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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인생무상, 안녕히 가십시오, 나도 뒤따라갑니다”

淸山에 2013. 9. 11. 10:33

 

 

 

 

 

 

 

 

김지하 “인생무상, 안녕히 가십시오, 나도 뒤따라갑니다
기사입력 2013-09-11 03:00:00 기사수정 2013-09-11 09:18:11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109>국장(國葬)

 

 

박정희 대통령의 유해를 실은 영구차 행렬 모습. 이날 서울은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동아일보DB

 

 

1975년 3월 다시 감옥으로 들어간 김지하의 옥중 생활은 79년 10월 만 4년 8개월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해 여름부터 김지하는 100일 참선을 시작했다. 하루에 30분 운동하는 것 이외에는 깨어서는 물론이고 잘 때도 가부좌를 틀고 잤다. 얼굴은 거의 ‘해골바가지’를 연상시킬 정도로 말라갔다. 가족과 변호사들이 번갈아 와서 건강을 걱정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100일이 흘렀다. 김지하는 “다른 건 다 잊었어도 날짜 가는 것만은 속으로 꼬박꼬박 세고 있었다”고 했다.

그날은 맑고 밝은 가을날이던 79년 10월 27일이었다. 그날도 김지하는 참선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점심 무렵 구치소 내 방송에서 무슨 말이 계속 흘러나오는데 그의 귀에 꽂히는 말이 있었다.

 

“고 대통령께서” “고 박 대통령께서” “고인께서”….

아니, 도대체 저것이 무슨 소리일까?

 

‘고’라니? ‘고 대통령’이라니? ‘고인’이라니?

김지하는 서서히 일어나 문 쪽으로 가서 문짝에 바짝 몸을 붙인 채(위에 있는 텔레비전 모니터의 시계·視界에서 벗어나기 위해 문짝에 몸을 바짝 붙이는 게 그의 버릇이 되었다) 교도관에게 물었다.

 

“저게 무슨 소리요?”

교도관이 사방을 둘러보더니 오른손으로 자기 목을 탁 끊는 시늉을 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탁!”

그리고 또 목을 끊는 시늉을 하며 반복했다.

 

“탁!”

“에엥? 누가?”

교도관은 오른손 엄지를 높이 세웠다.

 

“엇! 박정희가?”

김지하가 놀라 이렇게 말하자 교도관은 오른손을 얼른 입에 갖다 댔다.

 

“쉬잇!”

김지하는 아주 낮은 소리로 또 물었다.

 

“누구야? 누가 그랬다는 이야기야?”

교도관은 입을 꽉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것이었다. 순간, 김지하의 머릿속에는 세 마디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내 속에서, 내 속 저 밑바닥에서 꼭 허공 중에 애드벌룬 떠오르듯이 그렇게 세 마디 말이 줄지어 떠오르는 것이었다. 인생무상. 첫 번째 마디였다. 안녕히 가십시오. 두 번째 마디였다. 그리고 나도 곧 뒤따라가리다. 세 번째 마디였다. 이튿날 12시 추모방송에 나온 김수환 추기경의 첫마디도 인생무상이었다. 그렇게 소름끼치는 경험을 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가 말한 이튿날이란 79년 11월 3일이었다. 그날 서울에서는 건국 이후 최초로 국장(國葬)이 엄수됐다. 동아일보 3일자 1면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5·16 후 18년 5개월 동안 이 나라를 통치했던 박 대통령은 모든 사람이 일손을 놓고 슬픔으로 근조(謹弔)하는 가운데 말없이 유택(幽宅)에 묻혀 역사(歷史) 속으로 사라졌다. 이날 국장은 청와대 발인제로부터 시작해…오전 9시 26분 국향(菊香)에 뒤덮인 고인의 유해는 15년 10개월 16일 동안 정들었던 청와대 본관을 하직했다.’

