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國家魂은 무사도(武士道)이고, 미국에서는 플리머스에 도착했던 청교도 정신일 것이고, 독일은 게르만족의 어떤 신비한 생각일 것이며, 불란서는 박애(博愛)정신, 영국은 신사도(紳士道)겠죠. 이런 국가의 혼을 유지해 가는 그룹이 있어요. 이 사람들은 별로 여론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여론에 의해 생각이 좌우되지 않고 어떤 고매한 이상과 국가이익 또는 종교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죠. 이 그룹이 국가의 혼, 즉 국가의 정체성과 국가의 큰 進路를 항상 염두에 두고, 고민합니다. 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보통 사람들은 傾聽을 하는 거죠. 일본에서 총리대신이 높은 것 같지만, 총리 대신이 무슨 연설문을 쓰려고 하면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한테 가서 꿇어 앉아가지고 ‘좋은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연설문을 부탁합니다. 국가, 국익만 생각하는 깨끗한 엘리트 그룹이 강해야 一流국가가 됩니다. 한국도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국가 엘리트 그룹이 형성되려고 하다가 좌파가 집권하는 바람에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 사람들이 중앙을 장악하지 못하고 사회 주변에 가 있습니다. 제가 작년에 일본의 노보리베츠(登別)라는 마을에 갔더니 그 옆에 노보리베츠 다테 지다이무라(登別伊達時代村)라는 민속촌이 있었습니다. 이게 에도시대(江戶時代), 즉 도쿠가와 막부시대(德川幕府時代)의 마을을 재현해 놓은 곳인데에요. 거기 가니까 사무라이館이 있는데 거기에 무사도(武士道), ‘Spirit of Samurai'라고 영어로 써놓았어요. 그 영어문장이 아주 근사해서 제가 번역을 해보았어요. 일본의 정신이 사무라이라고 하는데 사무라이, 무사도라는 게 뭐냐? 일본사람들에게 무사도가 뭐냐고 물어보면 ‘무사도란 죽는 것이다’ 이렇게 답을 합니다. 무사도는 어떻게 죽느냐라는 주제를 갖고 고민한다는 이야기인데, 그 반대가 뭡니까? 어떻게 사느냐죠. 즉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느냐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자신을 채찍질하는 마음 자세를 무사도라고 한다’ 이런 뜻인데, 여기에선 꽤 길게 써 놓았어요. 한 번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투쟁본능은 보편적인 것이고, 또 자연스러운 것이다. 일본은 이 거친 투쟁본능에 제어장치를 붙여, 통제하려고 했다. 이를 무사도(武士道)라고 한다. 이는 사회를 통제하고 또한 활력을 주었다. 그리고 투쟁본능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그 어떤 신성한 것의 존재를 일본인에게 깨우쳤다. 봉건제도는 무너져도 그것을 지탱해준 무사도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를 체현(體現)한 이를 사무라이라고 한다. 무사도를 일본인의 독특한 관념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독특한 출생의 비밀에 있다. 무사도의 아버지는 선(禪)이고 어머니는 유교이다. 禪은 불교에 있어서 명상이며, 심사묵고(深思默考)에 의해 지(知)의 영역을 넘어서서 절대의 영역을 지향하는 것이며, 유교는 조선(祖先)숭배신앙을 기초로 민족의 보전을 목적으로 하는 도덕적 규범이다. 따라서 상호모순 된 개념을 가진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생긴 무사도를 체현한 인간, 즉 사무라이는 이 둘의 조합의 비율에 따라, 또 그 시대의 요청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나타난다. ‘사람의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이며, 서두르지 말고 참는 것이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기본이다’라고 말한 도쿠가와는 일본 최고의 사무라이이고, 강함을 추구하면서 결투에 생애를 걸고 상대를 죽여 간 미야모토 무사시도 사무라이이다. 이 두 사람 간에는 공통된 삶의 방식이 없어 대국(對局)에 위치하는 듯하다. 단 하나 있다고 한다면 간난신고(艱難辛苦)의 한가운데서 각각 신(神)에 다가가 체감한 것, 이것이 사무라이 정신이다> 이 마지막 문장이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간난신고(艱難辛苦)의 한가운데서 각각 신(神)에 다가가 체감한 것, 이것이 사무라이 정신이다’ 사람이 신에 다가간다는 이 말이 종교적인 말인데, 원래 인간이라는 것은 짐승과 같은 야수적인 면이 있는가 하면, 하느님처럼 아주 자비롭고 온화한 마음을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즉 인간은 짐승과 하느님 사이의 중간적 존재라는 거죠. 그러나 스스로 신이 되기 위해서, 하느님처럼 완벽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계속 추구하고 갈망한다는 것 이게 바로 종교성 아닙니까?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서 하느님을 닮아라, 또는 부처님을 닮아라, 알라신을 닮아라 하는 게 종교의 공통적인, 핵심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종교가 있는 가운데서 만들어 낸 예술, 건축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거죠. 로마에 가면 항상 보는 성 베드로 사원, 피렌체에 가면 우리를 압도하는 두오모라 불리는 거대한 성당, 거기 가서 느끼는 게 뭡니까? ‘이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다. 