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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을 內敵 소탕 작전으로 본 박정희

淸山에 2013. 5. 16. 06:57

 

 

 

 

 

5.16을 內敵 소탕 작전으로 본 박정희
박정희는 5.16을 변명한 적이 없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일부 학자들은 朴正熙가 경제개발에 注力(주력)한 것은 5.16 군사쿠데타가 憲政(헌정)질서를 짓밟았다는 죄책감이 있어 그걸 만회하려고 그렇게 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5.16군사혁명이 4.19 학생혁명 정신을 배신하였다고 생각한다. 박정희의 생각을 들여다 본다.
      
       朴正熙는 1963년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4.19와 5.16혁명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4.19혁명은 "피곤한 5천년의 역사, 절름발이의 왜곡된 민주주의, 텅 빈 폐허의 바탕 위에 서서 이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명제를 던졌고 이 명제에 해답하기 위한 '역사에의 민족적 총궐기'가 5.16이란 것이다. 4.19와 5.16을 동일선상에 놓는다는 것은 자유당과 민주당을 똑같은 봉건적, 수구적 세력, 즉 근대화 혁명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4.19학생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혁명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
      
       일부 지식인들이 자유당을 독재, 민주당을 민주세력으로 보고 있었던 데 대하여 朴正熙는 그런 형식논리를 거부하고 그들의 본질인 봉건성을 잡아채어 둘 다 역사 발전의 반동세력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 어디에도 합헌(合憲)정권을 무너뜨린 데 대한 죄의식과 변명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당시에 朴正熙가 이런 혁명적 시각을 자신의 신념으로 내면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원(不遠)한 장래에 亡國의 非運을 맛보아야 할 긴박한 사태를 보고도 인내와 방관을 미덕으로 허울 좋은 국토방위란 임무만을 고수하여야 한단 말인가. 정의로운 애국군대는 인내나 방관이란 허명(虛名)을 내세워 부패한 정권과 공모하고 있을 수는 도저히 없었다. 말하자면 5.16혁명은 이 공모를 거부하고, 박차고 내적(內敵)의 소탕을 위하여 출동한 작전상 이동에 불과하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장관 지명자들이 국회 인사청문회장에 나가면 야당 의원들은 "5.16을 어떻게 보나", "5.16은 쿠데타인가, 혁명인가"라고 묻는다. 정답은 "법률적으론 쿠데타이고, 역사적으론 혁명이며, 나의 가치 판단은 긍정적이다(또는 부정적이다)"일 것이다.
       5.16 당시 한국 지식인들의 여론을 선도하던 월간지 '思想界(사상계)'의 1961년 6월호 권두언은 발행인 張俊河(장준하)가 쓴 글이다. 그는 5.16의 성격을 박정희와 거의 같은 맥락에서 定義하였다.
      
       <4.19 혁명(革命)이 입헌정치(立憲政治)와 자유(自由)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혁명(民主主義革命)이었다면, 5.16 혁명(革命)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無秩序)와 공산주의(共産主義)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군사혁명(軍事革命)이다.>
      
       張 사장은 4.19와 5.16을 대치시키지 않고 통합하려는 論旨(논지)를 유지한다.
       <혁명공약(革命公約)이 암암리에 천명하고 있듯이, 무능(無能)하고 고식적(姑息的)인 집권당(執權黨)과 정부(政府)가 수행하지 못한 4.19 혁명(革命)의 과업을 새로운 혁명세력(革命勢力)이 수행한다는 점(點)에서 우리는 5.16 혁명(革命)의 적극적 의의(意義)를 구(求)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는 5.16 혁명(革命)은 4.19 혁명(革命)의 부정(否定)이 아니라 그의 계승(繼承), 연장(延長)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장준하는 나중에 박정희를 비판하는 입장으로 바뀌지만, 5.16 군사혁명 당시엔 불가피성과 당위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였다. 역사적 사건이 된 5.16은 세계사적 視野(시야)에서 다루는 게 맞다.
      
      
      *서진규 씨가 1961년에 하버드 대학 석사논문으로 쓴 5.16에 대한 한국인의 평가엔 이런 자료가 나온다. 40세 이상의 어른들 467명을 상대로 「1961년에 5.16이 났을 때 지지했습니까, 반대했습니까」하고 물었다. 응답자의 46%가 「지지했다」고 응답했고 19%는 「반대했다」고 했으며 나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찬반 의견을 표시한 사람들 중 약 70%가 「혁명을 지지했다」는 뜻이다. 서진규 씨는 연령층을 확대하여 808명을 상대로 「5.16 혁명의 한국 발전에 대한 영향」에 대해서 물었다고 한다. 응답자의 62%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 5.16혁명은 필요했다」고 답했고 17%는 「방해가 되었다」고 했으며 21%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고 답했다. 「박정희의 독재적 통치가 한국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가」란 질문에 대해서는 69%가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답했고 11%는 「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했으며 20%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했다.
      
       *1961년 5월16일 미군 방첩대는 거리로 나온 한국인을 대상으로 면접 여론조사를 하였다. 10명에 네 명은 '혁명 찬성', 두 명은 '찬성이지만 너무 일렀다', 네 명은 '반대'였다고 한다. 약60%가 찬성하였다는 이 통계는 서진규의 上記 조사와도 일치한다.
      
      박정희는 군사혁명으로 장면 정부를 뒤엎은 데 대하여 한번도 변명한 적이 없다. 죽을 때까지 커다란 자부심을 가졌다. 죄책감이나 콤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하여 경제개발에 주력하였다는 識者(식자)들의 분석은 말장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