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퍼슨과 李承晩 제퍼슨이 1950년대의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고 해도 李承晩보다 더 민주적으로 할 순 없었을 것이다. 趙甲濟
6.25 동란기에 주한미국대사였던 무초는 퇴임후 역사기록을 위한 증언을 하는 가운데 李承晩 대통령을 '국제정세에 관해서 최고의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격찬했다. 무초는 또 李 대통령이 Jeffersonian democrats를 자처했다고 말했다. 제퍼슨은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람이고, 3代 대통령을 지냈으며 루이지애나 매입(2300만 달러를 주고 프랑스로부터 한반도의 10배나 되는 지역을 사들임)을 통하여 당시의 미국 영토를 두 배로 넓혔다. 미국 독립정신의 핵심을 만든 인물이다. 그가 주장한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을 Jeffersonian democrats라고 부른다. 우리의 建國 대통령이 제퍼슨식 민주주의를 신념화한 인물이었다면 그 흔적이 한국에 남아 있을 것이다. 제퍼슨은 민주주의의 약점과 대중의 우매함을 잘 안 사람이었다. 그는 性善說의 신봉자가 아니었다. 그는 국민들의 분별력이 약하여 민주주의를 운영할 자질이 부족할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제퍼슨은 그런 국민들로부터 主權을 회수하여 독재정치를 펼 것인가, 아니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민을 교육할 것인가 自問했다. 결론은 後者였다. 제퍼슨 민주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작은 정부와 代義 민주주의 존중: 미국 헌법 조문의 엄격한 해석으로 정부의 권력남용을 막는다. 2. 국민의 재산과 권리를 수호하는 것이 정부의 기본 의무이다. 3. 국민의 알 권리와 정부에 대한 비판의 자유를 존중한다. 4. 정부는 인간의 자유를 보호하고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5. 교육을 중시한다. 6. 미국이 자유를 세계적으로 확산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7.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종교의 자유 보호책이다. 종교는 정치부패로부터 자유로와지며, 정치는 종교갈등으로부터 자유로와진다. 李承晩 대통령이 新生 대한민국에서 제퍼슨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구현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李承晩 대통령의 정책엔 제퍼슨식 민주주의와 유사한 면이 많다. 1. 政敎분리: 李承晩 대통령은 기독교 신도였으나 정치에 기독교를 끌어들이지 않았다. 기독교적 민주주의만이 공산주의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믿었으나 기독교 국가를 만들거나 기독교를 우대하진 않았다. 2. 교육重視: 李 대통령은 언론과 학교를 통하여 한국인을 깨우치면 一流 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3. 私有재산권의 신성시: 李 대통령은 농지개혁 때도 地主들에게 보상을 하도록 했고, 화폐개혁 때도 일정 액수 이상의 예금동결 계획에 반대했다. 4. 代義민주주의 존중: 李 대통령은 국회와 많이 갈등했으나 국회의 기능을 정지시킨 적이 없다. 戰時에도 국회는 정부를 맹렬히 비판했고, 대통령을 퇴진시키려 했다. 戰時에도 대통령 선거는 이뤄졌고, 특히 시, 읍, 면의회, 도의회 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지방선거 투표율은 90%나 되었다. 이때 선거로 뽑힌 의원들은 1만 명을 넘었다. 5. 언론자유의 존중: 李 대통령은 정부 비판을 많이 하는 언론에 불만이 많았으나 조직적인 탄압을 거의 하지 않았다. 탄압사례는 경향신문 폐간 정도이다. 李承晩 대통령은 자신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가 경찰이 쏜 총을 맞고 부상한 젊은이들을 위문하곤 '不義를 보고 일어나지 않는 젊은이들은 희망이 없다'고 말한 뒤 下野를 결단했다. 제퍼슨이 1950년대의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고 해도 李承晩보다 더 민주적으로 할 순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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