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리듬과 朴正熙의 한국 근대화 <全文>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주최 강연회)
[ 조이제(趙利濟)·East-West Center 수석고문 ] 여러분들 앞에서 이렇게 강연을 할 수 있도록 귀중한 기회를 만들어주신 朴대통령 기념사업회 회장이신 柳陽洙 대사님과 金正濂 대사님, 그리고 여러 위원님들께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저는 朴正熙 대통령을 늘 존경하고 좋아했습니다. 그 이유를 한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朴대통령은 복잡한 방정식보다는 산수(算數)를 잘 하셨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어로 算數라는 말은 ‘말한 대로 실행한다’, 즉 ‘일구이언(一口二言)을 안 한다’는 뜻이지요. 저는 오늘 국경을 초월해, 역사적인 시각에서 朴正熙 시대의 한국 근대화에 대한 저의 생각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1. 역사의 흐름과 天下大勢 역사의 진행은 두 가지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밖으로 뻗어나가려는 원심력(遠心力,centrifugal)이고, 다른 하나는 안으로 결집하려는 구심력(求心力,centripetal)입니다. 일찍이 중국의 성인 노자가 “다 이루었다는 것은 곧 쇠퇴과정의 시작(大成若缺)”이라고 한 것이나 『삼국지』의 저자 羅貫中이 “천하의 대세는 함께 오래 뭉쳐 있으면 반드시 흩어지게 된다(天下大勢 合久必分 分久必合).”라고 한 것도 결국은 이러한 역사 변화의 법칙을 통찰한 것입니다. 20세기의 후반부터 원심력이 세계화의 형태로 우세를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세계화의 몇 가지 뚜렷한 예를 들면, 정보통신의 혁명으로 인한 시·공간의 단축, 이에 따른 금융시장의 세계화, 오존층의 파괴 등의 전지구적 환경오염뿐만 아니라 미국의 911사태나 중국의 사스(SARS), 에이즈(AIDS), 쓰나미(TSUNAMI), 허리케인 카트리나(Hurricane Katrina) 등의 재난도 포함됩니다. 한 국가의 천재지변(天災地變)이나 정치적, 경제적 결정이 국경을 초월하여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구심력은 이른바 지역화 (regionalization)라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역화란 한 마디로 국가 또는 지역적인 경제 단위를 통합하려는 과정을 의미하고, 그 지역의 문화적 동질성(同質性)이나, 지리적인 인접성(隣接性), 그리고 지역에 따른 공통적인 경제적 이해관계를 기초로 합니다. 저는 최근 중국에 다녀왔습니다. 세계화의 역사적인 리듬을 타고 온 세계로 뻗어 가는 중국의 강대한 경제력과 지속적 성장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朴正熙 시대의 경제개발 정책이 당시 중국지도자들의 큰 관심을 끌었고 중국의 경제개발 정책수립에 있어서 하나의 좋은 모델이 되었습니다. 1990년 저는 중국의 鄧小平과 趙紫陽의 오른팔이자 한 때는 朱鎔基 총리를 부하로 거느리고 중국경제의 개방과 개혁을 주도한 馬洪 박사, 그리고 여기 앉아 계시는 김정렴 대사님을 모시고 중국 대련에서 韓中 경제지식 교류를 시작하였습니다. 김정렴 대사님은 이 대련 회의에서 1000여 명에 달하는 중국 정부 관료와 관계인사들 앞에서 특별강연을 하였습니다. 朴正熙 시대의 경제 개발정책에 관하여 감명 깊은 연설을 하여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았고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수차례의 한·중 지식교류에서 토의된 내용을 기초로 한 건의사항은 중국의 최고지도자 정책회의에 마홍 선생이 직접 보고했습니다. 1980년 초부터 시작하여 저는 중국 측으로부터 몇 차례에 걸쳐 한국경제발전에 대한 강의 요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중국은 대통령을 미국의 앞잡이, 군사 독재자라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朴正熙는 사회주의자였다’ 라고 말문을 열었더니 그들은 단박에 관심을 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그러나 朴正熙는 사회주의의 약점을 알았고 동시에 그는 자본주의의 좋은 점뿐 아니라 약점도 알았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朴正熙의 리더십은 대의멸친(大義滅親)이라는 유교 사상에 입각해 그 자신이 청렴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朴正熙는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을 통해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에 관련된 많은 서적을 읽었고, 역사의 리듬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2. 