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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淳台의 6·25 南侵전쟁이야기(15)/ “귀신이라도 잡겠다 (They might capture the devil)”

淸山에 2013. 8. 31. 17:59

기**

 

 

 

 

 

 

鄭淳台의 6·25 南侵전쟁이야기(15)/ “귀신이라도 잡겠다

 (They might capture the devil)”

대한민국 해병대에 찬사를 보낸 마가렛 히긴스 記者

鄭淳台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낙동강은 붉게 물들고 강가에 시체가 겹겹이 쌓여
 
낙동강은 남한 제1의 大河(대하)로서 태백산맥에서 발원하여, 장장 525km를 흘러 부산 서쪽에서 남해 바다로 흘러든다. 유역면적은 2만 3000 평방 킬로미터를 적셔 沃土(옥토)로 만들었다. 북한군의 거의 모든 사단이 이 강 연안에 집결하여 도하작전을 경쟁했다.

도하에 앞서 부대마다 회의를 열고 도하의 의의를 설명하고 각개 병사들에게 목숨을 아끼지 말고 도하한다는 결의를 밝히게 했다. ‘탈취 문서’에 의하면  敵 제3사단의 한 병사는 다음과 같은 결의를 밝혔다.

 

<이번 낙동강 도하에 있어 소대장의 명령을 1초도 어기지 않고, 분대장의 명령을 즉시 실천하고, 전투대열을 이탈하지 않고, 적의 포탄과 탄환이 날아오더라도 겁내지 않고, 목숨을 아까워하지도 않고 낙동강을 도하할 것입니다.


또 도하 때는 동지를 돕고, 적에 발견되는 바 없이 도하하고, 38선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전투에서 승리해 온 완강성과 전투에서의 많은 경험을 이번 낙동강에 있어서 용감하게 발휘하여 도하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조국과 인민을 위해 싸운다고 맹세한 군인선서를 생각하면서 최후의 피 한 방울도 아끼지 않고 싸우겠습니다. 도하에 있어 나는 중대의 모범이 될 것을 서약합니다.>

 

북한군의 주력 10만은 空爆(공폭) 등에 의한 30~40%의 전력 損耗(손모)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사력을 다해 도하를 결행했다. 도하용의 舟艇(주정)은 애시당초에 없었고, 야음을 틈타 드럼통을 띄운다든지, 나룻배 및 急造(급조) 뗏목, 徒涉地(도섭지)에 흙을 채운 가마니 및 돌을 쌓아서 포를 운반한다든지 하는 수법을 구사했다.

 

그러나 이들은 기다리고 있던 아군의 포격 및 空爆(공폭)에 의해 많은 사상자를 냈다. 낙동강은 붉게 물들고 강가에는 시체가 겹겹이 쌓여갔다. 그 처참함은 미 육군의 公刊史(공간사) 《남은 낙동강, 북은 압록강까지》에도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어느 하나의 전쟁터만 해도 2000여 명의 북한군 유기사체가 뒹굴고, 강바닥은 북한군의 시체로 덮혀, (중략) 엄청난 파리떼로 시계를 막고 있었다.>

 

하기와라 씨의 저서 《조선전쟁》에 따르면, 워싱턴의 ‘탈취 문서’ 중에 ‘희생자 등기표“라고 하는 14매의 手記(수기) 메모가 있다. 전사한 북한군 병사의 매장장소와 간단한 경력, 매장지의 지도가 기록되어 있다. 장소는 경상남도 창녕군 南谷面 詩南里(남곡면 시남리). 여기에 14명의 북한군 전사자가 묻혀 있다는 메모이다. 한 사람 한 사람 現 주소, 입대연원일, 사망에 이르는 경과 등이 기재된 것이다.


