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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淳台의 6·25 南侵전쟁이야기(13)/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선다면…

淸山에 2013. 8. 9. 19:24

 

 

 

 

 

鄭淳台의 6·25 南侵전쟁이야기(13)/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선다면…

6·25 때 戰死한 美英中 고위층 자제들과 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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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東 쇠고개 전투— 美軍 패잔병이 장독에서 고추장 퍼먹고…
  
이렇게 미 제24사단은 오산으로부터 대전까지 약 15일간에 걸친 전투에서 병력의 절반에 달하는 7000여 명과 장비의 60%를 잃었다. 이 무렵 미국은 이 전쟁이 당초 생각했던 간단한 것이 아닌, 제2차 대전 후 최대의 전쟁- 그 와중에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승세를 탄 북한군은 7월21일 “일거에 소백산맥을 돌파하여 낙동강을 도하해, 적을 종국적으로 격멸하기 위해 유리한 태세를 만든다”는 제4차 작전을 개시했다.

 

미 제8군은 전력이 쇠약해진 제24사단을 후방으로 내려 재편성토록 명하고, 일본으로부터 막 한국에 도착한 제1기병사단에게 永同(영동)을, 제25사단에게 尙州(상주)를 방어토록 했다. 여기서 처음 언급한 제1기병사단은 창설 당시엔 부대명 그대로 騎兵(기병)부대였으나 제2차 대전 때 순수한 보병사단으로 편제된 부대이다.

 

영동(대전 동쪽 40km)의 제1기병사단은 아직 전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연대 및 대대 규모의 부대로써 세 방향으로 포진해 북한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이때 다수의 피난민들이 남하했는데, 여기에 북한군의 게릴라가 섞여들어 정찰 및 습격을 감행했기 때문에 미군은 그 대책에 전전긍긍했다.

 

북한군은 미군이 매설한 지뢰밭의 제거를 위해 수백 명의 피난민을 그곳으로 밀어내면서 그 후방에서 전차와 보병이 사격하면서 전진해 왔다. 제1기병사단은 드디어 배후로부터도 포위되어 7월29일 金泉(김천)으로 퇴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편 尙州(상주: 대전 동북방 60km) 정면의 美 제25사단은 각 예하 연대마다 대응을 달리하고 있었다. 黃澗(황간)의 제27연대는 애로의 지형을 이용해 효과적인 반격을 되풀이 하면서 4일간의. 遲滯(지체)전투로써 북한군 제2사단을 再起(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었다. 미 제27연대는 이어 전개된 부산 교두보戰 중에도 미 제8군의 위기 지역마다 달려가는 소방수(예비부대)로서 武名(무명)을 떨쳤으며, 그 지휘관 마이 켈리스 중령은 곧 대령으로 진급했다. 후일 그는 미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美 제8군사령관으로서 한국을 다시 찾은 인물이다.

 

그러나 같은 미 제25사단 예하부대이지만, 醴泉(예천)의 제24연대는 북한군의 공격만 받으면 패닉을 일으켜 제 멋대로 진지를 버리고 후퇴하여 ‘전선포기부대’라는 오명을 쓰고 있었다. 연대장은 화이트(White) 대령— 이름 그대로 백인이지만, 연대의 병사들은 모두 흑인이었다. 공교로운 것은 제24연대나 제24사단이나 모두 ‘24’가 한국전쟁에는 불운한 숫자인지, 6·25 초전 때 크게 당한 부대들이다.  

제24사단은 후방에서 재편성을 하던 중 적의 대부대가 전라도를 우회하여 西部(서부)경남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에 의거해 예하 2개 연대를 급거 居昌(거창)·晉州(진주) 방면으로 파견했다. 또 오키나와(沖繩)에 주둔하다가 새로 사단에 배속된 제29연대도 그쪽으로 파견했다.

