는 아니라 해도 얼마는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을지의 여부도 입증되지 않을 것 같다.

 

20. 그러므로 교황이 “모든 형벌의 무조건적인 사면”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이는 실제로 모든 형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할 수 있는 형벌에 국한되는 것이다.

 

21. 그러므로 인간이 교황의 면죄부를 통해 모든 형벌을 면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 하는 면죄부 설교자들은 잘못을 범하고 있다.

 

22. 사실상 교황이 교회법에 따라 이 세상에서 치러야 할 벌을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사 하여 줄 수는 없는 것이다.

 

23. 모든 벌의 사함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오로지 가장 완전한, 즉 극소수의 사람에 게만 허락될 뿐일 것이다.

 

24.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벌로부터 구원이라는 어마어마하고도 무분별한 약속에 의해 기만당하고 있는 것이다.

 

25. 교황이 연옥에 대하여 갖는 일반적 영향력은 주교나 사제가 자신의 교구에 대해 갖는 특별한 영향력에 상응하는 것이다.

 

26. 교황은 실제 자신이 갖지 못한 결정적인 열쇠에 의해서가 아니라 중보를 통해서만 연옥 에 있는 영혼의 죄를 사할 수 있을 뿐이다.

 

27. 돈이 연보궤에 짤랑하고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으로부터 풀려난다고 말하는 이들은 단지 인간적인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28. 돈이 연보궤에 짤랑하고 떨어지면, 욕심과 탐욕도 분명히 증가한다. 그리고 교회의 중보 결과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29. 성 세베리누스(St.Severinus)와 성 파샬(St.Paschal)에 관한 전설에서처럼, 연옥에 있는 모든 영혼이 구원받기를 원하는지의 여부를 누가 알겠는가?

 

30. 누구도 자신의 회개의 완전성 여부를 확신할 수 없다. 더군다나 속죄의 완전성 여부는 더욱 더 확신할 수 없다.

 

31. 실제로 면죄부를 사는 사람은 실제로 회개를 하는 사람 만큼이나 드물다.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32. 면죄부를 사므로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믿는 이들은 그들의 교사들과 더불어 영원 한 저주를 받을 것이다.

 

33. 교황의 사면을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케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무한한 선물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특별히 경계하여야 한다.

 

34. 왜냐하면, 그 사면의 은혜는 오로지 인간이 설정한 성례의식에 대한 벌에만 한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35. 연옥으로부터 영혼을 속량하거나 고해신부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허가증을 사려는 이들에게는 회개가 필요하지 않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비기독교적 교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36. 진정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은 면죄부 없이도 죄와 벌로부터 완전한 사함을 받을 수 있다.

 

37.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살았든 죽었든 모든 그리스도의 축복과 교회에 참여하게 된다. 이는 면죄부 없이도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하신 것이다.

 

38.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축복과 용서는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제6 조〕에서 언명했듯이, 이는 하나님의 용서의 선포이기 때문이다.

 

39. 아무리 박식한 신학자라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면죄부와 동시에 진정한 회개의 필요성을 설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40. 진정으로 회개한 그리스도인은 자기 죄값을 달게 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면죄부는 벌을 가볍게 하려는 것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벌받기 싫어하게 하는 것이다. - 적어도 이는 벌 받기를 싫어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41. 교황의 면죄는 그것이 다른 사람의 행위들보다 더 낫다고 오해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설 명되어야 한다.

 

42. 교황은 면죄부를 사는 일이 자선사업과 같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그리스도 인들은 알아야 한다.

 

43.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꾸어 주는 것이 면죄 부를 사는 것보다 선한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44. 사랑은 행함으로써 더욱 커지고, 인간은 이를 통해서 더욱 선해지나, 면죄부를 통해서는 인간이 선해질 수 없고 단지 벌을 면할 뿐이기 때문이다.

 

45. 궁핍한 사람을 보고도 이를 지나치며 면죄부를 사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임을 그리스도인들은 알아야 한다.

