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朴正熙 照明

박정희에 대한 세 가지 시각

淸山에 2013. 12. 30. 14:15

 

 

 

 

 

박정희에 대한 세 가지 시각

金一榮, 趙利濟, 趙甲濟의 논평

조갑제닷컴   


 
  朴正熙에 대한 세 편의 논문을 소개한다. 성균관대학교 金一榮 교수는 박정희 기념사업회 회보 기고문에서 '박정희식 근대화 전략은 유럽에서 경험했던 先경제발전-後민주화의 세계보편적 방식이었다'고 주장했다. 趙利濟 교수도 이 사업회 주최 강연에서 '박정희는 유교적 실용주의를 근대화의 중심철학으로 삼았으며 그의 리더십은 역사적 産物이다'고 말했다. 세번째 논문('박정희와 국가와 나' 해설문)에서 趙甲濟는 '박정희는 주자학적 전통질서에 도전했던 진정한 혁명가였으며 봉건잔재와 전투하다가 戰死했다'고 평했다. 
   
   
     

 

 

 

 

 

산업화-민주화 양립은 가능한가 - 朴正熙 시대의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朴正熙 대통령은 죽어서도 영향력을 잃지 않은 채 우리 곁을 맴돌고 있다. 그는 전현직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인기도 조사에서 항상 50%를 훨씬 넘는 수치로 수위(首位)를 차지하고 있다. 민주화 운동을 통해 그와 직간접적으로 대결한 경험을 지닌 대통령들(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은 아직도 내심으로 그를 경쟁상대로 여기고 있다. 그(의 모델)를 극복하지 않고는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을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김일영(金一榮)·성균관대학교 정외과 교수 ]
  
  
   서거한 지 25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朴正熙 대통령(이하 직명 생략)은 한국 근현대사를 둘러싼 각종 논쟁의 중심에 있다. 친일파, 한국 현대사에서 군부의 역할, 경제발전의 공과 과, 한일국교정상화(징용 및 위안부 문제 관련), 베트남 파병(고엽제 및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 문제 관련), 각종 인권탄압, 지역감정 같은 해묵은 쟁점에서 그는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그가 없으면 논쟁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정도이다.
  
   朴正熙는 현재 진행중인 정치 및 경제적 사안에서도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다. 외환위기의 원인을 찾을 때도, 금융부실의 문제를 거론할 때에도 사람들은 그를 소환하고 있다.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과거사 관련 법안의 상당 부분도 그를 겨냥한 측면이 있고, 향후 대권구도와 관련해서도 그는 여전히 중요한 변수로 남아 있다.
  
   죽었으되 죽지 않은 朴正熙 . 모든 논쟁의 중심에 있는 朴正熙 . 여기서는 그를 평가함에 있어 가장 뜨거운 쟁점 중 하나인 산업화(경제발전)와 민주화(정치발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겠다.
  
  
   산업화와 민주화 사이의 관계 : 세 가지 입장
  
   이 문제에 대해서는 대략 다음 세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첫째,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양립가능하며, 따라서 민주적 경제발전이 가능하다. 단기적으로는 개발독재나 권위주의적 발전국가 방식이 가시적인 경제발전의 성과를 낳는데 더 효과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개발방식이 남기는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따라서 다소 더디더라도 정치적 민주주의 및 경제적 분배개선과 함께 가는 발전노선을 추구해야 한다.
  
   둘째,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양립은 이론적으로는 주장 가능하다. 하지만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양자를 성공적으로 병행추진한 예를 찾기 어렵다. 이 점에서 산업화 초기단계에서는 자본주의적 경제발전과 ‘권위주의적 발전국가’ 사이에 ‘선택적 친화성(elective affinities)’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다만 이 논리를 산업화가 성숙단계에 들어선 현재에까지 연장하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며 정략적이다.
  
   셋째, 朴正熙 식의 개발독재는 그 당시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경제성장을 위해 바람직했으며, 그 유효성과 필요성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사실 산업화와 민주화의 균형발전은 모든 나라들이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소망하는 것이 ‘항상’ 실현가능한 것은 아니다. 경제발전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진행된 나라에서는 민주주의를 병행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그러나 이러한 병행발전이 ‘항상’ 가능한가는, 다시 말해 산업화 초기 단계에도 이러한 병행발전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김대중 정권은 출범하면서 좪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좫을 모토로 내걸었고, 노무현 정권 역시 이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간에 이루어진 경제발전의 성과와 수준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지극히 타당하며 현실적인 목표이다. 그러나 이 목표를 산업화 초기 단계인 朴正熙 정권에 그대로 대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시야를 한국에만 두지 말고 좀 더 넓힐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비교사적 관점에서 朴正熙 시대의 발전경험을 다른 나라의 그것과 견주어볼 때 그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상대화되면서 좀 더 객관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영국은 병행발전의 모델이 아니다
  
  
  
  
  
   정치와 경제의 병행발전이 보편적 과제로 제시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추적해 가보면 우리는 ‘모델로서의 영국’의 경험과 만나게 된다. 흔히 영국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의 획기적(epochal) 사건을 순차적으로 겪으면서 양자를 조화 있게 발전시켜온 대표적 국가로 간주되고 있다. 이런 영국의 예는 근대화론자들에 의해 많은 후발국들을 가위처럼 짓눌러 왔다. 권위주의적 산업화를 추진한 많은 후발국들은 영국모델을 척도로 한 정치적 항의와 도덕적 심문(審問)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런데 영국의 경험이 과연 여타 국가들의 발전경험을 잴만한 보편적 척도나 모델이 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영국의 발전경험을 보편적 모델로 삼아 후발산업화 국가나 후후발산업화 국가에 대해서도 그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는 단선적 발전개념이 과연 타당한가?
  
   이런 근대화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영국의 경험은 근대화를 이루는 다양한 길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더 나아가 그것은 되풀이되기 어렵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서구민주주의라는 것은 단지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나타난 하나의 귀결에 불과”하며 “20세기의 70년대에 서서 되돌아본다면 비민주적이거나 심지어 반민주적인 근대화도 있었다는 부분적 진리가 제기”된다고 하면서 영국을 위시한 앵글로 아메리카적 경험을 상대화시키는 무어(B. Moore)의 주장이나 “근대화문제에 대한 자본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해결책은 되풀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슈바이니쯔(K. de Schweinitz)와 “역사적으로 보면 민주주의체제는 법칙이라기보다는 예외”였다는 벨러(H. U. Wehler)의 예외론 등이 모두 이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렇게 영국의 경험을 근대화에 이르는 다양한 경로들 중 하나로 상대화시켰으면서도 이들은 여타의 경로, 특히 위로부터의 혁명의 길을 설명할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국의 경험을 다시 모델로 끌어들이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무어의 경우 그것은 ‘부르주아 없이 민주주의 없다’(No bourgeois, no democracy)는 맑스주의의 명제를 그대로 수용하는 데에서 잘 드러나며, 이런 무어의 입장은 독일의 경험을 ‘특수한 길’(Sonderweg)로 이해하려는 벨러나 코카(J. Kocka), 빙클러(H. A. Winkler) 같은 학자들의 입장과 그대로 연결되고 있다.
  
   무어가 국가(Crown), 지주귀족, 그리고 부르주아 사이의 세력관계 및 동맹관계의 내용, 지주귀족의 농업경영방식, 그리고 농민층의 결집가능성 등 여러 요인을 동원해 근대화에 이르는 다양한 경로를 나누려고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국 부르주아혁명의 유무를 가지고 앵글로 아메리카적 길과 여타의 길 - 위로부터의 혁명과 농민혁명 - 을 구분함으로써 상대화시켰던 영국의 경험을 다시 모델로 도입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과연 부르주아혁명이 민주주의를 가져왔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경우 민주주의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 때의 민주주의는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후자의 경우라면 앵글로 아메리카적 경로의 대명사인 영국을 과연 민주화와 산업화를 순차적 내지는 병행적으로 추진한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후자의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는 도대체 누가 가져오는가?
  
