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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 몰트 위스키 ‘글렌리벳’…온 몸의 반응 이끄는 짜릿함 윤광준의 新 생활명품 <19>

淸山에 2015. 6. 13. 19:47







윤광준의 新 생활명품 <19>

싱글 몰트 위스키 ‘글렌리벳’…온 몸의 반응 이끄는 짜릿함
[중앙일보] 입력 2015.06.13 14:47 / 수정 2015.06.13 14:49   
 



사람들은 나를 주당이라 부른다. 술은 혼자서도 여럿이도 마신다. 주당은 술 좋아하는 무리를 일컫는 말이니 함께 마신 사람들까지 싸잡아 들여야 안심이다. 멀쩡한 남자치고 술 싫어하는 이가 있던가. 그동안 마신 술을 다 모았다면 수영장 하나 정도는 채우지 않았을까. 자랑 아닌 자랑은 지치지도 않고 마셔댄 세월의 기록이다. 술은 먹을 수 있을 때 마음껏 마셔야 한다. 주당 술친구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간다. 당뇨와 고혈압 증세를 핑계로 비실거리거나 암과 알츠하이머까지 앓는 환자들이 된 탓이다.

술친구들과 평생 마시기로 작정한 술은 채 비우지도 못했다. 슬프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실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술은 삭힐 수 있을 때까지만 허용되는 축복이었다. 할 일이 남았다. 끝까지 남아 그들의 몫까지 대신 마셔주면 된다. 축복은 살아남은 자만의 몫이다. 허망함은 허망한 꼴을 보지 않으려는 구체적 행동으로 맞서야 덜 억울할지 모른다.

술 마시지 못하는 친구들을 찾아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야 인간의 도리다. 폭탄주 서른 잔을 받아 마신 실력을 높이 사 주어야 마땅하다. 관계와 경쟁을 헤쳐가기 위한 남자들의 치열한 몸짓임을 안다. 술 먹는 일마저 업무로 바뀐 친구들의 서글픈 푸념은 짠하게 다가왔다. 술은 좋아하는 사람과 마시는 것이다. 정작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한 시간은 많지 않았다.

거울이 있으면 비추어보게 마련이다. 태연한 척 해봐도 친구들의 처지가 눈에 밟힌다. 예전처럼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술을 마시다간 똑같은 입장이 될지 모른다. 술 마시는 횟수가 자연스레 줄었다. 술 앞에 장사가 있을 리 없다. 무한정의 주량을 과시하던 맥주는 이제 마시지 않는다. 효모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대처다.

진단을 내린 의사는 술 끊기를 권했다. 건강을 우려하는 모든 의사들의 처방이란 약속한 듯 똑같다. 울상이 된 내게 의사는 정 끊을 수 없다면 차라리 도수 높은 술을 마시라 했다. 어쩔 수 없는 주종의 재편이 이루어지게 된 사연이다.

향이 부드러운가, 술술 넘어가는가

내친김에 술의 종류를 짚어보아야 한다. 따져보니 세상의 온갖 술은 딱 네 종류로 구분된다. 원료가 곡물인지 과일인지, 방식이 발효인지 증류인지 나뉘는 게 전부다. 복잡하게 여겨졌던 술의 계보란 이토록 단순하다. 자연의 원료를 인간의 재주로 발효시키면 술이 되는 것이다. 전 세계 대부분의 술은 여기까진 공통이다. 특별하게 좋은 술은 이것만 가지곤 모자란다. 시간을 묻혀야 생기는 침묵의 안정이 느껴져야 완성이다.

좋은 술의 기본은 파악됐다.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이다. 이를 일일이 확인하고 즐기는 일은 마셔봐야 안다. 아무리 좋아도 곁에 둘 수 없는 술은 관심없다. 손 내밀어 잡을 수 있는 술만이 내 것이다. 술은 쳐다봐선 절대 모른다. 풍기는 향이 코로 들어오고 알코올의 자극이 목으로 느껴져야 안다. 마신 술에 따라 취기의 내용과 지속의 강도가 다르다. 풍부한 향으로 목 넘김 부드럽게 술술 들어가는 술은 좋은 것이다.

