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이승만의 삶과 국가’ 펴낸 오인환 전 장관
이승만 꿈은
민주국가 건설… 친일청산보다 반공이 더 절실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평전 ‘이승만의 삶과 국가’를 펴낸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은 “사실에 입각해
이승만의 역사적 실체를 복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와 함께 좌우이념을 넘어선 역사의 성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이승만 전 대통령이 올 들어 논쟁의 중심에
섰다. 지난해 말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이 공개되면서다. 이 전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상임고문 등 유족이 ‘백년전쟁’ 제작자들을 고소했고,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은 반박 동영상을 만들었다.
‘백년전쟁’ 논란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가운데 17일 김영삼 정부 시절 공보처 장관(1993년 2월∼1998년 3월)을 지낸 오인환 전 장관(74)을 만났다. 그는 올
3월 ‘이승만의 삶과 국가’(나남)를 펴냈다. 이 전 대통령의 삶을 조명한 평전이다. 좌우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려는 균형감각을 갖고,
전직 언론인답게 ‘팩트(fact)’에 충실하게 저술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는 데에만 6년여, 본격 집필하는 데 꼬박 1년
3개월이 걸렸다는, 600쪽이 넘는 이 책에 대해 그는 “이승만을 잘 모르는 젊은 세대를 위한 책”이라고 했다. 이념 이전에 팩트를 봐 달라는,
젊은 세대를 향한 곡진한 주문으로 들렸다.
“역사는 단순한 답을 낼 수 없다”
―전반적으로는 이
전 대통령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념을 빼고 그의 삶을 쓰다 보니, 그가 보수 우파니까 보수 우파
논리에 방점이 찍히는 결론이 났다. 내가 보수 우파 입장에 서기로 작정하고 쓴 것은 아니다. 책에서 (이승만이) 잘못한 부분도 에누리 없이
지적했다. 나는 전체적으로는 그가 역사 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한다. 이데올로기라는 편견 없이 쓰려고 하다 보니 우파든 좌파든
모두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일반 시민의 눈높이에 맞췄다. 이 전 대통령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는 얘기를 주변에서 듣고 있다. 젊은
세대의 관심이 없다는 게 아쉽다.”
―‘백년전쟁’ 논란으로 젊은 세대도 이 전 대통령에게 주목하는 듯하다.
“나도
그것을 봤다. 이승만이 친일파이고 46세 때 여대생 노디 김과 미국 여행을 하면서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암시가 나오는데 내 입장은 ‘근본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박사가 하와이를 기반으로 독립외교활동을 하는 중에 프란체스카 여사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하와이 분위기가 어땠는 줄
아나. 부인회 부녀자들이 통곡을 했다. 독립운동 하던 그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쌀을 걷고 떡을 빚어 판 돈을 워싱턴에 보냈는데 외국 여자와
결혼한다니 민족적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당시 하와이 여성 교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그가 여성 한 사람과 부적절한 관계를
갖게 되면 모든 여성이 등을 돌릴 만한 상황이었다. ‘백년전쟁’은 명백한 왜곡이다. 역사는 배경까지 들여다봐야 한다. 실체는 거기에
있다.”
―이승만이 친일파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우파의 주장이 맞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은 반일주의자였다.
그런데 외교활동 노선과 궤를 같이하는 반일이었다. 당시 김구 선생이 피가 튀는 강렬한 항일투사였던 데 반해 이승만의 항일은 외교 투쟁을 통해서
극일(克日)을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우리 힘만으로 일본을 물리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미국 같은 강대국의 힘을 빌려 독립해야 한다는 외교
노선이었다. 김일성이나 김구 같은 격렬한 항일운동가가 아니어서 (반일) 강도의 열렬함에 대한 온도 차는 있을지라도 친일파는
아니었다.”
―책을 보면 이승만의 친일파 청산 실패에 대해서도 비판보다는 이해를 하려는 입장인 것 같다.
“이승만이
친일파 처벌의 불가피성이나 상징적인 중요성을 몰랐을 리 없다. 그랬던 그가 광복 초기 귀국했을 때부터 친일파를 조기에 처벌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던 것은 현실적 우선순위 때문이었다. 북에서는 소련 군정이 펼쳐지고 남쪽에선 박헌영의 인공 세력이 판을 치는 상황에서 그가 우선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이었다. 과거의 친일보다 현재의 반공이 더 절실하고 중요하다고 보았다는 얘기다. 이승만은 국민들의 증오
대상이었던 친일 경찰을 처단하지 않고, 반공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이들을 동원했다. 왜냐? 친일 경찰들이 수사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들을 모두 치게 되면 반공을 할 수가 없고 내전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승만이 그걸 몰랐겠나. 친일 경찰도 처단하고 건국사업도
진척시키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군대는 또 어떤가. 우수한 일본 육사 출신들이 광복 이후 군대를 장악했는데 그들이
6·25전쟁 때 나라를 지키지 않았는가. 역사는 이처럼 단순한 답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백년전쟁’에서 이승만을
‘하와이 갱스터’로 지칭한 데 대해서도 “접근이 복잡하다”고 짚었다.