   영국에서 부르주아화한 지주귀족과 부르주아의 힘이 강력했으며, 그들이 전쟁을 통해 절대왕권을 제어하고 영국을 대륙의 여타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주적인 국가로 만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경우 수립된 민주주의는 결코 오늘날과 같은 의미에서의 제도와 절차를 갖춘 ‘보통민주주의’(mass democracy)는 아니었다. 그것은 ‘유산자(有産者)민주주의’(bourgeois democracy)였다. 19세기 초까지 영국에서 참정권은 토지귀족에게만 허용되었으며, 1832년 선거법개정을 통해서도 그 허용범위가 산업자본가에게 국한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후 선거법 개정은 노동운동의 주요과제였으며 그러한 노동운동에 대해 당시 영국정부가 심한 탄압을 가했다. 이러한 노력과 투쟁 끝에 영국에서 노동자가 선거권을 얻는 것은 1918년이고 부녀자까지 획득하여 일반국민 전체가 선거권을 갖게 되는 것은 1928년이었다. 1928년 영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1990년 미국 달러 기준으로 환산하면 5,115 달러였다. 이 모든 점들을 상기한다면 ‘부르주아 없이 민주주의 없다’는 명제는 성립하기 어려우며, 영국을 민주화와 산업화를 병행적으로 추진한 모델로 보기 힘듦을 알 수 있다.
  
  
   “영국, 민주화 과대평가 억압성 과소평가”
  
   이 점에서 독일을 ‘특수한 길’로 보는 역사학자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영국이 결코 모델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하는 일리(G. Eley)나 블랙번(D. Blackbourn)의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 일리는 ‘특수한 길’론자들이 19세기 영국에 대해 민주화의 정도는 과장하고 국가의 억압성 정도는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흔히 영국의 경험이라고 일컬어지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조화로운 동시성’은 구체적인 역사지식에 반대되는 도그마일 뿐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가 시작되고 강화된 것은 통상 부르주아혁명으로 불리는 정치적 변혁이 발생한 한참 뒤이다. 그리고 그 때 그것을 추진하는 담당자가 되었던 것은 부르주아가 아니라 산업프롤레타리아를 위시하여 도시수공업자, 쁘띠부르주아지, 독립자영농 등이었다. 따라서 일리는 부르주아지를 항상 자유주의 및 민주주의와 연결시키는 것은 편견이라고 주장한다. 부르주아가 진실로 원하는 바는 산업자본주의를 자유롭게 발전시키기 위한 법적·제도적 틀의 마련이지 정치적 자유주의는 아니다. 만약 부르주아혁명 개념을 이렇게 법적·제도적 틀의 마련이라는 의미로 재(再)정의한다면 독일도 그것을 조용하게 겪었으며, 그 점에서 독일은 결코 예외, 즉 특수한 길을 걷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영국의 경험은 모델도 예외도 아니다. 영국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적으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점이 증명된 이상 그것은 더 이상 다른 나라들에게 정치와 경제의 병행발전을 강요할 수 있는 모델이 되기도 어렵고, 또 되풀이되기 어려운 예가 될 수도 없다. 실제 영국의 경험은 산업화를 거쳐 민주화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그 후의 대부분의 국가들의 경험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영국은 그것을 가장 먼저 겪었을 뿐이다. 이 점에서 영국은 병행발전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선구적 예’(prototype)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경험적 예를 찾기 어려운 병행발전론
  
   이렇게 영국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병행추진한 것이 아니라 그 역의 경우의 선구적 사례라면 산업화 초기 단계에 민주주의에 의거해서 경제를 도약시킨 사례를 찾기는 정말 어려워진다. 특히 그 범위를 후발산업화 국가들과 그 이후에 본격적인 산업화를 추진한 국가들로 한정시킬 경우 그 예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의 후발산업화 국가들 뿐 아니라 사회주의적 방식의 산업화를 추진한 구(舊)소련이나 동구권 국가들, 그리고 최근의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NICs)에 이르기까지 산업화의 초기 단계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성공적으로 병행시킨 나라는 없었다. 그리고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오늘에 와서는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방식으로 산업화를 추진한 국가들만이 비교적 순탄하게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과거 제3세계 권위주의국가를 이론적으로 합리화시켜 주는 도구라고 비난받던 헌팅톤(S. Huntington)의 이론이 오히려 경험적으로 증명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점에서 朴正熙 정부 하에서 일어난 권위주의적 경제발전은 영국을 ‘선구적 예’로 하는 일반적 경험에서 보아 크게 일탈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아울러 실존하지도 않았던 영국 모델을 근거로 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병행론을 가지고 朴正熙 시대를 비판하는 일도 이제는 그쳐야 한다.
  
   물론 지금까지 예가 없다고 해서 앞으로도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양립시킨 사례가 등장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 점이 경험론적 주장의 취약점인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이것을 보편화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개연성 면에서 현재까지는 양립불가능성의 명제가 절대적 우위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경험적으로는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권위주의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사이에 ‘선택적 친화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권위주의체제가 반드시 경제발전을 가져온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제3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권위주의체제 중 경제발전에 성공한 나라가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따라서 한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에서 경제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동인(動因)을 권위주의체제로만 환원시킬 수는 없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단순히 권위주의체제가 아니라 그것이 ‘발전국가’(the developmental state)의 모습을 지닐 때 경제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이론이 있다. 다시 말해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자본주의적 경제발전과 ‘선택적 친화성’이 있는 것은 단순한 권위주의체제가 아니라 ‘권위주의적 발전국가’라는 것이다. 朴正熙 시대의 대한민국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역사의 리듬과 朴正熙의 한국 근대화 <全文>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주최 강연회)
   


   [ 조이제(趙利濟)·East-West Center 수석고문 ]
  
   여러분들 앞에서 이렇게 강연을 할 수 있도록 귀중한 기회를 만들어주신 朴대통령 기념사업회 회장이신 柳陽洙 대사님과 金正濂 대사님, 그리고 여러 위원님들께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저는 朴正熙 대통령을 늘 존경하고 좋아했습니다. 그 이유를 한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朴대통령은 복잡한 방정식보다는 산수(算數)를 잘 하셨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어로 算數라는 말은 ‘말한 대로 실행한다’, 즉 ‘일구이언(一口二言)을 안 한다’는 뜻이지요. 저는 오늘 국경을 초월해, 역사적인 시각에서 朴正熙 시대의 한국 근대화에 대한 저의 생각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1. 역사의 흐름과 天下大勢
  
   역사의 진행은 두 가지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밖으로 뻗어나가려는 원심력(遠心力,centrifugal)이고, 다른 하나는 안으로 결집하려는 구심력(求心力,centripetal)입니다. 일찍이 중국의 성인 노자가 “다 이루었다는 것은 곧 쇠퇴과정의 시작(大成若缺)”이라고 한 것이나 『삼국지』의 저자 羅貫中이 “천하의 대세는 함께 오래 뭉쳐 있으면 반드시 흩어지게 된다(天下大勢 合久必分 分久必合).”라고 한 것도 결국은 이러한 역사 변화의 법칙을 통찰한 것입니다.
  
   20세기의 후반부터 원심력이 세계화의 형태로 우세를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세계화의 몇 가지 뚜렷한 예를 들면, 정보통신의 혁명으로 인한 시·공간의 단축, 이에 따른 금융시장의 세계화, 오존층의 파괴 등의 전지구적 환경오염뿐만 아니라 미국의 911사태나 중국의 사스(SARS), 에이즈(AIDS), 쓰나미(TSUNAMI), 허리케인 카트리나(Hurricane Katrina) 등의 재난도 포함됩니다. 한 국가의 천재지변(天災地變)이나 정치적, 경제적 결정이 국경을 초월하여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구심력은 이른바 지역화 (regionalization)라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역화란 한 마디로 국가 또는 지역적인 경제 단위를 통합하려는 과정을 의미하고, 그 지역의 문화적 동질성(同質性)이나, 지리적인 인접성(隣接性), 그리고 지역에 따른 공통적인 경제적 이해관계를 기초로 합니다.
  
   저는 최근 중국에 다녀왔습니다. 세계화의 역사적인 리듬을 타고 온 세계로 뻗어 가는 중국의 강대한 경제력과 지속적 성장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朴正熙 시대의 경제개발 정책이 당시 중국지도자들의 큰 관심을 끌었고 중국의 경제개발 정책수립에 있어서 하나의 좋은 모델이 되었습니다.
  