양을 아껴 마실 술이라면 좋은 술을 마셔야한다. 좋은 것만 누리기에도 인생은 짧은 법이다. 귀중한 시간을 실험과 확인의 과정으로 흘려버리긴 아깝다. 전문성을 지닌 주변의 친구들은 이럴 때 필요하다. 싱글 몰트 위스키에 빠진 친구는 빙긋 웃으며 바로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 싱글 몰트 바를 드나드는 횟수가 잦아졌고 위스키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다.

익숙하게 알고 있는 브랜딩 위스키와 싱글 몰트는 다르다. 위스키의 원료는 보리, 밀, 호밀, 옥수수, 귀리 등 다양하다. 그 중 보리만을 써서 원액을 만들고 증류, 숙성, 병에 담는 전 과정이 한 증류소에서 이루어져야만 싱글 몰트 위스키라 부른다. 더 엄격하게는 자기 밭에서 난 보리를 썼느냐로 따지기도 한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선 법적으로 100% 맥아로 만든 위스키만 몰트 위스키로 인정된다.

증류소의 입지와 성향에 따라 개성적인 맛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포도가 자라는 토질과 기후에 따라 와인의 맛과 품질이 결정되듯. 싱글몰트와 와인은 보리와 포도만 사용해 만드는 공통점이 있다. 싱글몰트엔 좋은 물이 더해져야 한다는 조건이 필수다.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방의 많은 증류소들이 수질 좋은 스페이사이드에 몰려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질 좋은 보리와 증류소안 우물의 조화

런던 주류 판매장 진열대를 가득 메운 위스키의 종류에 놀랐다. 와인만큼 다양한 위스키가 시판되고 있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위스키의 본산 스코틀랜드에서 만들어지는 위스키만도 2000 종이 넘는다. 그동안 알고 있었던 싱글 몰트 위스키란 국내에 소개된 극히 일부였다. 생산 지역에 따른 맛의 편차를 즐기는 재미가 크다. 심지어 소독약 냄새 같은 독특한 향도 있다. 두 번의 증류를 거쳐야 얻어지는 싱글몰트인 만큼 브랜딩 위스키에 비해 진하고 묵직한 맛이 느껴진다.

오랜 역사를 지닌 명가의 싱글몰트 위스키가 있다. 글렌리벳이다. 정부의 세금을 피해 오지인 리벳강 주변 계곡에 양조장을 차렸다. 밀주를 만들던 글렌리벳은 1824년 최초로 정식 증류소를 열어 시설과 규모를 키웠다. 동네 수준의 위스키를 균일한 품질의 최상급으로 올리게 된 출발이다. 그때부터 명성은 대단했다. 이름을 도용하는 수많은 아류들이 생겨났다. 이들과 구분하기 위해 붙인 ‘The Glenlivet’이란 상표는 품질의 자부심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글렌리벳의 맛은 깊고 풍부하다. 달콤한 부드러움의 감칠맛도 괜찮다. 질 좋은 보리와 증류소 안의 우물에서 직접 길어 올린 물맛이 어우러진 조화일지도 모른다.

풍미 넘치는 위스키의 세계에 냉담했던 이유를 돌아보았다. 내게 위스키란 폭탄주와 동의어였다. 똑같이 빨리 취하기 위해 무차별로 돌리는 폭탄주는 싫었다. 술은 즐기기 위해 마시는 것이다. 같은 보리로 만든 남매와 같은 술을 섞는 불경스러움은 근친상간과 다르지 않다. 허세를 더해 30년산 위스키로 말아 돌리는 폭탄주는 더욱 싫었다. 술자리의 격을 과시하는 남자들만의 리그에 동원된 값비싼 장식품 역할이 위스키였으니….

이제 위스키의 맛을 알겠다. 땅과 물, 보리와 바람, 햇빛과 이탄(泥炭·peat)의 연기, 오크통과 사람이 섞여 빚어낸 자연의 결정체란 의미가 다가온 덕분이다. 땅의 기억은 오랜 시간의 침묵을 거쳐 각각의 영혼으로 환원된다. 위스키를 생명의 물이라 부르는 이유가 수긍된다. 빈속에 글렌리벳을 마신다. 비워진 창자에 스미는 따가움이 생명의 흔적을 더 또렷하게 각인시켜준다. 안주가 필요하다면 물 한 잔이면 충분하다. 더 이상을 원한다면 치즈 몇 조각과 초콜릿도 괜찮다. 글렌리벳 하나만으로 온몸은 반응한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어 바닥에 고인 향까지 놓치지 말 일이다.

윤광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