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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 전 한인 어떻게 찾았나

淸山에 2012. 7. 14. 05:47

 

 

 

72년 전 한인 어떻게 찾았나
[중앙일보]입력 2012.07.14 01:03 / 수정 2012.07.14 01:06
LA 센서스 원본 40만 장, 석 달 동안 하나하나 훑어


1940년 센서스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인터넷 무료 검색이 가능한 호구조사다.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개인 신상정보가 모두 적힌 설문지 원본을 볼 수 있다. 역사학자들이 ‘황금 광맥’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주소, 이름, 인종, 나이, 출생지, 혼인여부, 학력, 직업, 연봉, 주택 소유 여부, 주택 시세, 학력, 출생지, 5년 전 거주지 등 34개 문항이 적혀 있다.

 

 

 72년 전 LA 한인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1940년 센서스 홈페이지에는 키워드 검색 기능이 없다. 웹서핑을 즐기듯 ‘Korean’을 검색창에 넣어 한인들을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NARA 측은 설문지 원본을 사진처럼 스캔해서 홈페이지에 올려놓기만 했다. 한 장 한 장 직접 보면서 명단 중에서 한인들을 골라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LA시에서 취합한 전체 설문지는 40만 장에 달한다. 한 장당 40명씩 1지구부터 선거구 순으로 등재되어 있다.

 

 

 방대한 자료를 분석하기 위해 기자 2명이 꼬박 3개월간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매달렸다. 한인을 식별하는 작업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10번째 질문인 인종(Race)란에 한인(Korean)임을 뜻하는 약자 ‘Kor’로 적힌 사람을 골라내면 됐다.

 

 

 하지만 한인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 LA 인구의 95%가 백인이던 시절이다. 인종란에 백인을 뜻하는 약자 ‘W’의 지루한 행렬을 견뎌야 했다. 2주간 한인을 단 한 명도 찾지 못하기도 했다.

 

 

 어렵게 찾아낸 한인이 포함된 설문지들은 컴퓨터에 저장했다. 찾아내고 저장하는 반복작업을 통해 한인 추출작업을 끝낸 뒤 자료들을 데이터베이스화했다. 3개월 만에 모습을 드러낸 72년 전의 LA 거주 한인 수는 모두 415명이다.

LA중앙일보 정구현 기자, 김병수 인턴기자

 

 


 

 

 

 

 

 

 

 

 

여기는 1940년 미국 LA … 이들이 한인 이민 개척자
[중앙일보]

 

미 연방 센서스 72년 만에 비밀 해제 … 40만 장 뒤져 찾아낸 415명

 

 

 

지난 4월 2일 미국 국립문서보관기록청(NARA) 홈페이지에 접속이 폭주했다. 1940년 센서스에 참여한 1억3200만 명의 신상정보가 공개됐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10년마다 실시되는 호구조사인 센서스는 통계만 먼저 발표된다. 개인별 자세한 인적사항은 ‘개인신원보호법’을 이유로 72년 뒤에나 공개된다.

 

 올해 봉인이 풀린 1940년 센서스에는 당시 한인들의 군상도 담겨 있다. 본지는 40만 장에 달하는 로스앤젤레스(LA)시 센서스를 3개월에 걸쳐 한 장, 한 장 조사해 당시 LA에 살던 한인 415명을 찾아냈다. 성명과 직업 등 34가지 신원정보가 망라된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했다.

 

 그들의 삶의 모습은 다양했다. 당시 22세였던 베티 류(왼쪽 사진)씨는 통신사 기자였다. 남녀 차별을 극복하고 주류사회에서 이미 한인 여기자가 활동 중이었다. 찰스 윤(오른쪽 사진)씨처럼 직업 군인이 된 한인도 있었다.

 

 LA지역 센서스 1호 등재 한인은 환갑을 앞둔 품팔이 농부였다. 이름 중간자가 빠져 신원 미상자나 다름없었다. 그의 이민사를 추적했다. 그는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난 한국인 이민자의 대표다.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인천 제물포에서 일본, 하와이, 캘리포니아 중부 프레즈노, LA, 다시 프레즈노로 이어진 42년간의 이민 경로를 밝혀냈다. 그는 72년 만에 이름을 되찾았다. 1905년 하와이행 몽골리아호를 탔던 24세 청년 현추성씨다. ▶관련기사 이어보기

 

 LA중앙일보 정구현 기자, 김병수 인턴기자

 

 

 

 

 

 

 

한인 ‘등재 1호’ 1881년생 현추성씨, 환갑에 10시간 일하고 연 352달러 벌어
[중앙일보]입력 2012.07.14 01:05 / 수정 2012.07.14 01:15
종로서 살다 하와이 거쳐 캘리포니아로

 

 

현추성씨가 타고 갔던 이민선 몽골리아호 승선표.


