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관심 세상史

李舜臣의 전쟁르포-鳴梁(명량)해전 이야기

淸山에 2014. 1. 1. 18:05

 

 

 

 

 

 

李舜臣의 전쟁르포-鳴梁(명량)해전 이야기

"네가 군법으로 죽고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趙甲濟   


 
   倭軍과 전쟁중에 모함에 걸려 투옥되고 고문까지 당하였던 李舜臣은 누명이 풀려 백의종군을 하다가 조선 水軍이 전멸하다시피 하자 다시 三軍수군통제사로 복직된다. 남은 배는 12척. 그래도 충무공은 '舜臣不死 尙有十二'라는 보고를 올린다. '이순신은 죽지 않았고 아직 12척이나 있습니다'는 말이다. '12척밖에 없다'가 아니라 '아직도 12척이나 있다'고 한다. 이 말이 가슴을 친다. 우리 민족사에 남을 만한 가장 감동적인 말중의 하나이다. 12척에 한 척을 보태어 13척을 이끌고 가서 敵船 200척과 싸운 것이 명량전투이다. 이순신의 亂中日記 중 가장 생생한 묘사가 이 海戰에 관한 것이다. 從軍기자의 기사처럼 生動하는, 李舜臣의 르포를 소개한다.
  
   <이른 아침에 別望軍이 다가와 보고하기를 수효를 알 수 없도록 많은 적선이 鳴梁(명량)으로 들어와 곧장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으로 오고 있다고 하였다. 즉각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수로 많은 敵을 대적하는 것이라 모두 회피하기만 꾀하는데 右水使 金億秋가 탄 배는 이미 2마장(1마장은 십리나 오리 정도 거리) 밖으로 나가 있었다. 나는 노를 재촉하여 앞으로 돌진하여 地字, 玄字 등 각종 銃筒을 폭풍과 우뢰같이 쏘아대고 군관들이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가 물러났다가 하였다.
  
   그러나 겹겹히 둘러싸여서 형세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온 배의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 보며 얼굴 빛을 잃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되 적선이 비록 많다고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치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하여 적을 쏘고 또 쏘아라 하였다. 여러 장수들의 배들을 본 즉, 먼 바다로 물러서 있는데,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고자 해도 적들이 그 틈을 타서 더 대들 것이라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호각을 불어 中軍에게 軍令을 내리는 깃발을 세우게 하고 또 招搖旗를 세웠더니 中軍將 미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로 가까이 왔으며 거제현령 安衛의 배가 먼저 다가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친히 安衛를 불러 말하기를, 너는 군법으로 죽고싶으냐, 네가 군법으로 죽고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니, 安衛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하였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여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피할 것이냐, 당장에 처형할 것이로되 敵勢가 또한 급하니 우선 功을 세우게 하리라 하였다.
  
   그래서 두 배가 앞서나가자 敵將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2척에 지시하여 일시에 安衛의 배에 개미가 붙듯이 서로 먼저 올라가려 하니 安衛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죽을 힘을 다하여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 창으로, 혹은 水磨石 덩어리로 무수히 마구 쳐대다가 배 위의 사람들이 거의 기진맥진하므로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 들어가 빗발치듯 마구 쏘아댔다. 적선 3척이 거의 다 엎어지고 쓰러졌을 때 鹿島萬戶(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들이 뒤따라 와서 힘을 합해 적을 사살하니 몸을 움직이는 적은 하나도 없었다.
  
   투항한 倭人 俊沙는 안골포(지금 진해시 안골동)의 적진으로부터 항복해 온 자인데 내 배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더니 말하기를,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저 자가 바로 안골포 적진의 적장 마다시요라고 했다. 내가 無上(물긷는 군사)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뱃머리에 낚아 올린 즉, 俊沙가 좋아 날뛰면서 바로 마다시라고 말하므로 곧 명하여 토막토막 자르게 하니, 적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이때 우리 배들은 적이 다시 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북을 울리며 일제히 진격하여 地字, 玄字 포를 쏘아대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퍼부어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은 퇴각하여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우리 수군은 싸웠던 바다에 그대로 묵고 싶었으나 물결이 몹시 험하고 바람도 역풍인 데다가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로 옮겨 가서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실로 天幸이었다>(朴惠一 외 3명이 쓴 「李舜臣의 日記」에서 인용. 서울대학교 출판부)
 

 

 

 

 

 

 

 

