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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 도독 추대된 형에게 “조용히 장사나 하시라”

淸山에 2012. 7. 15. 14:42

 

 

 

 


쑨원 부인, 남편 시키는 대로 이혼서류에 손도장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78>

| 제279호 |

 

남편들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쑹(宋)씨 세 자매의 운명도 엇갈렸다. 항일전쟁 발발 뒤 1942년 1월 전시수도 충칭(重慶)에서 함께한 쑹씨 세 자매. 왼쪽부터 메이링, 아이링, 칭링. [사진 김명호] 


1915년 6월, 쑨원(孫文·손문)은 도쿄의 공원 구석에서 쑹칭링(宋慶齡·송경령)에게 청혼했다. 쑹칭링 22세, 쑨원 49세 때였다. 쑹칭링은 부모의 동의를 구하겠다며 상하이로 떠났다. 쑨원이 “그럴 필요 없다. 결혼은 당사자들이 결정할 일이다. 구습을 타파하는 것이 혁명”이라고 역설해도 듣지 않았다.

 

불쑥 나타난 딸이 쑨원과 결혼하겠다고 하자 쑹자수(宋嘉樹·송가수) 부부는 진노했다. 남편 쑹자수를 한참 노려보던 니꾸이전(倪桂珍·예계진)은 쑹칭링를 붙잡고 통곡했다. “너 미쳤구나. 돌아도 단단히 돌았구나. 쑨원인지 뭔지 하는 인간이 몇 살인지 알기나 하고 하는 소리냐. 네 나이보다 곱절도 더 많은 사람이다. 게다가 결혼까지 하고 첩도 있는 놈이다. 절대로 안 된다.” 쑹자수에게도 갖은 원망을 퍼부어댔다. “도둑놈에게 홀려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갖다 바치더니 꼴 좋다. 저 애가 다 썩어빠진 과일 맛에 취했다. 어쩔거냐.” 쑹자수는 쑹칭링을 골방에 가둬 버렸다.

 

상황을 파악한 쑨원은 쑹자수의 의중이 궁금했다. 자신의 일을 남의 일처럼 빗대서 말하기 좋아하는, 마치 옆집에서 벌어진 일을 전하는 척하며 상대의 속을 떠보는, 중국인 특유의 수법을 동원했다. 쑹자수에게 편지를 보냈다. “칭링이 가정 있는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더구나 그 사람은 대반역자(大叛逆者)다. 결혼까지 하려고 한다니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아라비안 나이트에나 나올 만한 얘기다.”

 

쑹자수도 절묘한 답장을 보냈다. “금시초문이다. 하늘은 물론이고, 애들이 들어도 웃을 일이다. 칭링이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나는 선생을 존경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선생과 선생이 하고자 하는 일을 존중한다. 대반역자는 우리 모두의 영원한 적이다. 칭링도 그런 사람을 증오한다. 뜬소문에 불과하다. 만에 하나 가정이 있는 남자와 결혼하겠다면 나는 허락하지 않겠다. 이 점은 선생도 나와 같으리라 믿는다. 명성(名聲)은 명예(名譽)나 체면(面子)보다 중요하다.”

 

쑨원이 부인과 이혼하고, 쑹칭링을 취(娶)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반대가 잇달았다. 쑨원은 무장 거사를 결심했을 때보다 더 단호했다. “그와 결혼만 할 수 있다면 다음 날 새벽에 죽어도 후회하지 않겠다. 나는 너희들과 천하대사를 의논했지 사사로운 가정문제는 의논하고 싶지 않다”며 일갈했다.

 

쑨원은 마카오에 있는 부인 루무전(盧慕貞·노모정)을 일본으로 불렀다. 문맹에 전족을 한 루무전은 쑨원의 말을 한 번도 거역한 적이 없었다. 이날도 남편이 시키는 대로 했다. 이혼 서류에 엄지손가락을 꾹 찍고 뒤뚱거리며 마카오로 돌아갔다. 쑨원은 이 고마운 조강지처를 죽는 날까지 보살폈다.

 

같은 해 10월 초, 쑹칭링은 하녀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10월 24일 오후, 쑨원은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자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회의 중이던 혁명동지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혀를 찼다. 낄낄대는 사람도 있었다.

 

후일 쑹칭링은 이날의 일을 상세히 회고한 적이 있다. “쑨원이 혼자 역에 나와 있었다. 나를 서구식 주택으로 데리고 갔다. 작고 예쁜 집이었다. 일본인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도착했다고 일렀다. 다음날 아침 입회인이 될 변호사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난징의 쑨원기념관(孫中山紀念館)에 일본어로 작성된 두 사람의 결혼 서약서가 남아 있다. “빠른 시일 내에 중국 법률에 부합되는 정식 혼인수속을 밟는다. 앞으로 영원히 부부관계를 유지한다. 서로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한다. 서약에 위배하는 행위를 했을 경우 법률과 사회적 제재를 받아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각자의 명예를 위해 상대방을 헐뜯거나 원망해서는 안 된다.”

