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2월 2일, 난징에서 열린 국민당 4차 중앙집행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위유런(앞줄 왼쪽 여섯째)은 장징장(앞줄 의자에 앉은 사람), 차이위안페이(앞줄 오른쪽 셋째), 탄옌카이(앞줄 오른쪽 다섯째) 등과 함께 장제스(앞줄 오른쪽 넷째)를 당과 군의 최고 지도자로 추대했다. 뒷줄 오른쪽 둘째는 장제스의 처남 쑹자오런. 중간에 보이는 유일한 여성은 랴오중카이의 부인 허샹닝. [사진 김명호] |
1911년 12월 25일, 16년간 망명생황을 하던 쑨원이 귀국했다. 기자들의 단독 대담 요구가 줄을 이었다. 쑨원은 ‘민립보(民立報)’ 기자의 요청만 수락했다. “쑨원은 총통으로 자처해서는 안 된다. 겸양의 미덕을 보여야 한다. 공화국의 첫 번째 총통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원들이 선거법을 통과시킨 후 합법적으로 선출돼야 한다”는 사론을 봤다며 사장 위유런(于右任·우우임)의 안부를 물었다.
엿새 후, 쑨원은 민립보를 직접 찾아갔다. “위유런에게 차 한잔 얻어 마시러 왔다”며 ‘육력동심(戮力同心: 힘을 합하고 마음을 함께하겠다)’을 휘호로 남겼다.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임시 대총통에 선출된 쑨원은 “임시”라며 위유런과 민립보 동인들을 요직에 기용했다.
쑨원이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와의 합작을 선언하자 위유런은 위안스카이는 공화주의자가 아니라며 거부했다. 교통부장 자리를 걷어치우고 신문사로 돌아왔다. 베이징에 있던 혁명당 군사총책 황싱(黃興·황흥)이 상하이까지 내려와 “민립보는 파괴와 건설을 동시에 해냈다. 파괴는 격렬했고 건설은 온건했다. 혁명가들이 본받아야 한다”며 50만원을 쾌척했다. 위유런은 “뜻은 고맙지만 출처가 불분명한 돈”이라며 거절했다.
1913년 3월, 총리 취임을 눈앞에 둔 국민당 이사장 쑹자오런(宋敎人·송교인)이 상하이 역두에서 암살당했다. 위유런은 현장 목격자 중 한 사람이었다. 위안스카이의 공화제 파괴 기도를 파악한 위유런은 쑨원과 다시 합쳤다. 군대를 일으켜 쑨원의 2차 혁명에 힘을 보탰다.
1928년 2월 2일, 중국 최대의 혁명정당이었던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4차 회의가 난징에서 열렸다. 위유런은 장제스, 탄옌카이(譚延闓·담연개)와 함께 주석단에 앉아 회의를 주재했다. 6일간 계속된 회의는 중앙당 개조안을 의결했다. “국민정부를 개조하고 군사위원회를 설립한다. 혁명세력이 연합해 북벌을 완수한다.” 중국의 운명을 가르고도 남을 회의였다. 북방을 지배하던 봉천군벌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의 북양정부가 정통성을 인정받을 때였다.
군사위원에 선출된 위유런은 당 원로 장징장(張靜江·장정강), 차이위안페이(蔡元培·채원배) 등과 연합을 서둘렀다. 북벌군 사령관 장제스를 군사위원회와 중앙정치위원회 주석에 추대했다. 펑위샹(馮玉祥·풍옥상), 옌시산(閻錫山·염석산), 리쭝런(李宗仁·이종인)과 연합한 장제스는 4개월 만에 수도 베이징을 압박했다. 근거지 동북으로 돌아가던 장쭤린은 중도에 폭사했다.
위안스카이 사후 중국에 군림했던 북양군벌 통치가 끝나는 듯했지만,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친일세력을 제거하고 동북을 장악해 버렸다. 동북3성은 28세에 불과한 장쉐량의 천하로 변했다.
위유런은 장씨 집안과 인연이 깊었다. 3년 전, 장쭤린과 담판을 하겠다며 동북행을 자청한 적이 있었다. 회담은 실패로 끝났지만 수확도 있었다며 즐거워했다. “장쭤린은 마적 출신이다. 옛날 같으면 난세에 황제가 되고도 남을 사람이지만, 주책없을 정도로 완고한 게 흠이다. 아들 장쉐량은 물건이다. 변화에 민감하고 대국을 보는 눈이 있다. 엄청난 일을 해 낼 테니 두고 봐라.”
동북3성 보안사령관에 취임한 장쉐량은 난징 국민정부에 복종을 선포하며 통일정부 수립을 촉구했다. 위유런은 자신의 예측이 정확했다며 흐뭇해했다. 21살 연하인 장쉐량을 윗사람으로 깍듯이 모셨다.
1936년 12월, 장쉐량이 시안에서 장제스를 감금했다. 공산당 섬멸에 혈안이 돼 있던 장제스에게 국·공합작을 요구했다. 엄청난 사건이었다. 위유런은 “천고의 영웅(千古英雄)”이라며 장쉐량을 지지했다.
장쉐량의 요청을 수락하고 감금에서 풀려난 장제스가 장쉐량을 연금했다. 분노한 위유런은 장쉐량의 석방을 물고 늘어졌다.
1949년 1월, 인민해방군이 베이핑에 입성하자 장제스는 하야했다. 성명을 발표하고 내려오는 장제스를 위유런이 가로막았다. “장쉐량에게 자유를 줘라. 국가 지도자는 빈말을 해서는 안 된다. 감찰원장 자격으로 요구한다.” 장제스는 위유런을 뿌리쳤다. “난 이미 하야했다. 리쭝런에게 자리를 내줬다. 내가 간여할 바 아니다.”
위유런은 총통대리 리쭝런의 집무실 문턱을 하루가 멀게 넘나들었다. 결국 장쉐량 석방 지시서에 서명을 받아냈다.
장쉐량을 관리하던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은 리쭝런의 지시를 거부했다. “군사위원회는 당에 예속된 기관이다. 정부기관이 아니다. 총통의 명령을 따를 수 없다.” 총통 자리를 내놨지만 국민당 주석은 여전히 장제스였다.
위유런은 고향에 칩거 중인 장제스를 찾아갔다. 위유런이 왔다는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이놈의 영감 또 시작했다”며 넌덜머리를 냈다. 아들 장징궈에게 뒷일을 맡기고 산속으로 피해버렸다. 무릎 꿇고 고개 숙인 장징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위유런은 한숨을 내쉬며 난징으로 돌아왔다. “자식들이 아비보다 나으니 천만다행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