   1990년 저는 중국의 鄧小平과 趙紫陽의 오른팔이자 한 때는 朱鎔基 총리를 부하로 거느리고 중국경제의 개방과 개혁을 주도한 馬洪 박사, 그리고 여기 앉아 계시는 김정렴 대사님을 모시고 중국 대련에서 韓中 경제지식 교류를 시작하였습니다. 김정렴 대사님은 이 대련 회의에서 1000여 명에 달하는 중국 정부 관료와 관계인사들 앞에서 특별강연을 하였습니다. 朴正熙 시대의 경제 개발정책에 관하여 감명 깊은 연설을 하여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았고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수차례의 한·중 지식교류에서 토의된 내용을 기초로 한 건의사항은 중국의 최고지도자 정책회의에 마홍 선생이 직접 보고했습니다.
  
   1980년 초부터 시작하여 저는 중국 측으로부터 몇 차례에 걸쳐 한국경제발전에 대한 강의 요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중국은 대통령을 미국의 앞잡이, 군사 독재자라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朴正熙는 사회주의자였다’ 라고 말문을 열었더니 그들은 단박에 관심을 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그러나 朴正熙는 사회주의의 약점을 알았고 동시에 그는 자본주의의 좋은 점뿐 아니라 약점도 알았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朴正熙의 리더십은 대의멸친(大義滅親)이라는 유교 사상에 입각해 그 자신이 청렴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朴正熙는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을 통해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에 관련된 많은 서적을 읽었고, 역사의 리듬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2. 발전의 격차와 따라잡기 발전 모델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명치시대의 일본은 경제발전을 통한 부국강병책을 추구했습니다. 명치유신 주역의 한 사람인 오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1873년에 유럽의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특히 독일의 산업발전에 주목하여 독일이 일본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유럽 방문 당시 오오쿠보는 프리드리히 리스트(Fridrich List)의 이론에 크게 감명을 받았으며, 그가 수립한 1874년의 경제개발계획안은 리스트의 경제학이론을 채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1880년대 일본에서는 리스트의 저서(著書)가 널리 읽혀졌습니다.
  
   국가가 어떻게 하면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빈곤과 기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개발국가가 선진 국가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리스트 이후, 조셉 슘페터(Joseph Schumpeter), 그 후 자본주의 발전국가 모델(Capitalist Development State)을 제시한 차머스 존슨(Charmers Johnson) 등의 학자들이 연구한 후발경제발전이론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담 스미스가 물품의 가치에만 주목하는데 비하여 리스트는 물품의 가치를 더 포괄적으로 봅니다. 사과를 예로 들어, 아담 스미스는 한 나라가 구태여 사과나무를 심지 않아도 다른 나라에서 싸게 살 수 있으면 사다 먹는 것이 경제를 원활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에 비하여 리스트는 현실적으로 국가와 국경이 있는 한, 자기 나라에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사과를 공급하던 다른 나라에 사과생산이 흉작(凶作)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강국은 언제든지 자기의 이해에 따라 부문별로 문호(門戶)를 개방하기도 하고 폐쇄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리스트의 경제발전론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한 나라의 생산력은 국민 개개인의 물리적 힘과 지적, 정신적, 예술적인 힘에 근원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담 스미스와 달리 리스트는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과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의 음악도 경제 생산치 계산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독일의 경우에는 비스마르크(Otto Eduard von Bismarck)의 유명한 철강산업과 소맥 농업(steel and rye)을 주축으로 하는 기간단체의 연계를 들 수 있고, 일본의 경우에는 천황을 으뜸으로 하는 혁명지도자, 지주, 재벌 등을 주축으로 한 ‘국가가족의 논리’(三戶 公, 『家の 論理』,1991)를 따른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독일과 일본은 제국주의 모델을 채택하여 국가의 위신과 위대성, 곧 국민의 긍지와 자부심을 제고(提高)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전후 일본에서는 농협(農協)과 경단련(經團聯)을 계속 국가발전의 주축으로 활용해왔습니다.
  
   20세기 후반에 와서 한국, 대만, 싱가포르, 중국 등의 후발 국가들은 시대변천에 따른 새로운 모델과 상징(예를 들면 한국의 수출확대, 새마을운동, 올림픽 유치 등)을 형성하여 따라잡기에 혁혁(赫赫)한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여기에서 따라잡기 발전의 인과(因果)에 관한 사회과학적 논리를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경제발전은 단순한 1인당 GDP 증가로서만이 아니라 문화와 제도를 포괄하는 보다 광범한 사회변혁의 한 부분으로서 받아들여져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메이지유신과 그에 따른 경제발전은 사회의 모든 부문이 경제적 생산성을 목표로 동원(動員)된 사회적인 현상입니다.
  
   둘째, 인류를 비롯하여 모든 생물이 그러하듯이 사회적, 경제적 제도는 필연적으로 성장과 발전과정, 노화의 과정을 겪습니다. 그러나 제한된 수명을 가진 인간이 죽음을 피하지 못하는 것과는 달리, 사회와 경제는 획기적인 개혁과 참신한 구조조정(構造調整)으로 활기를 되찾음으로써 지속될 수 있습니다.
  
   셋째, 발전과정의 기간을 단축하려면 모종의 혁명적이며 극적인 조치, 제도와 틀의 구조조정을 필요로 합니다. 이 과정은 자본주의적 발전모델이론에서 말하는 효율적인 리더십과 함께 엄청난 사회적 에너지의 동원을 필요로 합니다. 최근 백 여 년 간의 역사적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국가경제 발전에 있어서 군(軍)의 역할은 기획, 조직력, 운영의 능률성(能率性)과 리더십의 측면에서 긍정적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3. 동아시아 국가 리더십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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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의 역사와 발전경험에 비추어 국가발전에 필요한, 제도화된 리더십에 관해 또 다른 논리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선의의 권위(Soft Authoritarianism)’에 입각한 제도화된 리더십은 시장경제체제와 부합(符合)함으로써 급속한 경제발전에 필요조건(必要條件)이 되어 왔습니다.
  
   권위와 리더십에 관해 몇 가지 실질적 예를 들면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에서는 천황제를 상징적으로 활용해 일본국민들의 마음 속에 권위에 대한 의식을 심어주었습니다. 朴正熙와 李承晩 두 사람은 피선(被選)된 대통령으로서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보여 주었으며 이를 국민들이 용납(容納)하고 존중했습니다. 이들 두 지도자에게 주어진 전통적인 신뢰는 두 사람이 민족의 생존과 경제발전이라는 역사적 임무를 달성할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태국(泰國)에서는 군주제가 상징적이긴 하지만 국민들에게 태국사회 권위의 중심이며 원천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자유 민주주의 원리들이 실행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권위주의적 리더십으로 급속한 경제발전을 경험한 또 다른 사례입니다.
  
   필리핀은 지배적인 유형에 속하지 않는 흥미로운 예외입니다. 20세기 초 수십 년간 미국은 필리핀에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발전과 경제발전을 이끌어내고자 시도했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1960년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일본을 제외한 다른 모든 동아시아국가보다 높았습니다. 그러나 필리핀은 한 번도 국가적 발전 목표에 일치하는 지속적인 리더십을 갖지 못했습니다.
  
   중국은 현재 이데올로기와 산업변천의 획기적인 과정을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등소평은 1980년대에 ˜계획체제에도 시장이 있고, 자유시장체제에도 계획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 계획 경제체제의 개념을 새롭게 변형시켰습니다. 지난 20년간의 정치적 안정과 등소평, 江澤民, 그리고 현재의 후진타오(胡錦濤)와 같은 제도화된 리더십이 주어져 오늘의 중국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수년 전 저와 MIT의 사무엘슨 교수(Paul Samuelson)의 대담이 KBS를 통해 방송된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도 소련은 실패했고 중국은 성공했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사무엘슨 교수는 소련이 실패한 것은 그라스노스트(Glasnost, 정치적 개방)를 먼저하고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경제적 구조 개혁)를 나중에 한데 있다고 말하고 경제발전이 먼저 되어야만 정치발전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경제발전을 이룩한 동아시아국가들을 보면 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선의의 권위주의를 공통적으로 내포하고 있습니다. 朴正熙, 등소평을 비롯한 몇몇 지도자들은 장기적인 국가발전을 위해서는 급속한 민주주의의 졸속한 실시보다 민주주의와 권위주의간의 타협점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이들 국가의 민주화 템포가 급속하지 않았습니다.
  
