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관심 세상史

세계사의 驚異 노르만 紀行

淸山에 2015. 8. 7. 12:00






세계사의 驚異 노르만 紀行

이탈리아 남부, 시실리, 노르망디, 바이킹의 후예 노르만 戰士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趙甲濟  



'세계사의 경이' 노르만 紀行


바이킹 戰士들은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정착, 문명화된 이후 잉글랜드와 남부 이탈리아 및 시실리를 정복, 유럽 최고의 번영을 이루면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붐을 일으켜 중세 유럽을 깨운다. 해적질을 하던 야만인이 文明 건설의 주인공이 된 수수께끼를 찾아 노르망디, 南이탈리아, 시실리를 가다.

 

趙甲濟(조갑제닷컴 대표)

 


기사본문 이미지

몽셍미셀 수도원과 공중 정원
 



바이킹에서 노르만으로


2010년 봄 바이킹의 고향인 스칸디나비아를 여행하고 온 필자는 어떤 모임에서 이탈리아 주재 한국 대사를 지낸 분과 옆 자리에 앉게 되었다. 내가 “시실리도 바이킹과 깊은 관련이 있더군요”라고 아는 체를 했다. 그는 내 손을 잡으면서 “그걸 아는 한국인을 처음 본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흥미로운 비밀을 공유한 사이처럼 친밀한 대화가 오갔다. 그 뒤 필자는 바이킹과 노르만의 역사적 발자취를 찾아서 나폴리, 시실리, 노르망디를 한 달 정도 취재하였다. 문명파괴자가 위대한 문명건설자로 돌변한 과정은 세계사의 가장 경이로운 이야기꺼리일 것이다. 2010년 월간조선에 두 차례에 걸쳐서 소개한 기사는 바이킹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지만 지금부터는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정착한 노르만 戰士(전사)들의 ‘두 나라 이야기’가 될 것이다.


서기 793년 6월 바이킹 해적이 잉글랜드의 동해안 섬을 습격, 수도원을 파괴하였다. 이것이 그 뒤 약 300년 간 이어지는 바이킹과 노르만(프랑스 노르망디에 정착한 바이킹) 세력의 대폭발, 그 序曲(서곡)이었다. 지금의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에 살던 바이킹은 유럽 全域(전역)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날씬하고 빠른 배로 해안을 덮치고, 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가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들은 해적이면서 동시에 貿易船團(무역선단)이기도 했다. 바이킹과 노르만은 선박을 매개로 한 기동성으로 놀라운 활동범위를 기록했다.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아이슬랜드, 그린랜드, 캐나다, 볼가 강, 키에프, 콘스탄티노플,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시실리, 北아프리카, 중동이 활동무대였다. 


바이킹과 노르만은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또 나라를 세웠다.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아이슬랜드, 러시아 公國(공국. 키에프), 노르만 공국, 잉글랜드, 시실리 왕국, 안티옥 공국 등.


바이킹의 야성을 문명적으로 진화시켜 그 힘으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곳은 프랑스 북쪽 노르망디 대평원이다. 11세기,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공이 정복하여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킨 새로운 모습의 잉글랜드와, 같은 시기에 노르망디의 오트빌 家門(가문) 戰士(전사)들이 이탈리아 남부 정복 사업을 통하여 세운 시실리 왕국은 12세기엔 유럽에서 가장 번영하는 나라가 되었다. 바이킹과 노르만이 세운 나라들 중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영국, 아이슬랜드는 지금도 늘 랭킹 20위 안에 드는 세계의 一流(일류) 국가로 분류된다. ‘바다의 戰士(전사) 집단’ 바이킹은 一流(일류)국가 제조기인 셈인데, 대제국 제조창인 ‘草原(초원)의 戰士(전사) 집단’ 몽골-투르크 기마민족과 유사점이 많다.

 


매력 있는 戰士

 

노르만족의 성격에 대하여 11세기 베네딕트 수도사이자 역사학자인 제오프리 말라테라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꾀가 많고, 정복과 통치를 위하여는 자신들의 전통을 버린다. 모든 것을 모방하고, 상반된 성격인, 베풀기와 탐욕을 겸한다. 두목은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하여 많이 베푼다. 노르만족은 아부에 능하고, 어릴 때부터 웅변가들이며, 법으로 엄격히 다스리지 않으면 통제가 잘 안 된다. 말과 무기, 사냥을 좋아하고, 추위나 배고픔을 잘 견딘다.>


노르만족은 적응력이 뛰어났다. 전통이나 관습의 구속을 받지 않고 필요에 따라 행동하였다. 어느 지역을 정복하면 재주 있는 현지인들을 채용하고, 좋은 여자를 골라 결혼도 했다. 노르만 지도자들은, 글을 읽을 줄 모른다고 열등감을 갖지 않았으며 교회의 書記(서기)를 보좌역으로 채용하여 文盲(문맹)의 문제를 해결하였다는 것이다(정복왕 윌리엄도 문맹자였다).


비잔틴(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오스 1세의 딸 안나 콤네네는 소녀 시절에 본 노르만 왕자 보헤몽(안티옥 공국의 건설자)에 대하여 이런 기록을 남겼다.  


<로마 땅에선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가장 키가 큰 비잔틴 사람보다도 한 단위가 더 컸다. 허리는 가늘고 어깨는 넓었으며 깊은 가슴과 강력한 팔을 가졌다. 너무 야위지도, 너무 살이 찌지도 않았다. 균형 있는 몸이었다. 그의 몸은 희고, 얼굴은 붉은 점이 있었다. 머리카락은 황색이었으나 다른 야만인처럼 허리까지 내려오지 않고 귀까지만 오도록 잘랐다. 수염은 면도칼로 잘라 분필보다 더 부드럽게 보였다. 그의 푸른 눈은 높은 품격과 기상을 보여주었다. 매력적인 사람이었지만 무섭기도 하였다. 용기와 열정이 몸과 마음에 녹아 있었지만 전쟁을 좋아하는 기질이었다. 그는 위트가 있고 재주가 많아 곤란한 상황에서 늘 벗어나곤 하였다. 대화를 할 때 그는 정보가 많아 보였고, 그의 답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런 체격과 그런 성격은, 황제 이외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였다.> 


바이킹과 노르만족을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게 큰 체격과 용기, 명예욕, 그리고 실용적 정신과 적응력이다. 고고학자들의 遺骨(유골) 조사에 따르면 바이킹 남자의 평균 키는 약 174, 여자는 158cm였다고 한다. 중세 유럽인들 중 가장 큰 체격이었다.

 


노르망디 紀行

 

노르망디는 북쪽 사람들(바이킹을 지칭)이 사는 땅이란 뜻이다. 덴마크 출신들이 중심을 이룬 일단의 바이킹은 서기 800년부터 英佛(영불) 도버 해협에 면한 프랑스 해안 지대를 공격하다가 세느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流域(유역) 지방을 황폐화시키더니 885년엔 파리를 포위한 적도 있었다. 프랑스 왕은 견디다 못해 서기 911년에 노르망디를 바이킹에게 떼어주었다. 프랑스 왕에게 형식적으로만 臣從(신종)하는 노르망디 公國이 탄생한 것이다.  


이곳으로 몰려든 바이킹은 곧 기독교로 개종하고 프랑스 어를 쓰게 되었다. 유럽문명권으로 편입된 것이다. 그럼에도 바이킹의 정신과 자질을 간직하였다. 바이킹의 野性(야성)과 프랑스적 문명이 교배하여 雜種(잡종)강세의 노르만 戰士(전사) 집단이 태어난 것이다. 노르망디 지역은 지금도 그렇지만 草地(초지)가 넓어 말을 키우는 데 유리하였다. 배를 잘 모는 바이킹은 좋은 말들을 길러내 유럽 최강의 기마군단을 편성하는 한편 활 부대를 양성했다.  


노르망디는 1944년 6월6일의 상륙작전으로 세계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066년 노르망디公 윌리엄이 이끄는 노르만 군대는 노르망디 해안을 출발, 잉글랜드를 점령했다. 세계사를 바꾼 두 상륙작전의 무대인 노르망디는 면적이 3만672평방킬로미터, 인구는 약 345만 명이다. 野山(야산)조차 보이지 않는 대평원이다. 英佛(영불)해협으로 들어가는 세느강 流域(유역)이라 농토와 목장이 많다. 노르망디는 문화와 예술과 영화를 통하여도 많이 알려져 있다.
 
몽셍미셀 요새, ‘셀부르의 우산’이란 영화의 무대가 된 셀부르 항구,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나오는 오마하 비치, 유명 배우들이 총출동한 영화 '더 롱기스트 데이', ‘남과 여’란 영화의 무대인 해안도시 도빌, 그리고 소설가 모파상과 프로벨, 인상파의 원조 클라우드 모네,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알렉스 드 토크빌 등이 이곳 출신이다.  나의 노르망디 기행은 파리의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에서 시작되었다. 이 미술관은 1932년에 폴 마르모탕이란 역사연구가가 자신의 저택과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품을 기증하여 설립되었다. 1971년에는 모네의 아들이 아버지의 작품 65점을 미술관에 기증하였다. 1950년엔 한 부자 여성이 아버지의 수집품을 기증하였는데 모네의 ‘해뜨는 印象’(Impression-Sunrise)이 포함되었다.

 


인상파 화가들이 좋아한 풍경


63x48cm의 캔버스에 그려진 ‘해뜨는 印象(인상)’ 앞의 의자에 앉아 보았다. ‘해뜨는 印象’은 세계 미술사의 흐름을 바꾼 그림이다. 모네는 이 그림을 노르망디 해안의 르아브르 항구(세느강이 노르망디 평원을 거쳐서 도버 해협으로 들어가는 하구)에서 창문을 통하여 그렸다. 1872년이었다.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모네가 받은 日出(일출) 항구의 풍경 인상을 그렸다. 햇볕과 이미지를 重視(중시)하니 자세한 묘사는 생략되었다. 모네가 이 작품을 전시회에 출품할 때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주최 측에서 제목을 요구하여 ‘‘해뜨는 印象’이라고 作名하였다. 제1회 인상파 전시회가 1874년에 열렸다. 이 전시회를 본 한 평론가는 혹평을 하면서 모네의 그림 제목을 따서 ‘인상파들의 전시회’라고 썼다. 이때부터 ‘인상파’라는 말이 통용된다.   인상파의 그림을, 평론가들은 스케치 수준의 미완성 작품, '벽보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식으로 비판하였지만, 그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곧 야수파, 입체파 등 20세기의 새로운 畵風(화풍)으로 발전해갔다.

모네의 '해뜨는 인상'은 1985년에 이곳 마르모탕 미술관에서 도난당하였다가 5년 뒤에 회수되었고 이듬해부터 다시 전시되고 있다. 모네는 노르망디의 지베르니에서 살면서 노르망디 풍경을 많이 그렸다. 르아브르 항구나 해안 풍경뿐 아니라 노르망디 公國의 수도였던 루앙의 대성당을 여러 시각에서, 여러 시점에서 그린 것, 지베르니의 저택 정원에 있는 睡蓮(수련)을 그린 것 등이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도 노르망디의 작은 항구와 마을로 몰려갔다. 이렇게 하여 노르망디의 풍경은 예술가들의 도움으로 세계인들에게 친숙한 존재가 되었다. 이런 그림을 보고 노르망디를 찾는 이들도 많다. 그래서 위대한 예술가는 위대한 생산자이다.


 


강이 흐르는 대평원


프랑스는 西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이다. 본토는 54만 7000평방킬로미터이고 남태평양 등에 있는 영토까지 포함하면 67만 4843평방킬로미터이다. 농토가 비옥하여 해외로 나가는 이민자가 많지 않다. 영토가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프랑스는 배타적 經濟水域(경제수역) 면적이 1102만 5000평방킬로미터로서 근소한 차이로 미국에 이어 2등이다. 인구는 6535만 명인데 최근 늘고 있다. 프랑스는 GDP가 세계 5위이고 富(부)의 축적을 의미하는 家口(가구)의 총자산으로 치면 세계 4등이다. 국방예산은 세계에서 5위이고 병력규모는 유럽연합에서 1등이다. 핵폭탄을 300개 보유한 군사 강국이고, 외교관 숫자가 미국에 이어 두 번째, 保健 서비스의 질은 세계1등으로 평가된다(WHO).

노르만 戰士(전사)들의 경쟁력은, 체력과 정신력이 뛰어난 바이킹 민족이 비옥한 노르망디의 자연과 프랑스의 풍성한 문화와 만나서 생긴 것이다. 노르망디를 비옥하게 만드는 원천은 세느강이다. 한국인들은 파리에 가서 그 유명한 세느강을 보고는 강폭이 좁은 데 놀란다. 한강보다 작다고 誤解(오해)한다. 세느강은 부르고뉴 지방의 야산에서 發源(발원), 르아브르-옹페르 항구 사이 하구를 통하여 바다(도버 해협)로 들어간다.

길이는 776km이고 流域면적은 7만 8650평방킬로미터이다. 漢江(한강)은 길이가 514km이고 流域(유역)면적은 3만 4402평방킬로미터. 세느강은 年中(연중) 流量(유량)의 차이가 거의 없다. 좁지만 깊다. 河口(하구)에서 120km 떨어진 루앙까지 해양선이 올라오고, 하구에서 560km지점까지도 배가 다닌다. 파리를 관통하는 세느강엔 37개의 다리가 걸려 있다. 河口(하구)엔 한때 세계에서 가장 길었던 斜張橋(사장교)인 노르망디 大橋가 있다.


노르만의 품격, 몽셍미셀


강이 흐르는 노르망디 대평원을 달리면 도버 해협. 바다의 냄새가 밀려오는 저 멀리 섬 위에 교회 같기도 하고 요새 같기도 한 몽셍미셀(聖미셀의 山)이 지평선에서 나타났다. 프랑스에서 에펠 탑 다음으로 많이 소개되는 사진이다. 2등변 삼각형의 몽셍미셀은 海面(해면)에서 교회 첨탑까지 높이가 150m이다. 아래 79m 부분의 산비탈엔 주택과 가게가 붙어 있고 그 위 약70m는 교회, 수도원, 정원, 성벽 등으로 구성된 복합건물이다. 이 건물의 양식은 山頂(산정)에 지은 수도원이 로마네스크 양식이고 그 뒤 고딕 식 수도원이 더해졌으므로 로마네스크 식으로 분류된다.