 

46. 그리스도인들은 생계의 충분한 여유를 갖고 있지 않는 한, 자신의 가족을 위해 충분히 저축하여야 하며, 결코 이를 면죄부에 낭비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7. 그리스도인들은 면죄부를 사는 것이 자유선택의 문제이지, 명령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48. 그리스도인들은 교황이 면죄해 주는 데 있어서는 돈보다 경건한 기도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9. 그리스도인들은 교황의 면죄부가 그리스도인들이 이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때에 만 유용한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이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망각한다면 매우 해로운 것임을 알아야 한다.

 

50. 교황이 면죄부 교사들의 진상을 안다면, 그는 자기 양의 뼈와 살 그리고 그 가죽으로 성 베드로 사원을 세우기보다는 오히려 그 사원이 재로 화하기를 원했을 것임을 그리스도 인들은 알아야 한다.

 

51. 교황은 면죄부 판매자들로부터 돈을 갈취당한 많은 이들에게 성 베드로 사원을 팔아서 라도 돈을 나누어 주기를 원할 것이며 또 원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알아야 한다

 

52. 비록 면죄부 담당 주교나 교황이라 할지라도 자기 영혼의 안전을 위해 면죄부에 희한 구원을 믿는 것은 헛된 일이다.

 

53. 면죄부 판매를 위해서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 전파를 금하는 교황은 그리스도의 적이 다.

 

54.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면죄부에 더 많은 시간을 할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 씀을 훼손하는 것이다.

 

55. 극히 무의미한 것인 면죄부가 한 단어, 한 문장, 한 구문으로 표현된다면 매우 중요한 것인 복음은 백 단어, 백 문장, 백 개의 구문으로 설교되어야 한다.

 

56. 교황이 면죄부를 파는 교회의 보물은 그리스도의 사람들 사이에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 다.

 

57. 면죄부가 이 세상의 보물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많은 면죄부 판매자들이 이를 마음대로 나누어 주기보다는 이를 긁어 모을 뿐이기 때문이다.

 

58. 이는 또 그리스도와 성자들의 공로도 아니다. 왜냐하면 교황없이도 그리스도의 공로는 속사람에게는 은혜를, 겉사람에게는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지옥을 주기 때문이다.

 

59. 성 로렌스(St.Laurence)는 교회의 가난한 자들이 교회의 보물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이는 그 당시 말의 어법에 따른 것이다.

 

60. 그리스도의 공로로 주어진 교회의 열쇠가 바로 보물이라는 우리의 말은 충분히 숙고한 결과이다.

 

61. 왜냐하면 분명한 것은 교황의 권한이 자신에게 부여된 벌과 재판을 면해 주기에 충분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62. 교회의 진정한 보물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증언인 가장 거룩한 복음이다.

 

63. 하지만 이 보물은 가장 싫게 여겨지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는 처음된 자를 나중된 자로 만들기 때문이다.(마20:16)

 

64. 한편, 면죄부의 보물은 가장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나중된 자를 처음된 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65. 그러므로 복음의 보물은 이전엔 사람을 위해 부를 남았던 그물이었다.

 

66. 면죄부의 보물은 지금 부를 위해 사람을 낚고 있는 그물이다.

 

67. 선동가들이 최고의 은혜라고 주장하는 면죄부는 실제로는 면죄부가 이익을 증진시킬 때 에만 그러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68. 하지만 이는 사실상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 신앙에 비교해 볼 때 가장 무의미한 은혜 에 불과하다.

 

69. 감독과 사제들은 교황 면죄부 사절들을 기꺼이 그리고 매우 경건하게 맞아들여야 한다.

 

70. 하지만 그들은 이 사절들이 교황으로부터 위임받은 것 대신에 자신들의 생각을 설교하 지 않도록 보다 더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71. 교황의 면죄부에 관한 진리를 거스리는 이는 파문되어야 한다.

 

72. 하지만, 면죄부 사절의 욕심과 방종을 경계하는 이들은 축복을 받을 것이다.

 

73. 교황은 여하튼 면죄부 판매에 해를 끼치는 이들을 혹독하게 꾸짖을 수 있다.

 

74. 하지만, 교황은 이보다는 더욱 더 거룩한 사랑과 진리에 해를 도모하기 위한 구실로 면 죄부를 사용하는 이들을 꾸짖기를 원한다.

