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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첫 해전 승리 해군 최초 전투함 '백두산함'

淸山에 2013. 6. 26. 00:35

 

 

 

 

 

 

6·25 첫 해전 승리 해군 최초 전투함 '백두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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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제독부터 수병까지 성금 모아 美서 구입
 첫 승전보 올린 대한해협 해전 등 각종 전과 올려

 

 

 

【서울=뉴시스】오종택 기자 = 1945년 11월 11일 창설한 해방병단은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해군으로 편입됐다.

 

창설 당시 해군은 변변한 군함 한 척 없이 일본군이 쓰다 버린 함정을 개조한 함정밖에는 보유하지 못했다.

이에 해군은 1949년 6월1일 '함정건조기금갹출위원회'를 구성하고 초대 참모총장인 손원일 제독이 위원장을 맡아 모금을 시작했다.

장교는 10%, 병조장은 7%, 하사관과 병은 5%를 매월 모금했다. 가족들 또한 운동에 동참해 삯바느질 등을 통해 비용을 보탰다.

 

이렇게 4개월 동안 모은 1만5000달러와 이승만 대통령이 정부지원금 4만5000달러를 더해 백두산함, 금강산함, 삼각산함, 지리산함 4척을 구입했다.

 

첫 함정인 백두산함은 1949년 10월17일 구입, 1949년 12월26일 백두산함이라 이름 붙여졌다. 백두산함은 하와이 군항에서 76㎜ 함포를 설치했고, 괌에서 포탄 100발을 구입하고 1950년 4월10일에 진해항에 도착했다.

 

백두산함 도입 이전까지 우리 해군은 JMS급과 YMS급 소해정 만을 보유했을 뿐 전투함은 없었다. 백두산함은 길이 52.9m, 만재수량 450t에 최고 속력은 18노트였다.

 

지금의 고속정 크기에 불과하지만 전쟁 기간 각종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대한해협 해전을 비롯, 서해안 봉쇄작전, 군산지구 방어전, 덕적도·영흥도 탈환 작전, 인천상륙작전 등에 참가했다.


 


특히 백두산함이 대한해협 해전에서 거둔 승리는 우리 해군 창설이래 첫 승전보이자 인천상륙작전의 교두보가 된 의미 있는 싸움이었다.

백두산함은 6·25전쟁 발발 당일인 1950년 6월25일 북한 무장 수송선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날 오후 8시12분께 부산 북동쪽 54㎞ 해상에서 북한군 특수부대 600여명을 태우고 항해하던 1000t급 북한 무장 수송선을 교전 끝에 격침한 것이다.

 

이 무장 수송선을 격침하지 못했다면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부산 등 우리 후방기지를 교란, 상당한 타격을 입혔을 것으로 전사가들은 보고 있다.

당시 이 승리로 인해 적의 후방 침공을 차단하고, 대한민국을 돕는 UN군과 무기, 탄약, 장비 등 병참물자가 들어올 수 있었다. 실제로 전쟁 중 부산항을 이용해 수송된 연합군은 연 590만명에 달했다. 군수물자는 5500만t, 유류 2200만t 등이다.

 

미 해군대학 토마스 커틀러(Tomas J. Cutler) 교수는 미국 해군 연구소가 발간한 한국 전쟁과 미국 해군이라는 책을 통해 "얼마간의 포격전 끝에 백두산함은 적함을 침몰시켰으며 적 수송병력과 승조원을 모두 수장시켰다. 이후 부산은 한반도에서 연합군의 최후 보루가 됐으며 증원 병력과 물자의 주요 도입 항이 됐다. 백두산함의 승리는 그것들을 가능하게 한 것으로서 그만큼 중요했었다."고 대한해협 해전을 평가했다.

백두산함은 6·25전쟁 이후에도 각종 경비임무에 투입됐다가 1959년 7월1일 퇴역했다.

 

해군은 백두산함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를 고려해 마스트(돛대)와 3인치 함포를 해군사관학교에 보존했다.

백두산함 마스트는 대한민국 해군의 창군 정신과 해양수호정신 계승의 의미가 큰 유물로 인정받아 2010년 6월25일 문화관광부 등록문화제 제463호로 지정됐다.

 

ohjt@newsis.com

 

 

 

 

 

 

 

 

6·25 날 부산 바다 침투한 적 600명 우리가 무찔렀지
[중앙일보]

 

 

50년 대한해협해전 회고록 낸 백두산함 포술사 85세 최영섭
'부산 함락 막자' 죽기로 각오 … 근접 전투 끝에 전우 둘 잃어
대한민국 만세’못 다하고 눈감은 모습 잊을 수 없어
누가 어떻게 나라 지켰는지 후대에 남기는 건 내 책무
 

 


독일 잠수함 부대의 모자를 쓴 노병 최영섭. “천안함이 북한의 잠수함에 당했다. 잠수함 전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노병 최영섭(85)에게 6·25전쟁의 기억은 바로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다.

 

 월급에서 5~10%를 갹출해서 대한민국 첫 군함 ‘백두산함’를 장만했던 일, 미 해군이 쓰다 넘겨 준 ‘백두산함’ 표면의 녹을 벗겨내고 흥에 겨워 페인트칠을 한 일, 1950년 6월 25일 저녁 부산 앞바다에서 검은 연기를 발견하고 추적했던 일까지. 최근 출간한 『6·25 바다의 전우들』에는 포술사로 참전했던 당시 ‘최영섭 소위’가 겪은 일들이 손에 잡힐 듯 그려져 있다.

