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첸 저항의 역사
체첸족은 러시아에서 8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다. 체첸족은 총 90만명 중에서 약 70만명이 체첸과 잉구시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 밖에 카작, 터키 등에 거주한다. 언어는 투르크어계인 체첸-잉구시어를 사용한다. 체첸과 잉구시 두 민족은 모두 카프카즈에 속한 나흐족의 일파이다. 이들은 7세기경부터 이 지역에 살기 시작했는데, 19세기 중엽에 러시아에 강제 편입되었다. 이때부터 체첸인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말살한 러시아에 대해 깊은 원한을 가지게 되었다. 러시아의 지배 18세기 말 팽창정책을 폈던 러시아가 카프카즈 정복에 나섰을 때
이들 산악민족들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가장 격렬하게 저항했었다.
이 전쟁은 거의 반세기 가까이 계속되었는데 1859년에 이르러서야 결말을 맺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러시아가 승리하긴 했으나 당시 유럽 최강을 자랑했던 러시아 육군은
수차례에 걸쳐 패퇴를 거듭하였고, 막대한 희생과 전쟁비용을 소모했다.
러시아는 이 경험을 토대로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 전쟁 당시 나흐족의 동부와 서부는 전혀 다른 대응을 하였는데, 동부는 격렬하게 저항한 반면, 서부는 몸을 사리며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 후 러시아는 이 두 집단을 각각 다르게 인식하고 지역을 분리하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동부는 체첸, 서부는 잉구시로 불리게 되었다. 소련의 탄압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기에도 체첸 민족과 러시아간에는 치열한 갈등이 있었다.
러시아의 지배에 저항한 체첸인들은 자신들의 저항을 성전으로 규정하고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10월 혁명과 적백 내전기에는 인접한 다게스탄 지역과 연합하여
'다게스탄 체첸 회교국'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921년 소련군이 이들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소련에 편입되었다. 혁명 후 레닌은 성명성을 통해 모든 이슬람교도들의 권리를 보장하였고 1936년에 체첸과 잉구쉬가 합쳐져 체첸-잉구쉬 자치공화국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스탈린에 의해 카프카즈에 대규모 숙청바람이 불어닥쳤다. 약 1년동안 카프카즈 전역에서 10만명 가량이 처형되거나 강제 추방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체첸인들은 스탈린 체제에 대항하기로 했다. 마침내 1940년, 체첸인과 잉구쉬인들은 하산 이스라일로프의 지휘로
스탈린 정부에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1942년 말에 다시 진압되고 말았다.
이후 체첸인에 대한 러시아의 박해는 제2차대전 말기 또 다시 전개되었다.
당시 스탈린은 이 지역을 일시 점령했던 독일군에게 체첸인들이 협력했다는 의심을 품고 1944년에 체첸-잉구쉬에 거주하는 50만명의 주민들을 모두 강제 이주시켰다. 이들은 주로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보내졌다. 당시 강제이주 대열에서 도망친 사람들은 카프카즈 산악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으로 소련군을 괴롭혔고, 강제 이주와 투쟁 과정에서 약 23만명이 사망했다.
거의 전 인구의 절반이 스탈린의 강압 정책으로 사라진 것이다. 이때 체첸-잉구쉬를 대표하는 수피 타리카스라는 정치조직이 결성되었는데, 이들은 체첸과 잉구시의 연대, 소련에 대한 저항, 고향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며, 소련에 대한 정치적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마침내 1957년, 이들의 노력과 후르시초프의 개혁에 힘입어
체첸인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졌으며 고향으로의 귀환이 허용되었다. 이로써 13년 만에 체첸-잉구쉬가 자치 공화국으로 다시 부활한 것이다. 독립 체첸 독립의 영웅인 조하르 두다예프는 소련 공군의 장성 출신이었다. 그는 소련으로부터 발트 3국의 독립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동했지만, 그곳 시민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에 깊은 감명을 받고 폭격 명령을 거부하였다. 덕분에 발트 3국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 이후 두다예프는 고향의 독립을 위해 군복을 벗고 체첸으로 돌아왔다. 체첸에 돌아온 그는 1991년 10월, 모든 행정부를 장악하고 체첸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소련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으며, 두다예프는 체첸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잉구쉬 역시 1992년 10월 독립을 선포하였다. 정치 체첸은 최근에 국명과 수도명을 모두 바꾸었다.
국명은 '이츠케리야 체첸'공화국으로, 수도인 그로즈니는 '조하르'로 각각 개명했다.
이번 개명은 체첸의 독립의지를 보다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츠케리야'는 체첸 강경파들이 독립국 체첸을 강조할 때, 스스로를 일컫는 말이다.
원래는 이 명칭은 체첸 남부 산악지대를 가리키는 지명인데,
이 지역이 18세기부터 대러시아 무장항쟁의 거점이 되면서 체첸독립의 상징어가 되었다.
체첸 게릴라들은 스스로를 '이츠케리야 전사'라고 칭해 왔었다.
수도 '조하르'는 체첸 독립투쟁의 상징인 고(故) 조하르 두다예프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는 체첸 독립 이후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저항군을 지휘하다가 96년 4월에 전사했다. 그는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궁을 사수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경제
이들은 전통적으로 대부분 유목민족이었다. 비록 유전과 천연가스의 발견으로 자원 발전과 섬유화학 공업을 이끌었으나, 대부분이 여전히 목축과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문화
숱한 고난을 감내했던 이들은 '피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전사'들이었다. 이들은 조국방위라는 결연한 자세로 남자는 만 7세가 되면 무기 사용법을 배우고,
가족이나 친척이 피살될 경우엔 남은 사람들이 반드시 피의 보복을 하는 것을 계율로 삼고 있다. 지금도 체첸인 대부분은 단검과 단총, 자동소총을 소지하고 있다.