   동아시아 역사에는 성군(聖君)으로 불리는 황제나 왕 또는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맹자(孟子)의 덕치국가론(德治國家論)에 근거한 유교적, 가부장적인 사회가치관과 전통에 입각한 권위 있는 리더십을 인정하고 존중해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국민들에게 수천 년에 걸쳐 각인되어 있는 인식 내지 의식구조와 정서를 고려해 볼 때, 경제적으로 성공한 이들 국가의 선의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은 결코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4. 역사의 리듬과 민족의 존망
  
   저의 친지이며, 중국 ‘NASA’(Rockets And Missiles Development)의 대부라 불리는 송건 박사는 “자연과학의 열역학법칙에 따르면, 어떠한 시스템이든 그 시스템으로 하여금 에너지와 물량 그리고 정보를 바깥세상과 교환할 수 있는 열린 환경이 주어질 때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다. 나라의 개방과 외부세계와의 상호활동과 교류는 지적, 과학적, 경제적, 사회적 발전에서 변화와 진보를 가져다준다는 점을 결코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항상 강조합니다.
  
   조선이 일본이나 다른 열강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개방되지 않고 스스로 개방할 수 있었을까요? 이에 대해선 논의의 여지가 많습니다. 유교적 가치와 전통에 근거한 배타주의적(排他主義的) 경향과 정책이 수세기에 걸쳐 동아시아 사회를 지배했습니다. 일본과 중국 못지않게 완강한 저항이 있었던 조선에서도, 심각한 내부 혁명이나 외부세력의 강압 외의 다른 방도로는 개방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요즈음 李舜臣 장군의 이야기가 TV에서 방영되었지요. 보다 객관적이었으면 합니다만, 李殷相 선생이 쓴 충무공 일대기를 보고 느낀 것은 조선 왕조가 일찍 개방하지 못하여 이순신 장군의 눈부신 전략과 업적, 그 지혜를 후대에 계승하지 못한 것입니다. 특히 거북선의 제조과정(製造過程)에 대한 자료를 한국에서 찾아볼 수 없고 주변국, 중국이나 일본에서 그 정보를 찾아야 할 형편이니 안타깝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먼저 개화한 일본에서 받아들여 저 유명한 도오고 헤이하찌로(東鄕平八朗)와 야마모도 이소로꾸(山本五十六)를 양성하게 된 결과를 보면 개방의 타이밍(timing)과 중요성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만 여년의 인류문명의 역사를 보면 야생식물 재배와 동물을 기르는 것도 포함해 농업기술이든 무기의 발달이든 기술적으로 우수한 민족이나 국가들이 약한 민족이나 국가를 정복하고, 지배하고, 멸종시켜 왔습니다. 이를 입증하는 선례와 사실적 증거들은 너무 풍부합니다. 최근 베스트셀러인 제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의 『총, 병균, 쇠 Guns, Germs and Steel』에 의하면 자연적이며 지리적인 장벽으로 인한 몇몇 예외(파푸아 뉴기니)를 제외하고는 약자들이 홀로 남게 되는 경우는 거의 드뭅니다.
  
   한 예로 스페인의 남미 정복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남미는 유럽과 아시아대륙과 격리되어 폐쇄된 대륙이었습니다. 1532년 스페인의 정복자(Conquistador)인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sisco Pizzarro)가 168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8만 명의 군대의 호위를 받고 있던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Atahuallpa)와 오늘의 페루(Peru)에서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피사로는 소총과 말의 기동력으로 순식간에 황제를 체포하고 5만명이나 되는 잉카 군대를 섬멸(殲滅)하였고, 이로써 잉카문명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잉카제국은 말도, 총도 없었다고 합니다. 황제를 석방해 달라고 22톤의 금을 피사로에게 공납했으나 황제는 처형당했습니다. 한편 잉카제국 인구의 90%가 스페인 사람들이 가져온 질병 천연두(smallpox)로 인해 전멸되다시피 했습니다.
  
   민족국가와 주권 그리고 개인 인권의 제도화가 강조되고 인정받게 된 것은 인류역사에서 아주 최근의 일이며, 그것도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의 표현대로 하자면 높은 건물에 동전 한 닢 정도의 폭에 불과한, 시간적으로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개방된 이후 1세기 이상의 세월이 흐른 지금, 한반도를 외부세계에 개방한 긍정적인 측면에 대한 인정은 고통스럽지만 객관적 분석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 사회적 기본시설 면에서 일본 식민지 통치 유산에 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기술적, 경제적 발전의 측면에서 돌이켜보면 36년간의 일본통치가 한국에게 전적으로 불이익만 주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국주의적 팽창과 식민지 행정을 통하여 일본은 한반도에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양 측면에서 사회기본시설을 건설하고 남겨주었습니다. 한 예로 부산에서 서울을 거쳐 신의주까지 한반도를 관통하는 주요 간선철도는 중국과의 국경선을 넘어 만주의 주요도시와 전략적 링크를 제공했습니다. 한국의 동북을 통하여 서울로부터 나진(羅津)까지 이어지는 철도를 시베리아 횡단철도(橫斷鐵道)와 연결시켰습니다.
  
   일제하 한반도의 경제발전은 현저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내선일체(內鮮一體)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일본이 한반도에서 손을 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면, 그와 같이 집중적인 사회간접자본을 투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945년 일본인들은 식민지 한국을 떠나면서 그들이 소유했던 자산을 고스란히 남겨 두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남한 내 총자산의 70~80%를 차지하고 있던 막대한 자산을 가지고 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러일전쟁은 러시아의 남만주 지배권과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상호인정하자는 일본의 제안을 러시아가 거부함으로써 발생한 것입니다. 만일 러시아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면 한반도가 독립과 주권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다수의 구소련과 러시아의 역사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으로 답하고 있습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정황을 감안해 볼 때, 이를 허무맹랑(虛無孟浪)한 가정(假定)이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당시의 일본은 경제규모의 한계로 인해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을 계속적으로 공급할 수 없었고, 결국 군수보급(軍需補給)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러일전쟁 당시 부산과 시모노세끼 (下關)사이를 오가는 화물선을 텅 비운 채, 전략적으로만 왕래시킬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혁명(Bolshevik Revolution)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여 러시아 국내 사정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때 일본은 미국 대통령 테오도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에게 러일전쟁이 조속히 끝날 수 있도록 중재(仲裁)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당시 러시아보다 일본에 우호적이었던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 이권의 인정을 포함한 별개의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러일전쟁을 종식(終熄)시켰습니다. 이 공로로 루즈벨트는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까지도 했으니 실로 역사의 아이러니(irony)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러시아의 영토소유에 대한 집착(執着)과 욕구(慾求)는 대단합니다. 그런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만주와 한반도를 자신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했을 리가 만무하다고 중국전문가들은 말합니다. 그랬다면 한반도는 1992년 소련의 붕괴 이후에야 해방될 수 있었을 것이고 거의 1세기 동안 서구와 북미의 교육, 기술, 과학, 개발자본, 경제 발전의 노하우에는 접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소련은 부산, 원산, 인천 등과 같은 부동항(不凍港)의 점령을 염원하고 있었고, 이 항구도시를 군사적, 경제적 목적을 위해 소련인이 거주하는 포령(包領, enclave)으로 발전시켰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경제적인 인프라(infra)와 인력자원의 개발 차원에서 볼 때도 한반도의 근대적인 경제발전은 소련 치하에서는 3, 4세대 즉, 100년 정도 뒤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2차대전과 특히 한국전쟁 이후 매우 어려운 시기에 미국의 막대한 규모의 원조가 있었기에 한국은 국가로서의 결속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대대적인 기아와 경제적 파멸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AID통계에 의하면 1945년부터 1983년까지 한국에 대한 외국원조의 총 규모는 약 260억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1961년 당시 한국의 GNP가 26억불이었으니 엄청난 규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에 따라 한국은 안전보장, 군사 및 경제원조, 직·간접적인 기술이전뿐 아니라 문화적·제도적 영향의 혜택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미국은 한국의 전쟁피해복구와 경제회복을 위해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발전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미국과 긴밀한 동맹관계를 최대한 활용한 것이 급속한 경제발전에 큰 도움이 된 것입니다.
  