영산전투- 적 최정예 제4사단의 소멸

 

倭館(왜관)에서 靈山(영산)을 거쳐 南旨(남지)에 이르는 낙동강 本流(본류)는 방어에 유리한 자연적 조건이다. 낙동강 강폭은 400~800m 이며, 물이 흐르는 부분은 300~400m, 수심은 1~1.5m. 낙동강의 동·서 兩岸(양안)에는 깎아세운 듯한 벼랑이 많다. 지도상에서 보면 낙동강의 영산 돌출부는 女人의 긴장한 유방처럼 탐스럽다. 처절한 전투가 전개된 이 돌출부에는 아이러니하게도 詩南里(시남리)·月下里(월하리)·大谷里(대곡리) 등 매우 로맨틱한 이름의 마을이 많다.

 

부산 교두보의 방어선 중에서 미 제8군이 가장 걱정했던 곳은 바로 이 정면이다. 강이 S자로 蛇行(사행)해 도하하기 쉽고, 또 서부 경남에서 東進(동진)하는 북한군은 우선 이 정면에 부딪치게 되어 있는 데다 경부선 철도와도 가까웠다. 더욱이 이 정면을 담당한 부대는 大田전투에서 북한군에게 패했던 미 제24사단이었다.

 

이러한 걱정은 현실화되었다. 8월6일 심야, 북한군 제4사단은 낙동강 돌출부에 은밀하게 도하, 東岸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미 제24사단은 제1선 대대에 이어 예비의 제19연대를 투입했지만, 모두 저지되었다. 이에 제34연대와 제19연대를 竝列(병렬)해 공격했지만, 북한군 제4사단의 반격을 받아 격퇴당했다. 7일에는 중간 요지인 클로바고지 및 오봉산 능선도 적에게 점령되었다.

 

북한군은 水中橋(수중교)를 가설하여 평균 수심 1.5m의 낙동강에서 도하작전을 감행했다. 수중교는 강바닥에 암석과 목재 혹은 가마니에 모래를 채워 수면 아래 30cm 높이로 水中假道(수중가도)를 만들어 탱크·대포 등 중장비까지 도하시키는 것으로, 소련군이 獨蘇(독소)전쟁 때 자주 이용했던 秘藏(비장)의 방식이다.

 

8일, 미 제24사단은 미 본토로부터 막 도착한 미 제9연대(제2사단 예하)를 투입, 총력을 들어 반격했지만, 그때 이미 북한군 제4사단은 主力의 도하를 끝내고 있었기 때문에 반격 역시 실패했다. 낙동강 돌출부 동쪽 15km지점의 靈山(영산) 시가지까지도 점령되었다.

 

12일, 미 제8군은 軍예비인 제27연대를 영산전투에 증파했다. 다음 날인 13일 아침, 미 제27연대는 영산 남쪽인 咸安郡(함안군) 漆西面(칠서면) 방면으로부터 낙동강을 逆(역)도하, 배후로부터 북한군을 습격, 격파하고 南旨(남지)를 거쳐 영산읍(지금은 영산면)을 회복한 후 다시 軍(군) 예비가 되어 대구로 돌아갔다. 대구 북방 多富洞(다부동)·왜관 전선이 심상찮았기 때문이었다.

 

제24사단은 14일부터 총공격을 개시, 낙동강 돌출부에 위치한 박진지구(영산면에서 직선거리로 15km)를 회복하려 했지만, 또다시 북한군에게 저지되었다. 워커 중장은 격노하여 미 제1해병여단을 제24사단에 배속시키고 조기 탈환을 엄명했다.   

   

영산전투는 17일 미 제8군 예비인 미 제5해병연대가 투입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미군의 반격에 쫓긴 敵 제4사단은 영산읍에서 클로비 고지 및 오봉산 능선으로 퇴각, 여기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으나 다음날까지 계속된 미군의 맹렬한 공중폭격과 과감한 지상공격에 지리멸렬, 간신히 살아남은 적병은 낙동강 西岸의 宜寧(의령) 방면으로 퇴각했다. 19일, 미 제24사단은 드디어 잔적을 소탕하고 낙동강돌출부를 회복했다. 이로써 서울을 함락시킨 직후 김일성이로부터 ‘서울근위사단’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북한군 제4사단은 궤멸했다.



