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을 따로 쓰자는 남편의 전격적 선언은 장여사에게 실로 충격적이었다.
결혼 후 지금까지 장여사의 머릿내음을 맡아야 잠이 온다던 남편이었다. 그런 남편이 어느날 갑자기 방을 따로 쓰자니 이건 뭐가 잘못되도 크게 잘못된 일이었다. 물론 남편이 근무하는 회사가 요즘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꽤나 사소한 일에도 신경을 곤두 세우는 남편을 애써 이해하려는 장여사였다.매정스런 말을 남기고 휑하니 남편은 출근했지만, 장여사는 그 파문을 진정시키느라 안절부절이었다.
그 동안 사실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는 핑계로 남편에게 소홀한 점도 없지 않았다. 아침 저녁 꾀죄죄한 몰골로 대문을 나서는 남편이 안스러운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써야 한다는 구실로 사사건건 남편의 일상사에 제동을 걸며 꾸려 온 살림이었다. 그 덕에 요만한 집 한 칸이나마 장만할 수 있었다고 자위해 보지만, 마음 한구석 늘 개운치 못함도 사실이었다.
여하튼 남편의 돌연한 행동은 장여사를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렇다면 혹시 남편에게 새로운 여자라도 생겼단 말인가? 그러나 금방 장여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적어도 새로운 여자를 거느리려면 수반되는 조건- 훤칠한 용모 내지는 넉넉한 지폐, 여자를 꼼짝 못하게 할 기술(?) 등-이 있어야 하는데 장여사가 보기에 남편은 아무리 후한 점수를 주어도 그 어느 한가지도 해당사항 없음이었다.
남편은 이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아침이면 회사로 출근했고, 퇴근 시간이 되면 거실에 걸린 시계추인 양 정확하게 집으로 되돌아 왔다. 예전과 다름없이 일 주일에 한 번씩 어항의 물을 갈아 넣었고, 남한강에서 탐석했다는 물개 모양의 아끼는 수석에 윤을 내었다.
변한 것이라곤 그날 아침의 전격적 선언 이후, 가뜩이나 적은 말수의 남편이 저녁을 먹기 무섭게 서재를 겸한 이층 자기 방에 밤새도록 틀어박히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잠을 자는 것도 아니었다. 남편 방의 불은 거의 밤새도록 켜져 있었다. 이런 불안한 날들이 보름 째로 접어든 어느 날, 장여사는 뜻밖에도 남편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느 날부터인가 남편의 손에 들린 검은 색의 큼직한 여행용 가방이었다. 며칠 전부터, 아니 방을 따로 쓰자고 제의한 다음 날부터 남편은 예의 검은색 가방을 신주 모시듯 가지고 다녔다.
‘ 남편은 현재의 회사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몰라.’
순간 장여사는 자신의 방정맞은 상상에 진저리를 쳤다. 그렇다면 남편이 보물단지처럼 껴안고 다니는 검은색 가방 속에는 회사의 기밀서류가 들어 있음이 틀림없었다. 가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산업 스파이에 대한 이야기를 장여사도 익히 알고 있었다. 남편의 가방에 회사의 기밀서류가 들어 있다면 이건 남편뿐 아니라 장여사의 인생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전에도 가끔 남편은 술에 취한 날, 회사의 승진 심사에서 늘학력문제가 거론되어 진급에서 누락되었다고 푸념을 한적이 있었다. 일곱 남매의 맏이로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시골 중학교 졸업장이 전부인 남편으로서는 당연히 느낄 수 있는 컴프렉스였다.
“하지만 일처리하는 능력으로는 당신이 뒤떨어지짖 않잖아요?”
그럴 때마다 장여사는 남편을 위로했지만 번듯한 졸업장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만년 과장자리를 못 벗어 나는 남편이 딱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장여사는 오늘 밤 자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우선 거실 커텐을 갈아 집안 분위기를 바꾸기, 식탁엔 화사한 장미와 시원한 맥주, 그리고 진한 화장.......’
남편은 기계적으로 퇴근 시간이 되자 전과 다름없이 커다란 가방을 소중히 감싸 안고 돌아 왔다.
그날 밤 장여사는 화사한 웃음과 함께 하얀 거품이 탐스럽게 넘치도록 맥주를 따랐다. 남편도 장여사의 갑작스레 변한 분위기가 싫지는 않은지 연거푸 몇 잔을 들이켰다. 한참만에 장여사가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보, 전 이대로의 생활에 정말 만족해요.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가방 속 물건은 회사로 되돌려 보내세요. 네?”
순간 남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가방 속 물건을 당신이 어떻게?”
장여사가 가방 이야기를 입에 올리자마자, 남편은 용수철이 튀듯 벌떡 일어 나더니 가방을 부둥켜 안고 한걸음에 이층 옥상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장여사는 문득 남편이 최후의 순간에 옥상에서 뛰어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보, 잠깐만 제 말좀... ....”
가쁜 숨을 몰아 쉬며 황급히 뒤따라 온 장여사의 말을 알아 들었는지 남편은 옥상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곤 심호흡을 하더니 천천히 가방을 열어제끼곤 무엇인가를 꺼내는 것이었다. 찰나의 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잠시 후 남편은 손짓으로 장여사에게 가까이 다가오라는 시늉을 했다. 불안한 마음에 휘청대며 남편에게 다가선 장여사의 눈에 들어 온 것은 놀랍게도 천체관측용 망원경이었다. 한참동안 망원경 렌즈에서 눈을 떼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던 남편이 황급히 장여사에게 망원경을 내밀었다.
“서쪽 하늘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섯 개의 별이 이어진 바다뱀자리 사이로 흐르는 희미한 별이 하나 보일거요.”
장여사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남편은 망원경 렌즈에 다시 눈을 대고 한참이나 확인한 후 말을 이었다.
“내가 보름내내 관찰한 별이요. 이 지구엔 76년만에 한 번씩 찾아오는 진귀한 손님이라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의 장여사의 심정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남편은 나머지 말을 이었다.
“76년만의 해후, 아니 우리 삶에 있어 마지막 해후가 될 진객 헬리혜성이라는 별이오.”
남편은 다시 한번 렌즈에 눈을 대고 뚫어지듯 하늘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방을 따로 쓰는 것은 일시적인 일이오. 하지만 우리와 함께 하던 것과의 영원한
이별, 늘 함께 하던 모든 것과의 마지막 해후임을 생각하면.......”
어느새 장여사의 어깨를 꽉 잡은 남편이 신들린 사람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장여사의 두 눈엔 주책없는 눈물이 어려 드넓은 밤하늘이 온통 은하수인 양 렌즈 가득 뿌옇게 흐려질 뿐이었다.
* 출처 : 문학사랑 - 박천호님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