발전의 격차와 따라잡기 발전 모델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명치시대의 일본은 경제발전을 통한 부국강병책을 추구했습니다. 명치유신 주역의 한 사람인 오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1873년에 유럽의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특히 독일의 산업발전에 주목하여 독일이 일본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유럽 방문 당시 오오쿠보는 프리드리히 리스트(Fridrich List)의 이론에 크게 감명을 받았으며, 그가 수립한 1874년의 경제개발계획안은 리스트의 경제학이론을 채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1880년대 일본에서는 리스트의 저서(著書)가 널리 읽혀졌습니다. 국가가 어떻게 하면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빈곤과 기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개발국가가 선진 국가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리스트 이후, 조셉 슘페터(Joseph Schumpeter), 그 후 자본주의 발전국가 모델(Capitalist Development State)을 제시한 차머스 존슨(Charmers Johnson) 등의 학자들이 연구한 후발경제발전이론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담 스미스가 물품의 가치에만 주목하는데 비하여 리스트는 물품의 가치를 더 포괄적으로 봅니다. 사과를 예로 들어, 아담 스미스는 한 나라가 구태여 사과나무를 심지 않아도 다른 나라에서 싸게 살 수 있으면 사다 먹는 것이 경제를 원활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에 비하여 리스트는 현실적으로 국가와 국경이 있는 한, 자기 나라에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사과를 공급하던 다른 나라에 사과생산이 흉작(凶作)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강국은 언제든지 자기의 이해에 따라 부문별로 문호(門戶)를 개방하기도 하고 폐쇄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리스트의 경제발전론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한 나라의 생산력은 국민 개개인의 물리적 힘과 지적, 정신적, 예술적인 힘에 근원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담 스미스와 달리 리스트는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과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의 음악도 경제 생산치 계산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독일의 경우에는 비스마르크(Otto Eduard von Bismarck)의 유명한 철강산업과 소맥 농업(steel and rye)을 주축으로 하는 기간단체의 연계를 들 수 있고, 일본의 경우에는 천황을 으뜸으로 하는 혁명지도자, 지주, 재벌 등을 주축으로 한 ‘국가가족의 논리’(三戶 公, 『家の 論理』,1991)를 따른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독일과 일본은 제국주의 모델을 채택하여 국가의 위신과 위대성, 곧 국민의 긍지와 자부심을 제고(提高)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전후 일본에서는 농협(農協)과 경단련(經團聯)을 계속 국가발전의 주축으로 활용해왔습니다. 20세기 후반에 와서 한국, 대만, 싱가포르, 중국 등의 후발 국가들은 시대변천에 따른 새로운 모델과 상징(예를 들면 한국의 수출확대, 새마을운동, 올림픽 유치 등)을 형성하여 따라잡기에 혁혁(赫赫)한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여기에서 따라잡기 발전의 인과(因果)에 관한 사회과학적 논리를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경제발전은 단순한 1인당 GDP 증가로서만이 아니라 문화와 제도를 포괄하는 보다 광범한 사회변혁의 한 부분으로서 받아들여져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메이지유신과 그에 따른 경제발전은 사회의 모든 부문이 경제적 생산성을 목표로 동원(動員)된 사회적인 현상입니다. 둘째, 인류를 비롯하여 모든 생물이 그러하듯이 사회적, 경제적 제도는 필연적으로 성장과 발전과정, 노화의 과정을 겪습니다. 그러나 제한된 수명을 가진 인간이 죽음을 피하지 못하는 것과는 달리, 사회와 경제는 획기적인 개혁과 참신한 구조조정(構造調整)으로 활기를 되찾음으로써 지속될 수 있습니다. 셋째, 발전과정의 기간을 단축하려면 모종의 혁명적이며 극적인 조치, 제도와 틀의 구조조정을 필요로 합니다. 이 과정은 자본주의적 발전모델이론에서 말하는 효율적인 리더십과 함께 엄청난 사회적 에너지의 동원을 필요로 합니다. 