이들은 러시아의 숱한 동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언어를 끝까지 지켜왔으며, 역사속 깊이 뿌리 박힌 산악민족 특유의 저항 정신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의 저항 의식은 너무도 대단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립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그래서 스탈린의 대숙청과 민족 재배치 정책에 있어서도 그 첫 번째 대상이 바로 체첸인들이었다.
최근 발생하였던 체첸인들의 인질극 사건과 러시아의 유혈 진압으로 체첸이 많이 알려졌지만, 석유를 포기할 수 없는 러시아의 집요함 때문에 그들의 독립은 요원할 것으로 보인다. 종교 이슬람 수니파로 알려진 이들은 애니미즘과 혼합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러시아 영내의 이슬람교도 중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전통적으로 무슬림 형제 결속을 강조하는 이슬람 수피집단의 관습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소련의 강한 반이슬람 정책에도 불구하고 체첸인들은 이슬람을 더 강하게 신봉하게 되었다
1차전
체첸 사태의 시발점은 1991년 8월, 체첸의 지도자 두다예프가 친러시아적인 잉구쉬와 결별하고
러시아 당국의 회유와 군사적 위협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포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결국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은 11월, 체첸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병력을 파견하였다. 12월에는 러시아 공군기들이 수도 그로즈니를 공습하기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군의 체첸지역 무력진공이 개시되어 양측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협상이 결렬되자, 러시아군의 공습과 지상군의 공격은 점차 강화되었다.
마침내 1995년 1월 1일 러시아 정부는 수도 그로즈니를 제압했다고 발표했다.
서방 세계는 러시아에 군사행동의 즉각 중지를 요구했으나 옐친은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그로즈니의 대통령궁이 러시아군에 넘어가자 체첸군은 정규전에서 게릴라전으로 전환했다. 그러자 사태를 낙관한 옐친은 군사작전을 종결하고 경찰작전으로 이를 대체했다. 이후 체첸의 집요한 반격에 당황한 러시아는 그로즈니에서 철수하게 된다.
분열
그로즈니를 회복한 체첸은 다시 독립국의 지위를 얻었다. 하지만 체첸의 경제권을 쥐고 있었던 러시아인들이 모두 추방되어 버리자 체첸의 경제는 자급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체첸인들은 전투에는 능했지만 평화에는 적응하지 못했다. 생활이 막막해지자, 체첸의 무장조직은 각자의 이해에 따라 분열됐다. 그로즈니 전투에서 사망한 두다예프의 공백으로 이들의 분열은 아무도 막지 못했다. 이후 체첸 대통령의 국가 장악력은 군벌들에 의해 힘을 쓰지 못했고 자국민들끼리 납치, 암살, 테러가 빈번해지며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2차전 이 와중에 체첸의 일부 군벌들이 다케스탄의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다케스탄은 남북으로 나뉘어 독립의 찬반을 놓고 내분에 휩싸였으며 이를 기회로 삼은 푸틴 총리는 강력한 기화탄을 사용하여 반군들을 쓸어 버렸다. 체첸군이 다케스탄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고향에 돌아오자,
러시아의 체첸 공격이 본격화 되었고, 이들의 군사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결국 체첸군은 정규전을 포기하고 러시아 영내에서 인질극을 벌였다. 푸틴은 이를 역이용하여 체첸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결국 체첸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남부 산악지대로 피신하였고, 차츰 포위망을 좁혀오는 러시아군에 대항하여 최후의 항전을 펼치고 있다. 이로써 체첸의 독립은 완전히 멀어졌으며, 체첸은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다. 원인 체첸 사태의 성격에 대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로 접근할 수 있다. 1. 이 사태는 내부의 권력다툼에서 비롯되었다.
1990년 10월에 결성된 두다예프의 권위적인 지배와 이에 반발하는 친러시아 성향인 아프트라노프 간의 권력투쟁이 체첸사태를 야기했다고 볼 수 있다.
2. 이 사태는 이슬람교도들의 항전 즉 종교전쟁의 성격을 띠고 전개되었다.
체첸 지역은 주변 이슬람권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의 체첸 공격은 전적으로 이슬람권에 대한 탄압으로 해석되었고 체첸인들의 강력한 저항은 여타 이슬람권 민족들의 투쟁과 유사한 양상을 띠었다.
또한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에서 수많은 의용군들이 이 전쟁에 참여했다. 3. 이 사태는 피할 수 없는 민족분쟁이다.
구소련은 126개의 크고 작은 다민족들로 구성된 국가이고 이중 100개 이상의 민족들이
지금의 러시아 연방 내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스탈린의 민족동화와 강제 이주정책 등으로
대부분의 공화국들은 기간민족의 비율이 채 5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유독 체첸공화국만은 체첸인이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관계로 민족적 단합이 잘 되었고 이로 인해 사태가 더욱 심각해지게 된 것이다. 특히, 내전중에 체첸에 거주했던 러시아인들이 모두 떠나버려 체첸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더욱 높아졌다. 다민족 국가인 러시아는 대부분 강압적 복속에 의해 다민족 국가를 형성하였다.
지난 18세기 말엽부터 무려 반세기에 걸친 정복사는 그 당시뿐 아니라 그 후에도
지속적인 반격을 받았고 최근에 이르러서도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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