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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부패한 기득권에 도전, 近代를 연 마르틴 루터

淸山에 2014. 8. 14. 12:52


 




교황의 부패한 기득권에 도전, 近代를 연 마르틴 루터

1517년 10월31일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 마르틴 루터가 聖書(성서)를 무기 삼아, 교황청을 상대로 도전장을 낸 행동은 조직적이지도 계획적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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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의 분노
  
 
   한 개인의 분노와 정의감으로써 세계사를 바꾼 마르틴 루터는 1483년에 독일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부였다가 광산업자가 된 사람이었다. 마르틴 루터의 부모는 엄하게 아들을 교육했다. 루터는 '엄격하고 가혹한 가정을 피해 수도원으로 도망쳤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가 선택한 아우구스티누스 은둔 수도원도 엄격하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이곳에서 루터는 자신을 채찍질하듯이 苦行(고행)했다.
 
   스물네 살에 그는 神父(신부)가 되었다. 작센 공국의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 강사가 된 그의 운명을 바꾼 것은 교황 레오 10세였다.
  
   1517년 레오 10세는 성베드로 사원을 완공할 경비를 모으기 위해 면죄부를 팔도록 했다. 면죄부를 산 사람은 지은 죄를 용서받을 받을 뿐 아니라 죽은 뒤 연옥에 빠져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보증을 교황으로부터 받는 것이었다. 교황은 독일의 마인츠 대주교 알프레히트에게 면죄부 판매권을 맡겼다. 알프레히트 대주교는 요한 테첼이란 사람을 판매인으로 지정했다.
 
   독일의 중심부에 있던 강국인 작센의 選(선)제후(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할 권한을 가진 영주) 프리드리히는 이 면죄부를 작센에서 팔아선 안된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독일인의 돈이 이탈리아로 흘러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판매인 테첼은 작센 공국으로 들어오지는 않았으나 접경지역 가까이 와서 면죄부를 팔았다. 작센 사람들이 국경선을 넘어가 면죄부를 사 오곤 했다. 비텐베르크 사람들은 면죄부를 사 와서 루터 신부에게 보여주면서 이것이 과연 효력이 있는지 물었다.
  
   평소부터 로마 교황청의 부정 부패에 분노하고 있던 마르틴 루터는 면죄부 판매를 지켜보면서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루터는 교황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교황이 하느님만 갖고 있는 권능을 사칭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은 자신의 善行(선행,베드로 성당을 짓는 데 기부하는 것 따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다. 인간은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해서 세운 공덕의 힘을 믿으므로써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부와 같은 司祭(사제) 직업도 필요없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사람들은 모두가 司祭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예수)과 인간 사이에는 司祭가 끼여선 안된다는 것이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이 억지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근거로 성경 말씀을 내세웠다. 그는 성경이 교황보다 위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생각을 담은 루터의 95개조 문서가 인쇄되어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루터의 이단적 주장에 열렬한 찬성과 신랄한 반론이 쏟아졌다. 루터는 그 성격이 공격을 당할수록 더 강해지는 편이었다. 로마 교황청은 이 수도사에게 로마로 오라는 소환령을 내렸다. 종교재판에 걸어 화형시킬 것이 뻔했다.
 
   루터는 작센공국의 영주인 프리드리히 측에 편지를 보내 독일 제후들이 독일의 신민을 이탈리아로 넘기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청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프리드리히는 이에 동의했다. 독일을 근거로 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도 프리드리히에게 루터를 잘 보호하라고 지시했다.
 
   루터는 독일 민족주의에 호소하여 이탈리아 교황의 명령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이때 독일 사람들은 '독일어를 쓰는 우리는 같은 민족' 이라는 의식을 하고 있었다. 윌 두란트는 '세계사 속의 영웅들'이란 책에서 이렇게 썼다.
  
