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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LA 한인 415명 그들은

淸山에 2012. 7. 14. 05:32

 

 

 

 

 

1940년 LA 한인 415명 그들은

 

 


LA 석유왕 집사 홍씨 … 백인과 결혼한 여기자 류씨 … 36세 남성 미용사 전씨 … 할리우드 연예인 김씨 3형제
미주 항일 언론인 홍언 선생도 나와
당시 월급 50달러 국민회 서기 활동
평균 소득 1204달러 미국인의 절반

 

 

미국 정착의 최우선 과제는 예나 지금이나 영어였다. 1930년대 한인 여성들이 LA의 국제영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다. 엄마가 영어를 배우는 동안 아이들은 교실 한쪽에서 뛰어놀았다. [사진 LA시립중앙도서관]

 

1940년 LA에 살던 한인들은 비록 415명에 불과했지만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번 조사에서 독립운동가부터 할리우드 한인 연예인까지 이제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다양한 한인들의 생활상이 드러났다. 센서스 설문지 속에 숨어 있던 72년 전 한인들의 모습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최소 생활비만 받은 애국지사

 

72년 만에 공개된 LA센서스 원본.


 이번 센서스 조사의 값진 수확 중 하나가 미주지역 항일 언론인 홍언(1880~1951) 선생의 기록이다. 1904년 하와이 이민선을 탄 홍언 선생은 신한민보 주필과 발행인으로 활동하면서 반세기 넘도록 미주 곳곳에서 ‘글의 칼’로 조국의 독립에 앞장섰다. 하지만 애국지사의 삶은 넉넉하지 못했다. 1940년 58세였던 홍언 선생의 센서스상 직업은 현재 한인회의 전신 격인 대한인국민회의 서기(Korean Association Secretary)였다. 그의 연봉은 고작 600달러로 그해 전국 평균 1725달러의 30%에 불과하다. 월급으로는 50달러다. 최소한의 생활비에 만족했던 애국지사의 초연한 삶과 넉넉하지 못했던 당시 대한인국민회의 자금 사정을 엿볼 수 있다.

 그는 1949년 6월 김구의 암살 소식에 충격을 받고 뇌일혈로 쓰러져 투병하다 1951년 3월 25일 숨을 거뒀다. 1995년 한국 정부는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LA 로즈데일 묘지에 안장됐던 선생의 유해는 1997년 8월 한국 국립묘지로 봉환됐다. 지난해 7월 국가보훈처는 홍언 선생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백만장자의 살림꾼은 한인

 

1940년대 LA 다운타운1가와 플라워 교차로에 있던 MJB 식료품 잡화점 앞에서 한인 업주가 기념촬영을 했다. 뒤편 위 창문에 식료품 잡화, 고기를 판다는 배너가 걸려 있다.


 당시 LA 최고 석유왕의 집안 살림은 한인이 도맡아 했다. 백만장자 알폰소 벨(Alphonzo Bell) 일가 저택의 집사(Butler) 해리 홍(당시 38세)씨다. 당시 베벌리힐스 등에서 석유를 시추했던 벨씨는 LA 서쪽에 600에이커 대지를 사들여 자신의 대저택을 짓고 주변을 부자들을 위한 최고급 주택단지로 개발했다. 이 지역은 벨씨의 이름을 따 벨에어(Bell Air)로 불렸다. 현재도 이곳은 유명 연예인을 비롯한 LA 상위 1% 부자들이 거주하는 대표적인 부촌이다.

 

 한국 출생으로 최종 학력이 고교 졸업인 홍씨는 하인 5명을 지휘해 저택을 관리하고 주인 식구를 돌보는 역할을 맡았다. 연봉 900달러를 받았다.

 홍씨가 돌봤던 벨씨의 자녀들도 역사적인 인물들이다. 벨씨의 장남인 알폰소 주니어는 이후 8선 연방 하원의원으로 정계의 거물로 성장했고, 딸 미네와씨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며느리가 됐다.

속기사로 출발 문장력 인정받아

 


 1940년 당시 언론계는 남녀차별이 지금보다도 훨씬 심할 때였다. 그런데 당시 주류 사회에 이미 한인 여기자가 활동하고 있었다. 현재도 캘리포니아 남부 전역에 뉴스를 공급하는 최대 통신사 중 하나인 시티뉴스서비스(City News Service)에 근무했던 베티 류(Betty Lyou Voight)씨다. 당시 22세였던 류씨는 로드니 보이트라는 한 살 위 백인 남성과 결혼해 LA다운타운의 주택에서 살았다. 주택이 있던 곳은 현재 LA타임스 주차장 건물 자리다.

 

 최종 학력이 고졸이었지만 그녀의 문장력은 인정받았던 듯싶다. 당초 법원 속기사로 일했던 류씨는 전업해 시티뉴스서비스에 입사했다. 시티뉴스서비스 경영실에서 근무하던 남편 보이트씨와 사내 커플이 됐다. 류씨는 당시 15명의 기자 중 한 명으로 당당히 취재현장을 누볐다. 당시 동료였던 일본계 메리 기타노씨는 2003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발랄하고 실력 있는 여성”이라고 류씨를 기억했다.

 

한국보다 20년 앞선 남자 미용사

 당시 36세였던 전(Chun, S. H)씨는 시대를 앞선 선구자였다. 그는 센서스 설문에서 직업을 ‘헤어 드레서(hair dresser)’라고 답했다. 우리말로는 미용사다. 그는 ‘미용실 업주(beauty parlor owner)’라고 덧붙였다. 이발사(barber)가 아니란 얘기다. 아내 도로시(당시 33세)씨는 보조(Assistant)로 남편을 도왔다.

