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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들어서 그는 수년간 상어 기름, 유기농 우유, 화장품, 자동차 부품, 원자력 시설에 들어가는 특수 페인트 제품에 이르는 여러 사업을 통해 작은 재벌 규모에 속하게 됐다. 1984년 全斗煥(전두환) 대통령이 그의 공장 한 곳을 방문했을 때 그는 세간의 주목을 받는 사업가가 돼 있었다.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나고 유병언은 정치 인맥을 통해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한강유람선 사업권을 따낸 것으로 알려졌다. 유병언은 그 당시에도 적정인원보다 많은 인원을 태웠다는 비난을 받았다. 연휴 기간에 최다 수용인원 200명의 두 배에 가까운 인원을 태우려 했었고 그 당시에 성난 시민들은 시위를 일으킬 수준이었다. 당시 선원으로 근무한 前 구원파 신자 이청 씨에 따르면 유병언은 부두에서 해탈한 모습으로 바라보기만 했다고 한다. 추락
영원할 것만 같던 그의 전성기는 1991년 들어서 벽에 부딪혔다. 그는 구원파 신자 32명이 사망한 사건에 연루돼 체포됐다. 공장 식당의 다락방에서 그들의 屍身(시신)이 발견됐고 몇은 목을 매단 채로 죽었다. 경찰은 유병언이 그들의 죽음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그들의 죽음이 갚을 수 없을 정도의 부채와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유병언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교회 돈을 사업에 썼다는 횡령혐의로 유죄를 선고받고 1991년부터1995년까지 4년간 복역했다. 그의 감옥생활과 1990년대 아시아 외환위기의 여파로 문 닫게 된 그의 사업체들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가 回生(회생)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검찰에 따르면 그는 출소하자마자 대중의 눈길을 피해 곧바로 회생했다고 한다. 그의 회사들이 부도가 나자 그는 그의 두 아들로 하여금 정부 채무상환 정책 중 하나인 '리시버 제도'(注: 주식회사가 경영난에 빠졌을 때, 파산절차에 따르지 않고 관리인을 두고 회사를 운영한 뒤 매각하도록 하는 제도)를 통해 저렴한 가격으로 다시 부도난 회사를 사게끔 했다고 검찰과 당국자들은 설명했다. 유병언은 이 회사들을 거미줄 식으로 엮어 하나의 주식회사 형태로 통합해 親知나 믿음이 깊은 신도들을 요직에 앉혀 운용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이진호 검사는 6월에 '그들은 종교와 사업을 연계해 신도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아내 사업을 키웠다'고 말했다. 기업운영 주체, 대주주들, 그리고 내부 감사들까지 모두 구원파 신도였고 어떠한 형태의 견제와 균형을 맞추려는 체계도 없었고, 兪씨 일가가 돈을 원하면 기업은 내주는 식으로 운용됐다고 말했다. 2005년 녹화된 설교에 따르면 유병언은 끝없는 핍박을 견뎌내기 위해 단결하자고 했다. 유병언은 마태복음을 인용해 “우리는 세상에 괴롭지만, 확실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핍박을 받을 때 슬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라고 말했다. 검사와 금융 규제 담당자들의 말에 따르면 유병언과 그의 일가는 그들의 富(부)를 키우기 위해 매우 창의적인 방법을 개발했다고 한다. 검찰은 兪씨 일가가 1300여 개의 특허와 저작권을 주장하며 실질적으로 자신들이 운영하는 회사로부터 돈을 받아내고 있다고 한다. 장남 유대균은 청해진 해운의 회사이름 사용료로 145만 달러를 받았고, 차남은 침몰한 세월호 이름의 저작권을 갖고 있는데 그를 통해 돈을 받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반면 다른 정부 문서에 따르면 兪씨 일가는 서류상으로는 청해진 해운의 주식을 보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청해진해운의 최대주주는 다른 선박회사인 천해지 주식회사로 밝혀졌고, 이는 유병언의 두 아들이 대주주로 등록된 ‘아이원아이(I-One-I)’라는 투자회사 소유다. 검찰은 유병언 측은 부인하지만, 유병언이 이 모든 회사의 실질적인 회장이자 결정권자로서 매월 1만 달러 이상의 월급을 받았다고 한다. 검찰은 유병언이 이 모든 사업을 뒤에서 쥐락펴락할 수 있었던 이유가 청해진 해운의 대표 김한식이 유병언의 명령을 따르는 독실한 신도였고 그의 이름으로 유병언의 주식 10%를 숨겨 줬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한식 대표는 공판에서 유병언의 형 유병일 씨에게 청해진 해운 고문료로 13만1000달러를 지급했다고 말했다. 검찰은 兪씨와 그의 두 아들 혹은 그들이 관리한 회사들이 최근에만 청해진 해운으로부터 최소 382만 달러를 받았다고 밝혔다. 다른 정부 자료에 따르면 청해진 해운은 250만 달러를 兪씨 일가와 연관된 회사 주식에 사용했고 그중 하나는 兪씨의 해외 전시전에 사용됐다. 돈이 兪씨 일가에만 들어감으로써 세월호의 안전이나 긴급상황 대처에 들어갈 돈도 없어진 청해진 해운은 76만4000달러의 적자를 내는 등 금전적으로 매우 힘들었다고 검찰은 밝혔다. 예술인 유병언