   <영국의 헨리8세(영국교회를 만들어 가톨릭에 대항한 왕)가 가톨릭의 교리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영국에 대한 교황의 압력을 거부하였던 것처럼 루터도 반란의 기치를 신학의 사막에 꽂지 않고 독일의 민족정신이라는 풍요한 토양에 꽂았다. 개신교가 승리한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민족주의가 깃발을 흔들었다.>
  
   루터의 반역이 성공하여 개혁으로 불리게 된 데는 구텐베르그의 인쇄술, 독일 사람들의 지지, 그리고 독일 영주들에 의한 루터 보호가 있었다.
  
   독일 영주들의 보호조치로 해서 루터를 소환할 수 없게 된 교황은 체면을 구긴 셈이다. 타협안으로 교황은 루터를 아우구스부르크에 있던 카예탄 추기경 앞으로 불러 그의 주장을 취소시키라고 명령했다. 루터는 카예탄을 만나러 갔으나 이단사상을 취소하라는 권고를 묵살하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루터의 주장을 담은 문서들이 인쇄되어 돌아다니자 많은 대학생들, 상인들, 문학인들이 루터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후원금을 보내자는 운동도 일어났다. 루터는 인쇄술의 도움으로 드디어 민중의 마음을 잡은 것이다. 고무된 루터는 1520년에 '槪要(개요)'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출판했다. 그는 이 글에서 교황을 정면 공격한다.
  
   <로마는 자주빛 옷을 입은 바빌론이요, 로마 교황청은 악마의 회당이다. 우리가 도둑을 교수대로, 강도를 칼로, 이단을 불로 처형하면서 어떻게 이들 추기경과 교황, 그리고 로마라는 소돔의 온갖 하수구를 공격하지 않는단 말인가.>






   역사를 바꾼 용기 -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
  
  
   13세기부터 이탈리아의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문예부흥, 15세기부터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중심으로 시작된 지리상의 대발견(또는 해양진출)과 식민지 개척, 16-17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종교개혁과 종교전쟁, 18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산업혁명과 帝國(제국)주의의 확산, 18-19세기에 걸친 프랑스의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19세기의 국민국가 건설과 서구 민주주의의 확산, 20세기의 두 차례 세계전쟁과 실패한 공산혁명.
  
   이렇게 세계사의 흐름을 정리해놓고 보면 마르틴 루터가 주도한 종교개혁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조직의 힘이 아니고 한 개인의 영웅적 결단에 의해서 역사의 흐름이 바뀌고 그 뒤의 세상이 달라진 정도로 따질 때 예수의 십자가刑(형), 루터의 종교개혁,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 먼저 떠오른다.
  
   1517년 10월31일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 마르틴 루터가 聖書(성서)를 무기 삼아, 교황청을 상대로 도전장을 낸 행동은 조직적이지도 계획적이지도 않았다. 오직 그 한 사람의 분노와 정의감이 촉발시킨 변화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인행동이자 용기였다.
  
   영국의 토머스 칼라일은 名著(명저) '영웅숭배론'에서 "용기를 특징으로 하는 튜턴 민족중에서, 그보다 더 용기 있는 인물이 살았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고 썼다. 그는 또 "자연과 사실의 진정한 아들 루터, 그를 보내주신 데 대해 작금의 수백 년, 그리고 앞으로 올 수백 년은 하늘에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고 했다.
  
   칼라일은 특히 1521년 4월17일 독일 보름스에서 열린 神聖(신성)로마제국의 국회에서 루터가 교황청 비판의 자세를 견지한 것을 근대 유럽사상 최대의 장면이라고 평가했다.
  
   1517년 루터의 95개조에 의해 종교개혁이 불 붙은 뒤 불길은 유럽 전역으로 번져갔고 사회, 정치혁명의 성격을 띠었으며 결국은 국가간의 전쟁으로 발전했다. 1517년에 시작하여 30년 전쟁이 끝난 1648년까지 西유럽은 가톨릭 편과 프로테스탄트 편으로 갈려 피비린내 나는 전쟁, 암살, 內戰(내전),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인간의 신념을 기준으로 하여 편을 가르고 피를 흘렸다는 점에서 20세기의 이념대결과 비슷하다.
  