   저명한 종교철학자 폴 틸리히(Paul J. Tilich)교수는 ‘살아있는 세포, 인간의 영혼, 한 시대의 성장을 관찰할 때 성장이란 이득이 될 수도 있고, 손실이 될 수도 있고 성취이자 희생이다. 많은 부분의 성장을 희생해야 단계적으로 궁극적, 전체적 성장이 가능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민주화의 지연, 지역적인 희생과 불균형이 있었기 때문에 전반적인 발전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朴正熙 시대의 경제발전은 주어진 여건을 최대한으로 활용함과 동시에 필요한 여건을 창출하여 가장 실용적이며 효율적인 접근방식과 전략으로 궁극적인 국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국민적 에너지를 집결하여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함으로써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목표를 달성하여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신흥공업국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5. 결론 : 朴正熙의 도전과 역사적 조명
  
   朴正熙 정권으로부터 시작된 국가발전은 역사의 리듬과 타이밍이 잘 맞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약 20 년간의 통치기간에 국민소득을 87달러에서 1,644달러로 약19배나 끌어올렸습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국경제 기적의 주역으로 인정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저는 몇 년 전 케네디와 존슨대통령의 안보보좌관직을 지낸 저명한 경제학자인 월트 로스토우(Walt Rostow) 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케네디 행정부의 각료 대다수가 그 당시 한국의 경제적인 잠재력과 능력에 대하여 강한 의심을 표명했지만, 로스토우 교수는 케네디(John F. Kennedy)를 설득하여 朴正熙의 신정부와 협력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당시 로스토우는 한국 방문을 통해 한국이 경제적 도약단계에 필요한 대부분의 필요충분조건들을 갖추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朴正熙가 한국경제의 도약과 근대적인 공업국가로의 변혁이라는 과제를 성공적으로 주도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둘째, 朴正熙 정권은 새마을운동 같은 제도개혁을 통하여 빈궁한 농촌사회의 기근을 극복하고 지니(Gini)계수상 도시·농촌간의 소득과 생활수준의 격차를 최소화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인구정책을 성공시켰고 또한 사회보장과 의료보험제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셋째, 뉴욕타임즈의 저명한 논설위원, 니콜라스 크리스토프(Nicholas Kristof)에 의하면 朴正熙 정권은 비록 민주화운동을 억압하였지만 경제발전을 통해서 오늘날 한국의 다원주의의 근간이 되는 중산층을 창출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했습니다.
  
   넷째, 주한미군의 철수를 가능케 할 수도 있는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에 직면하여 朴正熙 정권은 경제발전 능력에 의존하여, 능란한 외교활동과 군사력의 강화를 통하여 북한의 도발과 위협에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다섯째, 朴正熙 정권은 농촌과 지방정부를 위시하여 중앙정부 기구와 기업에 이르기까지 긍지와 자부심, 협동정신을 고취시킴으로써 국민정신을 함양하고 강화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음 세대에게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과학, 스포츠 등 각 분야에서도 국민적 자신감과 긍지(矜持)를 갖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여섯째, 정치와 정부의 부패에 관한 기록들을 돌이켜 보면, 다른 어느 정권 특히 朴正熙 사후 그를 계승한 정권들에 비하여, 朴正熙 정권은 그 부패(腐敗)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훨씬 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朴正熙는 한편으로 혁명적인 철학을 갖추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교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유교적 도덕성은 일본사범학교와 군관학교 교육에 의하여 강화되었습니다. 자신이 가난에 찌든 농촌출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족과 친척의 금전적 이익에 관심을 쏟지 않았습니다.
  
   『태평양의 세기 The Pacific Century』라는 책에서 프랭크 기브니(Frank Gibney)는 세 사람의 지도자가 경제적 기적을 만들어냈다고 썼습니다. 이러한 미덕과 기적을 상징하는 세 사람은 바로 朴正熙와 대만 총통직(總統職)을 물려받은 장경국(張經國), 그리고 싱가포르의 이광요(李光耀) 수상입니다. 이 명단에는 중국을 개방한 등소평도 포함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들 네 지도자는 배경이 매우 다르나 각각 분명한 정치노선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광요는 영국 캠브리지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은 법률가였습니다. 朴正熙는 군사 지도자였습니다. 장경국은 소련(蘇聯)에서 10년간 군사학교 교육을 받았고 총통직을 물려받은 인물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등소평은 탁월한 공산당 간부였고, 중국 인민해방군의 지도자였으며 수년간 프랑스에서 유학을 했습니다. 이들 네 사람 모두 동아시아 출신으로서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로 유교적 가치관입니다. 이 가치관은 형태는 달랐지만 본질적으로 대다수 국민들에게 경제적 복지와 유익을 목적으로 둔 선의의 권위주의적 통치의 기반(基盤)이 되었습니다. 둘째로 이들 지도자들은 각기 인생의 어느 시기에 사회주의적 성향과 사고를 가졌지만, 궁극적으로는 경제발전에서 시장경제의 역할을 중시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는 장기적인 국가목표를 달성함에 있어서 실용주의를 채택했다는 점입니다. 네 번째, 이들은 검소한 생활방식을 유지했고 공사가 분명하여 개인이나 가족의 이해관계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들은 허례허식, 부패 또는 개인적인 축재(蓄財)를 한 일이 없습니다.
  
   저명한 정치사회학자 모리스 쟈노비츠(Morris Janowitz)에 의하면 朴正熙와 등소평은 가장 큰 국가조직인 군에서 습득한 지도자의 특성을 가졌는데, 이것이 경제발전을 통한 사회변혁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장경국은 준군사적인 배경을 지님으로써 1988년까지 계엄령(戒嚴令) 하에 있었던 대만이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하는데 군의 긍정적 역할을 제공한 것으로 인정됩니다.
  
   완벽한 보석은 없습니다. 朴正熙의 리더십은 한국의 경제발전과 근대화의 역사적 달성을 가능케 하였지만, 그의 리더십에서 주요한 결점은 리더십 구조와 권력계승을 제도화하지 못하여 개혁과 정책의 계속성(繼續性)을 확보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인간관계 중심적 네트워크에 기초를 둔 전통적 통치스타일에 크게 의존했다는 점입니다. 혁명가, 그리고 군인으로서 朴대통령은 측근 군부인맥(軍部人脈)으로부터 스스로를 완전히 해방시키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말년으로 가면서 자기를 과신하게 되었고, 통치그룹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던 군동료나 부하들과 함께 있을 때에 더욱 편안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그의 가장 측근에게 배신당했으며, 그의 정권은 정해진 후계자도 없었고 원만한 권력이양(權力移讓)을 가져올 적절한 제도적 장치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영웅의 마지막의 아쉬움을 그리는 두보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杜甫의 蜀相」
  
   三顧頻煩天下計 兩朝開濟老臣心
   出師未捷身先死 長使英雄淚滿襟
   삼고초려 후 천하를 도모하고
   두 조정을 깨우친 노신의 마음
   출사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몸이 먼저 죽었으니
   자고로 영웅은 옷깃에 눈물을 가득 젖게 하노라.
  
   朴대통령은 그 시대의 역사, 문화, 그리고 사회적, 제도적 영향의 산물이었으며, 따라서 그의 체질화된 기질과 성향 그리고 사고방식은 짧은 시간에 없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성공적으로 일했던 젊은 시절에는 유능한 민간 정치인과 인재들을 통치 그룹 내에 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스타일에 영향을 끼친 문화적 타성은 그의 마지막 통치시기에 결정적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자본주의발전국가’의 성공은 자체 내에 이미 슘페터(Joseph Schumpeter)가 말한 ‘파괴의 씨앗’을 배태(胚胎)하고 있었습니다. 즉, 기업인들과 업계의 지도자들은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에너지를 젊은 세대 지도자들을 양성하는데 투자하지 않고 주로 기업이나 개인적 이익을 확장하는데 소비했습니다. 결국 그들 자신의 기본바탕을 침식하고 파괴하는 추세에 편승함으로써 朴正熙 시대에 시작된 생산적 패러다임을 지속시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국민의 의식구조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국과 미국의 성숙한 민주주의는 여러 세기에 걸친 제도적 실험과 축적(蓄積)의 결과이며, 그들의 민주주의는 제도적인 역사의 유산(遺産)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지속적으로 진정한 민주주의가 가능한 곳은 영국, 다음으로 미국이고 독일, 프랑스, 일본 등에는 아직도 물음표를 붙이고 있는 전문가도 많습니다. 영국의 경우에는 프랑스 혁명을 역사적으로 조명한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고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에서, 미국의 경우에는 토커빌(Alexis De Toqueville) 의 『미국에서의 민주주의 Democracy in America』를 통해서 자유민주주의의 깊은 문화, 제도적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독일과 일본에서의 경제발전상의 따라잡기는 불과 몇 십 년에 이루어졌습니다. 한국과 다른 신흥공업국가들은 후발주자로서 발전상의 간격을 단기간에 좁힐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민주주의로의 발전은 길고 때로는 험준(險峻)한 과정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경제발전은 민주주의를 위해 필수적이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입니다. 경제발전과 성숙한 민주주의 사이에는 격차가 있는데 이 격차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우리와 다음 세대의 도전입니다. 저 자신도 40여 년간 주로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만 지금도 미국의 친한 친구들로부터 미국식 민주주의 사회에 완전히 익숙하지 못하다고 지적(指摘)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근간(根幹)인 시민사회의 생활양식이 아직 저의 제2의 본능(Second Instinct)이 되지 못한 것을 느낍니다. 하물며 몇 년 정도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과연 민주주의를 뿌리 깊게 파악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입으로는 민주주의, 행동은 권위주의적인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슬로건으로 내세워 몇몇 집단이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朴正熙 정권이 닦아놓은 경제적 기반을 허비해서는 안 됩니다. 필요한 단체와 젊은 세대를 교묘히 조종(操縱)하고 또 이와 연관된 정치적 행동과 편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 귀중한 기반이 허물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국의 발전과정에서 급속하고 전면적인 민주화는 나라를 통제 없는 상태로 빠져 들어가게 할 위험성도 있습니다. 따라서 점진적이며 순차적인 민주화를 이루어 실질적인 정치참여(政治參與)를 확대하고, 사회적, 제도적 투명성을 제고해야 할 것입니다. 덮어놓고 선진을 외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성숙한 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다 성숙한 시민사회와 민주주의를 이룩하도록 역사와 문화 그리고 가치관과 기질, 또한 번영하는 한국의 장기적 비전에 부합하는 제도적 장치와 학습과정을 탐구하고 개발해야 합니다.
  