 남자 미용사조차 전무하던 시절 전씨는 아내를 보조로 둔 미용실 남자 원장이었다. 당시 LA한인들에게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을 터다. 그의 직업은 한국 미용 역사를 바꿀 만한 일대 사건이기도 하다. 한국의 1호 남자 미용사로 알려진 유지승 원장이나 박준 원장은 1960년대에 미용계에 발을 들였다. 한국에서 1호 남자 미용사가 탄생하기 20여 년 전 이미 LA에는 한인 남성이 미용실 원장으로 터를 잡고 있었다.

 

미주 한인 이민사 다시 쓴 리씨

 

1930년대 LA북쪽 그리피스 파크를 찾은 한인 꼬마들. 오른쪽이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막내아들 랄프 안씨다.


 쌍둥이 딸을 비롯해 5남매를 둔 리(Rhee, Byung)씨는 미주한인 이민사를 다시 쓰게 만드는 인물이다. 그는 1940년 환갑을 맞았다. 그런데 출생지는 하와이(Hawaii)다. 1880년에 하와이에서 태어난 한인 2세라는 의미다. 그의 부모가 최소 1880년 이전에 하와이에 정착했음을 뜻한다.

 통상 미주 한인 이민 역사의 출발점은 1902년 12월 22일이다. 당시 갤릭호를 타고 제물포항을 출발한 102명을 최초의 한인 이민자로 규정한다.

 리씨의 기록은 이민사의 출발점을 최소 22년이나 앞당기고 있다. 아내와 사별한 리씨는 환갑의 나이에도 장남과 함께 마켓 점원으로 일해 생계를 꾸렸다.

무명 배우 연봉은 1560달러

 제퍼슨과 카탈리나 인근에 살던 예순 다섯의 김(Kim, S. K.)씨는 아내 새라(54)씨와 3형제를 키우면서 속깨나 썩었을 법하다. 3형제 모두 직업이 ‘아티스트’다. 큰아들 마크(25)씨는 영화 배우(Screen Actor), 둘째 이노(23)씨는 광고(Commercial) 배우, 막내 얼(20)씨는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활약했다. 김씨 삼형제 모두 스타의 꿈은 이루지 못했던 듯싶다. 셋 가운데 가장 수입이 좋았던 장남의 연봉이 1560달러에 그쳤다.

최고 다산 가정 7남매

 LA시 남부 USC대학 근처에 살던 청과물 노점상 주인 연(Lyon, Don)씨는 다복한 가정을 꾸렸다. 한국 태생으로 예순넷이던 그는 아내 메리(62)씨 사이에서 3남4녀를 얻었다. 당시 장남 조셉씨가 22세, 막내 조지군이 11세였다. 마흔이 넘어 첫아들을 얻은 늦둥이 아빠였지만 이후 10년간 아내는 출산과 임신을 6차례 반복해 가족 수를 늘렸다. 장남은 주공무원으로 일했다.

 

하와이 사탕수수와 멕시코 애니깽

 

1940년대 야구 유니폼 차림의 30대 한인 폴 허씨(사진 왼쪽). LA 남쪽 베니스비치 해변가를 찾은 한인 여성들(가운데). 아이스크림 업소 앞에서 한인 여성들이 웃고 있다(오른쪽).

 

 류(Lyou, SunKoon)씨 집안은 하와이 이민자와 멕시코 이민여성의 재혼으로 탄생한 가정이다. LA에서 유일한 조합이다. 그는 아내 애윤(55)씨 사이에 5남매를 뒀다. 그런데 막내 필립(17)을 빼고는 모두 성이 김씨다. 아내 애윤씨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4남매다. 이들은 모두 멕시코에서 태어났다. 류씨는 1905년 하와이 이민자 출신이다.

 

광복 5년 전 LA 한인타운은 …

 1940년 4월 LA 한인타운은 ‘태풍의 눈’을 통과하고 있었다. 대공황의 긴 터널을 간신히 빠져나와 한숨을 돌렸지만 또다시 큰 혼란이 기다리고 있었던 때다. 태평양전쟁 발발 1년8개월 전이자, 대한민국 광복 5년 전이다. 고국의 독립을 되찾기 위한 격렬한 전쟁을 앞두고 잠시 동안의 고요를 되찾은 시절, 한인타운은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지표들이 ‘젊은 타운’을 뒷받침하고 있다. 415명 거주자의 평균 연령이 30세로 젊고, 미국 출생자가 246명으로 전체의 60%에 달했다. 이 중 9명을 제외한 237명이 20대 이하로 당시 이미 이민 정착기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했다.

 1940년 당시 미주 전체와 비교할 때도 미래는 밝았다. 가구별 인구수가 당시 3.67명이었던 데 비해 한인타운은 4.2명으로 더 많았다. 한인타운은 주류와 비교할 때도 ‘영(Young) 타운’이었던 셈이다.

 이에 반해 경제 지표는 이민생활의 고달팠던 삶이 반영됐다. 가구별 평균소득이 미주 전체는 2200달러인 데 비해 한인들은 1204달러에 그쳤다.

 당시 1달러의 구매력은 현재 20달러 선이다. 환산하면 가구별 평균소득은 2만4000달러 수준이다.

 소득이 낮으니 월세가 싼 지역에 거주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전체 평균 월세가 30달러였는데, LA한인들은 매달 23.76달러를 월세로 지출했다.

 주택을 소유한 세대 수는 주류사회와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LA 내 집을 소유한 한인은 고작 7명뿐이었다. 미주 전체는 43.6%였다. 당시 이민자들은 돈이 있어도 법적 규제가 심해 주택을 구입하기 어려웠다.

 

LA중앙일보 정구현 기자, 김병수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