호국의 高地 옆에 나부끼는 ‘통일일꾼’의 從北 강연회 플래카드

 

영산전투의 격전지는 낙동강 돌출부와 5번 국도 사이에 펼쳐져 있다. 필자는 함안군 칠서면에서 5번국도를 타고 낙동대교를 건너 영산면에 진입했다. 영산은 6·25 때 邑(읍)이었지만, 그 후 인구가 줄어 이제는 面으로 되어 있다. ‘영산호국공원’부터 찾아갔다. 호국공원 앞 좁은 샛강인 南川 위에 조선 正祖 때(1780년) 영산 백성들이 만든 무지개다리인 萬年橋(만년교)가 걸려 있다. 아담하고 소박하지만, 그 위로 걷기가 죄송한 보물 제564호이다. 이번 봄에는 다리 양쪽에 개나리·철죽 벚꽃이 한꺼번에 피어 수면 위의 무지개다리, 물속의 무지개 그림자와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처럼 가슴에 와 닿았다.    

 

靈山舊邑(영산구읍)의 만년교는 漢陽(한양)-東萊(동래) 간 嶺南大路(영남대로)의 右路(우로), 즉 추풍령-星州(성주)-昌寧(창녕) 등지를 경유하는 도로 상의 교량이었다. 영남대로는 통일신라 이후 조선왕조 때까지 우리 역사상 가장 중요한 도로 중 하나였다. 

 

만년교를 건너 호국공원을 들어가 임진왜란 호국충혼탑과 3·1운동기념비에 참배했다. 그런데 ‘6·25 전적비’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 이곳에서 만난 촌로가 전적비는 공원 동쪽 가파른 고지(235m) 위에 있다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었다. 이 촌로의 회고에 따르면 ‘이 평지에 돌출한 235고지의 기슭에는 감나무가 많이 자라나 있었는데, 미군의 포격에 의해 四肢(사지)가 찢어진 적군의 시체가 감나무 위에 무수히 널브러져 있었다”고 한다.

 

235고지에 오르면 釜谷(부곡)온천지-密陽(밀양)으로 연결되는 도로, 그리고 창녕읍으로 달리는 5번국도가 손바닥 안처럼 빤히 내려다 보인다. 밀양·三浪津(삼랑진)은 경부선 기차가 경유하는 주요 역이다. 적이 만약 밀양이나 삼랑진을 점령했다면 부산교두보는 남북으로 두 동강이 나버리게 되어 있었다.

 

부곡 쪽으로 답사하기 위해 235고지(남산)을 내려와 79번 국도로 향했다. 그 진입로에 수상한 플래카드 하나가 나붙어 있었다. 거기엔 “창녕이 낳은 통일일꾼 강정구 교수의 국제정세와 한반도의 선택과 평화협정 강연회”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통일일꾼’ ‘평화협정’ 따위는 시대에 가장 뒤떨어진 從北(종북)들의 상투어이다.

 

79번 국도는 이제 6차선 고속화 도로가 되어 자동차들이 무서운 속도로 달린다. 원앙고개(100m)를 넘어 부곡온천지까지 갔다가 되돌아와 5번 국도를 타고 창녕읍에 닿았다. 북한군 제4사단· 제9사단이 궤멸한 창녕·영산 지구를 일주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창녕읍까지 와서 ‘신라 眞興王 拓境碑(진흥왕 척경비)’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창녕읍사무소와 창녕경찰서 바로 뒤 만옥정 공원에 가면 진흥왕 척경비가 있다.

 

서기 561년, 진흥왕은 새로이 영토로 편입된 比火伽倻(비화가야)의 터전인 이곳 창녕까지 몸소 행차하여 확대된 영토에 대한 새로운 정책을 신하들 앞에서 선포했다. 이 사실을 돌에 새긴 것이 척경비다. 서울의 北漢山碑(북한산비), 함경남도의 마운령비· 황초령비와 더불어 진흥왕의 4대 巡狩碑(순수비) 중 하나이다. 순수비는 모두 험준한 군사요새지에 서 있다. 比斯伐(비사벌)이라고도 불렸던 창녕의 경우 신라가 낙동강 서쪽의 평야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진기지였다. 신라는 한강과 낙동강의 富(부)를 차지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진흥왕 척경비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그 배경으로 잡히는 것이 火旺山(화왕산·757m)이다. 화왕산성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郭再祐(곽재우)가 웅거했던 곳이다. 곽재우는 임진왜란 때 적의 병참로를 차단함으로써 북상한 왜군을 굶주려 패퇴하게 만든 南溟(남명)학파 제1의 병법가였다. 남명의 원래 뜻은 ‘남쪽에 있는 큰 바위’이지만, 여기서는 무학을 숭상하여 칼을 차고 제자를 가르친 대학자 曺植(조식)의 아호이다.