玉浦에서: 이순신이 기뻐할 위대한 역전승
  


  충무공이 孤軍奮鬪하여 지켜낸 바닷가에서 세계 제1이던 일본 조선공업을 누르고 한국의 조선업이 지금 세계 頂上에 올라 있다. 세계 7대 造船所가 한국에 있다니 이야말로 충무공이 기뻐할 민족적 逆轉勝이 아닌가.
  趙甲濟
  
  어제 尙美會(  02-734-1245  ) 여행단 32명은 거제도 옥포만을 내려다 보는 玉浦大捷기념탑을 방문했다. '亂中日記를 들고 떠나는 민족의 聖地순례' 2박3일의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루 전 퍼부었던 폭우가 걷히고 파아란 하늘과 청명한 공기 속에서 옥포만의 위용이 압도적으로 우리 눈앞에 다가왔다. 세계 제2위의 대우조선 공장이 내려다 보였다. 건조중인 수십만톤짜리 巨船들이 옥포만을 좁게 만들고 있었다. 900톤까지 들어올릴 수 있는 크레인 등도 보였다. 쇳덩어리의 집합체가 일대 장관이었다.
  
   옥포海戰은 李舜臣 장군의 첫 승리일 뿐 아니라 임진왜란중 조선군의 첫 승리였다. 1592년 4월14일(음력) 부산포에 상륙한 15만 명의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4월말에는 서울을 점령한다. 서울을 방어하도록 명령받은 金命元은 장수 된 몸이면서도 일본군이 다가오자 武器를 강에 버리고는 변장하여 달아나버렸다.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왜군은 아무 저항도 없이 서울을 점령했고, 宣祖는 북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1592년 5월초의 상황이었다. 정규군인 官軍이 붕괴되었으니 나라의 운명은 절망적이었다. 이러한 때 玉浦 해전 승리는 그 어느 누구의 지시도 도움도 없이 李舜臣의 결단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전남 여수에 있던 전라좌수사 李舜臣은 우수사 李億祺(이억기)와 함께 85척의 함선을 이끌고 5월8일 옥포만에 도착했다. 일본 해군은 50여척을 정박시켜놓고 있다가 우리 水軍 배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이 기세에 눌려 우리 배 6척은 싸우지도 않고 달아났다. 충무공은 직접 敵陣으로 들어가 26척을 불살랐다. 배를 잃은 일본군은 거제도에 상륙하여 도망했고, 살아남은 함선은 부산포로 물러났다.


   이 승리는 조선과 일본의 정규군끼리 대결하여 조선군이 올린 첫 승리였다. 이 첫 경험이 李舜臣 함대의 자신감으로 굳어졌을 뿐 아니라 패퇴를 거듭하던 宣祖 정권도 逆轉勝의 희망을 버리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 해전을 기려 巨濟市가 옥포만을 내려다 보는 산꼭대기에 만든 옥포대첩기념공원은 한려수도를 둘러볼 수 있게 하고 호젓한 산책로가 있어 생각에 잠기게도 했다. 특히, 그 勝戰의 현장에 해양강국 한국의 한 상징적 공장이 健在한 것을 내려다 보니 “이순신의 정신과 숨결이 저렇게 살아 있구나”하는 감회에 젖었다. 李舜臣의 이야기가 화석화된 역사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實感이 드는 것이었다.


   李舜臣이 남해안 바다를 지키지 못했으면 호남 곡창지대로 일본군이 들어가 明軍이 구원하러 오기 전에 조선은 일본 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충무공이 孤軍奮鬪하여 지켜낸 바닷가에서 세계 제1이던 일본 조선공업을 누르고 한국의 조선업이 지금 세계 頂上에 올라 있다. 세계 7대 造船所가 다 한국에 있다니 이야말로 충무공이 기뻐할 민족적 逆轉勝이 아닌가.
  
   오후에 그 옥포조선소에 들렸다. 휴일인데도 李學文 홍보팀장(부장)이 나와서 尙美會 여행단을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130만 평에 들어 서 있는 대우조선해양주식회사(DSME)는 종업원이 1만2000명, 협력업체 종사원은 약1만900명이다. 올해 매출액은 약5조원, 영업실적은 100억 달러(수주물량)를 예상하고 현재 수주 殘量이 149억 달러어치나 된다. LNG 운반선 건조량에서는 대우조선이 세계1위이다. 건조 선박의 약97%를 수출한다. 한 해에 이 조선소가 사용하는 철강무게만 해도 100만톤을 넘는다. 그 중 약70%는 포스코에서 사들이고 나머지는 수입한다. 포스코가 철강생산을 독점하고 있으므로 생산자가 큰 소리 친다고 한다.


