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오싱 출신인 《아큐정전(阿Q正傳)》의 저자 루쉰
루쉰고리에 있는 루쉰 형제가 태어나고 자란 집의 입구.
사오싱은 대문호 루쉰(魯迅)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루쉰은 1881년 사오싱의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원래 성은 저우(周)이고, 아명은 장서우(樟壽)였다. 그의 집안은 루쉰이 13세 때 할아버지가 뇌물사건에 연루되고 아버지가 병사하면서 몰락했다. 17세에 난징의 해군학교에 들어가면서 이름을 수런(樹人)으로 바꿨다. 루쉰은 1902년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갔다. 어학연수 후 센다이의학학교에 들어갔지만, 강의 중 중국인을 처형하는 영화를 보여주자 격분해 자퇴했다. 그 뒤 도쿄로 가서 외국 작품을 번역했다. 그때 동생이자 수필가인 저우쭤런(周作人)과 함께 번역집을 내기도 했다. 1909년 중국으로 돌아와 교사가 됐지만, 학교 고위층과 갈등으로 사직과 복직을 되풀이했다. 1912년부터 교육부 관리로 일했고 이듬해 거처를 베이징으로 옮겼다. 수년간 루쉰은 허무주의에 빠져서 고전 연구에만 매달렸다. 그러다 한 친구의 조언을 받아들여 창작의 길에 들어섰다. 1918년에는 《신청년》에 ‘루쉰’이라는 필명으로 〈광인일기(狂人日記)〉를 기고했다. 삼미서옥에는 루쉰이 평소 지각하지 않기 위해 썼다는 글자가 새겨진 책상이 남아 있다. 소설이 인정받자 1920년부터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이듬해 〈아큐정전〉을 연재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24년 베이징여자사범대학이 개혁적인 학생들을 퇴학시키자 학내 분규가 일어났다. 루쉰은 학생들을 지지하면서 학교당국과 기득권 계층을 통렬히 비난했다. 이때 쓴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라는 글에서 “사람을 무는 개라면 물에 빠졌건 안 빠졌건 간에 무조건 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쉰은 이로 인해 파면당했다. 국민당 정권이 반정부 지식인을 탄압하기 시작하자, 루쉰은 여제자 쉬광핑(許廣平)과 함께 베이징을 떠나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신변의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1930년 좌익작가연맹을 결성했고, 1932년 민권보장동맹을 조직했다. 1936년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55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임종하면서 “원수들이 나를 증오하게 하라. 나도 그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루쉰의 유해는 ‘민족혼’이라 쓰인 천에 덮여져 매장됐다. 루쉰은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남긴 작품은 중편 1편, 단편 32편 등이 전부다. 또한 작품마다 수준 편차가 심하고 문장이 난해하다. 이 때문에 오늘날 중국인들은 “루쉰의 소설은 재미없다”며 잘 안 읽는다. 반면 번역가로 뛰어난 재능을 보여 1938년 간행된 《루쉰 전집》의 절반이 번역 작품이었을 정도다. 사오싱의 최대 관광지, 루쉰고리
검은 천의 지붕이 설치된 우펑촨은 사오싱을 대표하는 명물 중 하나다. 사오싱에는 루쉰의 고향 마을 루쉰고리가 있다. 이곳에는 1년 내내 여행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루쉰고리에는 19세기 초에 지은 루쉰의 생가가 잘 보존되어 있다. 여기서 루쉰 형제는 1899년까지 살았다. 루쉰은 일본에서 귀국한 뒤 교사로 일할 때 옛집에서 3년간 지냈고,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수시로 고향에 내려왔다. 루쉰 옛집의 맞은편에는 삼미서옥(三味書屋)이 있다. 삼미서옥은 루쉰이 12세부터 17세까지 전통적인 유학교육을 받았던 서당이다.
소설 〈공을기〉를 형상화해 문을 연 상점 공을기. 루쉰 형제를 가르쳤던 훈장은 서우징우(壽鏡吾)다. 루쉰은 서우를 아주 존경해서 한때 유교 경전을 열심히 공부하며 과거를 준비했다. 지각을 하지 않기 위해 책상에다 ‘조(早·일찍)’라는 글자를 남기기도 했다. 삼미서옥은 서우 훈장의 집으로도 쓰였다.
〈공을기〉에 등장하는 술집 함형주점. 루쉰이 귀향할 때마다 즐겨 찾았다. 루쉰고리 한편에는 〈공을기(孔乙己)〉에 나오는 함형(咸亨)주점이 있다. 〈공을기〉는 1919년 루쉰이 두 번째로 쓴 단편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공을기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으면서도 육체노동을 수치로 여겼던 지식인이다. 루쉰은 공을기의 이율배반적인 삶을 통해 유교사상의 폐단을 비판했다. 소설에서 공을기는 주민들이 맡긴 필사로 돈 몇 푼을 손에 넣으면 곧바로 술집을 찾았다. 한데 이마저도 제대로 해내질 못해 일거리가 끊기자 도둑질에 손을 댔다. 이 공을기가 즐겨 마시던 술이 황주(黃酒)였고 그가 자주 찾은 술집이 함형주점이다. 황주 중 가장 유명한 술, 사오싱주 황주는 구천이 부차에게 복수하려 출정하기 전 병사들에게 한 사발씩 마시게 했다는 술이다. 이런 기록이 있어 포도주, 맥주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술로 손꼽힌다. 황주는 쌀을 쪄 식힌 다음 보리누룩을 섞어 발효해 빚는다. 색깔은 짙은 황색이며 알코올 도수는 15~20도에 불과하다. 맛이 진하면서 부드럽고 가격이 싸 서민들이 즐겨 마셨다. 각종 요리 맛을 내는 조미주로 쓰이기도 한다. 황주 중 가장 유명한 술이 사오싱주다. 사오싱주는 찹쌀을 쪄 보리누룩과 발효시킨다. 누룩 외에 신맛이 나는 재료나 감초를 넣는다. 물은 사오싱 교외에 있는 젠후(鑒湖)에서 떠서 사용한다. 젠후의 물은 미네랄이 풍부하다. 사오싱주는 진흙으로 빚은 항아리에 3년 이상 숙성시킨다. 오래 숙성할수록 향기가 좋아지고 빛깔은 암홍색을 띠게 된다. 사오싱에는 여러 종류의 황주가 있다. 제조 방식과 원료에 따라 위안훙주(元紅酒), 자판주(加飯酒), 샹쉐주(香雪酒), 산냥주(善釀酒) 등으로 나뉜다. 위안훙주는 사오싱주의 전통 방식에 따라 빚는다. 숙성시키는 술항아리 안을 붉은색으로 칠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술맛은 약간 쓴맛이 돈다. 보통 시중에서 판매되는 값싼 사오싱주는 거의 다 위안훙주로, 전체 사오싱주 생산량의 80%나 된다. 자판주는 다른 사오싱주보다 찹쌀을 10%가량 더 넣는다. 술맛은 위안훙주처럼 약간 쓰지만 더 부드럽고 짙다. 최근에는 브랜드의 고급화가 진행되며 자판주의 생산량이 급격히 늘고 있다. 샹쉐주는 맛이 달고 향이 진하다. 도수는 20도 이상으로 사오싱주 가운데 가장 높다. 따라서 숙성기간이 가장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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