“이 전 대통령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할 당시 동지였던
박용만과 맞서면서 마키아벨리즘적 음모자 측면을 보이지만, 이는 크게 보면 ‘하와이 교포를 누가 장악하느냐 하는 주도권 싸움’이었다. 당시
자금줄이라고는 하와이 교포뿐이던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이어나가려면 이들의 지지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박용만의 무장투쟁론이 현실적으로
성취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백년전쟁’ 논쟁이 지엽적인 부분으로 흐른다는 지적도 있다.
“그렇다. 지엽적이지
않은 얘기를 하나 할까. ‘백년전쟁’과 관계없는 얘기 말이다. 현재 좌·우파의 역사관을 보라. 좌파 역사관은 김구의 상하이임시정부, 혹은
극단적으로 김일성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해석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파는 임시정부도 인정하면서 이승만의 외교 독립운동도 평가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세력은 누구일까. 내가 보기엔 ‘없다’. 결정적인 역할을 한 주류 세력이 없다는 얘기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상하이임시정부의 광복군이 연합군 일원으로 참전한 것도 아니고,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 독립운동도 실익으로 나타난 게 없다. 그럼 누가 주류인가.
내가 보기엔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독립운동의 주류세력에 대해 철저하게 역사적인 성찰을 한 것 같지 않다.”
대한민국
역사의 주인은 국민
―그것은 독립운동사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 아닌가.
“그렇지 않다. 나는 독립운동을 역할
분담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주체는 광의로 볼 때 국민이다. 한민족이 광의의 독립운동을 한 주체라는 얘기다. 만주와 중국에선
무장투쟁 세력, 미주에서는 외교 독립운동 세력, 국내에서는 실력양성 주창 세력이 있었다. 누가 혼자 연출한 게 아니라 세 지역에서 역할 분담을
해서 전개되다가 광복 이후 한데 결집됐다. 이 과정에서 3자가 통합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임정 세력이 분리되고, 외교 독립을 주창하던
이승만과 실력양성론을 쌓았던 국내파가 손잡고 건국해서 오늘날 산업화 민주화를 이룩한 것이다. 산업화 민주화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처럼
단순하지 않다. 특정세력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왜 ‘이승만’ 책을 썼나.
“한국적 리더십에 대한 고민 때문이다.
그동안 ‘조선 왕조에서 배우는 위기관리의 리더십’ ‘고종 시대의 리더십’을 썼는데 이번에 이승만을 쓰고 앞으로 박정희 김영삼까지 쓰려고 했다.
그런데 한 권 쓰는 데 5년 이상 걸리더라. 박정희는 못하고 김영삼 시대를 쓰고 손을 놓을 생각이다.”
―한국적 리더십이
무엇인가.
“오늘날 한반도의 지정학적 여건은 100년 전에도 다르지 않았다. 100년 후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통일이 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미국 중국 등 강대국 사이에서 한국의 지도자가 되려면 역사 공부가 먼저 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열강들
사이에서 역사를 이어온 데 대한 감각이 있어야 한다. 또 양분화한 지역감정에 대한 통합능력도 있어야 하고, 경제성장을 시켜야 하니 경제도 잘
알아야 하고…. 한민족의 리더가 되려면 짐이 무겁다.”
―이승만 리더십은 어떻게 보는지….
“그가 없었어도 건국이 됐을
거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파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가 없었다면 6·25전쟁 같은 격변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어떤
사람들은 또 이승만이 남북분단의 원인 제공자라고, 그가 없었다면 통일이 벌써 이뤄졌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가 없었다면 공산주의 주도의
통일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승만은 국내외 정세 흐름을 포착해 절묘한 승부수를 던진 탁월한 정치 감각의 소유자였다. 국민 여론만 생각하고
친일파를 한꺼번에 처벌했다면 체제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다. 또 선배도 없이 독학으로 정치를 터득했다. 그러나 임기 후반 도그마에 빠져서 독재를
한 것은 견딜 수 없는 잘못이고 현대사의 큰 상처임에 분명하다. 역사의 광채를 죽인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광채가 죽었다고 역사가 죽는 것은
아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현재 대한민국을 만든 공로는 국민에게 있다”며 “지도자 한 사람만이 역사를 만들고 끌어가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우리 민족은 말과 글을 지키면서 고유의 문화와 전통, 풍습을 끝까지 고수했다. 독립운동 저변에는 그런
민족의식과 역량이 있었다. 대통령은 이승만을 뽑았지만 국회의원은 야당을 세웠던 게 우리 민족이다. 누가 가르친 게 아니었다. 앞으로의 세대에게는
그런 민족의 역량과 잠재력을 일깨우면서 균형 있는 역사 감각을 갖게 해야 한다. ‘백년전쟁’ 논쟁을 앞으로 또 백년 가져갈 수는
없다.”
‘이승만의 삶과 국가’ 서문 中
“어느 나라 사회이건 간에 국민은 자신의 사관(史觀)을
가질 자유가 있다. 그러나 좌·우파 양편이 자신의 지지 사관이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사료(史料)와 선행 역사연구를 자의적으로 취사선택하고 상반된
역사를 서술하면서 사회를 양분하는 결과를 빚는 경우는 한국밖에 없을 듯하다.”
인터뷰=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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