   이 종교개혁과 종교전쟁의 열병을 가장 슬기롭게 극복한 나라가 영국이었다. 영국 정도는 아니지만 최소한의 갈등으로 해결한 나라는 프랑스였고 最惡(최악)의 代價(대가)를 치른 것이 독일과 스페인이었다. 이 때문에 國力 소모가 적었던 영국 프랑스가 17, 18세기에는 선두에 나서고 독일과 스페인은 後進(후진)하였다. 16~17세기 약 100년간 독일이 종교분쟁에 휘말려 國力을 소진한 대가로 프랑스에 밀린 것을 극복하는 데는 1870년의 普佛(보불)전쟁에서 승리하기까지 약 230년이 걸렸다.
  
   이는 20세기 들어서 자본주의의 약점을 파고든 사회주의의 열병을 많이 겪은 러시아, 중국, 북한, 월남, 東歐(동구)가 주변 국가들에 비교하여 후진한 것과 비슷하다.
  
   마르틴 루터가 불길을 당긴 종교개혁에 의해서 인류의 사는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중세 유럽을 정신적으로(때로는 정치적으로) 지배하던 교황청의 절대적 권위가 무너졌다.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한 汎(범)유럽적인 권위가 약화된 틈을 타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進前(진전)하였다. 교황청의 권위에 도전한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개인주의, 人權(인권), 자본주의의 윤리를 확산시키면서 산업혁명과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가치관으로 뿌리내렸다. 기성질서의 큰 기둥을 무너뜨린 종교개혁은 교회의 압제로부터의 인간해방이란 성격을 띠었다.
  
   이 시기 인간해방의 핵심은 종교의 자유, 그에 따른 언론의 자유 같은 것들이었다. 인류의 자유를 획기적으로 향상시킨 종교개혁은 엄청난 인명손실이란 代價를 치렀다. 30년 전쟁으로 독일의 인구는 3분의 1이 줄었다고 한다. 독일의 피해는 2차세계대전 때보다도 더 참혹했다는 것이다.
  
   서구가 이슬람권이나 동양 유교문화권보다도 앞설 수 있었던 여러 이유중의 하나는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을 통해서 자유의 폭을 넓힌 西歐와 그런 개혁이 이뤄지지 않았던 이슬람과 유교 문화권의 차이는 후진국과 선진국의 차이로 나타났다. 인간이 도그마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찾으면 그 자유만큼 물질적 성장과 생산과 창조가 이뤄지고 이것이 근대화(산업화와 민주화)와 선진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재정립하였다. 상호 존중이 그것이다. 종교가 정치를 지배하면 이란이나 북한 같은 神政(신정)체제가 된다. 북한은 主體敎(주체교)와 영생敎主(교주) 김일성이 지배하는 중세型의 神政체제이다. 정치가 종교를 탄압하면 나치 독일 같은 전체주의 국가가 된다.
   과학과 종교도 상호 존중해야 한다. 과학이 종교를 분해한다든지, 종교가 과학을 억압하면 인간은 설 자리가 없다. 국가가 종교를 탄압하지 않는 한 종교는 國法(국법) 질서를 존중해야 한다. 종교인들이 교황을 국내 정치에 끌어들이는 것은 종교적 사대주의이자 政敎(정교) 분리의 대원칙을 훼손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訪韓(방한)하는 교황이 세월호 사고의 政爭化(정쟁화)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해선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천주교가 사회적 분열을 조장한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은 가톨릭이 지배하던 중세 유럽 국가가 아니다. 21세기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다. 일부 종교인들이 도덕적 우월성이란 함정에 빠져 국가와 法治(법치)를 우습게 보는 행태를 보이면 반드시 거센 反작용을 부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