   역사는 일직선을 따라 진행되기보다는 예측불허(豫測不許)의 사건들이 개입하곤 하는, 어떤 순환적 리듬을 따라 고르지 못한 속도로 진행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100 여 년 전, 우리나라가 세기적 전환기를 타지 못하여 나라를 잃었던 비통한 역사를 교훈 삼아 우리와 다음 세대는 앞으로 역사의 흐름을 잘 읽어야 할 것입니다. 대외적으로 개방하고 긍지를 지키면서 겸허하고 유연한 자세로서 개방과 협력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21세기 역사의 리듬을 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도전을 앞에 두고 우리 앞 세대가 이룩해놓은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말한 바 ‘피, 눈물과 땀의 노력’으로 된 귀중한 경제적, 사회적 기초를 흔들어 버릴 정도로 값비싼 대가를 치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朴正熙 대통령과 그 시대를 역사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세대간에 조화를 이루고 역사의 리듬을 타도록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가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한 근대화 혁명가의 육성과 숨결, 그리고 꿈 
   
   박정희 저『국가와 혁명과 나』의 해설문 <도서출판 지구촌. 1997>

 

 


   
   권력을 쥐고도 부패하지 않는 혼
  
   근대화 혁명가로서 비장한 생애를 살다가 간 박정희(朴正熙)의 국가관, 혁명관, 인간관을 보여주는 박정희 저 『國家와 革命과 나』(1963년 9월 1일 향문사에서 초판 간행)를 34년 만에 다시 출간하는 이유는 이 책이 담고 있는 격정과 비전이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는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된 한국의 창건'을 소망했고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人情)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했다. 자주 독립된 한국의 창건은 자주적인 통일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미완성의 대업(大業)으로 남아 있다. 그는 부하의 권총에 의해서 생이 끝나고 지식인들에 의해 사후(死後) 격하를 당했으나 서민의 인정(人情)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 한국인의 가슴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박정희 시대 18년. 박정희 사후(死後)18년을 다 거치면서 우리는 이 거목(巨木)이 드리우고 있는 큰 그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아낌없이 주고 간 이 나무를 좀 떨어진 자리에서 다소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이제는 그가 이 책에서 토로했던 포부를 이해하고 또 그의 성취와 비교해가면서 채점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혁명아 박정희의 인간을 그 숨결까지 느끼게 해준다. '폭우가 쏟아지는 야반 0시……'로 시작되는 서문과 '가난은 나의 스승이자 은인이다'로 시작되는 마지막 쪽 사이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먼저 분기(噴起)시킴으로써 잠자던 민족의 에너지를 분기시켰던 그의 인간됨을 알 수 있다. 18년 만에 세계 최빈국(最貧國)을 선진국의 문턱까지 끌어올려다 놓은 그의 지도력을 지탱한 것은 권력을 잡은 뒤에도 부패하지 않은 그의 혼이었던 것이다.
  
   이 책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땀을 흘려라/돌아가는 기계 소리를 노래로 듣고……/2등 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 우리는 일을 하여야 한다. 고운 손으로는 살 수가 없다. 고운 손아 너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만큼 못살게 되었고 빼앗기고 살아왔다. 고운 손은 우리의 적이다.'
  
   박노해 시인의 작품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의 저항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시가 국가원수의 저서에 실리게 된 사정은 이러하다. 『國家와 革命과 나』의 초고를 정리하는 데 있어서 박정희를 도와주고 있었던 박상길(朴相吉, 전 청와대 대변인, 水協 회장) 씨의 회고이다. '그날도 장충동 공관에서 박 의장과 담론을 나눈 끝 무렵이었습니다. 화제는 아마도 박 의장이 겪었던 가난이었을 겁니다. 그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박 의장이 다른 방에 갔다가 오더니 좀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이런 게 하나 있는데 넣을 데가 있겠습니까'하고 메모지를 건네주는 거예요. 받아보니 친필로 쓰고 고친 흔적이 있었습니다. 거의 조판이 다 돼 있었던 책에 무리를 해서 끼워 넣었습니다. 다른 시인의 작품을 옮겨 적은 것인지, 그분 자신의 창작인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아마도 창작일 겁니다. 지방 출장 때의 체험에 근거한 시작(詩作)이 아닌가 합니다.'
  
   박상길 씨는 자신이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을 도와서 이 책을 정리하던 때(1963년)의 이야기를 『나와 제3, 4공화국』이란 저서에서 이렇게 공개한 적이 있었다. '이즈음 의장의 일상은 보기에도 민망하리만큼 망쇄(忙殺) 하였지만 저술의 핵심을 잡기 위해서는 상당한 담론이 필요치 않을 수가 없었다. 대개의 경우 자정을 전후한 야반에 장충단 의장 공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내가 메모한 예정된 내용이나 때로 그분이 말하는 자유로운 의견들을 중심으로 대충 골간을 잡아 당초 세운 논술 구성 방향에 따라 써 내려갔다. 50장에서 100장 정도의 원고가 되면 의장 공관으로 직행하여 읽어보고 의견을 말하고 하였는데 바로 이 전후가 격동의 절정기였는지라 좀체로 차분하게 담론할 수가 없었다.
  
   가다가는 돌발적인 사태, 정치적인 난제(難題) 등이 주제로 등장하여 혹은 진지, 혹은 흥분, 혹은 격정적이 되는 등 의외의 경우가 많았다. 이같은 일들은 한 민족국가의 운명을 거머쥔 한 영도자의 스스럼없는 나상(裸像)을 보는 데서 역사의 엄숙, 민족의 비애, 국가의 어려움을 가슴에 느낄 수 있었고 이 절대한 파도와 맞선 한 운명적 인간의 순정, 정열, 비장, 결심 등을 그대로 읽을 수가 있었다. 나는 영원히 확신하고 있다. 이 이후 이분의 이름으로 몇 권의 책이 나온 바 있지만 이분의 철학.사상.정치.경제.문화.외교.사회관은 물론 하나의 인생관에 이르기까지 이만큼 정확한 바는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실용성과 주체성이 혁명의 논리
  
   모든 성공한 혁명에는 논리와 철학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박정희 식 근대화 모델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 근대화 혁명을 가능하게 만든 논리로서의 철학을 말하는 사람은 적다. 이 책의 재출간이 갖는 가장 큰 의미는 박정희의 근대화 혁명사상에 대한 재조명일 것이다. 박정희 사상이 지금까지 별로 정리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자신의 논리를 어렵고 고상하고 정교하게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설적으로 투박하게 툭툭 여기저기 던져놓기만 했던 몇 줄의 글들을 다시 모아서 지나간 세월의 캔버스에 배열해놓으면 비로소 이 혁명아가 그리고 있었던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설계도, 그 밑그림이 나타나는 것이다.
  