최근 백 여 년 간의 역사적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국가경제 발전에 있어서 군(軍)의 역할은 기획, 조직력, 운영의 능률성(能率性)과 리더십의 측면에서 긍정적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3. 동아시아 국가 리더십의 의의 < > 동아시아의 역사와 발전경험에 비추어 국가발전에 필요한, 제도화된 리더십에 관해 또 다른 논리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선의의 권위(Soft Authoritarianism)’에 입각한 제도화된 리더십은 시장경제체제와 부합(符合)함으로써 급속한 경제발전에 필요조건(必要條件)이 되어 왔습니다. 권위와 리더십에 관해 몇 가지 실질적 예를 들면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에서는 천황제를 상징적으로 활용해 일본국민들의 마음 속에 권위에 대한 의식을 심어주었습니다. 朴正熙와 李承晩 두 사람은 피선(被選)된 대통령으로서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보여 주었으며 이를 국민들이 용납(容納)하고 존중했습니다. 이들 두 지도자에게 주어진 전통적인 신뢰는 두 사람이 민족의 생존과 경제발전이라는 역사적 임무를 달성할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태국(泰國)에서는 군주제가 상징적이긴 하지만 국민들에게 태국사회 권위의 중심이며 원천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자유 민주주의 원리들이 실행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권위주의적 리더십으로 급속한 경제발전을 경험한 또 다른 사례입니다. 필리핀은 지배적인 유형에 속하지 않는 흥미로운 예외입니다. 20세기 초 수십 년간 미국은 필리핀에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발전과 경제발전을 이끌어내고자 시도했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1960년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일본을 제외한 다른 모든 동아시아국가보다 높았습니다. 그러나 필리핀은 한 번도 국가적 발전 목표에 일치하는 지속적인 리더십을 갖지 못했습니다. 중국은 현재 이데올로기와 산업변천의 획기적인 과정을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등소평은 1980년대에 ˜계획체제에도 시장이 있고, 자유시장체제에도 계획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 계획 경제체제의 개념을 새롭게 변형시켰습니다. 지난 20년간의 정치적 안정과 등소평, 江澤民, 그리고 현재의 후진타오(胡錦濤)와 같은 제도화된 리더십이 주어져 오늘의 중국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수년 전 저와 MIT의 사무엘슨 교수(Paul Samuelson)의 대담이 KBS를 통해 방송된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도 소련은 실패했고 중국은 성공했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사무엘슨 교수는 소련이 실패한 것은 그라스노스트(Glasnost, 정치적 개방)를 먼저하고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경제적 구조 개혁)를 나중에 한데 있다고 말하고 경제발전이 먼저 되어야만 정치발전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경제발전을 이룩한 동아시아국가들을 보면 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선의의 권위주의를 공통적으로 내포하고 있습니다. 朴正熙, 등소평을 비롯한 몇몇 지도자들은 장기적인 국가발전을 위해서는 급속한 민주주의의 졸속한 실시보다 민주주의와 권위주의간의 타협점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이들 국가의 민주화 템포가 급속하지 않았습니다. 동아시아 역사에는 성군(聖君)으로 불리는 황제나 왕 또는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맹자(孟子)의 덕치국가론(德治國家論)에 근거한 유교적, 가부장적인 사회가치관과 전통에 입각한 권위 있는 리더십을 인정하고 존중해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국민들에게 수천 년에 걸쳐 각인되어 있는 인식 내지 의식구조와 정서를 고려해 볼 때, 경제적으로 성공한 이들 국가의 선의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은 결코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4. 역사의 리듬과 민족의 존망 저의 친지이며, 중국 ‘NASA’(Rockets And Missiles Development)의 대부라 불리는 송건 박사는 “자연과학의 열역학법칙에 따르면, 어떠한 시스템이든 그 시스템으로 하여금 에너지와 물량 그리고 정보를 바깥세상과 교환할 수 있는 열린 환경이 주어질 때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다. 