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을 앞둔 그에게 농장 일은 힘에 부쳤을 터다. 당시 예순은 지금과 다르다. 광복 전 한국 남성의 평균 수명은 40대 중반이었다. 그가 사는 곳은 초라했다. 농장 근처 중국인 웡이 운영하던 하숙집이 그의 거처였다. 가족도 없었다.
그는 쇠약한 몸으로 왜, 어떻게 LA 감귤농장까지 오게 된 걸까. 그의 이민 경로를 추적했다.
미국국립문서보관기록청(NARA)의 데이터베이스와 사회보장국의 사망증명 기록, 하와이 이민선 승객 명단을 조회했다. 자료의 양은 방대했다. 1903년부터 1905년까지 하와이 이민 승선 명단은 7000여 명이었다. 사망증명서도 정확한 출생연도가 없어 앞뒤로 2년씩 오차를 넣었더니 3000건이 검색됐다. 건초더미에서 바늘 찾는 격이었지만 결국 그의 흔적을 찾아냈다.
하와이행 이민선 몽골리아호 승선 기록에 그가 있었다. 승선표도 발견했다. 1881년생인 그의 이름은 현추성(Hyun Choo Sung)이었다. 종로구 신문로에 살던 스물네 살의 그는 1905년 5월 3일 인천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고국을 등졌다. 3등 선실에 탔던 그는 무일푼이었다. 입국신고서의 ‘소지한 현금’ 난이 ‘0’으로 기록돼 있다.
나흘 뒤 일본 고베에 잠시 정박한 몽골리아호는 제물포를 출발한 지 2주 만인 5월 18일 마침내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고된 여정이었다. 인천의 한국이민사박물관에는 당시 현씨와 함께 몽골리아호 3등 선실에 탔던 함하나씨의 육성 증언이 남아 있다.
“기름 냄새가 진동하고 소나 말의 악취 때문에 밥 먹을 때 구역질이 났어요. 열흘간 아무것도 못 먹고 남편과 고통을 참느라 완전히 진이 빠졌지요.”
현씨가 하와이에서 본토 캘리포니아로 넘어온 것은 1920년대다. 1930년 실시된 캘리포니아 중부 프레즈노의 센서스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는 프레즈노 인근 한 목장에서 역시 농부로 일했다. 당시 이름은 ‘Hyun C. S.’로 기재됐다. 목장 근처 한인 이씨 집에서 하숙했다.
이 센서스에서 그가 가족 없이 혼자 살았던 이유를 찾았다. 혼인 여부 항목에 ‘사별(Widowed)’로 적혀 있다. 한국을 떠나 하와이에서 가정을 꾸렸지만 아내가 먼저 떠나면서 그는 40대에 홀로 되고 말았다.
그의 말년은 사회보장국의 사망증명서를 통해 찾았다. 1940년 노스리지의 땡볕을 견디며 농장에서 일하던 그는 다시 프레즈노로 돌아갔다. 그리고 7년 만인 1947년 5월 16일 사망했다. 66세였다.
그는 중간에 미국 땅을 떠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 농부로 전전긍긍하며 42년간의 타향살이를 하면서도 끝내 포기 못했던 것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고 말겠다는 고집이 아니었을까. 오늘날 한인 이민자들처럼 말이다.
1902년 황성신문에 실린 하와이 농부 모집 광고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품삯 한 달에 15달러. 하루 열 시간 일하고 일요일에는 쉴 수 있습니다. 숙식 제공합니다.’
LA중앙일보 정구현 기자, 김병수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