 

그런데 제29연대의 제3대대(대대장 헤롤드 모트 중령)는 河東邑(하동읍) 쇠고개에서 북한군의 매복작전에 걸려 일격에 궤멸했다. 이것은 敵 제6사단이 고의로 하동 쇠고개를 개방하여 미군을 유인, 함정에 빠지게 하고 기습을 가했던 것이다. 前참모총장으로서 ‘영남편성관구사령관’이란 직위를 단 蔡秉德(채병덕) 소장도 여기서 전사했다. 향년 34세. 중장으로 추서되었다. 미군은 이곳을 ‘하동의 올가미’라 부르며 경계했다.

 

하동 쇠고개는 하동군 赤良面(적량면)에서 하동읍으로 들어오는 진입로이다. 고갯길 바로 밑에는 慶全線(경전선) 철도의 하동역이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한국군 100여 명과 제29연대 제3대대장 헤롤드 모트 중령 등 미군 313명이 전사했다. 생존한 미군 병사들은 적량면→橫川面(횡천면) 방면으로 도주했다. 횡천면 如意里(여의리)의 한 촌로는 그때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흑인병사 하나가 담 안으로 후딱 뛰어들어 장독을 열고는 빨간 고추장을 한 주먹 떠 먹다가 질겁을 하며 팔짝팔짝 거려요. 처음엔 딸기잼 정도로 알았나보지…. 무슨 말인지 혀를 돌려 전혀 못 알아들었지만, 하여튼 무섭고도 불쌍해서 얼른 샘물 한 사발에 보리밥 한 주먹을 띄워 주었더니 게 눈 감추 듯 마시고는 냅다 도망갑디다.”

이리하여 서부 경남의 진주(북위 35도 부근) 정면에도 점차 위기가 닥쳐왔다.


북한군 제6사단의 大迂廻

 

7월 말, 미 제8군은 지금까지 행방을 알지 못했던 북한군 제6사단이 진주 정면에 육박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즉, 群山(군산)-木浦(목포)-麗水(여수) 등 호남을 크게 우회했던 북한군 제6사단이 남해안을 東進(동진)해 진주로부터 馬山(마산: 부산 서쪽 45km)를  거쳐 일거에 부산을 찌르려고 했던 것이다. 이 사실은 미 제8군뿐만 아니라 도쿄(東京)을 유엔군사령부, 나아가 워싱턴도 경악케 했다.

 

북한군 제6사단, 그 前身(전신)은, 將卒(장졸) 모두가 조선족으로 이뤄진 중공군 166師(사)였다. 그 사단장 方虎山(방호산), 그는 북한군 야전지휘관들의 작전능력과 조직력으로 랭킹을 매긴다면 첫 손가락을 꼽아야 할 만한 延安派(연안파)의 중진이었다.

 

북한군 제6사단은 북한과 中共 간에 체결된 “인민해방군 내부 조선인 부대를 북조선에 제공한다”는 협정에 따라 鴨綠江(압록강)을 건너 新義州(신의주)에 진주해 있었다. 이것을 방호산이 인솔하고 재편·개명했던 것이다. 남침 반년 전에 편제를 완결하고 맹훈련. 사단 내의 상하관계도 양호했다.
 
방호산은 소련군의 戰術(전술) 독트린에 물들지 않은 연안파 宿將(숙장)의 면목이 躍如(약여)했다. 남침시의 開城(개성) 공격전에 예상 主攻(주공) 방향으로 국군의 수비대를 구속하고, 이미 철거해 있던 경의선 철로를 은밀히 복구하여 병력을 열차편으로 개성 시내에 진입시키는 기습을 단행했다. 또 최초로 한강을 도하 金浦(김포)에 상륙한 것도 북한군 제6사단이었다.

 

이런 위기를 맞아 워커 중장은 8월1일 尙州(상주) 방면의 미 제25사단을 급히 북한군 제6사단의 진공 방향인 마산 방면으로 轉用(전용)하는 한편 예하 全부대에 대해 낙동강 진지로의 후퇴를 명했다. 무적을 자랑하던 미군이 오산·평택·천안·공주·대전 등지에서 무너져 후퇴를 거듭하여 방어선은 낙동강 부근으로 좁혀졌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8월 초순, 韓美軍은 미리 정해진 진지를 점령했다. 이것이 ‘부산 교두보’이라든가 ‘낙동강 방어선’ 혹은 ‘워커 라인’이라고 부른다.