백절불굴의 투혼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것이니…
 
창녕읍에서 1080번 지방도로를 6km 쯤 西進(서진)하다보면 우포늪을 만나게 된다. 국내 최대 규모의 천연늪으로 1억 4000만 년 전의 自然(자연) 늪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는데, 현재 360여종의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生態寶庫(생태보고)이다. 이곳 소목에 올라 우포늪을 조망했다. 우포늪을 뒤로 하고 다시 1080번 지방도로로 3km 달려 梨房面(이방면)에 이르면 1080번 지방도로가 끝난다. 여기서 67번 지방도로를 타고 낙동강변으로 5km쯤 내려오면 陜川郡(합천군)으로 건너가는 赤布橋(적포교)가 걸려 있다. 이곳 兩岸(양안) 일대가 모두 낙동강 방어전 당시의 격전지다.

 

적포교를 건너면 합천군 靑德面(청덕면) 적포3거리. 여기서 20번 국도를 타고 서남쪽으로 10km 쯤 내려가면 낙동강 돌출부 점령에 命運(명운)을 걸었던 북한군 제4사단과 제9사단의 사령부가 들어섰던 의령군 富林面(부림면) 新反里(신반리)이고, 낙동강 西岸(서안)의 이름없는 좁은 길을 따라 18km 쯤 남진하면 의령과 창녕을 잇는 박진교에 와 닿는다.

 

박진교를 건너면 바로 낙동강 돌출부인 창녕군의 대곡리. 강가의 무명고지에 ‘박진지구 전적비’가 세워 있다. 이곳은 1950년 여름 두 차례의 혈전 끝에 적의 공세를 막아낸 피의 전적지이다. 비문에는 “이곳에서 미 제24사단, 제2사단, 그리고 해병 제5연대가 보여준 百折不屈(백절불굴)의 투혼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것이니…”라고 쓰여 있다. 다음은 ‘박진전투기’ 碑文(비문)의 발췌이다.

 

<(전략) 이곳 박진지역은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낙동강을 도하하여 최후의 공세를 벌이던 적과 미군이 2주간 사투를 벌였던 현장이다.
당시 북한군 최정예 부대인 제4사단이 8월5일 야간에 나루터를 이용, 은밀히 기습 침투함으로 강변을 방어하고 있던 미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8월11일에는 영산읍까지 침공했다. 북한군은 일거에 부산을 함락시키기 위해 박진나루터에 가마니 등으로 水中橋(수중교)를 만들고 각종 차량과 병력 등 주력을 침투시킴으로써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기에 처하게 했다.  


이에 유엔군은 대구· 마산 등지에 있던 예비병력을 이곳에 집중시킴으로써 詩南里(시남리)·大鳳里(대봉리)·成士里(성사리)에서 대혈전이 전개되었고, 마침내 8월19일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혀 적을 강 너머로 완전 격퇴했다.>


마산-진주 전투(킨 작전)
 
북한군의 최강부대인 제6 사단이 7월31일‘서부 경남의 중심’진주를 점령하자 미 제8군이 상주지역에서 낙동강 방어를 맡은 미 제25사단을 급거 마산으로 돌려 배치했음은 앞에서 썼다. 이때 제25사단은 상주에서 마산까지 250km를 기차·차량 등을 이용해 불과 36시간만에 이동을 완료했다. 이것은 부산교두보의 內線(내선) 방어가 도로·철로를 이용하면 효율적으로 전개될 수 있음을 예고한 것이었다.