몽셍미셀은 노르만 公國의 후원으로 세워졌다. 서기 1017~1144년 사이 건축된 로마네스크 식 수도원은, 이탈리아 건축가 윌리엄 드 볼피아노가 노르만 공국 리처드 2세의 초청을 받아 설계한 것이다. 노르만의 윌리엄 공이 잉글랜드로 쳐들어간 다음 해인 1067년 몽셍미셀 수도원은 그의 정복 사업을 지지하게 되었다. 윌리엄 공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잉글랜드의 작은 섬을 선물로 주고 여기에 몽셍미셀 수도원의 새끼 수도원을 지어주었다.


몽셍미셀은 대평원이 끝나는 해안에서 약600m 떨어진 섬이다. 潮汐(조석) 干滿(간만)의 차이가 10m를 넘는다. 드러난 모래 바닥을 밟으면서 걸어 들어갈 수도 있으나 반드시 전문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관광객들은 주차장에서 전용 버스로 갈아탄 뒤 내려서 육교를 통해서 들어간다.


몽셍미셀은 요새 성격이 강하다. 15세기 英佛(영불) 100년 전쟁 중 영국군의 공격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도 바다와 격해 있는데다가 절벽과 성벽으로 둘러싸여 접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잔 다르크는 몽셍미셀의 영웅적 방어에 크게 鼓舞(고무)되었다고 한다. 나중엔 감옥으로도 사용되었다.


1070년대에 만들어진 유명한 ‘베이유 刺繡(자수)’ 그림에도 몽셍미셀이 나온다. 윌리엄 공의 인질이 되어 있던 미래의 잉글랜드 왕 해롤드(당시는 영주)가 바닷가 모래가 꺼지면서 빨려드는 두 노르만 병사를 구하는 장면이다.


연간 300만 명이 찾는 몽셍미셀은 노르만의 군사적, 종교적, 예술적 실력을 집약한 것이다. 신앙과 생존본능과 美的(미적) 감각이 한 건물에 집중된 셈이다. 섬과 교회 건물을 다 합치면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같은 크기이다. 꼭대기 수도원에 붙어 있는 옥상 정원은 꼭 하늘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 수도원에서 까마득한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보면 몽셍미셀은 신이 인간을 부려서 만든 건물이란 실감이 온다.




 

윌리엄 정복왕이 떠난 항구에서

 

노르망디의 디브 수 메르 항구는 1066년 9월, 노르만 공국의 윌리엄 공이 이끄는, 약 7000 명의 프랑스 어를 쓰는 기사들과 약 2000 마리의 말이 약 700 척의 배를 타고 출항한 곳이다. 필자는 노르망디를 여행하면서 해안 휴양지 도빌에서 하룻밤을 자고 난 뒤 베이유로 가는 길에 이 항구를 찾았다. 디브 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평온한 모습의 작은 항구엔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 그 흔적은 없었다. 주민에게 이곳이 그곳이냐고 물었더니 '아니 외국인이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아느냐'는 표정이었다.


1066년 윌리엄 공은 해롤드 왕이 즉위한 직후 잉글랜드 원정을 결심한다. 자신이 王位(왕위) 계승권이 있다면서 교황청에 로비하여 지원을 약속 받고 기사들을 모집한다. 자신의 휘하 기사들뿐 아니라 이웃한 브리타뉴, 프랑다스를 넘어 全유럽의 모험가들이 몰려 왔다. 모험심이 강한 유럽의 전사들에게 잉글랜드 원정은 일종의 벤처 투자 사업이었다. 윌리엄 공은 원정에 참여하는 기사들에게 성공하면 잉글랜드의 땅을 나눠주겠다고 약속했다.


 원정군을 편성, 유지하는 데는 대단한 軍需(군수)지원이 있어야 했다. 마크 모리스라는 학자의 계산에 의하면 디브 수 메르 항구에 집결한 7000명의 병력과 2000 마리의 말을 먹이는 데는 하루 28t의 밀가루와 하루 3만 갤런의 물이 필요하였다고 한다. 이들에게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중세엔 상비군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다가 필요할 때 대규모 병력을 모집하는 식으로 하지 않으면 재정적으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 


8월 초 노르만 군은 출항 준비를 끝냈지만, 날씨와 풍향이 맞지 않아 한 달 정도 기다려야 했다. 윌리엄 공은 속이 타 들어갔을 것이다. 700척의 대함대가 디브 항을 떠난 것은 9월12, 13일 중 하루로 추정된다. 바다는 거칠었다. 함대는 잉글랜드로 곧 바로 향하지 못하고 노르망디 연안을 따라 동쪽으로 약160km를 항해, 생벨러리 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보름 정도 날씨의 好轉(호전)을 기다리다가 9월27일 저녁 잉글랜드를 향해 출항하였다.


노르만 군의 잉글랜드 점령 과정은 중세에서 가장 정확하게 기록된 사건이다. 베이유 자수에선 시각적으로 기록했고 여러 권의 從軍記(종군기)가 있어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윌리엄 공이 탄 旗艦(기함)은 너무 빨리 나갔다. 28일 아침 잉글랜드 해안으로 다가가는 데도 後續 (후속)함대가 보이지 않았다. 윌리엄 공은 그래도 태연하게 아침 식사를 맛있게 했다고 전한다. 곧 뒤따르던 함대가 나타나, 페븐시에 상륙했다.


기사본문 이미지
노르망디 대평원이 바다와 맞닿는 곳에 몽셍미셀이 나타난다.



영국의 운명을 하루에 결정한 해스팅스 전투

 

윌리엄 공은 배에서 바닷가에 내릴 때, 다리를 헛놓아 엎어졌다. 불길한 징조였다. 그는 두 팔을 뻗으면서 외쳤다고 한다. '내가 잉글랜드를 잡았다.'


잉글랜드 왕 해롤드는 그때 북쪽 요크셔 지방에 있었다. 윌리엄 공의 상륙 사흘 전 이곳에서 決戰(결전)이 있었다. 노르웨이의 바이킹 왕이 수백 척의 원정군을 데리고, 동해안에 상륙했다. 그 또한 잉글랜드 왕좌를 노렸다. 남쪽에서 노르만 군의 상륙을 기다리던 해롤드 왕은 군대를 급히 북상시켜 스탬포드 다리에서 노르웨이 침략군을 만났다.


‘스탬포드 다리의 전투’로 알려진 이 싸움에서 노르웨이 바이킹 군대는 전멸하고 왕도 죽었다. 대승을 거둔 해롤드 왕에게 노르만 군의 상륙 소식이 전해진 것은 10월1일 전후였다. 해롤드 왕은 강행군을 하면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10월14일 아침 해롤드 왕이 지휘하는 앵글로-색슨 군대와 윌리엄 공이 지휘하는 노르만 군대는 해스팅스에서 마주 섰다.  해롤드 왕이 언덕의 능선을 차지했다. 노르만 군은 적을 올려 다 보는 위치여서 불리하였다. 특히 노르만 군의 자랑인 기병 돌격이 어렵게 되었다.


노르만 군은 3열로 섰다. 첫째 列은 弓手(궁수), 둘째 열은 중무장 보병, 셋째 열은 기병. 윌리엄 공은 이 기병 열의 한복판에서 지휘하였다. 잉글랜드의 기병은 말에서 내려 보병처럼 싸웠다. 이날 잉글랜드 군은 활 부대를 동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방패를 이어 붙여 방벽을 만들고 수비 자세를 취하였다.


노르만 군은 먼저 활로 집중 사격을 시작했다. 잉글랜드 군은 방패로 화살의 폭우를 피했으나 사상자가 났다. 이어서 노르만의 중보병이 앞으로 나와 잉글랜드 군을 덮쳤다. 방패와 방패,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 함성, 비명이 戰場(전장)을 진동했다. 잉글랜드 군은 물러나지 않았다. 창과 도끼, 돌을 매단 몽둥이를 던지며 저항하였다. 노르만은, 중보병의 공격이 효과를 보지 못하자 기병을 보냈다. 기병돌격은 언덕을 향하여 올라가는 형국이라 큰 충격을 주지 못하였다.


 


7000명의 戰士가 200만을 손에 넣다

 

일진일퇴하는 백병전이 수 시간 계속되었으나 승부는 나지 않았다. 오후에 들어 공격하던 노르만 군의 左翼(좌익)이 철통같은 잉글랜드 군의 수비에 밀려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윌리엄 공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고, 노르만 군의 좌익이 무너져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수비만 하던 잉글랜드 군이 추격에 나섰다. 이 위기를 逆轉(역전)시킨 것은 윌리엄 공이었다. 그는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준 다음 후퇴하는 노르만 군을 수습, 반격에 나섰다. 잉글랜드 군은 유리한 高地(고지)를 버리고 추격에 나섰다가 노르만의 반격에 걸려 많은 전사자를 내고 돌아갔다.


노르만 기병 전술은 몽골군과 닮은 점이 있었다. 전투 중 달아나는 시늉을 한다. 적은 추격하느라고 戰列(전열)이 흩어진다. 이때를 틈타 재집결, 반격을 감행, 흩어진 적군을 섬멸한다는 공식이었다.


윌리엄 공은 해스팅스 전투 막판에 이 기만전술을 썼다. 이런 전술은 고도로 훈련된 부대만 할 수 있다. 윌리엄의 직할 부대가 유인에 동원되었다. 접전중 갑자기 등을 돌려 아래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잉글랜드 군은 수비전만 하다가 비로소 찬스를 잡았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수비대열에서 이탈, 달아나는 노르만 군을 좇기 시작하였다. 수비하기 좋은 고지를 버리고 흩어지면서 내려왔다. 달아나던 노르만 보병과 기병이 집결하더니 갑자기 유턴했다. 반격이 시작되었다. 잉글랜드 군이 몰리기 시작하였다. 이 순간 해롤드 왕이 전사하였다. 베이유 자수의 그림에 따르면 그는 화살을 눈에 맞고 죽었다. 왕이 죽으면 졸병들은 버틸 수가 없다. 잉글랜드 군은 무너졌다.


쌍방의 병력은 각 7000명 쯤 되었을 것이다. 그날 반 정도는 죽거나 다쳤을 것이다. 특히 잉글랜드 군의  피해가 컸다. 잉글랜드 지배층을 대표한 기사단은 이 전투와 이어진 여러 전투에서 궤멸되었다. 단 한 번의 전투로 국가의 지배층이 전면적으로 교체되어 버린 희귀한 사례이다. 윌리엄 공은 1066년 런던으로 입성, 영국 왕으로 즉위했다. 잉글랜드는 프랑스 어를 하는 노르만 戰士들의 지배 하로 들어간 것이다. 7000명의 戰士(전사)들이 전투에서 이기자, 200만(당시 영국 인구)의 잉글랜드 인과 국토, 그리고 한 문명이 수중으로 들어온 셈이다. 세계사에서 보기 힘든 성공적 벤처 투자였다.

 

 

‘베이유 刺繡’ 앞에서

 

프랑스 노르망디의 베이유를 찾았다. 이 古都(고도)의 옛 교수신학교 건물 내 박물관엔 '베이유 刺繡(자수)'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1066년 노르망디의 윌리엄公이 잉글랜드에 상륙, 해스팅스 결전에서 해롤드 왕의 군대를 무찌르는 이야기를 담은 자수 그림이다. 50여개 장면의 사실적 그림인데, 길이 약 70m, 너비 약 50cm이다. 유리 안에 넣어 암실에서 전시하고 있었다.


이 보물에 대한 연구는 방대한데, 지금까지 확정된 사실은, 베이유 성당의 再建式(재건식)에 奉納(봉납)할 목적으로 정복왕 윌리엄의 이복 동생인 베이유의 오도 주교가 지휘하여 만든 것이란 점이다. 장군이기도 했던 오도는 윌리엄 왕이 고향인 노르망디로 돌아가면 대리 통치한 사람이다. 그가 자수 제작을 지시한 것은 1070년대로 보인다. 같은 시기 그는 베이유 성당의 건축도 시작하였다. 잉글랜드 기술자들이 자수의 제작에 참여, 7년 만에 완성한 뒤엔 베이유 성당으로 가져와 보관하였다.

이 자수에는 626명의 인물, 202마리의 말, 41척의 선박, 37동의 건물이 등장한다. 바이킹을 유명하게 만든 선박의 구조를 아는 데 좋은 자료이고 당시의 무기와 전술 연구에도 소중하다. 자수엔 밝은 별과 몽셍미셀 요새도 나온다. 나중에 천문학자들은 핼리 혜성임을 확인하였다. 해스팅스 전투가 있은 지 10년 정도 흐른 다음에 제작되었으므로 사실에 매우 가까운 그림이라는 평가이다.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은 이 베이유 자수로 해서 아주 실감 있게 다가온다. 일종의 동영상이다.


이 자수 기록화의 마지막 장면은 영국의 해롤드 왕이 눈에 화살을 맞고 죽는 모습이다. 해스팅 전투에선 앵글로 색슨 족의 귀족들이 왕과 함께 전멸하였다. 이는 발전적 변화의 곅기가 되었다.

 


 

영국의 운명이 바뀌다

 

프랑스 말을 하는 노르만 정복자들이 잉글랜드 지배층을 일거에 제거하고 앵글로 색슨족이 발전시킨 제도와 전통을 타고 앉아 새롭고 능률적인 국가를 만든다. 그때까지 영국은 유럽 문화권에선 멀어져 北海(북해)를 놓고 스칸디나비아의 후진 문화권에서 놀았다. 노르만 지배층에 의하여 프랑스-유럽 문화권과 연결되고 프랑스語 단어가 영어로 많이 들어와 세계적 언어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066년 이전에 영국은 로마-게르만-바이킹족의 침공만 받아왔는데 노르만 귀족이 통치 집단으로 들어앉은 다음엔 국력이 강해져 한 번도 침공을 허용하지 않고, 오히려 외국을 침략하는 나라로 달라졌다. 이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것이다.


이 베이유 자수는 2차 대전 때 독일이 눈독을 들였으나 베이유가 노르망디 상륙 직후에 연합군에 의하여 해방됨으로써 난을 면했다. 지금 베이유는 인구가 1만4600명에 불과한 조용한 시골이지만 베이유 자수로 해서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선 잘 알려진 地名(지명)이다.


이 자수를 보존하여 온 베이유 성당은 1070년에 기공되어 수백 년에 걸쳐 완성된, 그리하여 노르만 로마네스크 양식과 노르만 고딕 양식이 융합된 단정한 인상의 건축물이다. 건축학도가 관찰하면 로마네스크 식이 고딕 식으로 변화해간 과정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노르망디 상륙전의 와중에서 파괴되지 않아 1000년 전의 원형을 온전하게 알 수 있다. 벽화 중엔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의 지시로 살해된 뒤 聖人(성인)으로 추존된 토마스 베켓의 이야기가 있다.