 

당초 부산 교두보는 북측면이 洛井里(낙정리)로부터 영덕까지 90km, 서쪽은 마산으로부터 洛井里까지 135km였다. 한국군이 담당한 북측면은 산지의 연속이다. 미군이 담당한 서측면의 대부분은 낙동강이 흐르는 평야지대인데, 낙동강에 의해 엄호되었다. 최후 방어선의 북측은 왜관에서 동해안의 포항에 이르는 선으로 다시 축소되었다.

 

워커 중장은 “한국에서 철수는 없다”, “1인치라도 빼앗기면 많은 전우를 잃게 된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운다”고 말했다. 매스콤에서는 이를 “Stand or die”, 즉 “固守(고수)인가, 죽음인가”라는 센세이셔널한 제목을 붙였다.

 

당시 한국에는 많은 종군기자가 달려와 제1선에서 취재 경쟁을 벌이다 殉職(순직)을 하기도 했다. 예컨대 아이언 모리슨(런던 타임스), 크리스토퍼 버클리(데일리 텔리그라프) 등 영국기자 2명은 스리쿼터를 타고 국군 제1사단이 3.5인치 로켓포로 적 탱크 4대를 격파한 전투현장에 접근하다가 지뢰가 터지는 바람에 사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 주둔 미 공군대장이었다가 퇴역한 스파츠 장군은 <뉴스위크>誌(지) 특파원으로 전장을 누볐다. 제2차대전 당시 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卿(경)의 아들도 한국전에 종군기자로 참여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 한국의 기자들 중 일선에서 순직하거나 부상한 기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것은 한국 언론의 수치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장군의 아들 132명이 참전하여 35명이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제3대 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인 제임스 밴플리트 中尉(중위)는 B-26 폭격기의 파이롯드로서 1952년 4월4일 야간 출격했으나 돌아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결단력과 행동력의 장군’ 밴플리트 사령관은 바로 다음날 한국군 제2군단의 창설 기념식에 평시와 변함 없는 태도로 참석했다.

 

워커 장군의 아들 샘 중위는 제24사단, 아이젠하워 장군(1952년 11월 미 대통령 당선)의 장남 존 소령은 제7사단에 근무했다. 제2대 8군사령관과 유엔군사령관을 지낸 마크 클라크 장군의 아들은 제2사단에 근무중 3번 부상했고, 하트브레이크 고지에서는 중상을 입고 군무를 계속할 수 없어 퇴역했다. 패튼 장군의 아들 존 대위는 전차부대에서 복무했다. 이것이 바로 미군의 도덕적 우월성이다. 중공의 최고지도자 毛澤東(모택동)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도 유엔군기의 폭격을 맞아 전사했다. 그러나 한국과 북한 수뇌부의 자제들 중 전사자․부상자는 아무도 없었다. 바로 이것이 군사문화 후진국의 모습이다.

 

유엔군을 배수진으로 몰아넣은 ”고수인가, 죽음인가“의 싸움은 이후 1개월 이나 지속되었다. 당시 유행했던 군가도 그 시대를 반영하여 참으로 비장했다. 이 7.5조의 군가 제목은 이젠 잊었지만, 그 가사의 첫 소절은 다음과 같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선다면 아∼ 아∼ 이슬같이 주욱겠노라…” 

그때 부산의 육군종합학교 등에서는 ‘전장의 落花’ 혹은 ‘소모품’이라 불리던 육군 소위를 단기교육으로 양성하고 있었다. 해방동이인 졸자가 살던 집은 미군야전병원이 들어와 있던 동대신동 1가 부산사범학교 담벼락에 붙어 있었는데, 동대신동 2가의 동신국민학교에서 교육받던 후보생들이 시가행진을 하면서 으레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선다면…”을 불렀다. 우리 동네 해방동이 안팎의 꼬마들도 뒤따라가며 후보생들과 함께 그 군가를 제창했다.    
 