 

낙동강은 南旨(남지)에서 크게 꺾여 東進(동진)하기 때문에 馬山(마산) 정면은 하천방어가 가능하지 않다. 그 대신 馬山의 서부는 크고 작은 작 산들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데다 馬山港(마산항)을 병참선으로 활용할 수 있어 방어전에 유리했다. 또 남해로부터는 제해권을 장악한 유엔군 함선의 항공· 함포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

 

그 무렵 남쪽의 마산 정면에서는 제25사단(킨 소장)이 부산교두보 작전에서 처음으로 공세를 취했다. 이것을 사단장의 이름을 따 ‘킨 작전’이라고 한다. 마산은 서쪽의 진주에서 60km, 동쪽의 부산에서 57km 떨어진 항구도시다. 지금은 마산·창원·진해의 3개 市가 통합되어 昌原(창원)시로 되어 있다. 마산은 창원시로 통합되던 수년 전까지만 해도 경남 제1의 도시였다.

 

8월6일, 마산의 서쪽 끝 鎭東里(진동리)에는 미 제27연대, 미 해병5연대가 집결, 이 조그마한 해안마을은 갑자기 각종 차량과 대포 등으로 붐비기 시작했다. 미 제24연대의 각 대대도 마산 북쪽과 남쪽 그리고 진동리 동북 쪽에 배치되어 보급로를 정비했다. 또 하동전투에서 타격을 받은 미 제29연대를 中岩里(중암리·함안군 郡北面)에 집결시켜 예비로 두었다.

 

7일 아침, 제25사단은 진주고개와 사천(마산 서쪽 50km)를 향해 공격을 개시, 북한군의 침투부대를 격파하면서 11일 아침에는 진주고개를 점령했다. 그런데 격퇴했다고 생각했던 북한군은 산속으로 도피, 밤이 되면 후방에 침투해 습격을 되풀이했다. 鳳岩里(창원시 鎭田面)계곡에서는 미군의 2개 포병대대가 습격을 당해 궤멸당했다. 미 제555포병대대는 사상자 150명을 내고 105mm포 8문을 잃었다. 미 제90포병대대는 사상자 190명 발생에다 155mm포 6문, 차량 26대 유기라는 타격을 받았다.
 
이후 봉암리는 ‘피의 계곡’, ‘砲兵(포병)의 무덤’이라 불렸다. 전투는 전방도 후방도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피아간에 뒤섞여 혼전을 벌였다. 전차 100대를 집중시킨 킨 작전은 북한군 제6사단의 매복공격을 받아 隘路(애로) 속에 분단되어 고전을 거듭했다.  미 제8군은 킨 작전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고 판단해 8월12일 작전중지를 명했다. 그 후 미 제25사단은 咸安(함안)-鎭東(마산) 선으로 물러나 진동 북서쪽 西北山(739m) 일대의 방어로 주력했는데. 이후 1개월에 걸쳐 북한군 제6사단과 격렬한 山地戰(산지전)을 전개하게 된다.

 

킨 작전에는 한국 해병대의 金聖恩[(김성은·1924~2007), 국방장관 역임] 부대도 참가했다. 김성은 부대는 8월6일 밤부터 적 중화기에 의해 차단되어 있는 야반산·수리봉·서북산 일대의 적 진지를 탈환한 후 함안·군북으로 우회 기동하여 그 남쪽에 있는 오봉산과 필봉의 적을 섬멸하는 등 분투했다.

 

해병대 統營(통영) 상륙작전은 북한군의 ‘8월 공세’가 한창이었던 1950년 8월17일 김성은 중령이 지휘한 한국해병 제1대대가 단독으로 통영군 용남면 長坪里(장평리) 바다를 통해 상륙, 통영과 거제도를 점령하려던 북한군 제7사단을 무찌른 전투이다. 장평리 앞바다는 임진왜란 때(1952년 7월8일) 李舜臣(이순신) 장군의 함대가 와카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왜군 함대를 閑山島(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유인하기 위해 5~6척의 척후선을 보낸 거제도-통영 사이의 좁은 바닷길인 見乃梁(견내량)으로, 현재 이곳 바다 위엔 新거제대교와 거제대교가 걸려 있다.