나라의 개방과 외부세계와의 상호활동과 교류는 지적, 과학적, 경제적, 사회적 발전에서 변화와 진보를 가져다준다는 점을 결코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항상 강조합니다. 조선이 일본이나 다른 열강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개방되지 않고 스스로 개방할 수 있었을까요? 이에 대해선 논의의 여지가 많습니다. 유교적 가치와 전통에 근거한 배타주의적(排他主義的) 경향과 정책이 수세기에 걸쳐 동아시아 사회를 지배했습니다. 일본과 중국 못지않게 완강한 저항이 있었던 조선에서도, 심각한 내부 혁명이나 외부세력의 강압 외의 다른 방도로는 개방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요즈음 李舜臣 장군의 이야기가 TV에서 방영되었지요. 보다 객관적이었으면 합니다만, 李殷相 선생이 쓴 충무공 일대기를 보고 느낀 것은 조선 왕조가 일찍 개방하지 못하여 이순신 장군의 눈부신 전략과 업적, 그 지혜를 후대에 계승하지 못한 것입니다. 특히 거북선의 제조과정(製造過程)에 대한 자료를 한국에서 찾아볼 수 없고 주변국, 중국이나 일본에서 그 정보를 찾아야 할 형편이니 안타깝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먼저 개화한 일본에서 받아들여 저 유명한 도오고 헤이하찌로(東鄕平八朗)와 야마모도 이소로꾸(山本五十六)를 양성하게 된 결과를 보면 개방의 타이밍(timing)과 중요성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만 여년의 인류문명의 역사를 보면 야생식물 재배와 동물을 기르는 것도 포함해 농업기술이든 무기의 발달이든 기술적으로 우수한 민족이나 국가들이 약한 민족이나 국가를 정복하고, 지배하고, 멸종시켜 왔습니다. 이를 입증하는 선례와 사실적 증거들은 너무 풍부합니다. 최근 베스트셀러인 제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의 『총, 병균, 쇠 Guns, Germs and Steel』에 의하면 자연적이며 지리적인 장벽으로 인한 몇몇 예외(파푸아 뉴기니)를 제외하고는 약자들이 홀로 남게 되는 경우는 거의 드뭅니다. 한 예로 스페인의 남미 정복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남미는 유럽과 아시아대륙과 격리되어 폐쇄된 대륙이었습니다. 1532년 스페인의 정복자(Conquistador)인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sisco Pizzarro)가 168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8만 명의 군대의 호위를 받고 있던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Atahuallpa)와 오늘의 페루(Peru)에서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피사로는 소총과 말의 기동력으로 순식간에 황제를 체포하고 5만명이나 되는 잉카 군대를 섬멸(殲滅)하였고, 이로써 잉카문명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잉카제국은 말도, 총도 없었다고 합니다. 황제를 석방해 달라고 22톤의 금을 피사로에게 공납했으나 황제는 처형당했습니다. 한편 잉카제국 인구의 90%가 스페인 사람들이 가져온 질병 천연두(smallpox)로 인해 전멸되다시피 했습니다. 민족국가와 주권 그리고 개인 인권의 제도화가 강조되고 인정받게 된 것은 인류역사에서 아주 최근의 일이며, 그것도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의 표현대로 하자면 높은 건물에 동전 한 닢 정도의 폭에 불과한, 시간적으로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개방된 이후 1세기 이상의 세월이 흐른 지금, 한반도를 외부세계에 개방한 긍정적인 측면에 대한 인정은 고통스럽지만 객관적 분석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 사회적 기본시설 면에서 일본 식민지 통치 유산에 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기술적, 경제적 발전의 측면에서 돌이켜보면 36년간의 일본통치가 한국에게 전적으로 불이익만 주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국주의적 팽창과 식민지 행정을 통하여 일본은 한반도에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양 측면에서 사회기본시설을 건설하고 남겨주었습니다. 한 예로 부산에서 서울을 거쳐 신의주까지 한반도를 관통하는 주요 간선철도는 중국과의 국경선을 넘어 만주의 주요도시와 전략적 링크를 제공했습니다. 한국의 동북을 통하여 서울로부터 나진(羅津)까지 이어지는 철도를 시베리아 횡단철도(橫斷鐵道)와 연결시켰습니다. 