베이유 자수와 성당은 노르만 문화의 우수성을 상징한다. 11~13세기 유럽의 최고 문명은 프랑스에 있었다. 군사, 경제, 학문, 예술 모든 면에서 최고였다. 파리는 인구 20만의 매력적인 도시로 성장, 유럽의 인재들을 끌어 모았다. 노르만은 바이킹의 야성 위에 전성기의 프랑스 문화를 흡수, 보다 높은 수준의 새로운 문화를 재창조한 것이다. 노르만이 노르망디, 영국, 시실리 및 남이탈리아에 남긴 수많은 성당, 궁전, 성, 모자이크는 비잔틴과 아랍 양식까지 수용한 것도 많다. 위대한 戰士(전사) 집단이 위대한 文藝창조자가 된 경우이다.

 


로마네스크 건축붐을 일으킨 노르만

 

유럽을 여행하다가 보면 서로마가 게르만족에 의하여 멸망한 5세기 이후 11세기까지의 600년간에 세워진 건축물을 발견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중세 암흑기가 바로 이 시기였구나 하는 감을 갖게 된다. 이 시기의 건축물은 드물기에 소중하다.


*이탈리아 동해안에 있는 라벤나엔 5~6세기의 초기 기독교 건물(산 비탈레 교회, 네온 세례당 등)이 있다. 라벤나는 서기 402~476년 사이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다가 로마가 망한 뒤엔 동고트 왕국의 수도로 변했다. 서기 540년에 이탈리아 반도 수복에 나선 동로마 제국(비잔틴)에 넘어갔다가 751년엔 롬바르드 왕국으로 편입되었다.

*독일 아헨 성당: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를 연 샬레마뉴 大帝(대제)의 무덤이 있는 9세기 초 건축물이다.

*스페인 코르도바의 大모스크(메즈키타-카데드랄): 기둥이 천 개나 되는 이 모스크는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8~10세기에 걸쳐서 만들어졌다. 기독교 세력이 탈환한 뒤엔 성당으로 바꿨다.


11세기부터 프랑스, 노르망디, 잉글랜드, 남이탈리아, 시실리에서부터 새로운 양식의 많은 건축물들이 등장한다. 성당, 수도원, 성, 궁전이다. 이를 로마네스크 양식이라 부른다. 로마 양식의 건축이란 뜻이다. 거의 600년간 볼 만한 건물을 만들지 못했던 유럽 기독교 문명권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유형은 곧 고딕 양식으로 진화하고 유럽에 거대하고 아름다운 성당 건축 붐이 일어난다.
 

로마네스크 양식 건축 붐은 유럽 문명이 중세 암흑기의 침체를 벗어나 再起(재기)의 신호탄을 올림 셈이다. 이들 건물은 큰 것이 특징인데, 건축 기술의 발전을 반영한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확산을 매개한 것이 노르만 戰士(전사)들이었다. 이들이 정복 사업을 진행한 노르망디, 잉글랜드, 남이탈리아, 시실리에선 노르만 정권의 후훤 하에서 로마네스크 건축 붐이 일어났다. 노르만의 역사에 대하여 잘 모르는 이들도 시실리나 남이탈리아에 가 보고는 “바이킹(노르만)이 세웠다는 건물이 왜 이렇게나 많나”라고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된다.



노르만이 가는 곳에 성당이 선다


노르만-로마네스크 식 건물은 첫 인상이 육중하다. 벽이 두껍고 창이 작다. 실내는 검소하다. 반원형 천장, 원형 아치가 특징인데, 건물의 규모가 획기적으로 커졌다. 성당이라도 요새 같은 느낌을 준다. 실제로 성당과 성을 세트로 지어 방어용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서울 태평로의 성공회 본당 건물이 로마네스크 식이다.  


노르만이 유럽 도처에서 남긴 노르만-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이나 예술품은 웅장하고 아름다워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들도 많다.  

*영국: 더함 성당, 런던 탑, 윈체스터 성당, 웨스트민스터 사원

*프랑스: 몽셍미셀(수도원과 요새 겸함), 베이유 刺繡 그림

*南이탈리아: 나폴리의 달걀 성, 카스텔 몬테(시실리 왕국을 다스린 노르만-독일계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데리코 2세가 세운 성), 트로이아 성당, 트라니 성당, 바리의 성당과 성 등

*시실리: 팔레르모의 대성상, 몽레알레 대성당, 팔레르모의 노르만 궁전과 교회, 체라푸 대성당

 *노르망디의 수도였던 루앙은 노르만 시대의 건축 붐에 의하여 유럽의 유수한 건축도시로 성장했다. 윌리엄 공의 屍身(시신)이 안치되었던 캉의 수도원도 기념비적인 노르만-로마네스크 양식이다.


노르만은 11세기 전후에 유럽에서 가장 이동을 많이 한 사람들이었다. 북유럽에서 비잔틴, 예루살렘, 아프리카까지 다니다가 보니까 자연히 박식하고 개방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런 성격이 노르만 건축물에 나타난다. 스칸디나비아 식, 로마 식, 기독교 식에다가 비잔틴(그리스)과 아랍 양식까지 가미되니 건물의 인상이 풍성해진 것이다.  


노르만의 세력 확장은 새로운 건축양식의 확장을 매개하였을 뿐 아니라, 교황 그레고리 7세가 주도한 교회 개혁의 강력한 후원자 역할을 맡은 것과도 맞물렸다. 영국 저술가 폴 존슨은 ‘예술-새로운 역사’라는 책에서 노르만을 ‘가장 활력 있고 재주 많은 소수 민족’이라고 표현하면서 유태인, 아르메니아인, 베니스인, 네덜란드인과 비견된다고 했다.


폴 존슨은 <신성로마제국의 바보 같은 황제들은 그레고리 7세의 교회 개혁에 반대하였으나 노르만 세력은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 스스로 법, 지혜, 敬虔性(경건성), 그리고 예술에서 큰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고 평했다.  


그들은 질서를 파괴하는 야만 세력으로 출발하였다가 질서를 잡는 문명세력으로 변했는데, 예술을 그런 질서잡기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노르만은 문명세계의 지혜와 문화를 배우면서도, 바이킹으로서의 특징, 즉 적극성, 모험정신, 무자비성, 강력함, 폭력을 즐김, 손재주, 교활함, 수단이 많고 놀라울 정도로 과감한 성격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정복지에서도 교회 내의 개혁 세력, 즉 잘 교육된 수도승이나 주교들과 손을 잡았다.


더함 성당


노르만이 잉글랜드 켄트에 세운 로체스터 성은 당대 최강이었다. 45m 높이의 이 성벽은 한 번도 공격자의 入城을 허용하지 않았다. 궁전과 요새의 기능을 겸한 런던탑은 새로운 건축 사조를 반영했다. 교회, 궁전, 요새 기능을 겸했는데 영국을 정복한 노르만 왕조의 깊은 신앙심을 잘 드러냈다. 노르망디에도 수많은 수도원과 성을 지었는데, 캉의 채석장이 좋은 石材(석재)를 제공한 덕분이었다. 윌리엄은 잉글랜드를 정복하자 캉에서 석재를 실어 날라 교회와 성을 지었다. 캉의 석재는 ‘영국 교회의 흰 옷’이 되었다.


폴 존슨은 위의 책에서 정복자 노르만 지배층의 안목과 수준을 보여주는 사례로 더함 성당 건축을 들었다. 이 성당 건축을 지휘한 사람은 윌리엄 주교였다. 그는 정복왕 윌리엄의 친구였다. 윌리엄 왕이 1087년에 죽은 뒤 아들 루푸스가 즉위, 주교를 프랑스로 추방하였다. 주교는 3년간 파리와 노르망디의 건축물을 연구하고 돌아왔다. 왕의 신임을 회복한 그는 성당을 짓게 되는데 40년이 걸려 그의 死後에 완공된다. 더함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을 전면적으로 도입, 건물을 크게, 높게 만든 것인데, 건축학적으로 가장 창조적 건물로 꼽힌다.


갈비뼈를 닮은 반원형 천장(the ribbed vault), 飛樑(비량, the flying buttress, 벽을 바깥에서 버텨주는 역할), 뾰족한 아치(the pointed arch)는 이 성당에서 시도된 3대 건축 기법인데, 나중에 고딕 건축으로 이어진다. 그 전 건축물은 자재의 힘에 의존하였는데, 이 성당 이후엔 力學的(역학적) 계산에 의존, 부피를 키우고 창을 넓히고, 벽의 두께를 줄이게 된다.

폴 존슨은 <혁명적 技法을 도입한 건물이지만 전통적 양식 속에서 혁신을 한 것이라 보통 사람들은 급변을 눈치 채지 못하게 된다>면서 바로 이런 점이 노르만 사람들의 천재성이라고 해석했다.


잉글랜드 더함 성당의 길이는 143m, 예배당의 너비는 25m, 높이는 22m, 중앙 탑의 높이는 66m이다. 미국의 소설가 나다니엘 호돈은 더함 성당을 처음 본 감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다리 위에 서서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장면을 보면서 찬양하고 황홀하였다. 성당은 크고, 성스럽고, 달콤한데 그 모든 것이 하나로 되었다. 나는 이처럼 사랑스럽고 대단한 광경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유럽의 성당은 토털 아트


중세 유럽의 성당은 주로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인데, 폴 존슨에 따르면 인류의 예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취이다. 성당은 모든 양식의 예술을 다 포함하는 최대 규모의 토털 아트이다. 그는 사람들이 全생애를 투입, 성당을 찾아가 세밀하게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은 결코 헛된 투자가 아닐 것이라고 했다.
 
이들 중세 성당의 진짜 위대성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근 1000년간! 이렇게 오랜 기간 중단 없이 사용되는 예술품은 달리 없다. 중세에선 한때 국가 재정수입의 약10%가 성당을 짓는 데 투입되었다. 이 돈도 길게 보면 낭비가 아니다. 이들 성당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잘 정비, 관리되어 빛난다. 그런 중세 성당의 태반을 차지하는 로마네스크 및 고딕 성당에 가장 야만적이던 노르만의 손때가 묻어 있다는 점이 흥미로운 것이다.


노르만 戰士들은 어디를 정복하든지 통치와 행정에 뛰어났다. 잉글랜드를 정복한 윌리엄 왕은 1085년에 전국 國富(국부) 조사를 했다. 이 조사보고서는 ‘돔스데이 북(Domesday Book)'이라고 불린다. 전국 13,418 지역의 토지 및 가축 소유 실태, 세금, 軍役, 생활 상태 등이 자세히 기록되었다. 유럽 역사상 가장 치밀하고 정확한 國勢(국세)조사였다. 조사 목적은 課稅(과세)의 근거 자료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이 조사에 의하여 노르만 王朝(왕조)가 잉글랜드의 토지 소유권을 장악,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확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사 대상 지역의 약5분의 1은 왕이 직접 소유하였다. 4분의 1은 교회, 반은 윌리엄 왕의 추종자들이 소유하였다. 해스팅 전투에서 토착 앵글로 색슨 귀족들이 섬멸됨으로써 지배층이 완벽하게 교체되었고 따라서 중앙집권적인 효율성 높은 통치가 가능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남이탈리아를 장악한 노르만 세력도 이 돔스데이 북을 참고로 하여 1100년에 국세 조사를 실시했다. 노르만이 어딜 가든지 건축 붐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중앙집권적, 효율적 행정능력을 바탕으로 개방-실용 정책을 펴 富國强兵(부국강병)에 성공한 餘力(여력)이 있었던 덕분이다.






중세 유럽의 三國志 

서기 900년대 초,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정착한 바이킹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문명화하여 유럽 최강의 騎士(기사)집단이 된다. 해적질을 하던 이들이 騎馬(기마)전술을 발전시켜 보병 중심의 다른 군대를 눌렀다. 1066년 노르망디 공국의 월리엄 공은 잉글랜드로 쳐들어가 해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롤드 왕을 戰死(전사)시키고, 大勝(대승), 그해 성탄절에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였다. 윌리엄 정복왕과 노르만 후손들은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영국을 유럽 최강의 국가로 만든다. 노르만의 영국 정복은 영어와 佛語(불어)를 결합시켜 오늘날 영어가 세계 최고의 언어가 되는 길도 열었다.

이보다 먼저 이탈리아 남부에서도 노르만 전사들의 정복사업이 진행중이었다. 1017년부터 본격화된 정복은 1130년 루제로 2세가 남이탈리아와 시실리를 통일, 왕으로 등극하기까지 100여 년이 걸렸다. 이렇게 세워진 시실리 왕국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富强(부강)한 나라가 된다. 바이킹의 피를 받은 소수의 노르만 전사들, 특히 오트빌(노르망디의 촌락) 출신 탄크레드 家門의 형제들이 지중해 문명의 심장부를 정복해간 이야기는 삼국지처럼 흥미롭다. 유럽에서도 최근에 와서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대목이다.

11세기를 전후한 이탈리아 남부는 교황, 비잔틴, 신성로마제국, 롬바르디(이탈리아 북쪽), 아랍 세력이 각축하면서 여러 도시가 各自圖生(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었다. 노르만 전사들은 처음엔 용병으로 봉사하다가 나중엔 권력을 찬탈하는 방식으로 야금야금 남부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점령해가기 시작하였다.


*999년: 노르만 전사들이 나폴리 남쪽의 도시국가 살레르노를 사라센 해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용병으로 나타난 것이 100여 년에 걸친 남부 이탈리아 정복 사업의 시작이다.

*1017년, 이탈리아 동해안 몬테가르가노의 미카엘 천사 聖所(성소)를 노르만 순례자들이 참배할 때 바리의 롬바르드族(족) 영주 멜수스가 그들을 설득, 아풀리아를 다스리던 동로마제국(비잔틴)의 군대를 공격하도록 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노르만 戰士들은 남부 이탈리아 여러 도시의 傭兵으로 고용되었으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1046년: 오트빌 家門의 로버트 지스카드가 남이탈리아로 와서 먼저 온 형제들과 함께 정복사업에 나서는데, 분열되었던 남이탈리아를 통일하는 主役이 된다. 노르만의 등장에 위협을 느낀 세력들이 1053년에 反노르만 연합전선을 형성한다. 서로 적대적이던 교황, 비잔틴, 롬바르드 세력, 신성로마제국은 일단 노르만의 得勢(득세)를 꺾어야 한다는 데는 共感(공감)한다.