 

영구차는 사관생도들이 도열한 가운데를 지나 오전 9시 26분 대형 태극기가 교차 게양된 청와대 정문을 나섰다. 영구차가 나가는 동안 예순을 갓 넘긴 고인의 나이대로 62발의 조포(弔砲)가 울렸다.

 

오전 10시 전 국민이 1분간 묵념한 것을 시작으로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된 영결식은 TV로 생중계 됐다. 영식(令息)인 지만 육사 생도, 영애(令愛) 근혜 근영 양 등 유가족과 밴스 미 국무장관 등 41개국 조문 사절 및 각계 인사 등 3000여 명이 참석했다.

최규하 권한대행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흐레 전 천지(天地)가 진동하여 산천초목이 빛을 잃었고 경악과 비탄으로 온 국민의 가슴이 메었습니다. 아직도 나라와 겨레를 위해 하실 일이 많은데 각하 자신마저 가셨으니 이 얼마나 망극한 일입니까”라며 조사(弔辭)를 읽었다. 마지막으로 “이제 영부인 곁에서 고이 잠드소서” 하며 울먹이는 대목에서는 참석자들도 함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장내를 뒤덮었다고 언론들은 전했다.

 

7분 동안의 조사 낭독이 끝난 뒤 불교 조계종 찬불가대의 합창과 윤고암 종정의 영가법어(靈駕法語), 윤월하 총무원장 등 10명 법사(法師)의 독경이 있었다. 뒤이어 김지하가 옥중에서 들었다는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가 시작됐다.

 

추기경은 “인생은 무상하며 주만이 영원하시니 주여 인자로이 주의 종 박대통령의 영혼을 받아 주시고 광명의 나라로 인도하소서”라고 기도했다. 다음은 추기경 회고록 중 일부다.

 

‘나는 “이제 대통령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주님 앞에 선 박정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했는데 참석자들이 모두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 시대를 호령한 절대 권력자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빌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박 대통령을 생각할 때마다 애석(哀惜)의 정을 감출 수 없다. 그분이 쌓은 업적을 보건대 제3기 집권야욕을 꺾고 정권을 이양했더라면 지금쯤 국민의 존경을 받는 국부(國父)가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영결식이 끝나고 쇼팽의 ’장송 행진곡‘이 연주되는 가운데 낮 12시 19분경 영구차가 중앙청 정문을 빠져나갔다. 그동안에도 조객들의 오열은 계속됐다. 영구차가 지나가는 중앙청∼세종로∼시청 앞∼서울역∼국립묘지 도로변에는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애도 인파가 몰렸다고 신문들은 전한다. 동아일보의 보도다.

 

‘이날 중앙청과 정부종합청사 주변에는 새벽 4시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시민들이 몰려나와 연도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으며 오전 9시경에는 애도 인파로 빽빽이 들어찼다. 연도 요소요소에는 확성기가 설치돼 조가(弔歌)와 박 대통령의 육성이 수시로 흘러나왔는데 시민들은 아예 라디오까지 들고나와 고인의 육성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도 많이 보였다.’

 

박 대통령 유해는 고 육영수 여사의 묘소 오른쪽에 안치됐다. 이날 서울 하늘은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3. Marche funèbre: Lento

Mikhail Pletnev, piano

 

 

 

 

 

 

쇼팽, 피아노소나타 제2번


Piano Sonata No. 2 in B flat minor, Op.35

Frdric Franois Chopin 1810~1849

 

 

  쇼팽과 조르주 상드

 
이 곡의 작곡은 쇼팽이 중부 프랑스 노앙에 있는 상드의 집에서 한창 열애의 감정에 불타있던 1839년 여름에 이루어졌다. 3악장 장송 행진곡은 이미 1837년 러시아에 점령당한 조국 폴란드의 운명을 애도하는 뜻에서 먼저 작곡되어 있었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폴란드)에게는 3곡의 피아노 소나타가 있다. 최초의 것은 18세 경의 습작으로 오늘날에는 거의 상연되지 않는다. 나머지 2곡 즉 「제2번」과 「제3번」은 모두 낭만파의 피아노곡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사랑받고 있다. 특히 이 「제2번」은 유명한 장송행진곡을 포함했기 때문에 더욱 널리 알려졌으며 이 부분만을 독립해서 연주하기도 하고 때로는

 관현악이나 취주악 용으로도 편곡되어 있다.


