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위부터 아래로)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1950년 9월17일 파괴된 북한군 T-34 전차를 둘러보고 있다. 1951년 4월 29일 서울 방어 전투 중 중앙청 인근에 배치된 국군의 곡사포들. 1951년 2월 1일 수원 인근에서 중공군 포로들이 걷고 있다.
(위부터 아래로)파괴된 북한군 전차 보는 맥아더 -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1950년 9월17일 파괴된 북한군 T-34 전차를 둘러보고 있다. 국방부는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6.25전쟁 미공개 사진 20여장을 24일 공개했다. 서울 중앙청 인근에 배치된 곡사포 - 1951년 4월 29일 서울 방어 전투 중 중앙청 인근에 배치된 국군의 곡사포들. 포로로 잡은 중공군들 - 1951년 2월 1일 수원 인근에서 중공군 포로들이 걷고 있다. 1·4 후퇴 이후 중공군 공세 때 잡힌 포로들이다. /국방부 제공
일부 학자들은 대한민국에서도 북진통일(北進統一) 논의가 있었다며 북한의 남침 사실을 희석시키려 한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은 전쟁을 일으킬 능력이 없었기에 북진통일 논의는 그야말로 정치적인 선전 구호에 불과했다.
전쟁 발발 후 대한민국은 백척간두 위기에 놓였으나 미국을 위시한 UN군의 즉각적인 참전으로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린 국군과 UN군은 필사적으로 이 저지선을 방어해냈다. 그러는 와중에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UN군 사령관이 지휘하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는 역전됐다. 국군과 UN군은 당시 압록강까지 진격했고, 통일이 눈앞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중공이 대규모 참전을 결정하면서 6·25는 다른 성격의 전쟁으로 변질했다. 중공군이 합동명령권을 장악하고 북한군을 지휘하면서 전쟁은 UN군과 중공군의 대결장이 된 것이다.
중공군의 거센 공세에 밀려 서울이 다시 점령되는 등 위기를 맞았으나, 양측이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1951년 가을쯤 전선(戰線)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이 온 것이다. 1952년 초부터는 중공과 북한 정권도 지쳐 휴전을 원하기 시작했다. 1952년 8월 20일 김일성은 중공의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를 통해 스탈린에게 빨리 휴전을 승인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이 한반도에 묶여 있는 상태에서 정치·경제·군사적으로 고생하게 하는 것이 소련에 유리하다고 보고 휴전에 완강하게 반대했다.
결국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에야 6·25전쟁의 휴전 협상이 가능해졌다. 결국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져 현재의 휴전선이 군사분계선이 됐다.
전쟁은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막대한 인명 피해를 냈다. 국군을 포함한 유엔군 전사자는 18만명이었고, 북한군 52만명, 중공군 90만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또한 대한민국 국민 중에는 구체적인 추산이 불가능한(1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 민간인 사상자가 나왔다.
올해는 정전(停戰)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6·25전쟁을 끝낸 정전 체제가 60년 지속한 것이다. 세계적인 냉전 체제가 막을 내렸지만, 한반도에는 아직도 냉전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시대착오적이고 폭압적인 북한 정권도 남아있다. 대한민국은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에 평화 체제를 구축하면서 현재의 정전 체제를 넘어서야 하는 거대한 과업을 눈앞에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