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기질 세상에 퍼뜨려라" 박정희·JP 새 통치체제 구축 … 30·40대 젊은 권력의 탄생 [중앙일보] 입력 2015.04.01 01:27 / 수정 2015.04.03 09:34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4> 국가재건최고회의 출범
헌법 정지로 생긴 권력의 공백에 국가 3권 장악한 .최고회의. 들어서 일부 “최고회의는 공산당 용어” 반발 박 소장 “명칭이 뭐 중요한가” 관철 장교 1만여 명 미국서 유학생활 실무·합리적 미국식 관리체제 익숙 비 안 오면 기우제 지내는 국민의식 물 쟁여놓는 정신으로 바꾸는 게 목표
1961년 5월 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열린 뒤 최고위원들과 새로 임명된 내각의 각료들이 기념 촬영을 했다. 국가경영 세력의 근본적인 변화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앞줄 왼쪽부터 배덕진 체신장관(준장), 고원증 법무장관(준장), 이주일 최고위원(소장), 김홍일 외무장관(예비역 중장), 박정희 부의장(소장), 장도영 의장(중장), 김종오 합참의장(중장), 김동하 위원(예비역 해병 소장), 박임항 위원(중장), 김신 공군참모총장(공군 중장), 김성은 해병대사령관(해병 중장), 정래혁 상공장관(소장). 김종필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돼 최고위원을 맡지 않았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1961년 5·16은 구질서의 권위와 기능을 정지했다. 그날 내가 작성해 KBS방송으로 내보낸 포고문(4호)은 이랬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오늘 오전 7시를 기해 일체의 장면 정권을 인수한다. 민의원과 참의원, 지방의회는 오후 8시를 기해 해산한다. 국가기구의 일체의 기능은 군사혁명위원회가 집행한다.”
혁명위원회가 행정권을 장악하고 입법부를 해산시킨 것이다. 사법부 기능까지 집행한다고 했다. 군사혁명위의 3권 통합 행사 선언이었다. 5월 18일 피신했던 장면 총리가 나타났다. 그는 내각 총사퇴를 선언했다. 구질서의 중심인 그가 퇴진했다.
포고문은 이제 실행되기 시작했다. 정지된 헌법과 권력의 공백은 포고문이 메울 것이다. 새로운 시대, 결정적인 역사 전환의 무대가 열렸다. 이게 혁명이다. 혁명은 새로운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이제까지 구질서 종료에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새 질서 출발에 모아져야 한다. 17일 밤 나는 육군본부의 한 사무실에서 꼬박 날을 새웠다. 거사의 성공이 예감되던 시점이다. 나는 그동안 생각해두었던 신질서의 바탕이 될 통치 체제를 구체적으로 짰다. 혁명의 미래를 운영할 수단과 집행 방법을 담은 그랜드 디자인을 마련한 것이다.
18일 낮 장면 총리의 사임 직후다. 나는 바로 박정희 소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새벽까지의 작업 내용을 보고했다. 이미 박 소장과 나는 혁명 이후의 그림을 함께 그려왔다. 박 소장은 19일 오후 3시 군사혁명위원회 소집을 결정했다. 혁명 체제를 신속히 확정하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육사 동기생(8기) 최영택 중령에게 차트 작성을 부탁했다. 최 중령은 첩보부대(HID)에 근무하고 있어 보안 유지에 적임이다. 이튿날 오후에 군사혁명위 1차 회의에 참석했다. 육본 회의실엔 32명(혁명위원 30명, 고문 2명)이 착석해 있었다. 위원 구성과 명단은 전날 장도영 혁명위원회 의장과 박정희 부의장이 상의해 발표했다. 이로써 혁명의 앞날이 불투명했을 때 감돌던 불안과 초조함은 사라졌다. 나는 브리핑을 시작했다. 먼저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명칭을 바꾸자고 했다.
‘위원회’는 비상 상황에서 약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최고회의’는 나라의 방향과 의사를 결정, 주도하는 최상위 수준의 지위와 권한을 함축했다. 입법·사법·행정권을 쥐고 있는 만큼 ‘최고’가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국가 재건’은 혁명의 미래와 비전을 압축한다. 혁명의 진정한 가치는 국가 사회의 본질적 변화에 있었다. 나는 정쟁과 누습(陋習), 혼란에서 벗어나자는 혁명 궐기의 절실함을 나타내려고 했다. 그것이 혁명의 지향점을 국민에게 실감시키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된 것이다.
문재준(6군단 포병단장)·박치옥(공수단장) 위원이 내 브리핑을 끊고 들어왔다. 그 둘 대령은 육사 5기 동기다. “최고회의란 말이 공산당식 용어 아니냐”고 비판했다. 그들과 같은 이북 출신 위원들이 주로 흥분해 가세했다. 위원들 사이에 갑론을박으로 시간이 꽤 흘렀다. 그때까지 말없이 지켜보던 박 소장이 단상으로 나왔다. “조용히들 합시다. 여러분, 명칭이 뭐 그리 중요하기에 그 야단이요. 나는 명칭보다는 우리가 얼마만큼 국민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느냐, 그 점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어요. 시간이 급하니 따질 것이 있으면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다음 내용을 들어보는 것이 좋지 않겠소.” 실내는 찬물 끼얹듯 조용해졌다.
나는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입법·사법·행정권을 모두 장악하고 지휘, 감독하는 국가 최고 통치기관입니다.” 그리고 최고회의 직속으로 총무처, 공보실, 중앙정보부, 국가재건기획위원회,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 수도방위사령부 등 6개 기구를 둔다고 설명했다. 통치 기구안은 원안대로 통과됐다. 이 가운데 수방사는 미군 사령관과 협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 문제는 내가 매그루더와 회동에서 관철시켰다(본지 3월 30일자 6, 7면). 최고회의 의장과 부의장엔 장도영 중장과 박정희 소장이 각각 추대됐다. 최고회의 건물도 육본(삼각지)에서 태평로의 국회의사당(현재 서울시 의회)으로 옮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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