노르만이 교황을 포로로 잡은 시비타테 決戰


1052년 교황 레오 9세는, 독일로 가서 자신의 친척이기도 한 하인리히 3세 황제에게 援軍(원군)을 요청, 약 700명의 스와비아 보병을 얻어 돌아왔다. 1053년 6월 레오 9세는 직접 연합군을 이끌고 노르만 타도에 나선다. 교황 측 연합군은 약 6000명이었다. 보병이 다수고 기병이 보조 역할을 했다. 독일 및 이탈리아 인이 중심이었다. 노르만 전사들도 단결했다. 남부 이탈리아에서 각자 정복 사업을 벌이던 세 사람이 뭉쳤다.

탄크레드와 첫째 부인 사이에서 난 험프리(아풀리아 영주), 둘째 부인 사이에서 난 로버트 기사카르, 아벨사의 영주가 되어 있던 리처드는 약 3000명의 기병과 500명 정도의 보병을 편성했다. 이들은 교황 군대가 비잔틴 제국의 援軍(원군)과 만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早期(조기) 공격을 결단했다. 노르만 군은 식량이 부족하여 굶으면서 전투를 해야 할 판이었다. 그들은 교황에 반기를 든 적은 없으므로 협상을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053년 6월18일 양쪽 군대는 남부 이탈리아 시비타테(Civitate)라는 들판에서 마주 섰다.

노르만 군은 우익에 중무장 기병, 가운데는 말에서 내린 기병과 弓手(궁수), 왼쪽에 기병과 보병 혼합군을 배치했다. 교황 연합군은 왼쪽에 이탈리아 부대, 오른쪽에 스와비아 보병을 두었다.

노르만이 先攻(선공)했다. 우익의 중무장 기병이 교황 측의 이탈리아 보병들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보병은 압도적인 노르만 기병의 돌격에 순식간에 무너졌다.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추격 섬멸전이 전개되었다.

노르만의 中軍(중군)은 교황군의 스와비아 보병과 격돌했다. 스와비아 보병은 큰 칼을 잘 썼다. 사람을 세로로 兩斷(양단)할 정도였다고 한다. 노르만 중군은 스와비아 보병들의 철벽같은 방어진을 돌파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공격을 당해 守勢(수세)로 몰렸다. 이때 이탈리아 보병들을 추적하던 노르만의 중무장 기병이 섬멸전을 끝내고 돌아와 배후에서 스와비아 군을 쳤다. 스와비아 군은 兩面(양면) 공격으로 붕괴, 노르만軍(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노르만 군은 교황이 머물던 시비타테 城門(성문)에 도착, 최후통첩을 보냈다. 항복하면 봐주고 저항하면 주민들까지 몰살시키겠다고 선언했다. 그 뒤 일어난 사태에 대해선 두 가지 說(설)이 있다. 하나는 교황이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城(성)을 나가 항복,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주민들이 살기 위하여 교황을 성문 바깥으로 내몰았다는 說(설)이다.

노르만 군대는 교황을 베네벤토로 데리고 가서 아홉 달 동안 軟禁(연금)시켰다. 나중에 제1차 십자군 전쟁의 선봉이 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노르만은 교황에게 사과하고 융숭한 대접을 하면서도 여러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구원군을 보내줄 것이라 믿고 버티었으나 그들은 오지 않았다. 교황은 마침내 굴복했다. 노르만이 남부 이탈리아의 지배자임을 승인한 것이다. 레오 9세는 풀려난 뒤 곧 죽었다. 1059년 다른 교황 니콜라스 2세와 로버트 기스카르는 멜피(Melfi) 조약을 맺고 노르만의 남부 이탈리아 지배권을 公認(공인)했다. 지스카드를 아풀리아 公, 카라비아 公, 시실리 伯(백)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후 노르만 세력은 교황 편에 선다. 교황의 옹립에도 간여하였다. 당시 교황들은 내부 개혁(신부의 禁婚 등)을 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맞서는데 노르만이 여기에 힘을 실으면서 역사의 大勢(대세)를 탔다.

시비타테 전투는 1066년의 해이스팅스 전투처럼 세계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노르만의 남부 이탈리아 및 시실리 정복 사업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 그동안 각개 약진하던 노르만의 남부 이탈리아 정복 사업은 이 전투에서 공을 세운 기스카르 중심으로 통합된다. 그의 동생 루제로(영어표기는 로저)가 시실리까지 정복하고 그의 아들 루제로 2세가 나폴리 남쪽의 이탈리아와 시실리를 통일한다. 1130년 루제로 2세는 교황으로부터 시실리 왕국의 왕으로 공인받았다. 이 왕국은 나중에 지배자와 이름은 바뀌지만(마지막엔 나폴리 왕국), 700년간 존속되었다.

 

아말피 해안

이탈리아에서 나의 노르만 紀行(기행)은 로마에서 출발, 라벨로, 아말피, 살레르노, 나폴리, 시실리(타오르미나, 노토, 시라큐스, 팔레르모 등)의 경로로 이뤄졌다. 노르만 전사들이 정복하고 통치하면서 남긴 흔적들이 성당, 성, 탑, 모자이크, 전설로 남아 있는 곳이다. 로마에서 남쪽으로 달리는 도로의 왼쪽은 봄에도 눈이 덮인 산맥이 같이 뻗어 있다.

한 시간쯤 지나 높이 500m 쯤의 산꼭대기에 사진에서 많이 보아 친숙한 수도원이 나타났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이다. 6세기에 세워진 베네딕트 수도원의 본산이다. 9세기에 사라센 해적의 공격을 받아 황폐해진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노르만의 영향권 아래 들어간 1071년에 재건되고 알렉산더 2세 교황에 의하여 헌납되었다. 당시 수도원 건축엔 비잔틴 기술자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몬테카시노는 신학 연구와 靈的(영적)인 권위로 하여 교황청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058년 당시 수도원장인 데시데리우스는 나중에 빅토르 3세 교황이 되는데 약200명의 수도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노르만 세력은 이 수도원을 후원했고 수도사 아마투스는 노르만에 아주 호의적인 기록을 남겼다. 1944년 2월15일 미군은 독일군이 숨어 있다고 판단, 이 수도원을 폭격했는데, 독일군은 없었고 수백 명의 피난민이 죽었다. 戰後(전후) 수도원은 재건되었다.

나폴리를 중심으로 한 베수비오스 산, 폼페이 유적, 소렌토 만, 카프리 섬, 아말피~살레르노 해안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의 결합일 것이다. 한국인들은 나폴리의 겉만 보고는 혹평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역사와 문화의 깊이를 들여다 본 뒤엔 겸허해진다. 폼페이 유적을 구경한 다음 산을 넘어 아말피 해안으로 가는 길은 절벽과 협곡을 지난다. 아말피 해안 뒷산에 있는 라벨로라는 작은 산중 마을에서 내려다보는 아말피의 해안 경치가 세계최고라고 평한 사람은 이곳에서 살았던 미국의 소설가 고어 비달이었다.


기사본문 이미지

아말피는 절벽면을 수평 공간처럼 활용하여 도시를 건설하고 미로를 만들어 사라센 해적의 침략에
대응했다. 
 




해안절벽을 깎아 세운 아말피는 10세기 전후 이탈리아의 4대 해양도시(피사, 제노바, 베니스)중 하나로 번영하였다. 이 도시도 12세기 초에 나폴리와 함께 노르만의 지배로 들어갔다. 14세기의 지진으로 도시의 상당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이 그림 같은 도시의 중심에 있는 성당은 노르만-아랍 혼합의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이다. 노르만 전사들이 이 도시를 점령한 뒤 세웠다. 아말피~살레르노 해안도로는 S자 연속의 斷崖(단애) 위를 달린다. 구비를 돌 때마다 “이 순간 브레이크가 고장 나면?”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르만 건축의 대표작인 살레르노의 성당로 로마네스크 건축인데, 56m의 종탑이 유명하다. 아랍과 비잔틴 기술자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여기엔 중세의 가장 위대한 개혁적 교황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그레고리 7세의 무덤이 있다. 그는 왜 로마가 아닌 살레르노에 묻혔는가?





교황과 황제의 갈등


11~12세기 독일의 신성로마 제국 황제는 로마의 교황과 늘 갈등하였다. 교황은 유럽 기독교 세계의 정신적, 종교적 수장인데, 세속 권력 면에서도 힘을 쓰고 싶어 했다. 반면,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교황의 정신적 지도력을 인정하면서도 관할지 교회에 대한 통치권, 특히 인사권을 확보하려고 했다. 당시 교회, 수도회 등 유럽 全域(전역)에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던 교황 지휘하의 가톨릭 조직은 단순한 종교집단이 아니었다. 주교들은 영주처럼 땅을 소유하고 사법권 및 군대를 보유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교황에 복종할 뿐 世俗(세속)권력으로부터는 독립성을 유지하려 했다.

초기의 神聖(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교황과 주교들을 멋대로 교체할 힘이 있었지만 11세기에 들어서면 교회 안에서 개혁운동이 일어난다. 교황 입장에선 세속 권력이 성직자들을 임명하는 한 부패를 청산할 수 없다고 믿었다. 황제가 자격 없는 자들을, 돈을 받고 主敎(주교) 등 성직자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황제 입장에선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는 고위 聖職(성직)에 측근들을 임명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래야 자기 派(파) 사람들을 교회 기관에 취직시킬 수 있었다. 중세 유럽의 가장 큰 행정조직은 가톨릭 교회였고, 일자리도 가장 많았다. 主敎(주교) 임명권은 수많은 일자리를 만드는 인사권을 잡는 것을 뜻했다. 교황과 神聖로마제국 황제는 이 문제에서만은 타협이 어려웠다.

1059년 교황측은 종교회의를 열고, 교회법에다가 추기경 회의가 교황을 선출하도록 규정하여 황제의 영향력을 차단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뽑힌 교황이라야 황제의 측근이 아니라 가톨릭 세계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교황 측은 같은 해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대결할 수 있는 장치를 더 만든다. 로버트 기스카르가 지휘하는 노르만 戰士 집단이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한 것을 公認(공인)해주는 대신 그들로부터 교황에 대한 충성 서약을 받았다. 1066년 노르망디의 윌리엄公이 잉글랜드로 쳐들어갈 때 교황청의 실력자는 親노르만 성향의 힐데브란드(나중에 그레고리 7세)였다. 그는 윌리엄의 로비를 받고는 교황을 움직여 잉글랜드 왕 해롤드를 파문했다. 파문 이유는 해롤드가 윌리엄에게 했던 약속(왕위 양보)을 깼다는 것이지만, 실제론 윌리엄공이 잉글랜드 정복에 성공하면 교황에 절대 충성할 것을 맹세하였고 세속적 영향력의 확대를 노린 교황청의 계산과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헤이스팅스 전투 직전 해롤드는 자신이 파문된 사실을 알고 크게 傷心(상심), 결전 날에는 아주 소극적인 지휘를 하다가 戰死(전사)하였다. 왕이 파문되면 그에게 충성하는 부하들도 같은 벌을 받게 된다. 해롤드는 자신이 파문 당한 사실이 부하들에게 알려지기 전에 서둘러 결전의 날을 잡았다는 해석도 있다. 윌리엄은 잉글랜드 정복이 성공한 이후엔 교황청에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大同團結(대동단결)의 전통이 강한 노르만 전사들은 교황을 이용하는 데 익숙했고 파문도 겁내지 않았다.


카노사의 굴욕


1073년 개혁정신에 불타는 그레고리우스 7세가 새 교황이 되었다. 그레고리 7세는 교황이 되기 전부터 여러 교황의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실력자 역할을 했다. 힐데브란드로 불린 그는 특히 노르만 전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아베르사의 리처드가 제공한 300명의 노르만 戰士(전사)들을 지휘, 베네딕트 10세 반대 교황(antipope)을 몰아내고 니콜라스 2세를 등극시킨 것도 그였다. 1061년 알렉산더 2세를 교황으로 선출할 때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075년 그레고리 7세는 드디어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상대로 대결을 선언한다. 종교회의를 소집, 황제가 주교를 임명하는 것을 금지시킨 것이다. 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하인리히 4세와 그 추종자를 파문하겠다고 경고하였다. 황제가 거부하자 교황은 황제를 파문하고, 황제에 대한 영주들의 충성서약이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南독일의 親교황측 영주들이 들고 일어나, 期限(기한)을 정하여 그 안에 파문이 해제되지 않으면 황제를 폐위시키겠다고 결의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일단 전략상 후퇴를 결심하였다. 1077년 그는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을 넘어와 교황이 묵고 있던 北이탈리아의 카노사 城(성)에 도착했다. 이때의 모습을, 그레고리 7세는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는 아무런 敵意(적의)도 불손한 마음을 보이지 않고서, 자진하여 수 명의 종들을 데리고 내가 묵고 있던 카노사에 왔다. 그는 왕의 복장을 다 벗고는 3일간 성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울면서 再考(재고)를 호소하였다.>

이를 보고 그레고리 교황은 파문을 해제하고 하인리히를 황제로 복직시켰다.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알려진 이 에피소드는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승리를 상징하지만 그 후의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하인리히는 독일로 돌아가자마자 보복에 나선다. 그에 반기를 들었던 영주들을 처단하고 독일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회복한 것은 1080년이었다.

그는 독일에 있는 교회 성직자 회의를 소집,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폐위를 결의하게 하고, 이듬해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황제는 그레고리우스를 쫓아내고 꼭두각시 교황을 세웠다. 3년간 이탈리아에선 교황군과 황제군이 死鬪(사투)를 벌였다. 황제군은 1084년에 수개월간 로마를 점령했고, 교황은 로마 내의 요새인 상안젤로 성으로 피신, 저항하였다. 이때 남쪽에서 기스카르가 지휘하는 노르만 援軍(원군)이 도착, 황제군은 저항도 하지 않고 로마에서 물러갔다. 로마를 탈환한 노르만군은 시내를 약탈하였다. 로마 사람들은 화가 나서 교황을 미워하게 되었다. 노르만군이 철수할 때 교황도 더 머물 수가 없게 되어 노르만군을 따라나섰다. 그는 노르만이 지배하던 살레르노로 피신, 다음해(1085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이 위대한 개혁 교황은 죽은 뒤 살레르노 성당에 안치되었다. 이 성당은 1076년에 로버트 기스카르가 기공, 1084년에 그레고리 7세에 의하여 봉납되었다. 살레르노 대성당의 그레고리 7세 모비명은 '나는 정의를 사랑하였고 부정을 미워하였으므로 망명 중에 죽는다'이다.