일제하 한반도의 경제발전은 현저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내선일체(內鮮一體)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일본이 한반도에서 손을 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면, 그와 같이 집중적인 사회간접자본을 투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945년 일본인들은 식민지 한국을 떠나면서 그들이 소유했던 자산을 고스란히 남겨 두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남한 내 총자산의 70~80%를 차지하고 있던 막대한 자산을 가지고 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러일전쟁은 러시아의 남만주 지배권과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상호인정하자는 일본의 제안을 러시아가 거부함으로써 발생한 것입니다. 만일 러시아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면 한반도가 독립과 주권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다수의 구소련과 러시아의 역사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으로 답하고 있습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정황을 감안해 볼 때, 이를 허무맹랑(虛無孟浪)한 가정(假定)이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당시의 일본은 경제규모의 한계로 인해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을 계속적으로 공급할 수 없었고, 결국 군수보급(軍需補給)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러일전쟁 당시 부산과 시모노세끼 (下關)사이를 오가는 화물선을 텅 비운 채, 전략적으로만 왕래시킬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혁명(Bolshevik Revolution)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여 러시아 국내 사정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때 일본은 미국 대통령 테오도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에게 러일전쟁이 조속히 끝날 수 있도록 중재(仲裁)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당시 러시아보다 일본에 우호적이었던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 이권의 인정을 포함한 별개의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러일전쟁을 종식(終熄)시켰습니다. 이 공로로 루즈벨트는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까지도 했으니 실로 역사의 아이러니(irony)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러시아의 영토소유에 대한 집착(執着)과 욕구(慾求)는 대단합니다. 그런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만주와 한반도를 자신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했을 리가 만무하다고 중국전문가들은 말합니다. 그랬다면 한반도는 1992년 소련의 붕괴 이후에야 해방될 수 있었을 것이고 거의 1세기 동안 서구와 북미의 교육, 기술, 과학, 개발자본, 경제 발전의 노하우에는 접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소련은 부산, 원산, 인천 등과 같은 부동항(不凍港)의 점령을 염원하고 있었고, 이 항구도시를 군사적, 경제적 목적을 위해 소련인이 거주하는 포령(包領, enclave)으로 발전시켰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경제적인 인프라(infra)와 인력자원의 개발 차원에서 볼 때도 한반도의 근대적인 경제발전은 소련 치하에서는 3, 4세대 즉, 100년 정도 뒤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2차대전과 특히 한국전쟁 이후 매우 어려운 시기에 미국의 막대한 규모의 원조가 있었기에 한국은 국가로서의 결속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대대적인 기아와 경제적 파멸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AID통계에 의하면 1945년부터 1983년까지 한국에 대한 외국원조의 총 규모는 약 260억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1961년 당시 한국의 GNP가 26억불이었으니 엄청난 규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에 따라 한국은 안전보장, 군사 및 경제원조, 직·간접적인 기술이전뿐 아니라 문화적·제도적 영향의 혜택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미국은 한국의 전쟁피해복구와 경제회복을 위해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발전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미국과 긴밀한 동맹관계를 최대한 활용한 것이 급속한 경제발전에 큰 도움이 된 것입니다. 