 
한반도 남부의 지형조건

 
한국전쟁은 산과 강을 둘러싼 지상의 공방전이었다. 그 승패의 귀추는 지상전에 달려 있었다. 이 지상전의 양상을 규정한 것이 우선 한반도의 地勢(지세)였다. 그 제1의 특징은 넓은 평야가 없고, 산지가 많다는 점이다. 산지의 대부분은 경사가 급한 산과 구릉이다. 더욱이 그 경사가 40~60도가 보통이어서 전차는 오를 수 없고 보병도 기동에 애를 먹는다.

 

당시의 ‘일등로’인 국도라 해봐야 노폭 10m, 대부분 비포장도로였다. 개성-파주를 거쳐 서울로 들어오는 1번국도는 영등포-안양-의왕-수원-오산-평택-천안-연기-유성을 거쳐 목포로 내려간다. 제3번국도는 연천-동두천-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들어온 다음에 잠실-광주-이천-수안보-문경-상주-김천-거창-함양-산청-진주-사천로 이어진다. 금강 하구 장항에서 출발한 제4번 국도는 부여를 거친 다음에 대전 도심을 꿰뚫고 나가 옥천-영동-추풍령-김천-구미-왜관을 거쳐 대구 도심을 지난다. 위의 1번·제3번·제4번 국도가 6·25 초전에 적 주력이 지향한 기동로였다.
     
하천은 북쪽으로부터 임진강, 한강, 금강, 섬진강, 낙동강의 5대 강이 西流(서류) 혹은 南流(남류)하여 큰 장애를 형성한다. 集落(집락) 주변의 작은 산은 거의 헐벗어, 은폐를 하거나 뜨거운 태양을 가릴 灌木(관목)도 거의 없었다. 큰비가 내리면 좁은 하천은 대번에 범람하여 급류를 이루고 兩岸(양안)을 파고들어 자연적인 對戰車壕(대전차호)를 만들어 냈다. 또 평지는 물론 산간에도 무릎까지  빠지는 논이 많았다.

 

서울-부산을 잇는 간선도로변에서도 주위에서 4킬로미터평방의 평야를 찾기 어렵다. 경부선 철도는 경기도 평야의 동단과 충청도의 평야지대를 달리다 대전 동쪽에 이르면 소백산맥계의 산지로 들어서고 낙동강을 건너 후 잠시 대구지역의 금호평야를 달리다가 다시 산지로 들어가서 평지가 거의 없는 釜山(부산)에 도착한다.

 

6·25 당시엔 경부고속철도나 경부고속도로가 없었다. 당연히 적의 主기동로는 경부선과 비슷한 궤적을 긋는 경부본도가 중심이 되었다. 미군이 지연작전을 벌인 경부본도는 서울-수원-오산-평택-천안-조치원-유성까지는 1번국도로, 대전-옥천-영동-황간-추풍령-김천-龜尾(구미)-倭館-대구까지는 4번국도로 이어진다.

 

반면 南漢江(남한강) 水系와 낙동강 수계를 연결하는 옛 嶺南大路(영남대로) 중심의 산지에서는 국군이 지연전을 벌였다. 조선시대의 영남대로라 해도 그 폭은 8자(2.5m)에 불과했고, 6·25 당시의 ‘일등도로’라 해봐야 노폭 10m의 비포장도로였다. 그밖에는 1차선의 馬車道(마차도)였다. 그리고 많은 교량이 荷重(하중) 2톤 정도의 나무다리였다.

 

6·25가 발발한 그해 여름은 30여 년 만의 가뭄 때문에 무더웠다. 7~8월에 걸쳐 그늘 없는 전장에서 기온은 섭씨 42~44.5도에 달했다. 이러한 이상기온 때문에 산간의 논에서는 아침안개가 자욱했다.