 

 

 “선체를 까맣게 칠하고 국기도 달지 않은 선박이었지. 가까이 가서 보니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가득하더군. 우리 배 함장은 장교 전원을 사관실에 집합시키곤 ‘전투에 돌입한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 꼭 이기고 다시 만나자’며 컵에 냉수를 따랐어. 다 함께 건배하며 ‘싸우자’ ‘싸우자’ 외쳤어.”

 

 전투는 치열했다. 갖고 있는 포탄은 100발뿐. 당초 임무는 동해안 옥계해안으로 상륙하는 적군을 격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눈 앞의 적함을 놔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근거리 속전속결을 결정했다. 적함에 가까이 다가가 함교를 명중시켰다. 동시에 적의 포탄이 조타실을 뚫고 들어와 우리군 2명이 복부에 파편을 맞고 쓰러졌다.

 

 “두 사람을 사병식당내 응급실로 옮겼어. 전투를 마치고 가니 ‘적함은 어떻게 됐습니까’라고 묻는거야. ‘격침했다, 살아야 돼’라고 크게 외쳤지. 순간 두 병사의 눈빛이 환해지더니 고개를 떨궜어. ‘대한민국 만세’란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말이야.”

 

 후에 대한해협해전으로 명명된 이날 전투의 승리로 부산은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맥아더 사령부 정보요원 노만 존슨이 쓴 『한국작전』에선 ‘6월 25일 새벽 북한군 특수요원 600여 명이 해로를 통해 부산을 점령하려고 투입됐다. 천행으로 부산 인근 해상에서 이 위장선이 한국해군에 의해 격침됐다. 이 사건이 한국전쟁의 분수령이 됐다’고 했다. 미 해군대학 교수 토머스 커틀러는 『한국전쟁과 미국 해군』에서 ‘이 전투는 유엔군이 한국에서 생존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썼다.

 

 그로부터 60여 년. 노병에게 6·25는 진행형이다. 그의 서재는 충무공 이순신과 6·25전쟁 및 북한 관련 책들로 가득찼다. 68년 충무함 함장으로 예편한 그는 20년 전부터 한국해양소년단연맹 고문으로 전국 초·중·고교에서 안보 강의를 하고 있다.

 

  28년 강원도 평강에서 태어난 그는 광복 후 고향에서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쳤다. “그때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과 인민군 만행에 진저리가 났지. 남쪽으로 내려와 해사 3기로 입대했어. 겨우 되찾은 내 나라, 내 손으로 지키고 싶었어.”

 

 2009년 노병은 대한해협 전투에서 사망한 두 병사 가운데 유족을 찾지 못했던 한 사람, 전병익 하사관의 가족을 오랜 수소문 끝에 찾아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을 전하고, 정옥근 당시 해군참모총장과 함께 가서 유족들에게 훈장을 전했다.

 

 “군인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건 싸우다 죽어도, 다쳐도 나라와 군과 국민이 나와 내 가족을 잊지 않고 돌봐줄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지. 2002년 제2 연평해전에서 전사한 6명의 영결식에 대통령도 국방부 장관도 참석하지 않았잖아. 어떻게 군인들에게 목숨 걸고 나라 지키라고 말할 수 있겠나.”

 

 그는 최근 정치권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논란에 대해 “60여 년 우리 해군이 목숨바쳐 지켜온 해상분계선을 내줄 수는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책을 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목숨을 던져 나라를 지킨 전우들의 흔적을 후대에 남겨 놓는 게 늙은 내가 사라지기 전 해야 할 마지막 책무라고 생각했어. 지구상에서 사라질 뻔했던 대한민국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지켜졌는지를 말이야. 노병은 죽지 않는다잖아. 사라질 뿐이지.”

 

글=박혜민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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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의 함선인 백두산함..PC-701

 

이함은 수상 전투함도 아닌 이전 미해군의 USS PC-823 구잠함으로

취역은 1944년 7월24일이며, 2차 세계 대전 당시 대서양에서 인명구조작전에 주로 투입된 선박입니다..

배수량 280톤..

 

 

<대한민국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

사진 - ⓒ 보훈처

http://mpva.tistory.com/1994

 

 

사진 - ⓒ 중앙일보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15&total_id=3202798

 

ROKS Baekdusan (PC-701) was pending in the harbor

 

 

 

 

 

사진 - ⓒ http://www.krs.co.kr/kor/html/webzine/sub/SubRead_V5.asp?chasu=44&idx=23&gubun=4

“마도로스가 쓴 77가지 배 이야기”의 저자 나송진님

 

 

 

▲6·25전쟁 당시 '부산 대첩'(대한해협 해전)에 사용됐던 백두산함 모습. /조선일보 DB

대한해협 전투에서 전사한 전병익 일등병조.

사진 - ⓒ 월간조선

 

 2009년 11월 11일 전광월씨는 59년 전 戰死한 오빠 전병익 일등병조를 대신해 무공훈장을 받았다.

 

PC701 백두산함이 진주만에서 3인치포를 설치하는 장면.

 

 

오진우가 이끄는 인민군 766 특수부대는 1000t급 무장수송선과 4척의 어뢰정 엄호 아래 발동선 30여 척으로 구성된

상륙선단을 이끌고 1950년 6월25일 새벽 3시30분에 이미 강원도 옥계 방면으로 상륙을 개시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해군 AMS-509(가평정)號가 1차 저지..

부산으로 남하하는 적상륙선을 백두산함이 해군함포도 아닌 육군 3인치포로 격침하였다..

 

출처 - 월간조선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308100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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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


누군가는 이들을 해적이라 부른다.

 


출처  http://bns.gamechosun.co.kr/board/view.php?bid=free&num=367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