저명한 종교철학자 폴 틸리히(Paul J. Tilich)교수는 ‘살아있는 세포, 인간의 영혼, 한 시대의 성장을 관찰할 때 성장이란 이득이 될 수도 있고, 손실이 될 수도 있고 성취이자 희생이다. 많은 부분의 성장을 희생해야 단계적으로 궁극적, 전체적 성장이 가능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민주화의 지연, 지역적인 희생과 불균형이 있었기 때문에 전반적인 발전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朴正熙 시대의 경제발전은 주어진 여건을 최대한으로 활용함과 동시에 필요한 여건을 창출하여 가장 실용적이며 효율적인 접근방식과 전략으로 궁극적인 국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국민적 에너지를 집결하여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함으로써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목표를 달성하여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신흥공업국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5. 결론 : 朴正熙의 도전과 역사적 조명 朴正熙 정권으로부터 시작된 국가발전은 역사의 리듬과 타이밍이 잘 맞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약 20 년간의 통치기간에 국민소득을 87달러에서 1,644달러로 약19배나 끌어올렸습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국경제 기적의 주역으로 인정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저는 몇 년 전 케네디와 존슨대통령의 안보보좌관직을 지낸 저명한 경제학자인 월트 로스토우(Walt Rostow) 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케네디 행정부의 각료 대다수가 그 당시 한국의 경제적인 잠재력과 능력에 대하여 강한 의심을 표명했지만, 로스토우 교수는 케네디(John F. Kennedy)를 설득하여 朴正熙의 신정부와 협력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당시 로스토우는 한국 방문을 통해 한국이 경제적 도약단계에 필요한 대부분의 필요충분조건들을 갖추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朴正熙가 한국경제의 도약과 근대적인 공업국가로의 변혁이라는 과제를 성공적으로 주도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둘째, 朴正熙 정권은 새마을운동 같은 제도개혁을 통하여 빈궁한 농촌사회의 기근을 극복하고 지니(Gini)계수상 도시·농촌간의 소득과 생활수준의 격차를 최소화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인구정책을 성공시켰고 또한 사회보장과 의료보험제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셋째, 뉴욕타임즈의 저명한 논설위원, 니콜라스 크리스토프(Nicholas Kristof)에 의하면 朴正熙 정권은 비록 민주화운동을 억압하였지만 경제발전을 통해서 오늘날 한국의 다원주의의 근간이 되는 중산층을 창출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했습니다. 넷째, 주한미군의 철수를 가능케 할 수도 있는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에 직면하여 朴正熙 정권은 경제발전 능력에 의존하여, 능란한 외교활동과 군사력의 강화를 통하여 북한의 도발과 위협에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다섯째, 朴正熙 정권은 농촌과 지방정부를 위시하여 중앙정부 기구와 기업에 이르기까지 긍지와 자부심, 협동정신을 고취시킴으로써 국민정신을 함양하고 강화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음 세대에게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과학, 스포츠 등 각 분야에서도 국민적 자신감과 긍지(矜持)를 갖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여섯째, 정치와 정부의 부패에 관한 기록들을 돌이켜 보면, 다른 어느 정권 특히 朴正熙 사후 그를 계승한 정권들에 비하여, 朴正熙 정권은 그 부패(腐敗)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훨씬 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朴正熙는 한편으로 혁명적인 철학을 갖추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교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유교적 도덕성은 일본사범학교와 군관학교 교육에 의하여 강화되었습니다. 자신이 가난에 찌든 농촌출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족과 친척의 금전적 이익에 관심을 쏟지 않았습니다. 