무법자들이 법치와 문명을 건설하다

하인리히 4세도 勝者(승자)가 아니었다. 친교황측 영주들이 독일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후임 교황들은 이들을 지원하였다. 황제는 이탈리아에서 얻은 성과를 유지할 수도 없었다. 1106년 그는 파문당한 상태에서 사망하였다. 1122년 독일의 보름스에서 교황과 황제측이 타협했다. 독일에서 성직자 선출은 교회법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다만, 황제나 황제의 대리인이 참석,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황제와 교황의 대결에서 일단 승리한 쪽은 교황이었다. 황제의 성직자 임명권을 제한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역대 황제들은 교황과 대립,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하느라고 정작 본거지인 독일 내부의 통치는 소홀히 하였다.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영국에선 중앙집권적 王權이 강화되어 가는데도 독일은 여러 도시와 公國(공국)으로 분열되어 통일국가를 만들지 못하였다. 그런 사정은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럽에서 정치적 후진국이 되는 길이 열린 셈이다.

이런 가운데 남부 이탈리아와 시실리를 정복, ‘시실리 왕국’을 만든 노르만 전사들은 유능한 행정가로 변신, 이 왕국을 당시 유럽에서 가장 번성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비잔틴과 아랍 사람들에게 종교와 通商(통상)의 자유를 허용하고, 문화와 예술 진흥의 후원자가 되었다.

노르만이 남부 이탈리아와 시실리를 통일하는 데는 100여 년이 걸렸는데, 마무리를 한 이는 로버트 기스카르, 그의 동생 루제로(영어론 로저) 1세, 그의 아들 루제로 2세였다. 기스카르는 한때 지금의 크로아티아 지방까지 공략, 비잔틴을 정복하려고 했다. 시실리 왕국은 전성기엔 북아프리카도 점령했다. 기스카르의 아들과 윌리엄 정복왕의 아들은 1차 십자군의 선봉이었다. 노르만 전사들은 전투의 귀신이었지만 통치의 達人(달인)이기도 했다.

이탈리아 남부에 남아 있는 수많은 노르만-로마네스크 식 성당, 궁전, 성, 모자이크 등이 이들의 예술적 안목과 지배자로서의 수준을 보여준다. 서기 800년경에 시작된 바이킹의 해적질과 약탈은 서기 900년경부터는 노르만 시대로 넘어갔다. 노르망디에서 실력을 쌓은 戰士(전사)집단은 정복사업에 나서, 잉글랜드의 노르만 王朝와 시실리 왕국을 거의 동시에 탄생시켰다. 문명파괴로 시작한 바이킹 시대는 노르만 시대를 거치면서 문명건설로 마무리된다. 유럽을 무법천지로 만들었던 그들이 법치를 발전시킨다. 세계사에서 보기 힘든 위대한 逆轉(역전)이었다.



‘지중해의 진주’ 시실리의 엄청난 역사

이탈리아를 여행하면 한국에서 교과서로 알았던 역사와 현지에서 알게 되는 역사가 달라 혼란에 빠진다. 이탈리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 文明(문명)-로마와 르네상스의 고향이지만 현재의 이탈리아라는 국민국가는 1861년에 반도가 통일되면서 建國(건국)되었으니 매우 젊다.

서기 5세기에 西로마가 무너진 후 19세기까지 1400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는 한 국가나 王朝(왕조) 아래로 통합된 적이 없다. 여러 王國과 公國(공국)과 도시국가, 그리고 교황 직할령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런 분열상이 프랑스, 독일, 스페인, 비잔틴, 아랍, 노르만 등 외세의 침략과 개입을 불렀다. 이탈리아가 통일되기 전에 이 반도에서 가장 큰 나라는 11~12세기 노르만의 정복사업에서 비롯된 나폴리 王國(왕국)이었다. 로마 남쪽의 반도와 시실리를 다스린 나라였다. 이 왕국의 수도는 초기엔 시실리의 팔레르모, 나중엔 나폴리였다.

11세기 이후 '시실리 왕국', '두 개의 시실리 왕국', '나폴리 왕국' 등으로 불렸다. 나폴리 이남의 이탈리아 반도와 시실리는 고대 문명이 꽃핀 그리스, 이집트, 중동, 지중해와 인접하여 늘 유럽 文明(문명)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지중해의 진주' 같은 시실리는 여러 번 다양한 민족과 文明이 거쳐 가고 섞이고 쌓인 곳이다. 시실리 여행을 하면 장대하고 풍요로운 자연(특히 지금도 噴火하는 에트나 화산)을 배경으로 明滅(명멸)해갔던, 여러 민족이 남긴 문명의 다양성에 경탄하면서 역사의 무게 앞에서 겸허해진다. 기원 전 8세기부터 그리스 사람들이 시실리에 건너와 동쪽의 시라쿠사 등 도시국가를 만들었다.

아프리카 北岸(북안, 지금의 튀니지)에 살던 카르타고 人들도 몰려 와 서쪽에 정착하였다. 시실리의 州都(주도)인 팔레르모는 카르타고 사람들이 개척한 식민지였다. 카르타고-로마의 결전인 포에니 전쟁을 거치면서 시실리는 로마 지배로 넘어갔다. 시실리는 지금이나 그때나 농산물과 수산물 생산량이 많았다. 5세기, 西로마 제국이 무너지는 틈을 타서 라인 강 동쪽에 살던 게르만족이 침범한다.

게르만족의 선두 주자 반달족, 고트족이 이 섬을 점령하고 약탈하더니 6세기엔 지금의 이스탄불(당시는 콘스탄티노풀)에 수도를 둔 東로마제국(비잔틴)이 시실리를 탈환, 다시 기독교권으로 흡수되었다. 9세기 초부터는 중동을 석권한 사라센(이슬람 세력) 군대가 아프리카로부터 이 섬을 공략하기 시작, 827년엔 팔레르모를, 878년엔 시라쿠사를, 902년엔 타오르미나를 함락시켜 全島(전도)를 이슬람화한다. 이슬람 지배자들은 유태인과 기독교인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고 상공업을 장려, 시실리는 中世(중세)암흑기에도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노르만의 팔레르모

노르만이 팔레르모를 점령한 1072년부터 프랑스 안주家가 시실리 왕국의 통치권을 장악한 1268년까지의 약 200년간은 노르만系(계)의 지배 기간인데, 당시 유럽의 가장 역동적인 문명국가는 프랑스와 시실리였다. 시실리의 노르만 왕조는 세계사에서 굵게 기록되는 두 명의 名君(명군)을 배출하였다. 루제로 2세와 신성로마제국의 페데리코 2세 황제(半노르만·半독일 계).

<태양의 왕국(The Kingdom in the Sun)>이란 책을 쓴 영국의 존 율리우스 노르위치는 이렇게 묘사했다.

<루제로 1세는 이곳에서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통합이라고 생각했다. 2등 국민은 없어야 한다고 믿었다. 모든 사람들이, 노르만이든 이탈리아인이든, 롬바르드 사람이든 그리스인이든, 심지어 사라센이든 모두가 새 나라에서 할 역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랍말, 그리스말, 라틴어, 그리고 노르만의 프랑스어를 같이 쓰게 하였다. 아랍 사람들의 용어인 ‘팔레르모의 에밀’이란 말도 바꾸지 않고 그 官職(관직)에 그리스 사람을 임명했다. 재정 책임자는 사라센 사람이었다. 모스크엔 사람이 붐볐고, 라틴 및 그리스 성당이 많이 생겼다. 아랍사람들로만 편성된 부대도 운영했는데 충성도와 軍紀(군기)가 셌다. 평화가 무역을 활발하게 했다. 해적들을 몰아내니 해운이 발달했다. 1101년 그가 죽었을 때 시실리 왕국은 복합적인 종교와 언어와 인종을 포용하면서도 기독교 지도자에게 충성하는 나라가 되어 있었다. 지중해에서 가장 번영하는 나라의 길이 열렸다.>

아랍인 지리학자 이드리시는 <팔레르모처럼 장대하고 화려한 건축물이 가득 찬 도시는 없고, 팔레르모의 정원만큼 아름다운 경관도 없다>고 칭송했다. 北유럽의 야만인이 지중해의 문명인이 된 것이다.


두 성당의 전투

남이탈리아와 시실리를 정복한 노르만 전사들이 세운 시실리 왕국은 수도를 팔레르모로 정했다. 역사적 권위가 느껴지는 이 도시는 마피아가 내부 규율을 잡아서 그런지 소매치기 등 좀도둑의 준동이 덜하다고 한다. 팔레르모 오페라 극장에 가서 베르디의 ‘나부코’를 구경하였는데, 정장을 하고 온 상류층의 인상은 이탈리아라기보다는 北歐(북구)나 독일 분위기였다. 사람들의 몸이 크고 금발이 많았다. 노르만의 혈통을 받은 이들이 아직도 상류층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팔레르모엔 노르만 양식의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노르만 궁전 안에 있는 예배당의 화려한 모자이크, 팔레르모 성당과 몽레알레 성당의 로마네스크 양식은 서양 미술사에 늘 기록되는 문화유산이다. 이 세 곳을 다 둘러본 인상은 개방, 육중, 多樣(다양), 그리고 관용과 풍성함이다. 가톨릭, 비잔틴, 이슬람의 건축과 예술이 융합된 덕분이다. 노르만 식 강건함과 지중해 식 화려함이 조화를 이룬다.

팔레르모 성당은 노르만 왕조 시절인 1184년에 기공된 이후 700년간 증개축을 이어갔다.

노르만 로마네스크 양식을 바탕으로 하여 고딕, 스페인, 이슬람, 바로크, 신고전주의 양식이 더해졌다. 건축사의 흐름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더구나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성당이다. 한 도시를 대표하는 성당은 하나가 원칙인데 팔레르모엔 두 개가 있다. 팔레르모 성당과 근교의 몽레알레 성당. 팔레르모 성당의 대주교는 교황의 지원을 받아 노르만 왕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는데, 노르만 왕은 그를 견제하기 위하여 몽레알레 성당을 따로 지었다. ‘두 성당의 전투’라고 불린다.

팔레르모 성당엔 노르만 왕조의 전성기를 열었던 루제로(영어로는 로버트) 2세, 그의 딸 콘스탄스, 그의 남편 하인리히 4세(신성로마제국 황제), 두 부부의 아들 페데리코 2세(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무덤이 있다. 石棺(석관)앞에 서면 12세기 전후 유럽 역사를 대표하는 노르만 계통의 두 名君(루제로 2세, 페데리코 2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르네상스적 인간형이었다.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고, 종교적 차별을 거부하였으며, 법치를 세우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주로 교황권과 맞섰다.


가톨릭과 이슬람과 비잔틴을 융합한 노르만 예술

팔레르모 시내 한복판에, 루제로 2세가 12세기에 지은 요새 형 궁전이 있다. 州(주) 청사로 쓰이는 이 건물은 시실리 지배층의 역사를 이어간다. 카르타고-로마 식 요새 터 위에 아랍 인들이 자신들의 요새를 세웠고, 노르만이 새로운 지배자가 되자 그 요새를 넓히고, 화려하고 육중한 궁전을 올린 것이다.

이 건물 안에 ‘궁전 예배당’(Cappella Palatina)을 지어 봉납한 이는 루제로 2세였다. 코린트 식 화강암 기둥에 의하여 세 神廊(신랑)으로 구분된 聖所(성소)의 벽을 장식한 모자이크가 눈부시다. 金箔(금박) 배경에다가 비잔틴 양식의 이미지와 아랍 양식의 디자인으로 성경 이야기를 표현하였다. 한 지붕 안에서 당시 유럽의 3대 세력이었던 이슬람, 가톨릭, 비잔틴의 문화와 종교가 융합하고 조화를 이룬 점에서 예술의 목표를 다한 건물이란 평가를 받는다.

루제로 2세와 페데리코 2세가 이 궁전의 주인공이었을 때 팔레르모는 유럽에서 가장 자유롭고 번영하는 문화의 중심지였으나 永續(영속)되지는 못했다. 지배층이 안주, 아라곤, 스페인으로 바뀌면서 노르만 식 개방과 관용의 문화가 사라져 갔고 이는 시실리의 오랜 쇠락을 뜻했다. 노르만 지배층은 우수한 제도를 안착시키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뿌리를 내리게 할 중심 세력이나 사회적 토양이 없었다. 반면 잉글랜드에선 노르만 정복자들이 프랑스의 선진된 제도를 가져와서 토착 앵글로-색슨族(족)의 제도와 융합시키는 데 성공, 노르만의 우수성이 이어질 수 있었고, 대영제국의 번영으로 결실되었다.


기사본문 이미지
몽레알레 성당(촬영: 韓五洙)


 


기사본문 이미지

성당에 붙은 수도원의 회랑

 


기사본문 이미지

성당을 바치는 굴리에모 2세像




시대를 앞서간 페데리코 2세

팔레르모 근교 山麓(산록)에 있는 몽레알레 대성당은 노르만 왕조의 굴리에모(영어론 윌리엄) 2세가 세운 것이다. 노르만-비잔틴-아랍식이 혼합된 건축물이다. 13세기 말에 단기간에 완성되었다. 굴리에모 2세가 적극적으로 후원한 덕분에 공사기간이 단축되었다.

굴리에모 2세는 라틴어, 아랍어 등에도 능통하였고, 인문적 교양이 풍부한 온후, 관용, 경건한 성품의 왕이었다. 교황권의 대리자인 팔레르모 대주교가 앉아 있는 팔레르모 대성당이 있는데도, 왕이 나서서 같은 圈域(권역) 안에 또 대성당을 지은 데는, 교황의 간섭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몽레알레 대성당 벽면엔 6340 평방미터에 걸쳐 비잔틴 풍의, 성서 이야기를 소재로 한 모자이크 그림이 장식되어 있다.

천지창조에서부터 베드로의 십자가刑까지 수많은 에피소드를 그린 것이다. 중세 때는 일반 신도가 성경을 읽을 수 없었으므로 신부가 이 그림들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하였을 것이다. 성당을 '돌에 새긴 성경'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 성당에서 실감할 수 있다. 굴리에모 2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棺을 이 성당에 모셔 권위를 더했다. 노르만 왕조의 마지막 왕은 굴리에모 2세(영어론 윌리엄 2세)인데, 아들이 없어 고모 콘스탄스(할아버지 루제로 2세의 딸)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시실리 왕국의 노르만 왕조는 150여년 만에 代가 끊어졌다.