어떻게 14, 15, 16세기에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는가? 이런 산더미 같은 건축물이 완벽한 디자인과 디테일과 마감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인간이 만들 수가 있는가? 불가능하다.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을 통해서 만드신 것이다’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즉 사람이 하느님과 같은 절대자(絶對者·절대자란 것은 완벽한 존재란 의미입니다)에 다가가려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때로는 결투하는 심정으로 노력하다 보니까 그런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죠. 이런 종교적 심성(心性)을 가진 인간은 완벽한 수준으로 오르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를 채찍질합니다. 그러니까 종교라는 것이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고급종교가 없으면 一流국가가 될 수 없다, 이렇게 되는 거죠. 無宗敎 국가에서 一流국가가 된 사례는 하나도 없습니다. 종교를 아편이라고 말살했던 공산주의 국가가 망했습니까, 흥했습니까? 기독교의 뿌리를 잘라낸 북한은 야만상태가 되고 기독교, 유교, 불교가 공존하는 한국은 一流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본을 이해할 때 이 武士道의 정신을 놓치면 이해가 안 되죠. 기독교를 모르고 유럽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읽어보면 ‘이 무사도가 종교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성(神聖)이라고 하는데 영어로 말하면 신성함 즉 ‘holiness’죠. 일본의 무사들, 그리고 그 무사들의 후손인 지금 일본의 지도층 사람들은 일을 할 때 어떤 마음 자세로 하느냐 하는 것을 이 말이 암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결투하듯이 최선을 다하는 거죠. 이런 절대와 완벽을 추구하는 종교성은 사무라이 정신과 바로 통합니다. 얼마 전에 캐이블 텔레비전 프로에서 일본 칼을 만드는 과정을 소개한 게 있었어요. 마사무네(正宗)라는 장인(匠人) 집안이 代를 이어서 칼만 700년 동안 만들어오고 있더라고요. 그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좋은 칼을 만들고 나면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옵니다. 이 칼에 내 이름이 새겨지고 내 정성이 들어갑니다. 1000년 뒤에도 저는 이 칼을 통해 살아있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자동차를 만드는 데가 바로 도요타 아닙니까? 도요타가 올해 들어와서 세계에서 가장 큰 제조업체가 되었습니다. 도요타 자동차가 GM을 능가하는, 매출액 규모로서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가 되었어요. 도요타의 성공 비결이 많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나온 책이 지금 서점에 가면 수십 권이 있을 거예요. 저도 그 중에 한 권을 봤는데 거기서 느낀 게 바로 이 사무라이 정신입니다. 결투를 하든지 칼을 만들든지 회사를 운영하든지 뭘 하든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最善을 다하고 책임진다는 그 자세가 세계 최고 기업을 만들어내고 일류국가를 만드는 겁니다. 이게 종교적 심성이죠. 혹시 북경(北京)의 이화원이라는 데 가보셨습니까? 호수가 있고 서태후가 살았던 별궁도 있는데 굉장히 크죠. 거기에 감동이 있습니까? 성 베드로 사원을 보고 느낀 감동을 저는 이화원, 만리장성, 紫禁城에서는 못 느꼈습니다. ‘이건 사람이 만든 거다, 편의상 만든 건데 참 마무리가 잘 안되었다, 크기만 크다’ 이 정도죠. 거기에는 종교적 심성이 없죠. 권력자가 편의대로 만든 것이니까요. 우리가 석굴암(石窟庵)을 자랑하는 이유도 종교성, 절대성, 완벽성, 예술성과 관련됩니다. 거기에는 만든 사람의 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聖德大王神鐘, 즉 봉덕사 종 에도 만든 사람의 정신이 들어가 있어 종을 치면 그 정신이 소리로 울려 나옵니다. 전설에 의하면 만든 사람이 자기 자식을 집어넣었다는데, 그건 뭐 야사(野事)이겠지만 사랑하는 자기 아이를 끓는 쇳물에 던져 넣어서 鐘을 만들 정도의 자세로 만든 것이 봉덕사 종, 성덕대왕 신종, 에밀레종이라는 거죠. 그런 정신이 살아있다는 것은 바로 그 나라가 一流국가였다는 증거입니다. ‘화랑도 정신이 살아 있었던 때, 호국 불교가 일어날 때가 바로 우리 역사상 최고의 예술혼이 살아 있었던 때다’는 여기에 일류국가의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종교, 전쟁, 예술이 인간의 능력과 자존심을 극대화시키고 富國强兵의 일류국가를 만듭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기독교가 신라 삼국통일기에 호국불교가 했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역할을 했느냐? 조선조(朝鮮朝)에서는 ‘돈 버는 것은 죄다, 청빈(淸貧)이 최고다’라고 했어요. 기독교 정신은 뭡니까? 열심히 돈 벌어라. 돈 버는 것은 죄가 아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잘 쓰는 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즉 청부(淸富)정신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