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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확률 5000분의 1 대모험 … 적진 허리 끊어 6·25전쟁 대세 뒤집다[인천상륙작전 15일 63주년]

淸山에 2013. 9. 13. 06:26

 

 

 

 

 

 

[인천상륙작전 15일 63주년]

성공 확률 5000분의 1 대모험 … 적진 허리 끊어 6·25전쟁 대세 뒤집다
[중앙일보] 입력 2013.09.13 00:52 

 수정 2013.09.13 01:15

 

 

 


해군·해병대 전승 기념 행사
낙동강에 집중한 북한군 허 찔러
전사자 13명 내고 놀라운 성과
세계 3대 상륙작전 중 하나 꼽혀
 
 
작전명 크로마이트(Chromite).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훗날 “성공 확률은 5000분의 1이었다”고 술회했던, 위험천만한 인천상륙작전의 명칭은 철광석의 이름에서 따왔다. 크로마이트란 무의미한 이름을 일부러 붙였을 만큼 작전 보안에도 철저했다.

 15일은 인천상륙작전 63주년이다. 해군과 해병대는 13일 인천 월미도에 안보전시관을 여는 것을 시작으로 15일까지 전승기념 행사를 연다. 15일 인천 앞바다에선 세종대왕함 등 함정 10여 척과 항공기 20여 대, 상륙장갑차 20여 대가 참가해 인천상륙작전을 재연하는 행사를 하고 맥아더 동상에 헌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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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9월 15일부터 17일까지의 3일은 낙동강까지 밀렸던 한국전쟁을 수세에서 공세로 반전시킨 날이었을 뿐 아니라 전사(戰史)에도 기록된 날이다. 군사전문가들은 인천상륙작전을 제1차 세계대전 때 터키의 갈리폴리상륙작전,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의 노르망디상륙작전과 더불어 세계 3대 상륙작전의 하나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학수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은 “인천상륙작전은 20세기 마지막 대규모 상륙작전”이라며 “다른 상륙작전에서 연합군이 많은 피해를 봤던 것과 달리 인천상륙작전 때 아군의 피해가 거의 없었다는 점도 얼마나 성공한 작전이었는지 보여 준다”고 말했다.

 

 갈리폴리상륙작전 때 연합군은 20만5000여 명, 노르망디상륙작전 때는 8975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인천상륙작전 당시 전사자는 국군과 유엔군을 합쳐 15일 9명, 16일 4명 등 모두 13명이었다.

 

 그런 인천상륙작전은 일대 도박이었다. 작전회의에서 다른 장군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맥아더 장군이 “반드시 성공한다. 아무도 이렇게 섣부른(brash) 짓을 할 줄은 모를 테니까”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작전이 얼마나 모험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당시 소령으로 참전했던 공정식 전 해병대 사령관은 “인천 앞바다는 조수간만의 차가 6m나 되고 물이 차 있는 만조시간은 2시간밖에 안 될 뿐 아니라 항로가 구불구불하고 좁아 작전이 불가능한 지형이었다”며 “미국 내에서도 맥아더 장군을 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육지에서 반격할 경우 10만 명의 목숨을 담보해야 한다”는 논리로 반대자들을 설득했다.

 

 맥아더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배후지역의 섬에 병력을 상륙시켜 뒤에서부터 일본군을 무력화한 ‘개구리 전법(Leap Frogging)’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적이 있다. 북한군이 낙동강 전투에 몰두하고 있어 인천은 상대적으로 허술할 것이니 그때처럼 적의 허리를 끊을 수 있다는 맥아더(유엔군 사령관) 장군의 예측은 주효했다.

 

 합동군사대 해군 교관인 김창섭 중령은 “전쟁 발발 직후 마오쩌둥(毛澤東)이 김일성에게 서울지역의 방어를 위해 인천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쌓을 필요가 있다고 충고했다”며 “김일성은 그러나 낙동강 전선의 전력을 메우기 위해 인천 쪽 병력 일부를 낙동강으로 보내 방어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했다”고 설명했다. 연합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13일 만인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고, 이후 평양을 거쳐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었다.

 

 

정용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