콘스탄스는 독일 스와비아 왕조 출신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바바로사의 장남 하인리히와 결혼하고, 바바로사가 죽자 하인리히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하인리히 6세) 및 시실리 왕으로 등극했다. 콘스탄스는 아들을 낳는데, 페데리코 2세(영어로는 프레데릭, 독일어로는 프리드리히 2세)였다. 독일과 이탈리아 북부 및 지금의 체코, 네덜란드, 헝가리 등지를 관할지역으로 삼았던 신성로마제국은 중앙집권화된 적이 없었다. 느슨한 제후국 연합체였다.

이 신성로마제국에 대하여 18세기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신성하지도, 로마답지도, 제국 같지도 않다'고 조롱한 바 있다. 페데리코 2세는 독일을 멀리하고 시실리에 머물면서 이탈리아 반도 전체의 통일을 시도하였다. 이탈리아 통일은 교황권과 교황 직할령을 정리하고 외세의 개입을 차단하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다. 페데리코의 통일 꿈은 600년 뒤에야 현실이 된다. 시대를 앞서간 영웅이었다.

 


기사본문 이미지

나폴리-시실리 페리船에서 찍은 에트나 火山
 

기사본문 이미지

시실리의 타오르미나에서 바라본 山頂 도시 카스텔 몰라. ‘어금니’란 뜻이다.





우리는 흔히 좋은 경치를 보면 “그림 같다”는 말을 한다. 3월 중순 시실리의 동해안 도시 타오르미나의 그리스 극장 관람석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을 때 무심코 나온 말이기도 하다. 청명한 하늘, 정면엔 연기를 내뿜는 에트나 화산의 꼭대기(3300m)가 보였다. 왼쪽으로는 높이 200m의 해안 절벽 위에 만든 2700년 역사를 가진 도시 타오르미나, 그 뒤편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쌓은 성벽과 ‘어금니’라는 뜻을 가진 山頂 마을 카스텔 몰라. 타오르미나에서 내려다 본 이오니아 海의 색감은 코발트 블루이다. 여러 번 빤 청바지 색깔이다.

양쪽에 늘어선 상점들과 교회를 지나 약 1.5km인, 타오르미나 중앙로를 걷다가 절벽 위에 조성한 작은 광장에 섰다. 낙차 약 150m 아래 해안의 모래사장이 빛난다. 타오르미나는, 보는 이들의 뇌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映像(영상)을 남긴다. 화산, 바다, 해안, 절벽, 유적, 마을, 교회, 수도원, 城砦(성채), 하늘, 꽃밭이 어우러진 에덴동산의 이미지이다. 나는 16세기 수도원을 개조한 상 도메니코 팰리스 호텔에서 묵었다. 절벽 위에 있는데 영화 '그랑 블루'의 무대가 된 호텔이다. 타오르미나 해안에서 벌어진 세계 프리 다이빙 대회에 참석한 선수단이 머무는 곳으로 나온다. 

타오르미나를 유럽의 인기 관광지로 만든 이는 독일 화가 오토 겔렝과 文豪(문호) 괴테이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타오르미나의 경관을 격찬하였다. 베를린이 고향인 게렝은 나이 스무 살 때 시실리를 여행하다가 타오르미나에 매혹되어 겨울을 지내면서 이 도시의 환상적 모습을 畵幅(화폭)에 담아 가 독일과 프랑스에서 전시하였다. 그림을 본 유럽의 미술 평론가들은, “空想(공상)이 심하다”고 비판하였다. 겔렝은 “타오르미나를 가보라. 만약 내가 과장을 하였다면 경비를 물겠다”고 선언하였다.

타오르미나는 감수성이 좋은 많은 예술가, 문학가들을 끌어들였다. 특히 방랑벽이 있는 사람들이 이 도시에 머물면서 그들의 인생을 바꿀 작품을 남겼다. 영국의 D.H. 로렌스와 미국의 트루먼 카포테는 ‘폰타나 베키아’라는, 17세기 빌라에서 장기 투숙하면서 작품을 썼다.

택시를 타고 산길을 달려 ‘어금니’ 城(카스텔 몰라)에 도착했다. 해발 600m를 넘는 산이라 에트나 화산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 산꼭대기 마을에도 성당, 호텔, 그리고 맛있는 커피점이 있다. 골목을 걸어가다가 LG 상표가 붙은 에어컨을 발견했다. 이젠 한국인이 노르만처럼 세계를 싸돌아다닌다는 증표였다.



기사본문 이미지

그리스 극장에서 본 타오르미나. 타오르미나 뒷산의 꼭대기엔 노르만 山城(산성)이 있다. 
 

기사본문 이미지

2500년 간 종교 시설로 계속 사용되는 시라쿠사 성당(촬영: 韓五洙)


 






편안한 시라쿠사 성당

기원전 480년 카르타고의 공격을 물리친 시라쿠사 왕의 명령에 따라 아테네 신을 모시는 도리아式 神殿(신전)이 교회 자리에 세워졌다. 기원 전 415년 펠로포네소스 전쟁 때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편에 선 시실리의 시라쿠사를 공격하였다가 패전한다. 기원 전 398년 플라톤이 시라쿠사를 방문, 이상향이라고 칭찬했다. 사도 바울은 로마로 선교 여행을 할 때 시라쿠사에 도착, 기독교를 시실리에 소개했다. 기독교 공인 후 그리스 신전은 교회 건물로 개조된다. 시실리는 로마 멸망 후 반달, 고트족의 공격을 받다가 東로마제국, 즉 비잔틴의 지배로 넘어갔다. 서기 878년 아랍이 시라쿠사를 점령, 이 교회 건물을 모스크로 改造하였다. 1085년 노르만이 아랍세력을 몰아내고 시라쿠사를 수복한 뒤 모스크를 성당으로 바꾸었다. 성당의 관할권은 로마 교황으로 넘어갔다. 노르만은, 성당을 확장, 木造(목조)지붕을 올리고, 모자이크를 붙였다. 1693년 대지진 때 많이 부서져 正面(정면)을 바로크 양식으로 바꾸었다. 2500년간 중단 없이 그리스 신전, 이슬람 모스크, 기독교의 교회로 사용된, 역사의 숨결이 멈추지 않는 건물이다. 일본인 역사 저술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 멸망 후 지중해 세계'라는 책(한길사)에서 시라쿠사 성당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시라쿠사 성당은 기독교 교회로 돌아간 뒤에도 아랍 색채가 전혀 보이지 않고, 교회가 되기 전에 古代 신전이었던 前歷(전력)이 지금도 압도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강력하게 다가온다. 시라쿠사는 기독교 세계가 되든 이슬람에 굴복하든 상관없이 고대 그리스를 줄곧 질질 끌면서 살아왔다는 느낌이 든다. 고대 그리스 조각처럼 쓸데없는 요소를 모두 제거한 뒤에 흐르는 고요함과 편안함으로 가득 차 있다.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밖에 없는데도 더 없는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다. 이런 느낌의 서재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마음을 사로잡았다.>

軍事(군사)에 취미가 있는 필자가 노르만 紀行에서 가장 편안하게 느낀 곳은 ‘달걀城’이란 뜻을 가진 나폴리 만의 카스텔 델오보 海城(해성)이었다. 시실리 왕국의 전성기를 연 루제로 2세가 12세기 초, 나폴리를 점령한 뒤 지은 성인데, 수백 명이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우람한 城砦(성채)이다. 루제로는 한때 이 성에 머물렀다. 파도를 맞으면서 버티어온 당당한 성벽을 바라보니 바다에서 기른 힘으로 문명을 파괴하다가 기독교화한 이후엔 문명 수호자로 돌변한 바이킹의 이미지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본문 이미지

나폴리의 노르만海城 카스텔 델오보의 성벽
 


바이킹의 法


기사본문 이미지

스웨덴 고틀란드에서 발견된 바이킹 그림. 피의 독수리 방식의
사형 집행 장면이 새겨져 있다.   


 





 

미국 히스토리 채널의 연속 드라마 ‘바이킹’엔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오지만 史實(사실)에 충실하다. 특히 그들의 독특한 법의식이 잘 표현되었다. 바이킹-노르만은 정복지를 잘 다스려 一流 국가로 만드는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 이들이 다스린 나라들은 예외 없이 부국강병의 법치국가가 되었다. 잉글랜드, 시실리 왕국,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등. 그런 비결의 핵심은 이들의 法治(법치) 정신이었다. 야만 상태에서도 法的(법적) 제도와 전통을 유지, 발전시켜간 점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바이킹-노르만의 法(법)에 대한 관점이 독특했다. 그들은 법을, 正義(정의)를 구현하는 수단으로 보지 않았다. 공동체를 유지하는 질서로 여겼다. 그들의 법 집행은 증거와 證人(증인)을 重視(중시)하고, 매우 실용적이었다. 바이킹은 나쁜 행위가 반드시 나쁜 사람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殺人(살인) 행위에 대한 처벌도 슬기롭게 했다.  

사람을 죽여 놓고도 일정한 時限(시한)에 자수하면 정상을 참작하였다. 바이킹 법은 살인한 자는 행위를 한 뒤 만나는 첫 번째 사람에게나, 세 집을 지나치기 전에 자수를 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살인을 한 뒤 적절한 조치를 취하였을 경우엔 추장이 재판장 역할을 하는 주민회의에서 피살자 가족에 대한 배상을 하는 조건으로 死刑(사형)을 면제해주기도 했다.  

사람을 죽이고도 신고하지 않거나 밤에 몰래 죽이는 행위는 용서하지 않았다. 바이킹은 善과 惡보다는 명예와 수치심을 法治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정정당당한 행동을 했느냐의 與否(여부)가 유무죄를 판단하는 데 잣대가 되었다. 예컨대 누군가가 사고를 만나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가족에게 알리지 않은 행위는 살인죄에 준하여 처벌했다. 회식 장소에서 살인이 벌어지면 모든 참석자들은 가해자를 체포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 의무를 다하지 않은 자는 피살자 유족들에게 배상해야 했다. 도둑질을 하다가 발각된 절도범은 죽여도 죄가 되지 않지만 강도를 죽여선 안 된다. 절도는 피해자 몰래 하지만 강도는 面前(면전)에서 이뤄지므로 피해자에게도 최소한의 방어 수단은 보장된다고 판단한 결과이다.  

사소한 절도에 대한 처벌법은 통로를 만들어 지나가게 해놓고 마을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것이었다. 이 집단 폭행에서 빠지는 주민에겐 벌금을 물렸다. 범죄자 처벌을 공동체의 의무로 규정한 것이다. 從北세력에 대해서도 한국인이 이런 法的 의무를 지도록 하면 문제 해결이 쉬울 것이다.  

법치엔 王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천재지변이 잦고 농사를 망치고 바다에서 물고기가 잡히지 않아 주민들이 굶게 되면 神(신)에게 황소를 잡아 바쳤다. 효과가 없으면 산 사람을 祭物(제물)로 바쳤다. 이것도 소용이 없으면 왕을 祭物(제물)로 바쳤다.





‘피의 독수리’ 刑 

바이킹은 ‘피의 독수리’라는 잔인한 死刑(사형) 집행 의식을 유지하였다. 바이킹이 남긴 詩와 그림에 소개된 방법은 이렇다<히스토리 채널 시리즈 ‘바이킹’에선 그 장면이 생생하게(처참하게) 재연되었다.> 이 사형 방식은 왕이나 주교, 또는 추장과 같은 자가 重罪(중죄)를 범했을 때 적용하였던 것 같다.  

사형수의 등을 칼로 갈라 가죽을 벗기고, 등뼈를 드러낸다. 갈비뼈를 부러뜨려 날개처럼 펼친다. 상처엔 소금을 뿌린다. 허파를 등 뒤로 잡아 당겨 어깨 위에 얹어 놓는다. 이 모습이 ‘피로 그린 독수리’와 비슷하다고 한다. 이렇게 칼질을 해도 사형수는 비명을 지르지 않아야 한다. 입을 다물고 침묵으로 버티면서 죽어야 오딘 神(신)을 만날 수 있다. 한번이라도 소리를 질렀다가는 죽어서 좋은 데를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잉글랜드의 캔터베리 대주교, 잉글랜드의 노슴브리아 왕, 노르웨이의 왕자가 이런 형을 받아 죽었다고 전한다.  

노르만 戰士(전사) 집단의 이탈리아 남부 정복 역사를 다룬 책 ‘南의 北人’(The Normans in the South, 1016-1130) 著者(저자) 존 율리우스 노르위치(John Julius Norwich)는 유럽에서 無法(무법)천지를 만든 노르만과 바이킹이 法治를 세우는 일에 전념하였다는 것은 하나의 파라독스라고 표현했다. 아무리 파렴치한 노르만 지배자라도 아주 독창적인 법과 제도를 만들어내곤 하였다는 것이다. 노르만 戰士들은 국가를 세우는 데는 법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법치를 강화하는 것이 정권을 강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계산하였다.

이들은 법을 도덕적으로 보지 않고 실용적으로 인식하였다. 잉글랜드의 노르만 왕 헨리 2세와 시실리의 노르만 王朝 건설자 루제로 왕은 치밀한 법적 제도를 갖추는 데 총력을 경주하였다. 그들은 법을, 관념적 理想(이상)이나 正義(정의)라고 착각하지 않았다. 노르만은 법을 주인이 아니라 노예로 여겼다. 노예는 튼튼할수록 도움이 된다. 법치도 튼튼하게 만들어야 지배자와 공동체에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 야만의 바이킹이 유럽 문명의 위대한 遺産(유산)인 法治에 기여하였다는 것은 세계사에서 가끔 발견되는 경이로운 逆轉劇(역전극)의 한 幕(막)이다.







*현기증 나는 시실리의 역사



유럽문명의 십자로인 지중해의 섬 시실리는 대강 15개 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페니키아, 그리스, 카르타고, 로마, 비잔틴, 아랍, 반달, 고트, 노르만, 프랑스, 독일, 스페인, 오스트리아, 영국, 이탈리아. 이들이 남긴 다양한 양식의 성당, 신전, 성채, 도시 등이 수려한 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다. 무대 장치의 중심은 3300m의 에트나 화산, 늘 연기를 내뿜는다. 유적의 密度(밀도), 문화의 다양성, 자연경관의 수려함을 합산하면 이곳이 아마도 세계 최고의 관광지일 것이다.

 

시실리의 역사 年表(연표)를 본다.

