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집으로 돌아왔지만 당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밥도 잘 먹히지 않았다. 난 못 참고 도망 나왔지만 나와 함께 입대했던 동기들은 그 어려운 환경에서 버티고 있을 터였다. ‘넌 뭐냐. 바닥부터 기어 올라가겠다고 큰소리치더니만. 이미 틀려먹지 않았느냐’. 죄책감과 자학, 수치심이 밀려왔다.
3주쯤 지난 48년 8월 3일. 을지로 황금좌극장(후에 국도국장)으로 ‘왕중왕’이란 영화를 보러 갔다. 머릿속이 복잡해 스크린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영화 중간 쉬는 시간에 극장 2층을 돌아봤더니 군인 100여 명이 단체관람을 와 있었다. 육사 교도대(敎導隊) 사병들이었다. 화랑담배를 나눠 피우며 즐겁게 웃고 있었다.
‘기껏해야 중학교밖에 안 나왔을 저 애들도 참고 지내는데. 대학까지 나온 놈이 그걸 못 참고 도망 오다니. 난 패배자 아닌가’.
불현듯이 일어나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인솔장교인 기세훈 중위를 붙잡고 탈영병임을 고백했다. “13연대에서 도망 나왔습니다. 생각을 고쳐먹었으니 저를 교도대에 데리고 가십시오.” 기 중위는 내 경력을 묻더니만 “선생이 될 인텔리가 왜 군에 가려 하느냐”며 나를 만류했다. 나는 “제발 입대시켜 달라. 여기서 안 받아주면 나는 타락해 인간을 포기할 경지로 갈지 모른다”고 사정했다. 겨우 기 중위의 허락을 받아 교도대 사병들이 타고 돌아가는 GMC 트럭 꽁무니에 올라탔다.
육사 교도대라고 13연대보다 나을 건 없었다. 첫날 밤 강당에서 모포를 덮고 자는데 사방이 가려웠다. 라이터를 켜서 보니 빈대들이 분열식을 하듯 기어 다녔다. 느닷없이 누군가가 뒤통수를 때리며 말했다. “빈대가 많아서 못 자나 본데 뜯기면서 자. 또 일어났다간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팰 줄 알아.” 그날 밤을 꼴딱 새웠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버텼다. 또다시 포기할 순 없다고 스스로 다잡았다.
재입대한 지 2주 정도 지났다. 어느 날 ‘나는 왜 군인이 됐는가’란 제목으로 작문을 쓰라고 했다. 탈영과 재입대까지 과정을 써냈다. 사흘 뒤 대대본부 선임장교이던 최택원 (육사 5기·후에 총무처 차관) 중위가 나를 불렀다. “야, 너 같은 놈이 어떻게 이런 데 끼여 왔느냐?” 그 후 최 중위 추천으로 육군사관학교 행정처(처장 박율선 대위)에 근무하게 됐다. 박 대위는 “ 군인이 될 바엔 장교가 돼야 한다”며 육군사관학교에 가라고 권했다. 49년 1월 중순 육사 8기생 추가 모집 시험 에 응시했다. 시험장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13연대에서 도망 나올 때 같이 불침번을 섰던 임달순이었다. 반가워 얼싸안았다. 우리 둘 다 합격해 8기생 1대대 3중대로 배속됐다.
8기 교육훈련은 5개월이었다. 졸업할 때 학과 성적은 공동 1등이었다. 면접시험을 보는데 공주중 선배인 박병권(국방부 장관) 교무처장이 면접관으로 앉아 있기에 반가워 웃었더니 면접 태도가 불손하다고 점수가 깎였다. 종합성적 6등으로 졸업했다. 졸업식이 열린 49년 5월 23일, 1년 만에 어머니를 만났다. 대학을 그만두고 13연대에 들어가면서 집에 일절 소식을 끊었다. 내 힘으로 일어선 모습을 보여줘 놀라게 해드릴 생각이었다. “이 자식아, 살아 있었구나.” 눈물 흘리는 어머니를 꼭 안아드렸다.
정리=전영기·최준호·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박병권(1920~2005년)=군내 조선민족청년단(족청) 출신의 대표적 인물. 연희전문학교 졸업 뒤 일본군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됐다. 해방 뒤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창군 멤버가 됐다. 육군사관학교장, 육군 제2훈련소장, 제3군단장을 지냈다. 1961년 7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뒤 군사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민정 참여에 반대해 63년 3월 사임했다. 65년엔 한·일협정 비준에 반대하는 예비역 장성 11명의 서명에 참가해 구속됐다. 국영기업 대한중석 사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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