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미국을 방문해 냉전 시절 서방을 대표하던 M-16 소총의 설계자 유진 스토너(오른쪽)와 함께선 미하일 칼라시니코프. [중앙포토]
지난 23일 94세를 일기로 타계한 칼라시니코프의 천재성과 AK-47의 탁월함이 새삼 재조명받고 있다. 툰드라의 혹한은 물론 열대우림의 고온 다습한 기후나 먼지가 많은 사막지대에서도 웬만해서는 고장이 나지 않을 만큼 튼튼하게 설계된 AK-47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많이 사용된 개인 화기다. 중학교 학력이 전부지만 천부적인 기계 감각을 가진 독학 설계사가 개발한 이 소총은 지난 60여 년 사이 1억 정 가까이 보급됐다. 값싸고, 튼튼하고, 탁월한 성능을 지닌 현대전의 단골 돌격용 소총 AK-47은 소련 등 공산권은 물론 제3세계 혁명세력의 중추 화기로 각광받았다. 개발자 칼라시니코프는 ‘소련 원자폭탄의 아버지’ 이고리 쿠르차코프, 우주 개발의 수장 세르게이 코룔로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소련 황금시대의 영웅 반열에 올랐다.
AK-47은 1947년 개발된 ‘자동소총 칼라시니코프(Avtomat Kalashnikova obrasza 47)’의 약칭이다. 그는 “복잡한 것은 나쁜 것이다”는 모토를 가지고 있었다. “명품이 되려면 단순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을 읽지 못하는 병사들도 쉽게 사용할 수 있으려면 조작이 간단해야 한다는 철학에서 나온 발상이다. 단순한 디자인으로 21세기 혁신의 아이콘이 된 고(故) 스티브 잡스를 연상시킨다. 잡스는 “나의 만트라(주문) 중 하나는 집중과 단순함이다. 단순함은 복잡함보다 더 어렵다”(98년 5월 비즈니스위크)고 설파했다. 잡스는 칼라시니코프보다 36년 늦게 태어나 2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나이와 시대, 문화와 환경이 전혀 다른 곳에서 살았지만 두 천재가 시공을 초월해 하나로 연결됐다면 과장일까.
시베리아 우랄산맥 인근 알타이 지역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를 영웅으로 만든 것은 소련을 침공한 나치 독일이었다. 그는 41년 소련군 제8기계화군단 제12전차사단 제24전차연대 소속 중사로 T-34전차 지휘관을 맡아 2차대전에 참가했다. 소련 서부 브랸스크에서 독일군 34군단 소속 기갑부대를 만나 전투하다 파편을 맞아 어깨와 가슴을 다쳤다. 소련군 8만 명이 전사하고 5만 명이 포로가 된 큰 전투였다. 당시 병원으로 후송된 그는 소련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성능이 뛰어난 자동 소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소총과 함께 자동으로 연속 사격이 가능한 성능 좋은 MP-38이나 MP-41 등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독일군에게 소련군이 속절없이 패배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군도 41년부터 PPSh-41 기관단총(일명 따발총)을 사용했다. 이 기관단총은 근거리에서 단시간에 총알을 퍼붓기가 쉬워 소련군이 애용했지만 장전이 힘들고, 드럼 탄창을 쓸 경우 탄환이 걸리기 쉬운 결점이 있었다. 소련군은 42년 이후 PPS-42, 43 등 기관단총을 내놨지만 독일군은 43년 Stg-44라는 고성능 돌격소총을 개발해 대응했다. 독일군은 무기체계의 우위를 계속 유지해 패전 직전까지 소련군과의 전투 시 전사자 발생 비율에서 1대7 정도의 우위를 지킨 것으로 알려졌다.
칼라시니코프는 총기에 대한 전문 지식이나 개발 경험이 없는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에서 후송된 병원 간호사에게 노트와 연필을 빌려 소총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듬해 4월 퇴원한 그는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시베리아 철도기관실 기술부에 들어가 자동 소총 제작에 참여했다. 호기심은 그의 최대 무기였다. 43년 소련군 무기아카데미 회원이 된 그는 본격적으로 신형 자동 소총 개발에 매달렸다. 연구원들 중 유일한 중학교 졸업자였다. 결국 그가 제출한 설계안이 채택되고 49년부터 양산에 들어갔다.