검찰과 정부는 兪씨 일가의 수많은 재산 축적 책략 중 하나로 유병언의 또 다른 이름인 '아해'의 사진작품 판매를 들고 있다. 兪씨 일가 측이 청해진 해운을 포함한 그들이 관리하는 회사들에 그의 사진을 좋은 투자상품이라며 터무니없는 가격에 사게끔 강요했다는 게 검찰 측 설명이다. 구원파인 李모씨에 따르면 많은 신도들이 이 사진들에 과연 투자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구매했다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사진 가격이 급상승할 것으로 기대해 투자하기도 했지만 다른 이들은 꺼림칙하지만 兪씨와 구원파의 위세를 보고 구매했다고 한다. 李씨는 자신들과 구원파에 대한 편견으로 비롯된 오랜 시간 고난을 겪었지만, 아해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사진작가로 거듭나고 아해가 유병언이라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졌을 때에는 한국의 구원파에 대한 오해도 사라질 것으로 기대했다고 한다. 아이를 칭하는, 이 오래되고 들어보지 못한 '아해'라는 이름은 3년 전 그가 세계 명소를 돌아다니며 찍은 자연사진을 통해 알려졌다. 루브르 박물관의 정원을 빌려 개최한 작품전은 뉴욕에 위치한 아해프레스 명의로 돈이 지급됐다. 아해프레스는 유병언의 차남(한국이름 유혁기, 미국이름 키쓰)이 운용하고 있다. 추가로 설치된 가건물을 제외하고 임대료 자체로만 50만 달러 이상이 들었다. 신도들에 따르면 전시전의 이름으로 쓰인 ‘나의 창 밖으로’는 유병언이 4년간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매일 窓(창) 밖의 풍경을 촬영한 사진들을 모은 것이라고 한다. 아해프레스의 마이클 함 이사는 유병언이 그가 수감생활 중 매일 감옥 창틀로 본 세상에 영감을 얻어 270만 장의 사진을 같은 창문을 통해 찍었다고 밝혔다. 유병언은 그의 존재 자체를 신비스럽게 하고 싶어서였는지 남들이 그의 사진을 찍을 때 항상 뒤에서나 옆에서만 찍게 했고 아해프레스 웹사이트에도 르네상스 맨(르네상스的 교양인)처럼 '창안자, 사업가, 자선가, 환경 운동가, 무도가,화가, 조각가, 시인, 그리고 사진작가'로만 소개돼 있다. 함 씨는 서면 인터뷰에서 '전시회는 대중들에 자연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서 열렸다'고 말하며 '우리의 시각에서는 아름답고 의미 있는 노력이 허위 자료와 부정확한 언론 보도로 인해 더럽혀졌다'고 세월호 참사 이후 유병언을 향한 비난이 쏟아진 후 밝혔다. 세월호의 소유사인 청해진 해운은 유병언의 작품을 구매한 회사 중 한 곳이다. 청해진 해운 대표는 체포 전 한 한국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청해진 해운은 유병언의 사진이 담긴 200개의 탁자용 책을 구매하기 위해 10만 달러 정도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검찰은 그들이 7장의 사진을 구매하기 위해 10만7000달러를 사용했다고도 밝혔다. 兪씨와 연계된 다른 회사에서는 한 장의 사진을 구매하는데 2만1400달러의 돈을 들였다고 밝혔다. 이 사진들이 과연 그만한 시장 가치가 있는지는 확인된 바 없다. 전문가, 딜러, 경매상들은 이 사진들이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수집가나 딜러에 팔렸는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뉴욕국제사진센터 수석 큐레이터로 근무하고 아시아 사진전을 담당하는 크리스토퍼 필립 씨는 “나의 15년간의 박물관 큐레이터로서의 의견은 이 작품들에 가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들에 전하지도 못할 정도다”라고 말하며 그의 작품은 과거 한국의 경제나 종교의 각종 쓰레기 작품들을 모아 하나의 보편적인 작품을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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