 

통영 상륙작전은 같은 해 9월15일의 仁川(인천) 상륙작전보다 한 달 앞선 상륙작전이었으며, 북한군의 기습 남침 이후 韓美 양군이 낙동강까지 밀리면서 방어전에 급급할 때 유일하게 북한군을 공세에 의해 제압한 작전으로 기록되었다.

 

이때 마산 서부 鎭東里(진동리)에서는 마산-진해를 거쳐 부산을 함락시키려는 敵 제6·제7사단의 공격이 미 제25사단에 의해 막히자 적은 거의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던 통영반도를 먼저 장악한 뒤 거제도를 점령해, 對岸(대안)의 마산항과 진해만을 봉쇄하려 했다. 북한군 제7사단은 제1차로 예하의 제51연대와 제104 치안연대 650명을 보내 8월17일 새벽 1시 고성을 통해 통영읍으로 침입시켰다.

 

이에 8월17일 새벽 3시 김성은 부대는 해군함정 512호정과 평택호에 나눠 타고 통영반도 동북방 1km 지점에 위치한 紙島(지도·거제도와 통영군 사이의 섬)에 도착했다. 그러나 거제도 서북 해안을 방어하는 것보다 통영반도에 상륙하여 적을 섬멸하는 것이 작전상 유리하다고 판단, 통영 근해를 경비하던 우리 해군 함정 703·901·504·512·302·307호정 및 평택호의 지원·엄호 하에 8월17일 18시 통영반도 동북방 장평리에 상륙을 개시했다.

 

이와 병행해 해군 함정들은 사전 계획에 따라 통영항 내에 접근, 매일봉, 남망산 및 부두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해병대를 상륙시킨 512호정과 평택호도 남하하여 함포사격에 가세했다.

 

적은 해병대가 통영항 정면으로 상륙할 것으로 오판하고, 고지에 배치되었던 병력을 통영항 일대에 집결시켜 해안선에 배치시켰다. 이로써 장평리 상륙작전은 아무 接戰(접전)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상륙을 완료한 해병대는 밤을 새워 가며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여 8월18일 새벽 제2중대가 ‘통영의 목구멍’ 轅門(원문)고개로 진격하여 방어진을 구축하고, 제7중대는 시가전의 요충인 매일봉을 5분 먼저 점령함으로써 한 발 늦게 올라오는 적에 치명타를 먹였다. 이에 당황한 적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8월18일 12시부터 해군 함정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19일 오전 10시까지 통영 시가지에서 소탕작전을 벌였다. 퇴로를 차단당한 적의 일부는 어선 3척을 타고 해상으로 도주하다가 해상을 경비하던 504·512호정에 의해 격침되었다.

 

통영상륙작전을 완수한 해병대는 적의 유일한 예상 공격로인 원문고개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 반격해 오는 적의 대부대를 치열한 육박전까지 감행하면서 수 차례에 걸쳐 격퇴했다. 轅門(원문)이란 원래 軍門(군문) 또는 官衙(관아)의 外門(외문)을 뜻한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후 3도수군통제사영이란 관아가 설치되어 統營(통영)이라 불렸는데, 원문은 그 외문에 해당한다. 통영에는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1606년에 세운 忠烈祠(충렬사)와 국보 제305호 洗兵館(세병관)이 보존되어 있다.  

 

이 상륙작전에서 거둔 전과는 적 사살 469명, 포로 83명이며, 따발총 128정, 아식소총 107정, 권총 13정, M1소총 3정, 기관단총 14정, 박격포 2문, 지프 12대, 트럭 10대와 다수의 포탄· 수류탄 등을 노획했다. 아군 피해는 전사 19명, 부상 47명이었다.

 

미국의 일간지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마가렛 히긴스 기자는 한국 해병대의 승전을 보도한 기사에서 “귀신이라도 잡겠다(They might capture the devil)”는 찬사를 보냈다. 6·25 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활약한 히긴스는 1951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은 세계적 전쟁 전문 기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