   박정희는 우리 민족사의 위대한 1급 지식인이자 사상가였고, 그 사상을 실천에 옮겨 민족이 처한 상황을 타파해간 혁명가였다. 삼국통일로써 우리 민족사에서 공간적인 현상 타파를 가져온 김유신(金庾信), 그리고 한글 창제로써 정신적인 현상 타파를 꾀했던 세종대왕과 같은 반열에 서게 될 당대의 진보적 사상가였다. 그는 청빈(淸貧)을 위선자와 패배자의 변명이라고 경멸하고 우리 민족의 숙명처럼 따라다니던 가난을 물리침으로써 민족사의 물질적인 제약을 타파해간 사람이다.
  
   혁명가 박정희의 진정한 혁명성은 그가 생전에 자신의 혁명논리를 체계화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던 점에 있다. 혁명이 이념화되면 우상숭배로 전락하고 혁명을 타락시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어떤 주의나 학설의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그 어떤 주의나 학설도 거부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활용했던 실용성과 주체성이 그의 진정한 혁명논리였다. 그는 섣부른 이념이 없을 때 영구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혁명적 발상은 그 당시 한국의 지배층과 지식인들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민주주의는 신(神)이다'는 신앙에 도전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해방 후의 정치세력을 민주주의의 탈을 쓴 봉건적 수구세력으로 규정했다. 그들 구정치인(舊政治人)이야말로 '덮어놓고 흉내낸 식의 절름발이 직수입 민주주의'를 맹신하는 사대주의자라고 단정하기도 했다. 그의 혁명적 역사관은 서구식 민주주의 맹신자들이야말로 조선시대의 당파싸움 전문가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위선적 명분론자라고 규정했다.
  
   그는 4.19와 5.16혁명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4.19혁명은 '피곤한 5천년의 역사, 절름발이의 왜곡된 민주주의, 텅 빈 폐허의 바탕 위에 서서 이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명제를 던졌고 이 명제에 해답하기 위한 '역사에의 민족적 총궐기'가 5.16이란 것이다. 4.19와 5.16을 동일선상에 놓는다는 것은 자유당과 민주당을 똑같은 봉건적.수구적 세력, 즉 근대화 혁명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4.19학생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혁명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
  
   다수의 국민들과 지식인들이 자유당을 독재, 민주당을 민주세력으로 보고 있었던 데 대하여 박정희는 그런 형식논리를 거부하고 그들의 본질인 봉건성을 잡아채어 둘 다 역사 발전의 반동세력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 어디에도 합헌(合憲)정권을 무너뜨린 데 대한 죄의식과 변명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당시에 박정희가 이런 혁명적 시각을 자신의 신념으로 내면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원(不遠)한 장래에 망국의 비운을 맛보아야 할 긴박한 사태를 보고도 인내와 방관을 미덕으로 허울 좋은 국토방위란 임무만을 고수하여야 한단 말인가. 정의로운 애국군대는 인내나 방관이란 허명(虛名)을 내세워 부패한 정권과 공모하고 있을 수는 도저히 없었다. 말하자면 5.16혁명은 이 공모를 거부하고, 박차고 내적(內敵)의 소탕을 위하여 출동한 작전상 이동에 불과하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박정희는 서구식 민주주의의 강제적 이식(移植)과 맹목적 추종을 비판했으나 자유민주주의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자주정신이 강한 그로서는 외래 정치사상을 부정하고 싶고 그리하여 민주주의란 이름이 붙지 않는 한국식 정치원리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지만 자신과 한국의 처지를 자각하고 있었다. '엄격한 의미로서 혁명의 본질은, 본시 근본적인 정치사상의 대체와 사회 정치구조의 변혁을 뜻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런 점에 있어 한계가 제약되어 있고, 그 혁명의 추진에 각양(各樣)의 제동작용이 수반되고 있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함에는 벗어날 수가 없다. 민주주의의 신봉을 견지하는 한 여론의 자유를 막을 수는 없다. '토론의 자유' 속에 '혁명의 구심력'을 찾아야 하는 혁명. 바로 이것이 본인이 추구하는 이상혁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힘이 들고 어려운 길이다.' 박정희 근대화 혁명이 성공한 요인은 유교의 실용성과 집단주의적 희생정신을 동원하여 이를 서구 자본주의의 시장원리에 연결시킴으로써 경쟁체제의 작동에 의한 영원한 자전력(自轉力)을 얻어냈다는 점에 있다. 동양과 서양문화의 장점을 뽑아내어 종합한 셈인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주체적 관점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자조-자립-자주-통일의 단게적 발전 전략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박정희의 국가 근대화 전략은 자조-자립-자주의 정신적 근대화 과정(이를 그는 주체의식의 확립혁명이며 인간 개조라고 했다)을 그 추진력의 원천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보겠다는 자조(自助)정신이 생겨야 자립경제가 건설될 수가 있고 자립경제를 기반으로 할 때만이 자주국방을 할 수가 있다. '자주국방능력이 없는 국가는 진정한 독립국가가 아니다'는 생각을 확집(確執)처럼 갖고 있었던 점에서 박정희는 우리 민족사에서 김유신과 가장 닮은 자주적 국가관의 소유자이다. 박정희는 국토통일도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을 건설한 다음에야 우리 주도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통일관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1976년 1월 24일 국방부를 연두순시한 자리에서, 미리 준비된 원고를 읽는 식이 아니라 자신의 소감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밝힌 내용이다.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찾아낸 녹음 테이프에서 가감 없이 풀어본다.
  
   '특히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논리를 이론적으로 여러 가지로 제시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공산주의를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왜냐. 우리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우리가 용납해선 안 된다. 공산당은 우리의 긴 역사와 문화, 전통을 부정하고 달려드는 집단이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만이 우리 민족사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하여 지켜가는 국가이다. 하는 점에 대해서 우리가 반공교육을 강화해야 하겠습니다. 공산당이 지난 30년간 민족에게 저지른 반역적인 행위는 우리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을 겁니다. 후세 역사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온 것은 전쟁만은 피해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이 분단 상태를 통일을 해야겠는데 무력을 쓰면 통일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번 더 붙어서 피를 흘리고 나면 감정이 격화되어 몇십 년 간 통일이 또 늦어진다. 그러니 통일은 좀 늦어지더라도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고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참아온 겁니다. 우리의 이런 방침에 추호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그들이 무력으로 접어들 때는 결판을 내야 합니다. 기독교의 성경책이나 불경책에서는 살생을 싫어하지만 어떤 불법적이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침범할 때는 그것을 쳐부수는 것을 정의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누가 내 볼을 때리면 이쪽 따귀를 내주고는 때려라고 하면서 적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만 선량한 양떼를 잡아먹으러 들어가는 이리떼는 이것을 뚜드려 잡아죽이는 것이 기독교정신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우리 동족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무력으로 쳐 올라갈 리야 없지만 그들이 또다시 6.25와 같은 반역적 침략을 해올 때에 대비하고 있다가 그때는 결판을 내야 합니다.
  
   통일은 언젠가는 아마도 남북한이 실력을 가지고 결판이 날 겁니다. 대외적으로 내어놓고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미, 소, 중, 일 4대 강국이 어떻고 하는데 밤낮 그런 소리 해보았자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객관적 여건이 조성되었을 때 남북한이 실력으로 결판을 낼 겁니다. 그러니 조금 빤해졌다 해서, 소강 상태라 해서 안심을 한다든지 만심을 한다든지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박정희가 말한 '남북한이 실력으로 결판을 낼 어떤 객관적 여건'이 지금 조성되어 있다. 문제는 이 호기를 잡아챌 만한 주체성과 의지력과 지도력을 가진 대통령이 없다는 점이다. 주변 4대국 가운데 어느 나라도 남한 주도에 의한 통일을 지원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통일한국이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중국 편으로 기울까 걱정하고 있다. 차라리 기울어 가는 북한을 연착륙이란 이름 아래서 지원하여 분단의 항구화를 도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정책을 펴고 있다. 이런 상황인데도 우리 정부의 목표가 북한체제의 흡수통일인지 평화 공존의 항구화인지 알 수가 없다. 북한 당국은 민족의 원수, 반(反)국가단체, 그리고 우리의 적이며 북한동포는 김정일(金正日) 집단에 의하여 인질로 잡혀 있는 구조의 대상이다. 이런 구분 없이 북한 당국과 북한 주민을 다같이 북한이라고 표기하니 화해의 대상에 민족의 원수가 포함되어 있다.
  