이 소나타는 1839년 여름 노앙에 있는 조르주 상드의 집에서 완성되었다.

조용한 도시 노앙에서 애인 상드에게 위로를 받으면서 쇼팽(폴란드)은 드디어 온 정력을 작곡에 기울일 수가 있었던 것이리라.

이윽고 그의 창작 활동은 절정기를 맞이하지만 한편 육체는 결핵 때문에 쇠약해지고 있었다.


곡은 4악장 구성이며 제3악장이 장송 행진곡으로 되어 있다. 이 부분은 이미 1837년에 단독으로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소나타 전체가 제3악장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4개의 악장은

 서로 그렇게 유기적으로는 결부되어 있지 않고 각각 자유로운 독창성을 갖고 있다.

 


 

 

 

쇼팽은 39년이란 짧은 생을 통하여 거의 피아노 작품만 썼고 피아노의 기능을 최대한 살려 서정적

 시를 읊은 바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지만 피아노 독주를 위한 소나타는 3 곡만을 남기고 있다.

 제1번은 "c단조 작품4"로 18세때 쓴 것이고, 이 작품은 은사인 엘스너에게 헌정되었으나

 

 이 곡은 독창성이 없어 오늘날 연주되지 않고 제2번 "b플랫단조 작품35"와 제3번 "b단조 작품58"

 이 두 곡이 연주 되고 있습니다. 이 두 곡 모두 원숙기에 쓰여져 전 작품 중에서도 명작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모두 마르조카 섬에서의 전지 요양을 마치고 조르쥬 상드의 노안에 있는 집에서

그녀와 더불어 평화로운 위안을 받으면서 행복된 생활 속에 얻어진 소산이다.

제 2번을 통속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3악장의 "장송 행진곡"은 후에 여기에 삽입합니다.

 

 

Chopin Piano Sonata No. 2 in B-flat minor, Op. 35

 

 

Pogorelich 연주, 이보 포고렐리치, 피아노연주가; 출생지: 크로아티아; 1958~

 

  

 

 

  

  
 1악장 (Grave, doppio movimento) 그라베 토피오 모비멘토

 

 

 

신음하는 듯한 어둡고 무거운 화음으로 4마디의 서주에 이어 과격한 저음부의 펼친화음의 반주 위에 조급한 제 1주제가 제시됩니다. 곡은 불안한 가운데 점차 거칠어 지고 과겨해지나 애절한 그리고 조용한 d플랫장조의 제 2주제가 나타나 어느정도 정상적인

분위기를 되 찾습니다. 재현부의 첫 머리에 제 2주제가 먼저 나온 것도 관례적인 소나타 형식과는 다릅니다.

곡은 종결부에서 제 1주제의 단편적인 동기가 회상되고 끝납니다.

 

 

 

 

2악장 (Scherzo)

 

 

곡은 어둡고 무거운 주제로 시작되어 점차 정감이 고조되면서 격렬한 공포의 분위기 마저 느끼게 합니다. 마치 검은 먹구름이 감돌고

뇌성이 울리고 비바람이 몰아치듯 반음계적인 연속악구가 이어집니다. 퓨 렌토의 중간부인 트리오는 마치 천사의 음성처럼

청순하고 아름다운 주제로 된 감미로운 부분입니다. 다시 스케르쪼의 주부가 반복된 다음

중간부의 주제가 종결부의 선율로 되 풀이 되어 여운을 남깁니다.