   대우조선이 만드는 32만톤 유조선의 경우 어른 500만 명분의 무게를 실을 수 있다. 이 조선소에서 짓는 배들중 가장 비싼 것은 浮游式원유생산저장하역선(FPSO: Floating Product Storage Off-loading)이다. 한 척이 10억 달러선이다. 아마도 9만톤짜리 원자력 항공모함과 핵추진 잠수함 및 이지스 순양함을 제외하면 가장 비싼 배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대우조선해양주식회사는 약1500명의 설계요원들을 데리고 있다. 한국의 조선업이 세계최고의 경쟁력을 확보한 이유는 이 기술력인 것이다.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한국의 조선업이 싼 임금으로 성장했고, 이 때문에 현대중공업 등 조선업종에서 노사분규가 가장 심했던 시절이 있었다. 李學文 팀장은 “대우조선 공장은 그린 앤드 크린(Green and Clean)하다”는 표현을 했다. 둘러보니 공장이라기 보다는 ‘쇳덩어리를 조각하는 공원’이란 느낌이 들었다. 쇳물이 녹아내려 바다를 더럽히는 그런 조선소를 생각하면 이 또한 오해이다. 공장을 한 바퀴 둘러보아도 휴지 한 조각, 오물 한 점, 쇳물 한 방울 찾을 수 없었다.
  
   유조선 한 척을 만드는 데 약8만 조각의 철판이 필요하다. 이 조각을 이어붙여 가는 것이 造船이다. 그래서 건설업종과 生理가 비슷하고 현대건설처럼 건설업에서 성공한 기업이 진출하면 잘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는 동행한 여행단 사람들에게 “이것이 바로 한국의 피라미드가 아니겠습니까. 프랑스는 에펠탑을 갖고 있지만 이런 조선소는 없으니 열등감을 갖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이 가장 감동적인 관광거리가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지키자, 지키도록 하자, 지적확인하자”
   “No change, no future'(변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
   이런 모토가 쓰여진 공장을 구경하던 여행객이 “이 공장을 만든 金宇中씨야말로 충무공의 정신을 이어받은 분이 아닌가. 그분이 獄에서 나와야 할텐데”라고 말했다. 다른 분은 한국인으로 태어난 자부심을 느낀다고도 했다. 李舜臣의 위대성은 조정이나 국가가 전혀 지원하지도 않는 가운데서 水軍을 精兵으로 훈련하여 프로 戰士 집단인 일본군을 무찔렀다는 이른바 白衣從軍 정신에 있다. 조선조는 임진왜란을 당한 뒤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정묘호란, 병자호란, 그리고 일제침략을 허용하고 말았다. 李舜臣을 기렸으나 그의 정신을 이어받지 못했던 것이 조선조였다. 실천력이 약한 선비집단이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李舜臣 정신을 제대로 이어받은 것은 李承晩이 建國과 建軍을 주도했고, 朴正熙가 근대화와 자주국방정책을 이끌었던 대한민국이었다. 두 위대한 대통령은 富國强兵을 목표로 삼아 거대한 경제력과 군사력과 과학기술력을 건설했다. 종합 國力面에서 세계 10위권안에 드는 대한민국이야말로 李舜臣의 자주국방 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정신과 실력을 두루 갖춘 자랑스러운 후손들의 집합체인 것이다. 李舜臣 정신은 말장난이나 글짓기로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 실력으로써 계승하는 것이다.


   대우조선 공장을 나서면서 옥포대첩비가 있는 산꼭대기를 쳐다보았다. 내 곁의 한 분이 말했다.
   “기업은 이렇게 잘 하는데 정치는 왜 그 모양입니까. 정치도 기업에 맡기면 안될까요?”
   옥포대첩비 아래 效忠祠에는 ‘尙有十二微臣不死’(상유십이미신불사)라는 글이 걸려 있었다. 충무공이, 元均의 패전으로 사라진 水軍을 재건하여 일본군과 싸우려고 준비하고 있던 중 조정에 보고한 문서의 한 구절이다. “아직 12척이 있고 제가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12척밖에 남지 않았던 朝鮮水軍으로 기적의 鳴梁대첩을 만들어냈던 李舜臣이 還生하여 대우조선의 위용과 巨船들의 모습을 보았다면 “여러분들, 정말 수고했습니다”라고 머리를 숙였을 것이다.

 


  [ 2006-05-08, 1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