   일류국가에의 염원
  
   박정희의 근대화 혁명이 당시 지식인의 패션이었던 민주주의에의 맹목적 추종을 거부한 주체성에서 비롯되었듯이 한반도 통일도 요사이 주변 강국과 국내 지식인들의 패션이 되고 있는 위선적 평화통일론을 우리가 거부하고 피아 구분, 목표, 전략이 분명한 승공통일, 즉 북한을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의 체제로 흡수하는 통일로 나갈 때만 선진 통일조국을 건설하는 마지막 관문 통과라는 역사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가 이 책에서 약속했고 그가 실천했던 '민족중흥―조국 근대화'의 대업은 통일이란 결론이 어떻게 나느냐에 따라서 그 평가가 달라질 것이다. 34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을 읽을 때 우리에게 던지는 박정희의 물음은 '당신들은 어떤 통일을 하려고 하는가'이다.
  
   삼국통일과정에서 신라도 지금 한국과 비슷한 기로에 섰던 적이 있다. 당(唐)은 신라와 손잡고서 백제을 멸망시킨 다음에는 내친김에 신라까지 쳐서 식민지로 삼으려고 했다. 이때 대책회의가 열렸다. 김춘추(金春秋), 즉 태종무열왕은 '아무리 그렇지만 우리를 도와서 백제를 멸해준 당(唐)을 상대로 어찌 싸울 수가 있겠는가'하고 약한 태도를 보인다. 이때 병권(兵權)을 쥐고 있던 김유신이 나서서 이런 취지의 말을 한다.
  
   '개는 주인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주인이 개의 다리를 밟으면 개는 주인을 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찌 당하고만 있겠습니까.'
  
   김춘추와 김유신의 생각에는 큰 차이가 있다. 김춘추는 당을 우호적 강대국으로 생각하고 평화적 현상유지를 주장하고 있다. 요사이 미국을 보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가진 시각은 이 수준일 것이다. 그러나 김유신은 당이 비록 우방이라고해도 조국의 자존심과 생존권을 위협한다면 사생결단의 자세로써 대결하여 자주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박정희가 가졌던 미국에 대한 태도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그는 미국에 대한 감사를 항상 간직하고 있었지만 한국에 대한 미국의 내정간섭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 정책적 표현이 중화학공업과 자주국방 건설이었다.
  
   삼국통일과정에서는 결국 김유신의 대당(對唐) 결전의지가 채택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삼국통일이라 하면 김춘추보다는 김유신을 먼저 연상하는 것도 김유신의 대당(對唐) 결전 전략에 의해서 한민족의 삶터가 확보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남북한통일과정에서는 과연 박정희식 대미(對美) 자주노선이 계승될 것인가. 아니면 김춘추식 평화론이 선택될 것인가. 김유신과 박정희 노선에는 희생이 따른다. 전쟁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희생정신, 그런 희생을 요구할 수 있는 지도층의 솔선수범이 있어야 한다. 그런 희생과 고통과 결단과 단련을 통해서 일류국민이 되고 일류국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김유신―박정희 노선은 바로 일류국가가 되는 전략인 것이다. 『삼국사기』의 열전(列傳) 김유신과 박정희의 이 저서를 같이 읽어보기를 권한다. 두 사람이 꿈꾸었던 통일조국은 이륙국가로 자족하는 수준의 나라가 아니었음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해방 뒤에 이승만(李承晩)이란 위대한 자주적 지도자의 영도 아래서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선택했다. 박정희는 이승만이 잡아놓은 터와 쳐놓은 울타리 안에서 건실한 보금자리를 건설했다. 이제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납치되어간 형제를 다시 찾아와서 온전한 가정을 마련하는 단계에 올라섰다. 그래야만 이웃에서 우러러보는 가정, 즉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국가가 될 것이다. 이승만―박정희를 이어서 누가 우리 나라를 이끌고 일류국가로 가는 이 마지막 관문을 통과할 것인가. 그가 어떤 지도자여야 할 것인가. 이런 화두(話頭)를 가지고 고민해야 하는 한국인에게 이 책은 많은 감흥과 감명을 줄 것이다. 이 책은 또 선진 통일조국을 건설하겠다는 웅지를 품은 정치인들에겐 있어서도 필독서가 될 만하다.
  
   봉건적 잔재와 싸우다가 전사
  
   정치인이 자신의 포부를 미리 밝히고 이를 충실히 실천해간 예로서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있다. 히틀러는 아리안족의 우월성과 순수성에 대한 집착을 바탕으로 하여 민족의 생활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을 줄기차게 추구하다가 세계를 2차세계대전의 참화로 몰고 갔다. 박정희도 집권 3년째인 1963년에 『國家와 革命과 나』에서 피력한 조국 근대화란 목표와 자조-자립-자주-통일의 단계적 방법론을 박정희는 죽을 때까지 견지하였다. 전술, 정책적인 수정은 있었지만 본질적이고 전략적인 수정은 없었다는 사실을 34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은 언어감각의 천재이고 화가는 색감(色感)의 천재이듯 영웅은 행동의 천재이다. 복잡하거나 절망적인 상황의 본질을 간단하게 파악한 다음 단순화된 목표와 전략에 일생을 투척하는 도박을 감행하는 사람들이 영웅이다. 영웅의 생애가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런 행동의 집중적 투자를 위해서는 생략하고 무시해야 할 인정, 사정, 과정, 때로는 인명의 희생 때문이다. 이런 영웅의 생애가 고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범인(凡人)은 살았을 때의 그를 알아주지 못하고 그가 죽고 나서는 그가 성취한 것들만 공짜로 즐기려 하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죽음은 그가 혁명의 대상으로 삼았던 봉건적 잔재, 즉 사대주의, 위선적 명분론, 당파성과 그가 도전의 대상으로 삼았던 미국식 민주주의가 연대하여 그를 삼킨 결과라는 해석이 있다. 국내 민주화세력에 내재(內在)된 사대성과 명분성을 중시하는 시각이다. 1979년 10월 그는 미국의 인권 압력과 국내 민주화세력의 도전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다. 김영삼(金泳三) 신민당 총재가 『뉴욕 타임즈』와 한 기자회견이 미국의 내정간섭을 요청한 것이라 하여 화를 낸 박정희는 김 총재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하게 되었고 이는 부마(釜馬)사태의 한 요인이 되었다. 이런 정치적 불안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권부(權府) 깊숙한 곳에서 갈등이 빚어지고 드디어 김재규(金載圭)는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게 된다. 이 김재규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한 여러 요인 가운데는 차지철(車智澈)에 대한 증오심과 차 실장을 편드는 박정희에 대한 원한 이외에 민주화세력으로부터의 영향과 미국의 어떤 작용을 상정할 수 있다.
  
   김재규는 10월 26일 밤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라고 중얼거리면서 궁정동 식당으로 들어가 총을 쏘았고 법정에서는 박정희가 사력(死力)을 다해서 추진한 자주국방정책을, 한미(韓美) 안보협력체제를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김영삼을 조선조의 양반정치 전통을 이어받은 사대적 정치인으로 보았고 김영삼은 박정희를 인권탄압을 자행하는 독재자로 보았다. 미국과 국내의 지식인, 학생세력은 김영삼 편을 들었다. 박정희의 지지 기반은 '침묵하는 서민대중'이었다. 이들 속에서 박정희는 항상 영웅이었다.
  
   요즈음 들어서 박정희에 대한 인기가 갑자기 높아진 것같이 말하지만 서민 대중 속에서 그의 인기는 변함이 없었는데 최근 들어서 정치인(그것도 민주계 정치인)과 지식인들 사이에서조차 평가가 높아진 것이 새로울 뿐이다. 박정희에 대한 재평가를 앞당긴 것은 '민주화의 기수' 김영삼의 실정(失政)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상징하는 민주화세력의 나상(裸像)을 알게 됨으로써 박정희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의 죽음을 예약한, 봉건적 잔재와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당돌한 도전의 가치를 범인(凡人)들도 이제는 이해하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그런 점에서 『國家와 革命과 나』의 재출간은 시공(時空)을 뛰어넘어서 고독했던 이 혁명가의 육성과 숨결을 직접 느끼며 역사와 대화하게 해준다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