 

이와 같은 한반도의 지세 및 기후는 전투의 양상에 영향을 미칠 수박에 없었다. 우선 탱크가 도로 밖으로는 다닐 수 없어 기동이 제한되었다. 다음으로, 지금과는 정반대로 당시 한국의 산야엔 수목이 적어 감시·관측에 의한 空地(공지)의 화력 발휘가 용이했다. 반면 그늘이 없어 더위에 의한 체력 소모가 극심했다. 또 가뭄은 미 공군의 활동을 용이하게 했다. 다만, 산간의 아침 안개는 空地의 화력 발휘를 방해, 화력에 의존하는 방어 측에 불리하게 했고, 기동을 위주로 하는 공격 측에 유리했다.
 

북한군의 複合전법과 한미 양군의 지체전략

 

 

開戰(개전) 이후 1개월—전투의 주도권은 북한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북한군의 전법은 正(정)과 奇(기)의 배합이었다. 즉, 피난민 속에 게릴라를 집어넣거나 미리 한미군의 후방에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하고, 그 후방을 차단하며, 이어 정규군이 우선 포격을 가한 뒤 전차로 정면을 돌파시켜 한미군의 陣內(진내)를 교란하고, 보병은 측면의 산기슭으로부터 침투·포위해서 타격한다는 것이었다. 북한군은 다음과 같은 기만전술도 구사했다.

 

<▶약 200명의 부녀자, 어린이, 노인들을 전투지역 내로 걸어가게 함으로써 총알받이로 만  들었다.
▶적은 그들의 옷을 벗어버리고, 몸에 진흙을 발라 위장하여 미군 방어선으로 접근했다.
▶8명 내지 10명의 적병들이 공격을 하다가 마치 항복하는 것처럼 손을 들었다. 미군이 사격을 멈추고, 그들 위장 항복자를 맞아들이러 진지 밖으로 나올 때 1개 소대 규모의 북한군이 은폐된 곳에서 공격을 가했다.
▶많은 북한 군인들은 미군에 우호적인 마을에 몸을 숨기고자 할 때 그들의 군복을 벗고 하얀 두루마기 등 민간인 옷을 입었다.>

 
조셉 굴든의 《한국전쟁: 알려지지 이야기》에 따르면 한국전에서 <타임>지와 <라이프>지 종군기자로 활동한 존 오스본은 북한의 전술들이, 특히 민간인들을 방패로 사용하는 전술이 미군 병사로 하여금 잔인한 처사를 하도록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북한 수뇌부의 당초 예상과 달리 미국과 유엔이 남침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여 무력 개입을 결의했음은 앞서 거론한 바 있다. 따라서 북한군에 있어서 이 전쟁의 成敗(성패)는 미군의 지상군이 한국에 투입을 완료하기 전에 부산까지 점령할 수 있는가, 어떤가에 달려 있었다. 한편 유엔군 측도 이 전쟁이 시간과의 싸움, 즉 미국 본국 병력과 무기의 부산 集中(집중)까지 空間(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버는 싸움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했다. 군사적으로는 이와 같은 작전행동을 ‘지체행동’이라 부른다.

 

미군은 최초의 저지선을 평택-안성의 선으로 선정하고, 그 바로 전방에 제24사단의 스미스지대를 배치했지만, 즉각 돌파되었다. 다음의 저지선을 금강 南岸(남안)에 선정했지만, 그것도 3일 만에 붕괴했다. 이에 다시 제24사단으로써 대전을 확보케 하고, 그 사이에 제1기병사단을 대전 정면에 전개시키려고 했지만, 그 전에 제24사단은 북한군 2개 사단의 포위공격을 받고 사단장까지 행방불명이 되어 방어능력을 상실했다.

 

미군은 주민들 가운데 적군이 섞여 있다고 하는, 종전과 종류가 전혀 다른 전쟁에 직면했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최후의 방어선을 낙동강 左岸(좌안)으로 설정했다. 미군은 이 부산교두보에 몰려있었지만, 1개월여 간의 지체행동에 의해 미 본국으로부터 2개 사단과 T34전차를 능가하는 최신예 전차의 증원을 획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