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가 두 살 때 충남 부여군 규암면 외리 159번지 집에서 찍은 사진.
부여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방과 후엔 부여경찰서 무도장(武道場)에서 검도를 수련했다. 청소년 시절에 검도 3단을 딴 뒤 나중에 대한검도회로부터 명예6단증을 받았다. 4~5학년 때부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나폴레옹전, 플루타크 영웅전 등 위인들의 전기를 탐독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기쿠치 간(菊池寬) 작 『제2의 키스』를 숨어 읽다가 형에게 책을 빼앗기기도 했다. 나는 가족들의 눈을 피해가면서 연애물을 탐독한 조숙한 소년이었다. 독서열은 공주중학교 3~4학년 때 절정에 달했다. 일야일권(一夜一卷) 독파주의(讀破主義), 즉 하룻밤에 한 권씩 읽는다는 원칙으로 계조사문고, 세계문학전집을 모조리 읽었다. 다 읽지 못했을 경우에 결석하는 일도 가끔 있었다. 내가 그 후 지니게 된 지식과 상식의 원천은 이렇게 10대 시절의 독서에서 형성됐다. 작가 아나톨 프랑스가 “내가 인생을 알게 된 것은 사람들과의 사귐에서가 아니라 책과 접촉한 결과였다”고 술회했듯 인간이 한평생 체험할 수 있는 것은 한정돼 있다. 기숙사 생활을 했던 중학 시절 2학년부터 급장을, 3~4학년 때는 검도부장·승마부장·학생중대장을 맡았다. 그림·풍금·만돌린·피아노 같은 예능도 그때 배웠다.
다시 천북국민학교 교사 시절로 돌아가자. 학교 근무 4개월이 지나 방학을 맞았을 때다. 부여 집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얘야, 일본이 망했단다.” 잠결에 “예? 뭐요?”라고 물었더니 어머니께서 “일본이 망했다고 천황이 방송했단다. 일어나봐라”고 하셨다. 벌떡 일어났다. 라디오에선 일본 천황이 금속성의 고르지 못한 음성으로 항복을 고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이었다.
무작정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해방이 됐다는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남대문 앞에서 난생처음으로 태극기를 봤다.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아, 진짜 해방이로구나. 형용할 수 없는 감격이 가슴을 꽉 메웠다. 용산에 있던 그 많던 일본군 20사단 군인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뒤바뀌어 있었다. 그해 10월 나는 대전사범학교 부속 국민학교로 전근 갔다. 내 머릿속엔 광복 날 서울에서 본 그 광경이 떠나지 않았다. 해방을 맞은 이 조국에서 국민학교 교사 생활에 안주할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946년 상경해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부에 응시해 합격, 3월에 입학했다. 영국 이튼(Eton) 스쿨에 대한 동경이 날 사범대로 이끌었다. 1815년 영국 웰링턴 장군이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격파한 뒤 “어떻게 그 유럽의 망나니를 이길 수 있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난 이튼 정신을 가지고 싸웠다. 워털루 전투의 승리는 이튼 교정에서 얻어진 것이다.” 그래, 나도 이튼 스쿨 같은 학교를 만들자. 해방된 조국을 이끌어갈 후진을 키워보자. 이런 꿈을 가졌다.
1947년 5월 13일 서울에서 비보를 접했다. 수년간 중풍을 앓으셨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이다. 지역 유지였던 아버지는 해방 전후 인삼 재배와 금광 개발 사업에 뛰어드셨다가 크게 실패를 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가세는 급속도로 기울어 파산 지경이 됐다. 부유하고 평탄했던 내 어린 시절과 작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리=전영기·최준호·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아서 웰링턴(Arthur Wellesley Wellington, 1769~1852)=19세기 영국군 총사령관과 총리를 지낸 군인·정치가. 이튼(Eton) 스쿨을 거쳐 1787년 앤저스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815년 6월 벨기에 남동부 워털루 평원에서 나폴레옹의 군대를 물리쳤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나폴레옹에게 승전한 넬슨 제독과 함께 영국의 대표적 전쟁영웅이다. 웰링턴은 “워털루 전투의 승리는 전장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이튼 교정에서 얻어진 것”이라며 청소년 교육의 중요성을 중시했다. JP가 서울대 사범학교에 입학하는 데 영향을 준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