 

75. 면죄부를 과대평가하여 인간이 아무리 못할 짓을 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어머니를 범했 다 할지라도 면죄부가 그 죄를 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76. 우리의 주장은 정반대로 교황의 면죄부는 아무리 하찮은 죄라도 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77. 성 베드로가 지금의 교황이라 할지라도 더 큰 은혜를 베풀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 베드로와 교황을 동시에 모독하는 것이다.

 

78. 우리의 주장은 반대로 지금의 교황, 또는 어떤 교황이라 할지라도 고린도전서 12장28절 에 씌어진 대로 복음과 영력 그리고 치유의 은사 등 훨씬 더 많은 은혜를 갖고 있다는 것 이다.

 

79. 교황의 성의에 그려진 십자가와 면죄부 사절이 세운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같 은 가치를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80. 그러한 말을 퍼뜨리는 감독, 사제 그리고 신학자들은 다음에 답해야 할 것이다.

 

81. 이 무분별한 면죄부의 강조 때문에 아무리 박식한 사람이라도 세인들의 중상 또는 날카 로운 질문으로부터 교황의 권위를 지키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82. “교황이 교회를 세우는 데 드는 하찮은 돈을 확보하기 위해 수많은 영혼을 구속한다고 한다면, 그는 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의 절박한 필요를 들어주거나, 또는 거룩한 사랑을 실 현하기 위해 연옥을 완전히 비우지 않는가? 후자는 가장 사소한 것이 아닌가?”

 

83. 또, “이미 구속받은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부당한 것인데, 왜 죽은 자의 장례 미사나 기념 미사는 계속되는가? 또 왜 교황은 그러한 이유에서 바쳐진 기부금을 돌려주지도 않 고, 이의 취소를 허락하지도 않는가?”

 

84. 또, “돈 때문에 불경한 자와 저들로 하여금 연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경 건한 영혼을 살 수 있도록 하면서, 오히려 경건하고 사랑스런 영혼을 위해서는, 즉 순수한 사랑의 목적으로는 이를 행치 않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신앙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 인가?”

 

85. 또, “이미 오래 전에 취소되었고, 사실상 사문화되었으며 폐지된 것이나 다름없는 회피 총칙(悔罪總則)이 왜 면죄부 판매를 통해 아직도 살아있고 강력한 힘을 갖는 것처럼 통용 되고 있는가?”

 

86. 또, “오늘날 최고의 부자였던 크라수스(Crassus)보다도 훨씬 부자인 교황이 가난한 신자 들의 돈으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돈으로 이 성 베드로 사원을 짓지 않는 이유는 무엇 인가?”

 

87. 또, “이미 전적인 회개를 통해 완전한 구속과 축복을 받은 이들에게 교황은 또 무엇을 용서하고 무엇을 축복하겠다는 것인가?”

 

88. 또, “교황이 지금 하루에 한 번 모든 신자들에게 베풀고 있는 사면과 축복을 하루에 백 번을 한다고 하여 얼마나 더 큰 축복이 교회에 임하겠는가?”

 

89. “교황이 면죄부를 통해 돈보다는 영혼의 구원을 구하고 있다면, 왜 그는 지금까지 행해 온 똑같은 효력을 갖는 사면과 특사를 중지하는가?”

 

90. 세인들의 날카로운 논박을 오직 힘으로만 억누르고, 이를 논리적으로 해소치 않는 것은 교회와 교황을 적들의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91. 그러므로, 면죄부가 교황의 마땅한 뜻과 생각에 따라 설교된 것이라면, 이 모든 의문들 은 이미 해결되어야 했을 것이다. 이들은 없어져야 했을 것이다.

 

92. 그리스도의 백성들을 향하여 평안하지도 않는데 “평안하라, 평안하라”하는 모든 선지자 들은 다 물러가야 한다.

 

93. 그리스도의 백성들에게 십자가가 없는 곳에서 “십자가, 십자가”를 외치는 모든 선지자들 에게 축복이 있을 것이다.

 

94. 그리스도인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형벌, 죽음 그리고 지옥을 거치면서 부지런히 따 르도록 교훈되어야 한다.