 

1. 기원 전 900-700: 아프리카 튀니지 지방에 살던 카르타고(페니키아) 사람들이 미케네 사람들을 밀어내고 정착.

2. 기원 전 750-215: 그리스인들이 시실리로 건너와 도시를 건설한다. 시라쿠사, 타오르미나, 엘리체, 아그리젠토 등. 올리브와 포도, 그리고 무역으로 번성했다. 아그리젠토와 시라쿠사 연합군이 기원 전 480년에 카르타고 군을 무찌르고 황금기를 연다. 기원 전 415-413년에 그리스 본토에서 아테네 군이 시라쿠사를 쳐들어왔다가 패배, 7000명이 포로가 되어 노예가 된다. 시실리엔 그리스 유적이 많다.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비잔틴도 그리스 문화였으므로 시실리의 문화적 토양은 기본이 그리스이다.

 

3. 기원 전 264-211: 카르타고-로마 사이의 포에니 전쟁에 휘말린다. 로마군이 카르타고 세력을 몰아내고, 시실리의 지배자가 된다.

4. 기원 전 218-기원 후 468: 로마 시대. 이때 만들어진 유적들이 로마 대저택과 바닥 및 벽화(Villa Romana del Casale at Piazza Armerina), 타오르미나의 로마식 극장, 카타니아의 로마 극장과 원형 경기장 등이다.


5. 기원 후 468-476: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이 北아프리카에서 쳐들어왔다.

6. 기원 후 476-535: 게르만 東고트족이 시실리를 지배한다.

7. 기원 후 535-827: 그리스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비잔틴(동로마제국)이 약 300년 간 지배. 시실리에 그리스 문화의 발자취를 덧 씌웠다. 663년엔 잠시 시라쿠사가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 콘스탄틴노플을 대체하기도 했다. 700년 무렵부터 아랍의 침공이 시작된다.

 

8. 기원 후 827-1061: 아랍 지배로 들어갔다. 스페인으로 진출한 아랍군과 北아프리카에서 온 베르베르족 등의 연합군 1만 명이 상륙, 832년에 팔레르모를 점령, 수도로 정했다. 아랍 지배 하의 팔레르모는 세계에서 가장 다양하고, 번성한 문화, 通商(통상)의 도시였다. 종교적 관용, 낮은 세금 덕분이었다. 878년엔 시라쿠사까지 점령, 시실리 전체가 아랍 치하로 들어갔다.


9. 1060-1194: 노르만 시대. 1059년 교황 니콜로 2세는 프랑스 노르망디의 오트빌 家門(가문)의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한다. 조건은 노르만인들이 비잔틴 제국의 침입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1064년에 오트빌 가문의 루제로가 이끄는 노르만 군대가 시실리의 메시나에 상륙한다. 아랍이 비잔틴 세력과 싸우기 위하여 도움을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노르만은 시실리의 지배자인 아랍 세력을 굴복시켜나갔다. 1071년엔 수도 팔레르모를 점령했다. 소수였던 노르만은 개방적이고 너그러운 통치를 했다. 비잔틴(주로 그리스계) 기술자들과 아랍의 관료체제를 결합시켜 시실리를 효율적으로 관리한다. 아랍과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아랍 말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어로 교체되고, 교회의 구조는 라틴화되어 그리스 영향력이 점차 감퇴한다.

시실리엔 노르만 지배 시절에 건설된 궁전, 성당, 城들이 많다. 팔레르모 일대의 노르만 궁전과 대성당은 세계적인 문화재이다. 시실리 全域(전역)에 세워진 노르만 성과 요새는 규모가 크다. 노르만은 점령하는 곳(영국, 나폴리, 시실리, 노르망디 등)마다 거대한 성과 성당을 지었다. 그들은 파괴자로 시작하여 건설자가 되었다.

기원 전 1130-1154년 사이 시실리 왕 루제로 2세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노르만 왕국은, 시실리, 남이탈리아, 말타, 북아프리카, 중동에 걸쳐 영토를 확대하였다. 기원 전 1154-1166년 굴레모 1세(영어로는 William I), 1166-1189 굴레모 2세 때 노르만 왕국은 전성기를 맞는다. 굴레모 2세가 팔레르모 근교에 세운 몽레알 성당은 노르만 건축의 대표작이다. 1189-1194 년 사이, 노르만 왕국은 굴레모 2세의 사망 이후 분열되더니 독일의 호헨스타우펜 왕가로 넘어갔다.

 

10. 기원 후 1194-1266: 호헨스타우펜 가문의 지배시절. 중세 유럽의 名君 중 한 사람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데리코 2세(영어로는 프레데릭, 독일어로는 프리드리히 2세)를 배출하였다. 


11. 1266-1282: 프랑스 앙주 公家(공가)의 지배. 앙주는 시실리 사람들을 탄압하다가 1282년 부활절 때 민중봉기가 발생, 시실리에서 추방된다.

 

12. 1282-1516: 스페인 아라공 왕국이 시실리 귀족들의 초빙을 받아 앙주를 대신하여 시실리를 지배하지만 남부 이탈리아는 여전히 앙주 支配(지배)를 받았다. 시실리는 이탈리아 본토 및 유럽 문명과 단절되면서 쇠락하기 시작한다. 노르만은 시실리와 이탈리아 남부를 합쳐서 시실리 왕국으로 다스렸는데, 아라공 가문은 부활절 폭동 이후 시실리만 통치하였고, 남부 이탈리아는 계속 앙주 가문의 지배를 받았다. 1492년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스페인은 시실리에 대한 관심이 약해졌다. 부패한 관료, 가혹한 종교재판이 시실리의 특징이었던 관용과 개방성을 파괴해갔다.

 

13. 기원 후 1516-1713: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리던 스페인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스페인은 시실리를 착취하였고, 폭동이 빈발하였다. 1669년엔 에트나 화산이 폭발, 카타니아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1693년의 대지진 후 도시를 재건할 때 노토, 라구사, 시라쿠사 등에는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바로크 건축물을 지었다.

14. 1713-1720: 스페인이 시실리 통치권을 사보이 가문에 넘겨주었다. 1720년, 사보이 가문은 시실리를 오스트리아에 넘기고 사르디니아를 얻었다.

15. 1720-1734: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 지배.

16. 1734-1806: 부르봉 王家(왕가)의 스페인이 다시 시실리를 지배한다. 1799년 나폴레옹이 나폴리를 침략하니 페르디난드 왕은 시실리로 달아났다. 영국의 넬슨이 돕는다.

17. 1806-1815: 영국이 시실리를 통치, 양원제 의회를 설립하고, 봉건적 특권을 폐지하는 등의 개혁을 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배하자 영국은 시실리를 부르봉 왕가에 돌려주었다.

 

18. 1815-1860: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지배.

19. 1860-1946: 통일 이탈리아 왕국 지배. 1943년, 연합군, 시실리에 상륙, 독일군을 몰아내다.

20. 1946년 이후: 이탈리아 공화국


시실리가 이탈리아 지배를 받은 것은 최근 150여 년이고 그 전엔 스페인 지배를 약500년간 받았다. 시실리에 가면 스페인 냄세가 나는 이유이다.
......................................................

우리는 흔히 좋은 경치를 보면 “그림 같다”는 말을 한다. 내가 2012년 3월 중순 시실리의 동해안 도시 타오르미나의 그리스 극장 관람석에 서서 사방을 둘러 보았을 때 무심코 나온 말이기도 하다. 청명한 하늘, 서쪽 정면엔 연기를 내뿜는 에트나 화산의 꼭대기(3366m)가 보였다. 바다쪽으로는 높이 200m의 해안 절벽 위에 세워진, 2700년 역사를 가진 도시 타오르미나가 내려다 보이고, 뒤편엔 몬테 타우로 산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쌓은 성벽과 ‘어금니’라는 뜻을 가진 해발 500m의 山頂 마을 카스텔몰라.

 타오르미나에서 내려다 본 地中海의 색감은 코발트 블루였다. 여러번 빤 청바지 색깔이다. 서기 전 3세기에 만든 그리스 반원형 극장(로마 시대 때 증축)은  지름이 109m이고, 가장 아름다운 자연 배경을 가진 고대 극장으로 꼽힌다. 여름에 정기적으로 국제 음악회가 열리는데, 장대한 경관과 장구한 세월이 無音의 배경음악이다.
 
괴테는 '이탈리아 紀行'에서 이 극장에 선 感想을 담았다. 
<옛날에 상류층 관객들이 앉던 자리에 앉아 보면, 세상에 어떤 사람이 이처럼 멋진 풍경을 눈 앞에 둘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른쪽의 높은 바위 위엔 성채가, 저 아래로는 도시의 全景이 視野에 들어온다. 바로 앞쪽으로는 에트나 산맥의 길다란 산마루가 이어지고, 왼쪽으로는 시라쿠사까지 뻗어 있는 해안선이 보인다. 바다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암초들과 바위 절벽, 그리고 아득히 먼 곳의 칼라브리아 해변은 주의깊게 보아야만, 구름과 분간할 수 있다.> 
 

타오르미나는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에도 동로마제국(비잔틴 제국)이 902년까지 영유하다가 아랍 세력에 빼앗겼다. 1078년, 아랍인들은, 남부 이탈리아를 석권한 노르만 세력의 루제로 1세에게 항복하였다. 노르만과 아랍인들이 남긴 대표적 유적은 산꼭대기에 지은 城이다. 타오르미나에서 택시로 20분을 올라가면 해발 500m 산꼭대기에 만든 '카스텔몰라' 城에 닿는다. 여기서 마주 보는 에트나 화산은 꼭대기가 눈에 덮여 일본의 후지산 비슷하다. 

 양쪽으로 즐비한 상점들과 주택과 교회 사이를 지나는 약1.5km의 움베르토 거리(타오르미나 중앙로)를 걷다가 절벽 위로 나 있는 작은 광장에 섰다. 낙차 약150m 아래 해안의 모래사장이 빛난다. 머리를 뒤로 돌리면 해발 500~600m의 돌산이 내려다 본다. 타오르미나는, 보는 이들의 뇌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映像(영상)을 남긴다. 화산, 바다, 해안, 절벽, 유적, 마을, 교회, 수도원, 城砦(성채), 하늘, 꽃밭이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이다. 에덴 동산의 이미지이다. 尙美會 여행단은 15세기에 지은 도미니크 수도원을 개조한, 근사한 정원을 가진 호텔(San Domenico)에서 묵었다. 절벽 위였다. 수도사들이 조용하게 거닐었을 긴 복도와 정원의 하루는 너무 짧았다.



타오르미나를 유럽의 인기 관광지로 만든 이는 독일 화가 오토 겔렝과 文豪(문호) 괴테이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타오르미나의 경관을 격찬하였다. 베를린이 고향인 게렝은 나이 스무 살 때 시실리를 여행하다가 타오르미나에 매혹되어 겨울을 지내면서 이 도시의 환상적 모습을 畵幅(화폭)에 담아 가서 독일과 프랑스에서 전시하였다.

게렝의 그림을 본 유럽의 미술 평론가들은, “空想이 심하다”고 비판하였다. 겔렝은 “타오르미나를 가 보라. 만약 내가 과장을 하였다면 경비를 내가 물겠다”고 선언하였다.

타오르미나는 감수성이 좋은 많은 예술가, 문학가들을 끌어들였다. 특히 방랑벽이 있는 사람들이 이 도시에 머물면서 그들의 인생을 바꿀 작품을 남겼다. 영국의 D.H. 로렌스와 미국의 트루먼 카포테는 ‘폰타나 베키아’라는, 17세기에 세워진 빌라에서 장기 투숙하면서 작품을 썼다. 로렌스는 Touch and Go (1920), The Lost Girl (1920), Arron's Rod (1922)을 완성했는데, The Lost Girl로 상금 100달러의 문학상을 받고 인기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기사본문 이미지
시실리의 타오르미나에서 바라본 해발 500m의 山頂 도시 카스텔몰라. '어금니'란 뜻이다. 아랍 지배 시절 세운 도시를 노르만이 발전시켰다. 


기사본문 이미지

타오르미나에 있는 그리스-로마 시절의 半圓(반원) 극장


기사본문 이미지

타오르미나 풍경
 


기사본문 이미지

그림 같은 타오르미나

 

기사본문 이미지

시실리의 상징 紋章


기사본문 이미지

타로르미나 시내 건물의 벽면




기사본문 이미지

시실리의 풍경엔 늘 에트나 산정이 등장한다.



기사본문 이미지

시실리 타오르미나 근처의 해안 마을
 



기사본문 이미지

타오르미나 근처의 山城(산성). 12세기 경, 노르만이 시실리를 점령하고 만들었다


 
 








.


기사본문 이미지


.







시실리의 노르만/역사 산책
----------------


 

이탈리아를 여행하면 한국에서 교과서로 알았던 역사와 현지에서 알게 되는 역사가 달라 혼란에 빠진다. 이탈리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 文明-로마와 르네상스의 고향이지만 현재의 이탈리아라는 국민국가는 1861년에 반도가 통일되면서 建國(건국)되었으니 매우 젊다.

서기 5세기에 西로마가 무너진 후 19세기까지 1400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는 한 국가나 왕조 아래로 통합된 적이 없다. 여러 王國과 公國(공국)과 도시국가, 그리고 교황 직할령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런 분열상이 프랑스, 독일, 스페인, 비잔틴, 아랍, 노르만 등 외세의 침략과 개입을 불렀다.

이탈리아가 통일되기 전에 이 반도에서 가장 큰 나라는 나폴리 王國이었다. 로마 남쪽의 반도와 시실리를 다스린 나라였다. 이 왕국의 수도는 초기엔 시실리의 팔레르모, 나중엔 나폴리였다. 11세기 이후 '시실리 왕국', '두 개의 시실리 왕국', '나폴리 왕국' 등으로 불렸다.

나폴리 이남의 이탈리아 반도와 시실리는 고대 문명이 꽃핀 그리스, 이집트, 중동, 지중해와 인접하여 늘 유럽 文明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지중해의 진주' 같은 시실리는여러 번 다양한 민족과 文明이 거쳐가고 섞이고 쌓인 곳이다. 시실리 여행을 하면 장대하고 풍요로운 자연을 배경으로 명멸해갔던 여러 민족이 남긴 문명의 다양성과 복잡성에 경탄하면서 역사 앞에서 겸허한 자세를 갖게 된다.

