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7월 23일 인천 송도유원지에서 혁명정부와 주한 미국 측 수뇌부가 편안한 복장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표정들이 심각하다. 왼쪽부터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새무얼 버거 미국 대사(등 보이는 이), 가이 멜로이 미 8군 사령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매그루더=“한국군 지휘권은 내게 있다. 당신들이 내 허락 없이 전방부대를 이동시킨 것은 마이어 협정 등 위반이다. 원위치시켜라.”
▶나="우리는 레볼루션(Revolution·혁명)을 한 사람들이다. 레볼루션을 하면서 어떤 녀석이 몇 날, 몇 시에 어떤 부대를 이끌고 혁명하겠다고 미리 신고하느냐. 그런 레볼루션도 있나.”
나의 거친 반격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매그루더는 “내 지휘권 침해를 용인할 수 없다”고 또 소리쳤다. 그때 나도 맞고함을 질렀다. “당신이 우리 혁명을 부정하는데 그럴 거면 내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나는 간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한상국의 통역은 열정적이었다. 매그루더와 나의 제스처·어조를 그대로 따라 하며 말을 옮겼다. 일어서려는 내 손을 지그시 잡고 자리에 끌어 앉힌 건 멜로이 대장이었다. “가지 마라. 우리가 오늘 만난 목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는 하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못 이기는 체 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만나자고 했으면 조용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해야 할 것 아니냐. 성난 사자 모양으로 협박하는 분위기에서 무슨 상의가 되겠느냐.” 그제야 매그루더 대장이 웃으면서 태도를 바꿨다. “부러 그랬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싶었다.” 매그루더는 나보다 26살이 많은 역전노장이다. 주로 군수 분야에서 잔뼈가 굵었다. 내 배포와 스케일을 테스트한 것이다.
대화는 정상화됐다. “당신들은 어떤 사람인가. 왜 혁명을 하려 했나.” 매그루더는 근원적인 문제를 내게 물었다. “나는 포트 베닝 미 육군보병학교에 입학해 미국을 좀 봤다. 근대화된 인사관리, 물자관리, 조직관리 방법을 배웠다. 이런 미국을 우리나라에 비춰 보니 나라 꼴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전부 뒤집어서 새로 해야겠다는 발상뿐이었다. 구 정치인들은 머릿속에 욕심밖에 없고 싸움만 했다. 당신의 조국처럼 우리도 밥 먹는 거 걱정 안 하고 자유롭게 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되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이게 혁명을 한 이유다.”
미리 준비한 말은 아니었다. 나의 진심이었다. 1951년 여름 6개월간 미국에 유학하면서 풍요와 자유가 넘치는 비결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25살 대위 때다. 이런 배움과 생각이 답변의 바탕이 됐을 것이다.
매그루더는 군사혁명정부의 계획과 정책에 대해서도 궁금해했다. 그건 내가 끊임없이 준비하고 정리해온 문제다. “우선 배고픔부터 없앨 것이다. 외국 자본을 끌어다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 산업을 일으켜 국민이 잘살게 되면 민주화를 달성할 것이다. 미국의 지원을 기대한다.” 내친김에 한·일 관계에 대한 나의 비전도 얘기했다.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일본과 외교관계를 열려고 한다. 우리가 일본과 손을 잡으면 미국의 태평양 방위에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나의 답변은 거침없었다. 매그루더는 놀라는 표정이었다. 세 시간이 훌쩍 지났다. 흉금을 털어놓은 비공개, 비공식 회담이었다. 이날 대화에서 나는 매그루더의 진의를 알게 됐다. 그는 자신의 훼손된 작전지휘권을 원상으로 돌려받길 원했다. 혁명정부를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매그루더도 나의 진심을 이해했다. 나는 미 사령관의 작전지휘 권한에 상처 낼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혁명정부를 스스로 지킬 병력만은 확보해야겠다고 강조했다. 매그루더의 요청으로 우리는 20, 25일에도 만났다.
대화 결과는 매번 박정희 소장에게 보고했다. 처음 보고 때 박 소장은 “매그루더가 자네를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뭐래”라고 물었다. 나는 “제가 혁명을 지도하는 것 같아 보자고 한 거랍니다”라고 답했다. 박 소장은 “보기는 잘 봤구먼”이라고 했다. 매그루더와 나는 서로 건드려선 안 될 것과 얻어낼 수 있는 것의 경계를 헤아릴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5·16 이후 새로운 한·미 질서에 관한 주요한 합의가 마련됐다. 미군은 5·16혁명을 인정하고 혁명정부에 협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혁명정부는 서울에 진주한 전방부대(6군단 포병단, 해병1여단)를 원위치시키기로 했다. 다만 그 이전에 혁명정부를 방위할 수도방위 사령부부터 신설하기로 했다. 주요 군 인사를 할 때 사전 협의하겠다는 약속도 해줬다. 나와 매그루더의 합의는 5월 23일 박정희 소장과 매그루더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합의는 5월 26일 한·미 간 공동성명 동시 발표로 확정됐다.
전영기 기자, 유광종 작가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가이 멜로이(1903~68년)=1961년 6월~63년 7월 주한 미군 사령관(대장). 50년 6·25 남침 때 미군 제24사단 19연대장(대령)으로 참전했다. 그해 7월 대평리(현 세종시) 전투에서 직접 장갑차를 이끌고 싸우다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이때의 공로로 수훈십자훈장을 받았다. 미국으로 돌아가 육군정보국장, 미 제4군 사령관을 지냈다. 60년 주한 미군 부사령관에 임명돼 다시 한국에 왔고, 이듬해 주한 미군 사령관에 올랐다. 63년 7월 한국에서 전역식을 갖고 36년의 군 생활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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