 


3악장 (Marcia Funebre)

 

 

유명한 장송행진곡 입니다. 이 곡은 소나타가 창상된 이전 1837년에 이미 완성된 것으로 잃어버린 폴랜드의 조국을 애도하는 뜻에서 쓰여진 것으로 상상됩니다. 따라서 "전 국민의 고통과 탄식이 그의 마음에 반영된 인간만이 쓸 수있는 음악이다" 라고 알려지고

있듯이 조종과 같은 저음위에 장송행렬의 무거운 발걸음을 묘사하듯 정중한 행진곡 주제가 나타납니다.

중간부의 트리오는 무겁고 침울한 화음과는 달리 비통한 심정을 위안하듯 조용한 선율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시 주부의 행진곡이 되 돌아와 우리들을 슬프게 합니다마는 마치 장송행렬이 멀리 사라지듯이 조용히 끝납니다.

 

 

  


4악장 (Finale. Presto)

 

 

대단히 짧은 악장입니다. 이 곡은 시종 동음으로 연주되는 셋잇단음표가 반복되는 특이한 악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황량항 폐허의 고독감과 처참한 느낌을 주는 동기로 시작됩니다. 이 악상은 지칠줄 모르고 계속되어 끝까지 동일한 악상으로 일관합니다. 슈만은 이 악장을 가리켜 "이것은 음악이 아니라 조롱에 가깝다. 그러나 이 비 선율적인 즐거움도 없는 악장에서 반항을 할려는 혼을 힘센 손으로 누르고 있는 어떤 특수한 무서운 혼이 우리들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인정 않할 수 없다 우리들은 마치 매혹되듯이 불평도 못하고 그렇다고 칭찬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입장에서 복종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고 크라크는 "가을 바람이 새로운 묘 위에 나뭇잎을

뿌리고 있다"라고 시적 표현을 하고 있다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에서 벗어난 이 작품은

발표 당시부터 비난과 환영이 엇갈린 평가로 말썽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쇼팽의 작품은 피아노 연주가들이 외형적인 잔 재주로 쓴 것과는 달리 명 연주가로 알려진 그가

그 이전에 진정한 본격적인 작곡가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이 곡은 영원히

 빛을 잃지않는 독창성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피아노적인 어법을 그 가운데 살린 명곡입니다.

한치의 틈도 없이 곡에 꽉찬 쇼팽의 시와 환상과 정열은 그야말로 낭만주의 음악의 정수이고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쇼팽의 고향 바르샤바>

 

 

<쇼팽의 생가>

 

 

 

 

 

 

 

 

Piano Sonata No.2 in Bb minor, Op.35

쇼팽 / 피아노소나타 2번

Frdric Franois Chopin 1810∼1849




Maurizio Pollini (Piano)



전곡 연속 듣기
 

 

 

제 1악장 그라베 토피오 모비멘토 b플랫단조 2분의2박자 소나타형식

신음하는 듯한 어둡고 무거운 화음으로 4마디의 서주에 이어 과격한 저음부의 펼친화음의 반주 위에 조급한 제 1주제가 제시됩니다. 곡은 불안한 가운데 점차 거칠어 지고 과겨해지나 애절한 그리고 조용한 d플랫장조의 제 2주제가 나타나 어느정도 정상적인 분위기를 되 찾습니다. 재현부의 첫 머리에 제 2주제가 먼저 나온 것도 관례적인 소나타 형식과는 다릅니다. 곡은 종결부에서 제 1주제의 단편적인 동기가 회상되고 끝납니다.


 


1악장 (Grave, doppio movimento)

제 2악장 스케르쪼 e플랫단조 4분의3박자 3부형식

곡은 어둡고 무거운 주제로 시작되어 점차 정감이 고조되면서 격렬한 공포의 분위기 마저 느끼게 합니다. 마치 검은 먹구름이 감돌고 뇌성이 울리고 비바람이 몰아치듯 반음계적인 연속악구가 이어집니다. 퓨 렌토의 중간부인 트리오는 마치 천사의 음성처럼 청순하고 아름다운 주제로 된 감미로운 부분입니다. 다시 스케르쪼의 주부가 반복된 다음 중간부의 주제가 종결부의 선율로 되 풀이 되어 여운을 남깁니다.