그는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는 농부였다. 1940년 로스앤젤레스(LA)시 센서스에 가장 먼저 등재된 한인은 59세의 현(Hyun, C. Sung)씨다. 이름 중간자가 이니셜로만 돼 있어 한국식으로 호명할 수 없었다.

 

 현씨는 LA에서 북동쪽으로 32㎞ 떨어진 노스리지 감귤농장에서 노동자(Laborer)로 매주 60시간씩 일했다. 당시엔 통상 주 6일 노동이 기준이었다. 매일 10시간씩 뙤약볕 아래서 구슬땀을 흘린 것이다. 노동의 대가로 연 352달러를 벌었다. 전국 평균 연봉이 1725달러였던 시절이다. 평균 수입의 20% 수준에 머무는 고단한 밥벌이였다는 얘기다.

 


 환갑을 앞둔 그에게 농장 일은 힘에 부쳤을 터다. 당시 예순은 지금과 다르다. 광복 전 한국 남성의 평균 수명은 40대 중반이었다. 그가 사는 곳은 초라했다. 농장 근처 중국인 웡이 운영하던 하숙집이 그의 거처였다. 가족도 없었다.

 

 그는 쇠약한 몸으로 왜, 어떻게 LA 감귤농장까지 오게 된 걸까. 그의 이민 경로를 추적했다.

 미국국립문서보관기록청(NARA)의 데이터베이스와 사회보장국의 사망증명 기록, 하와이 이민선 승객 명단을 조회했다. 자료의 양은 방대했다. 1903년부터 1905년까지 하와이 이민 승선 명단은 7000여 명이었다. 사망증명서도 정확한 출생연도가 없어 앞뒤로 2년씩 오차를 넣었더니 3000건이 검색됐다. 건초더미에서 바늘 찾는 격이었지만 결국 그의 흔적을 찾아냈다.

 

 하와이행 이민선 몽골리아호 승선 기록에 그가 있었다. 승선표도 발견했다. 1881년생인 그의 이름은 현추성(Hyun Choo Sung)이었다. 종로구 신문로에 살던 스물네 살의 그는 1905년 5월 3일 인천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고국을 등졌다. 3등 선실에 탔던 그는 무일푼이었다. 입국신고서의 ‘소지한 현금’ 난이 ‘0’으로 기록돼 있다.

 

 나흘 뒤 일본 고베에 잠시 정박한 몽골리아호는 제물포를 출발한 지 2주 만인 5월 18일 마침내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고된 여정이었다. 인천의 한국이민사박물관에는 당시 현씨와 함께 몽골리아호 3등 선실에 탔던 함하나씨의 육성 증언이 남아 있다.

 “기름 냄새가 진동하고 소나 말의 악취 때문에 밥 먹을 때 구역질이 났어요. 열흘간 아무것도 못 먹고 남편과 고통을 참느라 완전히 진이 빠졌지요.”

 

 현씨가 하와이에서 본토 캘리포니아로 넘어온 것은 1920년대다. 1930년 실시된 캘리포니아 중부 프레즈노의 센서스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는 프레즈노 인근 한 목장에서 역시 농부로 일했다. 당시 이름은 ‘Hyun C. S.’로 기재됐다. 목장 근처 한인 이씨 집에서 하숙했다.

 

 이 센서스에서 그가 가족 없이 혼자 살았던 이유를 찾았다. 혼인 여부 항목에 ‘사별(Widowed)’로 적혀 있다. 한국을 떠나 하와이에서 가정을 꾸렸지만 아내가 먼저 떠나면서 그는 40대에 홀로 되고 말았다.

 

 그의 말년은 사회보장국의 사망증명서를 통해 찾았다. 1940년 노스리지의 땡볕을 견디며 농장에서 일하던 그는 다시 프레즈노로 돌아갔다. 그리고 7년 만인 1947년 5월 16일 사망했다. 66세였다.

 

 그는 중간에 미국 땅을 떠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 농부로 전전긍긍하며 42년간의 타향살이를 하면서도 끝내 포기 못했던 것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고 말겠다는 고집이 아니었을까. 오늘날 한인 이민자들처럼 말이다.

 

 1902년 황성신문에 실린 하와이 농부 모집 광고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품삯 한 달에 15달러. 하루 열 시간 일하고 일요일에는 쉴 수 있습니다. 숙식 제공합니다.’

 

LA중앙일보 정구현 기자, 김병수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