『태평양의 세기 The Pacific Century』라는 책에서 프랭크 기브니(Frank Gibney)는 세 사람의 지도자가 경제적 기적을 만들어냈다고 썼습니다. 이러한 미덕과 기적을 상징하는 세 사람은 바로 朴正熙와 대만 총통직(總統職)을 물려받은 장경국(張經國), 그리고 싱가포르의 이광요(李光耀) 수상입니다. 이 명단에는 중국을 개방한 등소평도 포함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들 네 지도자는 배경이 매우 다르나 각각 분명한 정치노선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광요는 영국 캠브리지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은 법률가였습니다. 朴正熙는 군사 지도자였습니다. 장경국은 소련(蘇聯)에서 10년간 군사학교 교육을 받았고 총통직을 물려받은 인물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등소평은 탁월한 공산당 간부였고, 중국 인민해방군의 지도자였으며 수년간 프랑스에서 유학을 했습니다. 이들 네 사람 모두 동아시아 출신으로서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로 유교적 가치관입니다. 이 가치관은 형태는 달랐지만 본질적으로 대다수 국민들에게 경제적 복지와 유익을 목적으로 둔 선의의 권위주의적 통치의 기반(基盤)이 되었습니다. 둘째로 이들 지도자들은 각기 인생의 어느 시기에 사회주의적 성향과 사고를 가졌지만, 궁극적으로는 경제발전에서 시장경제의 역할을 중시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는 장기적인 국가목표를 달성함에 있어서 실용주의를 채택했다는 점입니다. 네 번째, 이들은 검소한 생활방식을 유지했고 공사가 분명하여 개인이나 가족의 이해관계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들은 허례허식, 부패 또는 개인적인 축재(蓄財)를 한 일이 없습니다. 저명한 정치사회학자 모리스 쟈노비츠(Morris Janowitz)에 의하면 朴正熙와 등소평은 가장 큰 국가조직인 군에서 습득한 지도자의 특성을 가졌는데, 이것이 경제발전을 통한 사회변혁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장경국은 준군사적인 배경을 지님으로써 1988년까지 계엄령(戒嚴令) 하에 있었던 대만이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하는데 군의 긍정적 역할을 제공한 것으로 인정됩니다. 완벽한 보석은 없습니다. 朴正熙의 리더십은 한국의 경제발전과 근대화의 역사적 달성을 가능케 하였지만, 그의 리더십에서 주요한 결점은 리더십 구조와 권력계승을 제도화하지 못하여 개혁과 정책의 계속성(繼續性)을 확보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인간관계 중심적 네트워크에 기초를 둔 전통적 통치스타일에 크게 의존했다는 점입니다. 혁명가, 그리고 군인으로서 朴대통령은 측근 군부인맥(軍部人脈)으로부터 스스로를 완전히 해방시키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말년으로 가면서 자기를 과신하게 되었고, 통치그룹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던 군동료나 부하들과 함께 있을 때에 더욱 편안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그의 가장 측근에게 배신당했으며, 그의 정권은 정해진 후계자도 없었고 원만한 권력이양(權力移讓)을 가져올 적절한 제도적 장치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영웅의 마지막의 아쉬움을 그리는 두보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杜甫의 蜀相」 三顧頻煩天下計 兩朝開濟老臣心 出師未捷身先死 長使英雄淚滿襟 삼고초려 후 천하를 도모하고 두 조정을 깨우친 노신의 마음 출사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몸이 먼저 죽었으니 자고로 영웅은 옷깃에 눈물을 가득 젖게 하노라. 朴대통령은 그 시대의 역사, 문화, 그리고 사회적, 제도적 영향의 산물이었으며, 따라서 그의 체질화된 기질과 성향 그리고 사고방식은 짧은 시간에 없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성공적으로 일했던 젊은 시절에는 유능한 민간 정치인과 인재들을 통치 그룹 내에 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스타일에 영향을 끼친 문화적 타성은 그의 마지막 통치시기에 결정적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자본주의발전국가’의 성공은 자체 내에 이미 슘페터(Joseph Schumpeter)가 말한 ‘파괴의 씨앗’을 배태(胚胎)하고 있었습니다. 즉, 기업인들과 업계의 지도자들은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에너지를 젊은 세대 지도자들을 양성하는데 투자하지 않고 주로 기업이나 개인적 이익을 확장하는데 소비했습니다. 