 

1914년 6월 일본 요코하마(橫濱)에 머무르던 쑹자수(뒷줄 왼쪽 둘째) 일가. 앞줄 왼쪽부터 3남 즈안(子安), 차녀 칭링, 부인 니꾸이전(倪桂珍), 장녀 아이링. 뒷줄 왼쪽 첫째는 차남 즈량(子良), 오른쪽 첫째가 아이링의 남편 쿵샹시. 장남 즈원(子文)과 막내딸 메이링은 미국 유학 중이었다. [상하이 孫中山故居 소장]

 

 

 

쑨원, 도독 추대된 형에게 “조용히 장사나 하시라”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76>

| 제277호 |

 

1922년 6월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의 대원수부(大元帥府)에서 경호원들과 함께한 쑨원과 쑹칭링(宋慶齡·송경령) 부부. [사진 김명호] 


1940년 3월 중국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 제143차 회의는 쑨원(孫文·손문)에게 국부(國父) 칭호를 부여하기로 의결했다.
중국 공산당도 쑨원에 대한 예의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관방 명의로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중국의 국부로 규정한 적은 없지만 모든 공식 문서에 ‘민주혁명의 선구자(先行者)’라는 말을 쑨원의 이름 앞에 꼭 붙인다.

 

쑨원이 국·공 양당에서 추앙받는 이유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친인척 관리도 그중 하나다. 쑨원은 형과 누나가 한 명씩 있었다. 형 쑨메이(孫眉·손미)는 열일곱 살 때 하와이에 건너가 개간과 목축업으로 부를 축적한 거부였다. 화교 사이에 영향력도 굉장했다. 중국인들이 마오이다오(茂宜島)라고 부르는 하와이 제2의 섬 마우이에서 왕(王)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쑨메이는 동생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1894년 쑨원이 호놀룰루에서 흥중회(興中會)를 창립했을 때 제일 먼저 입회원서를 제출했고, 거사 자금을 조달하느라 수십 년간 경영하던 사업이 거덜나도 원망하는 법이 없었다.

 

신해혁명 후 민국정부가 수립되고 쑨원이 임시대총통에 선출되자 광둥(廣東)의 명망가들이 쑨메이를 성(省) 도독(都督)에 추대했다. 쑨원은 혼비백산했다. 당일로 광둥의 사회단체와 언론기관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는 전문을 보냈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형님은 질박하고 정직한 사람이다. 정치가 뭔지 모르고 소질도 없다. 도독은 막중한 자리다. 재능이 부족하고 남이 뭐라면 무조건 고개만 끄덕이는 사람이 갈 자리가 아니다.”

 

홍콩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쑨메이에게도 전보를 보냈다. “광둥 사람들이 형을 도독으로 추대하려 한다. 형이 정치 무대에 나서면 만인의 주목을 받게 된다. 우쭐대다 실수하기 십상이다.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패가망신하지 않으려면 조용히 장사나 하며 먹고살 길을 찾도록 해라.” 쑨메이는 동생의 권고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1915년 마카오에서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칩거하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쑨원의 형으로서 손색없었다.

 

쑨원은 누나 쑨먀오촨(孫妙茜.손묘천)과 우애가 돈독했다. 망명 시절 주변 사람들에게 지난날을 회상할 때마다 누나 얘기를 빠트리는 법이 없었다. “나보다 세 살 많은 누님이 고향에 한 분 있다.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누나 따라 산에 가서 나무하고 풀 벨 때가 그립다. 나를 끔찍이도 아끼며 보살펴줬다. 감사한 마음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먀오촨에게 싱충(杏冲.행충)이라는 외아들이 있었다. 쑨원이 임시대총통에 선출되자 “빨리 찾아가서 멋진 일자리 구해보라”고 권하는 사람이 많았다. 싱충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외삼촌이 있는 난징(南京)은 여기서 너무 멀다. 내가 가면 농사지을 사람이 없다. 다시는 그런 얘기 꺼내지 마라. 우리 엄마가 알면 큰일난다.”

 

1923년 쑨원이 광저우(廣州)에서 대원수(大元帥)에 취임했을 때 먀오촨이 고향 산나물 들고 찾아온 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남매는 이 얘기 저 얘기로 한밤을 꼬박 새웠다. 쑨원이 조카의 근황을 묻자 먀오촨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생활이 말이 아니다. 하는 일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니 보기에 안쓰럽다. 적당한 일자리가 있을지 네가 한번 알아봐라.”

 

생전 부탁 한번 해본 적 없는 누나의 완곡한 청을 쑨원은 “농사일도 제대로 못하는 놈이 뭐 하난들 제대로 하겠느냐”며 거절했다.

쑨원은 법적으로 문제 될 게 없는 일이라도 형제나 조카들을 위해 천박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자신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대신 혁명 과정에서 희생된 열사들의 가족이나 후손에 관한 일이라면 뭐든지 해주려고 안절부절못했다. 붓글씨를 팔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 일쑤였다. 담보가 없어 쩔쩔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912년 2월 15일 난징에서 쑨원이 임시정부 관원들과 함께 한족(漢族)의 마지막 왕조였던 명(明)나라 개국황제 주원장(朱元璋)의 능을 참배하고 있다. 신해혁명은 만주족 왕조였던 청나라를 무너뜨린 민족혁명이었다. 1911년 12월 귀국 후 쑨원은 임시 대총통에 선출됐지만 북방의 위안스카이가 황제를 퇴위시키고 공화제를 선포하자 총통직을 내놓고 임시정부를 해산했다. [사진 김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