기원 전 8세기부터 그리스 사람들이 시실리에 건너와 동쪽의 시라쿠사 등 도시국가를 만들었다. 아프리카 北岸(북안,지금의 튀니지)에 살던 카르타고 人들도 몰려 와 서쪽에 정착하였다. 시실리의 州都(주도)인 팔레르모는 카르타고 사람들이 개척한 식민지였다. 카르타고-로마의 결전인 포에니 전쟁을 거치면서 시실리는 로마 지배로 넘어갔다. 시실리는 지금이나 그때나 농산물과 수산물 생산량이 많았다. 5세기부터 西로마 제국이 무너지는 틈을 타서 라인강 동쪽에 살던 게르만족이 침범한다. 게르만족의 선두 주자 반달족, 고트족이 이 섬을 점령하고 약탈하더니 6세기엔 지금의 이스탄불(당시는 콘스탄티노풀)에 수도를 둔 東로마제국(비잔틴)이 시실리를 기독교 권으로 탈환하였다. 9세기 초부터는 중동을 석권한 사라센(이슬람 세력) 군대가 아프리카로부터 이 섬을 공략하기 시작, 827년엔 팔레르모를, 878년엔 시라쿠사를, 902년엔 타오르미나를 함락시켜 全島(전도)를 이슬람화한다. 이슬람 지배자들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고 상공업을 장려, 시실리는 中世(중세)암흑기에도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11세기부터 바이킹의 후예들인 노르만 인들의 시실리 공략이 시작된다.

이탈리아 남부와 시실리를 통합한 왕국을 처음 만든 이들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서 원정 온 노르만 전사들이었다. 노르만인들은 9세기 말부터 노르망디에 정착한 바이킹족의 후예들이었다. 바이킹족은 지금의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에 살던 미개한 게르만族으로 약 300년간 유럽의 全域(전역)을 습격하면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등지에 정복왕조를 세웠다. 몽골-투르크족이 기마군단을 앞세워 중국, 한반도, 일본열도, 중앙아시아, 中東에서 여러 나라를 만들고 부수고 하였던 것과 비견된다. 바이킹족은 뛰어난 항해술을 이용하였고 몽골-투르크족은 기마군단을 앞세운 점이 다르다. 기동성이 이들 정복민족의 힘의 원천이었다. 이들은 싸움도 잘 했지만 소수가 다수를 효율적으로 지배하는, 통치, 행정술이 뛰어났다.

1066년 노르망디의 윌리엄公은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에 상륙, 해스팅스 결전에서 잉글랜드 군을 격파, 영국(잉글랜드, 아일란드 등)을 정복하고 王이 된다. 노르만 세력은 그 후 수백 년간 英佛(영불)에 걸친 영토를 갖게 되는데, 100년 전쟁을 통하여 정리된다. 노르만의 영국정복 이전에도 영국은 덴마크의 카누트 대왕에 의하여 통일된 적이 있다. 11세기 초 카누트 大王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영국에 걸친 바이킹 대제국을 세웠으나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노르만의 영국정복은 그 후 영국의 운명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 문명권에서 멀어진 北海 국가에서 탈피, 유럽 文明의 일원이 되고, 佛語의 영향을 많이 받은 영어가 만들어지고 좋은 제도가 뿌리를 내려 富國强兵(부국강병)의 길을 걷는다.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아이슬랜드가 100% 바이킹 국가라면 핀란드는 30%, 영국은 50% 바이킹 국가라고 부를 만하다.

노르망디 지역에 정착한 바이킹족은 이곳에서 프랑스의 고급문명과 기독교를 받아들여 실력을 기른 다음 2차 원정에 나선다. 영국 정복은 설명한 대로이고, 거의 같은 시기에 오트빌 家門(가문)의 노르만 戰士(전사)집단이 나폴리 이남의 이탈리아 반도와 시실리를 점령한다. 이들을 이끈 루제로 1세가 교황으로부터 시실리王 및 캄파니아(이탈리아 남부)公으로 公認(공인)된 것은 1130년이었다. 루제로(영어로는 로저) 2세(서기1095~1154)는 정복과 행정을 결합시켜 시실리 왕국을 유럽에서 가장 번영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바이킹 사람들이 그렇듯이 노르만 지배세력도 여러 종교, 민족,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한 바탕에서 실력 위주의 개방적이고, 실용적이며, 관용적인 통치를 했다. 이슬람과 기독교도들이 공존하고 아랍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과 유대인들까지 시실리 왕국에선 큰 차별을 받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노르만의 루제로 1세가 팔레르모를 점령한 1072년부터 프랑스 안주家가 시실리 왕국의 통치권을 장악한 1268년까지의 약200년간은 노르만 王朝(그 피를 이어받은 독일의 스와비아 왕조 시절도 포함)의 시실리 지배 기간이다. 당시 유럽의 가장 역동적인 문명국가는 프랑스와 시실리 왕국이었다. 시실리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는 스페인의 코르도바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국제적인 도시였다. 나중엔 노르만의 영국이 중심국가로 떠오르지만 12세기 당시엔 아직 변방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미개하였던 바이킹족이 소수로서 다수를 다스리면서 가장 찬란한 기독교 文明을 건설한 것은 세계사의 한 기적이다. 10세기까지만 해도 바이킹족은 원시종교를 믿고 부족장이 죽으면 殉葬(순장)을 했다.

시실리의 노르만 왕조에는 다섯 명의 名君(명군)이 있었다. 루제로 1, 2세, 굴레모 1, 2세, 그리고 페데리코 황제. '

'로마인 이야기'를 쓴 일본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 멸망 후의 지중해 세계'(한길사)에서 노르만인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시실리를 탈환한 이후 취한 점령 정책을 감동적으로 서술하였다.

<(노르만 정복왕) 루제로는 패배자가 된 아랍 유력자들과 그 가족을 죽이지도 않았고 노예로 삼지도 않았다. 남이탈리아 내륙지방에 땅을 주고 농장주로서 살게 했다. 아랍인 병사들을 노르만-시실리 군에 편입하였다. 아랍의 학자도, 상인도, 기술자도 농장경영자도 남았다. 서로 다른 신을 믿는 사람들이 상대의 신앙을 존중하며 共生(공생)하는 사회가 실현된 것이다. 노르만 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 사라센 해적에게 피해를 본 남이탈리아 사람들과는 달리 유럽의 북쪽 끝에서 온 노르만 사람들에게는 이슬람교도에 대한 원한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랍인 지리학자 이드리시는 이 시기의 팔레르모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팔레르모만큼 장대하고 화려한 건축물이 가득 찬 도시는 없고, 팔레르모의 정원만큼 아름다운 경관도 없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사라진 여러 민족과 종교와 문명의 융합을 보여주는 건축물이 시실리엔 많다. 팔레르모 근교에 있는 몽레알레 대성당은 노르만 왕조의 굴레모 2세가 만든 것인데, 노르만-비잔틴-아랍식이 혼합된 건축물이다. 몽레알레 대성당은 13세기 말에 단기간에 세워진 것인데, 굴레모 2세가 적극적으로 후원한 덕분에 공사기간이 단축되었다. 굴레모 2세는 라틴어, 아랍어 등에도 능통하였고, 인문적 교양이 풍부한 온후, 관용, 경건한 성품의 왕이었다.

이 성당 건축엔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 교황권과 왕권이 격돌하는 중세였다. 교황권의 대리자인 팔레르모 대주교는 굴레모 왕을 견제하고 있었다. 대주교가 관리하는 팔레르모 대성당도 대단한 건물인데, 왕이 나서서 같은 권역 안에 또 다시 대성당을 지은 데는, 대주교의 권한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몽레알레 대성당 벽면엔 6340 평방 미터에 걸쳐 비잔틴 풍의, 성서 이야기를 소재로 한 모자이크 그림이 장식되어 있다. 천지창조에서부터 베드로의 십자가刑까지 수많은 에피소드를 그린 것이다. 중세 때는 일반 신도가 성경을 읽을 수 없었으므로 신부가 이 그림들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하였을 것이다. 성당을 '돌에 새긴 성경'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 성당에서 실감할 수 있다. 굴레모 2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棺을 이 성당에 모셔 권위를 더했다.

시실리 왕국의 노르만 왕조는 150여년 만에 代가 끊어지고, 政略(정략) 혼인 관계에 의하여 1190년 독일 스와비아 왕조의 하인리히 6세가 시실리 왕이 된다. 노르만 왕조의 마지막 왕은 굴레모 2세(영어론 윌리엄 2세)인데, 아들이 없어 고모 코스탄자(할아버지 루체로 2세의 딸)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코스탄자는 독일 스와비아 왕조 출신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바바로사의 장남 하인리히와 결혼하고, 바바로사가 죽자 하인리히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하인리히 6세) 및 시실리 왕으로 등극했다. 코스탄자는 아들을 낳는데, 그가 중세 유럽의 名君 중 한 사람인 페데리코 2세(영어로는 프레데릭, 독일어로는 프리드리히 2세)이다.

하인리히 6세는 독일에 체류중 시실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왔다가 1197년에 병으로 급사했다. 독일과 이탈리아 북부 및 지금의 프랑스 동부와 헝가리 등지를 관할지역으로 삼았던 신성로마제국은 중앙집권화된 적이 없었다. 느슨한 제후국 연합체였다. 이 신성로마제국에 대하여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신성하지도, 로마답지도, 제국같지도 않다'고 조롱한 바 있다.

11~12세기 신성로마 제국 황제는 교황과 늘 갈등하였다. 교황은 유럽 기독교 세계의 정신적, 종교적 수장인데, 세속 권력 면에서도 首長(수장) 노릇을 하기를 원하였다. 반면,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교황의 정신적 지도력을 인정하면서도 관할지 교회에 대한 통치권, 특히 인사권을 확보하려고 했다.
당시 교회, 수도회 등 유럽 全域(전역)에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던 교황 지휘하의 가톨릭 조직은 단순한 종교집단이 아니었다. 주교들은 영주처럼 땅을 소유하고 사법권 및 군대를 보유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교황에 복종할 뿐 세속권력으로부터는 독립성을 유지하려 했다.
초기의 神聖로마제국 황제는 교황과 주교들을 멋대로 교체할 힘이 있었지만 11세기에 들어서면 교회 안에서 개혁운동이 일어난다. 교회 입장에선 세속 권력이 성직자들을 임명하는 한 부패를 청산할 수 없다고 믿었다. 황제가 자격 없는 자들을 돈을 받고 주교 등 성직자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황제 입장에선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는 고위 聖職(성직)에 측근들을 임명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래야 자기 派(파) 사람들을 교회 기관에 취직시킬 수 있었다. 중세 유럽의 가장 큰 행정조직은 가톨릭 교회였고, 일자리도 가장 많았다. 주교 임명권은 수많은 일자리를 만드는 인사권을 잡는 것을 뜻했다.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이 문제에서만은 타협이 어려웠다.

1059년 교황측은 종교회의를 열고, 교회법에다가 추기경 회의가 교황을 선출하도록 규정하여 황제의 영향력을 차단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뽑힌 교황은 황제의 측근이 아니라 가톨릭 세계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교황 측은 같은 해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대결할 수 있는 장치를 더 만든다. 루제로 지스카드가 지휘하는 노르만 戰士 집단이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한 것을 公認(공인)해주는 대신 그들로부터 교황에 대한 충성 서약을 받았다. 프로 戰士집단인 노르만 기사단의 뒷받침으로 황제의 독일군과 대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1073년 개혁정신에 불타는 그레고리우스 7세가 새 교황이 되었다. 1075년 그는 드디어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상대로 대결을 선언한다. 종교회의를 소집, 세속권력, 즉 황제가 주교를 임명하는 것을 금지시킨 것이다. 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하인리히 4세와 그 추종자를 파문하겠다고 경고하였다. 황제가 거부하자 교황은 황제를 파문하고, 황제에 대한 영주들의 충성서약이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南독일의 親교황측 영주들이 들고 일어나, 파문이 해제되지 않으면 황제를 폐위시키겠다고 결의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일단 전략상 후퇴를 결심하였다. 1077년 그는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을 넘어와 교황이 묵고 있던 北이탈리아의 카노사 城(성)에 도착했다. 이때의 모습을 그레고리우스 7세는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는 아무런 敵意(적의)도 불손한 마음을 보이지 않고서, 자진하여 수 명의 종들을 데리고 내가 묵고 있던 카노사에 왔다. 그는 왕의 복장을 다 벗고는 3일간 성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울면서 再考(재고)를 호소하였다.>

이를 보고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파문을 해제하고 그를 교황에 복직시켰다.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알려진 이 에피소드는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승리를 상징하지만 그 후의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하인리히는 독일로 돌아가자마자 보복에 나선다. 그에 반기를 들었던 영주들을 처단하고 독일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회복한 것은 1080년이었다. 그는 독일에 있는 교회 성직자 회의를 소집,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폐위를 결의하게 하고, 이듬해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그레고리우스를 쫓아내고 北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재확인하기 위한 원정이었다. 3년간 이탈리아에선 교황군과 황제군이 死鬪(사투)를 벌였다. 황제군은 1084년에 수개월간 로마를 점령, 교황을 추방하였다. 이때 남쪽에서 노르만 援軍(원군)이 도착, 황제군은 로마에서 물러났다. 로마를 점령한 노르만군은 시내를 약탈하였다. 로마 사람들은 화가 나서 그레고리우스 교황을 미워하게 되었다. 노르만군이 물러나자 교황도 더 머물 수가 없게 되어 노르만이 지배하던 살레르노로 피신, 다음해(1085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하인리히 4세도 勝者(승자)가 아니었다. 친교황측 영주들이 독일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후임 교황들은 이들을 지원하였다. 황제는 이탈리아에서 얻은 성과를 유지할 수도 없었다. 1106년 그는 파문 당한 상태에서 사망하였다.

1122년 독일의 보름스에서 교황과 황제측이 타협했다. 독일에서 성직자 선출은 교회법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다만, 황제나 황제의 대리인이 선출시 참석,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황제와 교황의 대결에서 일단 승리한 쪽은 교황이었다. 황제의 성직자 임명권을 제한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역대 황제들은 교황과 대립,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하느라고 정작 본거지인 독일 내부의 통치는 소홀히 하였다.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영국에선 중앙집권적 왕권이 강화되어 가는데도 독일은 여러 도시와 공국으로 분열되어 통일국가를 만들지 못하였다. 그런 사정은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럽에서 정치적 후진국이 되는 길이 열린 셈이다.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탈리아 통일을 기도한 이가 페데리코 2세이다. 이탈리아 통일은 교황과 교황 직할령을 정리하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다. 페데리코와 교황은 정면충돌 코스로 달리지 않을 수 없는 구조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