AK-47은 총기의 역사를 완전히 바꾼 기념비적 소총으로 꼽힌다. 부품은 최대한 단순화해 8개밖에 되지 않는다. 그만큼 사용하기 쉽다는 말이다. 고장이 적고 조작이 간단해 총기를 전혀 접하지 않은 사람도 1시간 정도만 교육받으면 사용이 가능하다. 이런 장점은 시에라리온·모잠비크·소말리아·콩고·수단 등 제3세계에서 소년·소녀 병사를 대량 배출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고장도 잘 나지 않는다. 탄환이 장전돼 화약이 폭발하는 곳인 약실이 이전의 다른 소총에 비해 크게 개선됐다. 먼지나 화약 찌꺼기가 약실에 남아 있어도 다음 탄환이 막히지 않고 부드럽게 끌어올려진다는 것이 베트남전과 이라크전 등 실전을 통해 증명됐다. 이물질이 유입되지 않도록 작동 공간을 최대한 작고 촘촘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오히려 이런 공간을 넉넉하게 만들어야 이물질의 배출이 쉽다고 생각한 역발상이 적중했다.
무게는 4.3㎏으로 무거운 편이다. 슬라이드 부분은 강철제를 사용해 M-16의 2배나 된다. 하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변형된 탄환도 사용이 가능해졌다. 무게 때문에 연발사격 시 반동이 커 총구가 튕겨 올라가 점차 위쪽을 향한다는 것이 몇 안 되는 단점이지만 다른 장점들이 이를 커버하고도 남는다는 평이다. 대량 생산했을 때 제작비는 공장도 가격으로 120달러에 불과했다. 우간다에서는 닭 한 마리 값에 거래되기도 한다. 후속으로 개발된 개량형으로는 AKM, AK74, AK100시리즈 등이 있다.
AK-47은 냉전에 편승해 소련을 주축으로 하는 공산 동구권에 대거 보급돼 주력 무기가 됐다. 반제국주의를 외치던 아랍·아프리카·아시아 등의 제3세계에도 친소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대량 공급됐다. 지구상의 소총 5~6자루 중 하나가 AK-47이다. 소련은 바르샤바조약 회원국과 북한·중국 등 20여 개 나라에 라이선스 생산을 허가해 줬다. 경제사정이 열악했던 옛 유고슬라비아는 이 총을 마구 내다팔았다. 북한은 58년부터 ‘58식 보총’이라는 이름으로 자체 생산한다.
냉전시대엔 그의 존재 자체가 비밀
이집트의 수에즈운하 국유화 선언으로 촉발된 56년 제2차 중동전쟁은 AK-47의 사실상 국제전 데뷔 무대가 됐다. 60~80년대엔 아프리카의 식민지 해방 투쟁과 제3세계 혁명의 상징이 됐다. 값싸고 조작이 쉬운 이 총은 내전이나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했다. 해적·마피아 등 범죄조직이 애용했으며 알카에다 등 테러리스트의 손에도 들려 있었다. 2013년 12월 사담 후세인이 숨어 있다 붙잡혔을 때 동굴 안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이 소총은 정규군보다 민간인들에게 더욱 악명이 높았다. 분쟁지역 어린이와 여성들에겐 공포 그 자체였다.
20세기 가장 뛰어난 발명품 중 하나를 개발했지만 칼라시니코프의 삶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냉전시대에는 그의 존재 자체가 비밀이었다. 소련의 개혁·개방이 시작된 80년대 말 미하일 고르바초프 시대에 와서야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생애 마지막까지 우랄산맥에 가까운 이젭스크에 거주했다.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1000㎞ 떨어진 소련 최대 군사산업 도시인 이젭스크로 이주한 것은 AK-47을 개발한 지 4년 뒤인 51년이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30평 규모 아파트에서 평범하게 살았다. 100개 이상의 특허를 보유한 회사를 가지고 미국 플로리다의 대저택에서 살았던 M-16 설계자 스토너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소총 때문에 세계 각지에서 혼란과 비극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 왔다. “조국을 지키기 위한 일념에서 AK-47을 개발했다. 방어용 무기다. 테러리스트와 조직 범죄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정의롭지 못한 전쟁에 이 무기가 사용되는 것은 설계자가 아닌 정치인들의 잘못이다.” 평생 골수 공산주의자를 자처했던 소총의 천재가 털어놓은 항변이다.
한경환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