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러터리 잡설 (12) 병사와 동물 1 이철재 기자 ....
인간은 참 모진 족속인가 봅니다. 자기네들끼리 싸우는 것도 모자라 다른 동물을 불러들이니 말입니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전쟁에서 갖가지 동물을 써왔습니다. 말뿐만 아니라 낙타도 타고 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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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때 오스만 제국의 낙타 기병대 . 당나귀는 짐을 나르는 데 부렸습니다.
1차 세계대전 가스 마스크를 쒸운 독일군의 당나귀 . 탱크가 없던 시절 코끼리는 적의 방진을 뚫는 역할을 했습니다.
기원전 202년 10월 19일 자마 전투에서 동원된 전투 코끼리 부대 . 무선통신이 발달하지 않았을 땐 비둘기가 통신문을 전달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독일의 전서구 통신병 . 돌고래는 바다에서 적의 기뢰를 탐색하도록 훈련을 받기도 했습니다.
돌고래를 훈련시키는 미국 해군 . 이번 밀리터리 잡설에선 전쟁과 동물이란 주제로 몇차례 썰을 풀가 합니다.
기병대가 없어진 요즘 전장에선 군견이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물입니다.
전장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은 해병대 군견 맥스에 대한 영화 ‘맥스(Maxㆍ2015년)’ . 개와 함께 대표적인 반려동물인 고양이는 군묘(軍猫ㆍ군용 고양이)로 쓰였을까요? 군 생활을 하신 분들은 ‘짬타이거’를 떠올리시겠죠. 군부대에 어슬렁 거리다 잔반(남은 음식)이나 장병들이 던져주는 음식물로 먹고 사는 고양이 말입니다. ‘짬(잔반)’과 ‘타이거(짬을 많이 먹고 살이 쪄 호랑이만큼 커졌다는 뜻으로)’의 합성어입니다.
러시아군의 짬타이거
짬타이거 말고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군묘가 있습니다. 함재묘(艦在猫ㆍship‘s cat) 애깁니다. 인간은 9500년 전 고양이를 기르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대 이집트인은 배에 고양이를 태웠습니다. 이후 전 세계의 함선에선 고양이를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식량을 축내는 쥐를 잡기 위해서죠. 또 쥐는 밧줄과 목재를 갉았습니다. 범선시대 돗을 움직이는 밧줄이 끊어지면 곤란한 상황에 처했겠죠. 철선이 나왔어도 쥐는 골칫덩어리였습니다. 각종 전선을 훼손해서죠. 쥐가 옮기는 전염병도 두려웠겠죠. 그리고 고양이는 오랜 뱃생활의 외로움을 달래줬고, 수병의 PTSD의 완화에 큰 도움을 줬습니다.
다양한 함재묘 사진들 . 이와 같은 이유로 고양이는 선원과 수병의 친구이자 수호자였습니다. 일부 함은 고양이에게 계급까지 내렸습니다. 수병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죠. 영국 해군은 1975년이 되서야 위생 문제를 들며 함재묘 제도를 폐지했습니다. 한국 해군에서도 선진 해군의 사례를 본받아 함재묘를 길러봤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후문입니다. 함재묘의 역사가 길다보니 진기한 얘기도 많습니다. 1) 불침묘 샘(Unsinkable Sam)
오스카 또는 샘 . 이 고양이의 원래 이름은 오스카(Oscar)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독일의 전함 비스마르크(Bismarck)의 함재묘였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영국 해군의 맹공을 받아 1941년 5월 27일 격침됐습니다. 2200명의 수병 중 116명만과 오스카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오스카는 영국 해군 구축함 코사크(HMS Cossack)에 의해 구조됐습니다. 그런데 코사크는 몇달 후인 10월 24일 독일 잠수함의 어뢰공격으로 반파됐습니다. 이 때도 오스카는 살아남아 영국 기지가 있는 스페인 지브롤터로 보내졌습니다. 여기서 ’불침묘 샘‘이란 별명을 얻게 됐습니다. 그리고 영국 해군 항공모함 아크로열(HMS Ark Royal)의 함재묘가 됐습니다. 그런데 아크로열은 같은해 11월 14일 역시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받았고, 영국 해군은 어떻게든 이 배를 살려보려고 했으나 예인이 어려워 결국 침몰시켰습니다. 오스카는 판자에 올라 바다에서 떠돌다 영국 해군 구축함 라이트닝(HMS Lightening)에 구조됐습니다. 오스카는 함재묘에서 퇴역해 지브롤터 영국 총독의 집에서 쥐를 잡는 임무에 투입됐고, 나중에 영국 본토로 옮겨져 선원회관(Home for Sailors)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2) 블래키(Blackie)
윈스턴 처칠(오른쪽)과 블래키 . 블래키는 영국 해군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HMS Prince of Wales)의 함재묘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인 1941년 8월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이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뉴펀들랜드 앞바다에서 비밀리 만날 때 처칠을 수행했습니다. 이 때 미영의 정상들은 그 유명한 대서양 헌장(Atlantic Charter)에 서명을 하죠. 처칠이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서 내릴 때 블래키가 그에게 다가가자, 처칠은 블래키에게 작별인사를 한다고 잠시 멈춰섰습니다. 이 장면이 사진으로 찍혀 유명해졌죠.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1941년 12월 10일 일본 해군기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습니다. 블래키는 무사히 구조돼 생존자와 함께 싱가포르로 옮겨졌지만 그 후 행적에 대해선 밝혀진 게 없습니다. 3) 사이몬(Simon)
사이몬과 애머시스트 수병들 . 사이몬은 1948년 홍콩에서 영국 수병이 주워와 영국 해군 구축함 애머시스트(HMS Amethyst)의 함재묘가 됐습니다. 사이몬은 함장의 군모 속에서 잠을 잘 정도로 귀여움을 받았습니다. 1949년 공산당이 난징(南京)을 공격할 때 영국 거류민을 후송시키기 위해 애머시스트는 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이었습니다. 공산군은 애머시스트를 무차별 포격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사이몬도 이 때 중상을 입었습니다. 영국 해군은 사이먼을 필사적으로 치료했습니다. 병상에서 일어난 사이먼은 평소처럼 함내 쥐를 잡고 수병에게 애교를 부려 PTSD에 빠졌던 수병들의 마음을 달랬습니다. DA 300
사이몬은 영국으로 돌아왔지만 상처 부위가 다시 감염돼 사망했습니다. 영국의 유력 신문인 더 타임스(The Times)는 사이먼의 부고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의 장레식엔 애머시스트 수병 전원이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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