 

95.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평화에 대한 잘못된 확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많은 고난을 통해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확신하여야 한다.(행14:22)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만성절(All Saint Day)을 기하여 라틴어로 쓴 「95개조 항의문」을 비텐베르그 성곽 교회 앞에 게시하여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하기를 원하는 이는 누구든지 나오라고 덧붙였다. 그는 선동보다는 토론을 통하여 그릇된 관행을 고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로마 천주교회에 대한 선전 포고가 되었고, 종교개혁의 봉화를 드는 사건이 되었다. 루터는 이 항의문에서 주로 다음의 네 가지 문제를 다루었다.

 

첫째, 베드로 성당 건축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루터는 성도들의 건축하여야 할 것은 일차적으로 마음의 성전이요,

그 다음은 그가 살고 있는 지역의 교회당이며, 마지막 순서가 로마의 베드로 성당이라고 생각하였다.

 

“교황이 교회를 세우는 데 드는 하찮은 돈을 확보하기 위해 수많은 영혼을 구속한다고 한다면, 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의 절박한 필요를 들어주거나 또는 거룩한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연옥을 완전히 비우지 않는가?”(82조), “이미 구속받은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부당한 것인데, 왜 죽은 자의 장례 미사나 기념 미사는 계속되는가? 교황은 그러한 이유에서 바쳐진 기부금을 돌려주지도 않고, 이의 취소를 허락하지도 않는가?”(83조)에 주장하였고,

또 “오늘날 최고의 부자인 크라수스보다고 부자인 교황은 가난한 신자의 돈이 아닌 자신의 돈으로 성 베드로 사원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성도들이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헌금을 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를 표명하고 있다.

 

둘째, 교황의 내세권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였다. “죽은 사람은 죽음으로써 모든 형벌로부터 벗어나고, 교회법에 관한 한 이미 죽었으며 그로부터 해방될 권리를 갖고 있다. 죽어가는 사람에 있어서 불완전한 경건이나 사랑은 반드시 커다란 불안을 수반한다. 사랑이 적으면 적을수록 두려움은 더욱 크다.”(13조, 14조)을 주장하며 성도들의 이 땅에서 행한 것에 대한 대가를 내세에 가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루터는 교황이 내세 문제에 대하여 간여할 권세가 없음을, 죄의 면책권도 없음을 말하고 있다. 내세권에 대하여는 오직 심판주되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에게 사죄권과 연옥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다고 주장하는 로마 천주교회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셋째, 면죄부 제도의 해악을 지적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므로 죄를 용서받는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청에서 발부하는 면죄부를 사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또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돈이 연보궤에 짤랑하고 떨어지는 순간에 영혼이 연옥에서부터 풀려난다고 말하는 이들은 단지 인간적인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므로 가라지임을 말하고 있다.

 

루터는 면죄부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1조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셨을 때, 이는 신자의 삶 전체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고 주장하여 죄에 대한 면죄함을 받는 것은 돈보다 경건하 기도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48조)고 주장한다.

 

“자기 영혼의 안전을 위해 면죄부에 의한 구원을 믿는 것은 헛된 일이며, 면죄부 판매를 위해서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전파를 금하는 교황은 그리스도의 적이며,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면죄부에 더 많은 시간을 할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는 것이다”(52, 53, 54조)고 주장하며,

 

복음보다는 면죄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위배되고 이론상으로 그릇된 것임을 강조하면서, “꾸고자 하는 자에게 꾸어주고, 필요한 자에게 빌려주는 것이 면죄를 사는 것보다 선한 일”이라고 주장하였다.(43조)

 

넷째, 연옥에 대하여 부정적인 주장을 하지 않았다. 루터는 연옥 교리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연옥의 형벌(15조)이 있음을 말하고, 지옥, 연옥, 그리고 천국의 차이는 절망, 두려움 그리고 구원의 확신 간의 차이가 같다.(16조)고 주장하여 연옥에는 성화되지 못한 영혼들의 들어가서 정화되는 곳임을 말하여 주고 있다.

 

또한 진정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죄값을 달게 받기를 원하며(40조), 면죄부 없이도 죄와 벌로부터 완전한 사함을 받을 수 있음(36조)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살았든 죽었든 모든 그리스도의 축복과 교회에 참여하게 된다. 이는 면죄부 없이도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하신 것임(37조)을 말함으로써 이 땅에서도 성화되어 연옥 형벌을 면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