 


2악장
(Scherzo Presto)

 

제 2악장 스케르쪼 e플랫단조 4분의3박자 3부형식

유명한 장송행진곡 입나다. 이 곡은 소나타가 창상된 이전 1837년에 이미 완성된 것으로 잃어버린 폴랜드의 조국을 애도하는 뜻에서 쓰여진 것으로 상상됩니다. 따라서 "전 국민의 고통과 탄식이 그의 마음에 반영된 인간만이 쓸 수있는 음악이다" 라고 알려지고 있듯이 조종과 같은 저음위에 장송행렬의 무거운 발걸음을 묘사하듯 정중한 행진곡 주제가 나타납니다. 중간부의 트리오는 무겁고 침울한 화음과는 달리 비통한 심정을 위안하듯 조용한 선율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시 주부의 행진곡이 되 돌아와 우리들을 슬프게 합니다마는 마치 장송행렬이 멀리 사라지듯이 조용히 끝납니다.



3악장 (Marcia Funebre)

제 4악장 프레스토 b플랫단조 2분의2박자

대단히 짧은 악장입니다. 이 곡은 시종 동음으로 연주되는 셋잇단음표가 반복되는 특이한 악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황량항 폐허의 고독감과 처참한 느낌을 주는 동기로 시작됩니다. 이 악상은 지칠줄 모르고 계속되어 끝까지 동일한 악상으로 일관합니다. 슈만은 이 악장을 가리켜 "이것은 음악이 아니라 조롱에 가깝다. 그러나 이 비 선율적인 즐거움도 없는 악장에서 반항을 할려는 혼을 힘센 손으로 누르고 있는 어떤 특수한 무서운 혼이 우리들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인정 않할 수 없다 우리들은 마치 매혹되듯이 불평도 못하고 그렇다고 칭찬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입장에서 복종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고 크라크는 "가을 바람이 새로운 묘 위에 나뭇잎을 뿌리고 있다"라고 시적 표현을 하고 있다.

 

4악장 (Finale. Presto)

쇼팽은 40년이란 짧은 생을 통하여 거의 피아노 작품만 썼고 피아노의 기능을 최대한 살려 서정적 시를 읊은 바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지만 피아노 독주를 위한 소나타는 3 곡만을 남기고 있다. 제1번은 "c단조 작품4"로 18세때 쓴 것이고, 이 작품은 은사인 엘스너에게 헌정되었으나 이 곡은 독창성이 없어 오늘날 연주되지 않고 제2번 "b플랫단조 작품35"와 제3번 "b단조 작품58" 이 두 곡이 연주 되고 있습니다. 이 두 곡 모두 원숙기에 쓰여져 전 작품 중에서도 명작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모두 마르조카 섬에서의 전지 요양을 마치고 조르쥬 상드의 노안에 있는 집에서 그녀와 더불어 평화로운 위안을 받으면서 행복된 생활 속에 얻어진 소산이다. 제 2번을 통속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3악장의 "장송 행진곡"은 후에 여기에 삽입합니다.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에서 벗어난 이 작품은 발표 당시부터 비난과 환영이 엇갈린 평가로 말썽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쇼팽의 작품은 피아노 연주가들이 외형적인 잔 재주로 쓴 것과는 달리 명 연주가로 알려진 그가 그 이전에 진정한 본격적인 작곡가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이 곡은 영원히 빛을 잃지않는 독창성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피아노적인 어법을 그 가운데 살린 명곡입니다. 한치의 틈도 없이 곡에 꽉찬 쇼팽의 시와 환상과 정열은 그야말로 낭만주의 음악의 정수이고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