결국 그들 자신의 기본바탕을 침식하고 파괴하는 추세에 편승함으로써 朴正熙 시대에 시작된 생산적 패러다임을 지속시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국민의 의식구조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국과 미국의 성숙한 민주주의는 여러 세기에 걸친 제도적 실험과 축적(蓄積)의 결과이며, 그들의 민주주의는 제도적인 역사의 유산(遺産)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지속적으로 진정한 민주주의가 가능한 곳은 영국, 다음으로 미국이고 독일, 프랑스, 일본 등에는 아직도 물음표를 붙이고 있는 전문가도 많습니다. 영국의 경우에는 프랑스 혁명을 역사적으로 조명한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고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에서, 미국의 경우에는 토커빌(Alexis De Toqueville) 의 『미국에서의 민주주의 Democracy in America』를 통해서 자유민주주의의 깊은 문화, 제도적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독일과 일본에서의 경제발전상의 따라잡기는 불과 몇 십 년에 이루어졌습니다. 한국과 다른 신흥공업국가들은 후발주자로서 발전상의 간격을 단기간에 좁힐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민주주의로의 발전은 길고 때로는 험준(險峻)한 과정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경제발전은 민주주의를 위해 필수적이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입니다. 경제발전과 성숙한 민주주의 사이에는 격차가 있는데 이 격차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우리와 다음 세대의 도전입니다. 저 자신도 40여 년간 주로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만 지금도 미국의 친한 친구들로부터 미국식 민주주의 사회에 완전히 익숙하지 못하다고 지적(指摘)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근간(根幹)인 시민사회의 생활양식이 아직 저의 제2의 본능(Second Instinct)이 되지 못한 것을 느낍니다. 하물며 몇 년 정도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과연 민주주의를 뿌리 깊게 파악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입으로는 민주주의, 행동은 권위주의적인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슬로건으로 내세워 몇몇 집단이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朴正熙 정권이 닦아놓은 경제적 기반을 허비해서는 안 됩니다. 필요한 단체와 젊은 세대를 교묘히 조종(操縱)하고 또 이와 연관된 정치적 행동과 편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 귀중한 기반이 허물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국의 발전과정에서 급속하고 전면적인 민주화는 나라를 통제 없는 상태로 빠져 들어가게 할 위험성도 있습니다. 따라서 점진적이며 순차적인 민주화를 이루어 실질적인 정치참여(政治參與)를 확대하고, 사회적, 제도적 투명성을 제고해야 할 것입니다. 덮어놓고 선진을 외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성숙한 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다 성숙한 시민사회와 민주주의를 이룩하도록 역사와 문화 그리고 가치관과 기질, 또한 번영하는 한국의 장기적 비전에 부합하는 제도적 장치와 학습과정을 탐구하고 개발해야 합니다. 역사는 일직선을 따라 진행되기보다는 예측불허(豫測不許)의 사건들이 개입하곤 하는, 어떤 순환적 리듬을 따라 고르지 못한 속도로 진행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100 여 년 전, 우리나라가 세기적 전환기를 타지 못하여 나라를 잃었던 비통한 역사를 교훈 삼아 우리와 다음 세대는 앞으로 역사의 흐름을 잘 읽어야 할 것입니다. 대외적으로 개방하고 긍지를 지키면서 겸허하고 유연한 자세로서 개방과 협력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21세기 역사의 리듬을 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도전을 앞에 두고 우리 앞 세대가 이룩해놓은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말한 바 ‘피, 눈물과 땀의 노력’으로 된 귀중한 경제적, 사회적 기초를 흔들어 버릴 정도로 값비싼 대가를 치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朴正熙 대통령과 그 시대를 역사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세대간에 조화를 이루고 역사의 리듬을 타도록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가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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