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소설&드라마

자유찾아 천만리 - 탈북여성작가 지현아 씨의 수기 1-10

淸山에 2012. 6. 30. 12:06

 

 

 

 

 

자유찾아 천만리

탈북여성작가 지현아 씨의 수기

박영순기자2012.06.21 00:54:46
 

 


또 한명의 탈북여성작가가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은 지현아이다. "자유 찾아 천만리"는 저자가 태어나서부터 탈북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반복되는 탈북과 강제 북송, 그 과정에서 집결소와 수용소에서 겪은 비참한 생활들과 이름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그린 실화이다.
  
책은 한 여성의 곡절을 넘어 분단의 아픔을 애절히 호소한다. 분단조국에만 있을 수 있는 비극의 연속이 그대로 스토리로 이어지는 이 수기는 탈북자들이 어떤 삶을 살았고, 또 그 고비들을 어떻게 이겨냈는가를 한편의 영화처럼 보여준다. 뉴포커스는 작가와 출판사의 동의를 얻고 오늘부터 연재를 시작한다.
  
 자유찾아 천만리        
  
 책을 내면서...

 
나는 작가도 아니고 시인도 아니다. 또한, 북한에서 말하는 일명 혁명의 수도 평양에서 살지도 않았으며, 골수 공산당 당원의 집안에서 태어나 재능을 꽃피워 본 적도 없다. 여느 사람들과 똑같이 지방의 소도시에서 태어나 인민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를 따라 이사 간 농촌에서 고등중학교를 졸업했다.

  
주변 사람들이 굶어 죽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북한 사회에서 굶주림에 견디다 못한 나는 18살이 되는 해에 끼니를 위해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했으나 붙잡혀 북송되어 감옥생활을 했다.

  
중국에서 불법 체류자로서의 심리적 불안과 공포심으로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고, 중국 천국, 한국 천국, 하늘 천국을 경험하면서 인간의 고통과 행복한 삶을 알아갔다. 그리고 지금은 남한의 자유체제에 들어와 내 생각을 마음껏 펼치며, 행복한 삶을 위해 돈을 벌면서 안정을 추구해 가고 있다.
  
탈북자들은 식량부족, 경제적 어려움, 질병 등에서 벗어나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받기 위해 북한을 떠난 사람들이다. 탈북이 발각되어 북송되면 민족반역자로 몰려 정치범 수용소에 넘겨졌고 탈옥을 하다가 잡히면 죽도록 맞았다.
  
탈북자들의 공통적 특징은 주체사상 교육을 통해 수령에 대한 충성이 최선의 가치인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자아비판과 남을 비판하는 ‘생활총화’를 통해 모든 문제의 잘못을 자기와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에 익숙해 있다. 인민학교 때부터 생활총화라는 이름으로 1주일간의 생활을 김일성 아버지 앞에서 모두 고백하고 개개인은 무조건 남을 비판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
  
탈북자들의 마음에는 북한에서 받은 아픔, 상처, 고통, 공포, 노예, 핍박과 억압으로 인해 쌓인 응어리가 너무 많다. 북한, 중국, 베트남 등 국경수비대로부터 쫓기고 또 남한에서의 정착 경로 과정을 통해 소외감, 감정억제, 질병, 자유, 가치관의 혼돈 상황에서 정신적 혼란을 겪고 있다.
  
스스로 탈북 수기를 쓰겠다고 한 것이 일 년 전부터였지만 완성은 하지 못한 채 늘 초조하게만 여겨왔다. 무척 감성적인 성향의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어렸을 때부터 즉흥시나 짧은 글짓기에서 항상 우수상을 차지했던 경험으로부터 무엇인가 쓰고 싶다는 욕구가 충만했고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량한 동토의 왕국인 북한의 참상에 관해 나 자신조차 말하지 않는다면 돌들이 벌떡 일어나 말할 것 같아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북한 동포의 삶이 삼척동자라도 알 만큼 비민주적이고 인권이 없는 참혹하고 비관적이라는 사실과 눈물과 죽음의 계곡에서 탄식하고 있는 동포의 참상을 올바로 알리고 싶었다.

  
어느 때부터일까? 아마 북한에서 “어버이 수령 김일성”이 사망한 이듬해인 95년부터 일 것이다.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기 전해인 95년도 고난의 행군 때부터 북한의 참상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싶었다.
 
4번의 탈출과 3번의 북송, 수백 번의 무서운 매들이 달려들 때마다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안 되는 줄 알았던 영화와도 같은 무서운 구사일생의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질 때마다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고 싶었다. 볼펜과 종이는 없었지만, 눈으로 찍어두고 눈으로 입력하며 머리에 어떻게든 기록하려고 애썼다. 부끄러운 북한 탈출 체험을 되살리고 우여곡절 끝에 성공한 이야기를 기록해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아슬아슬한 죽음의 고비들을 넘길 때마다 저장하고 기록했던 모든 것이 지워져 없어질까 걱정도 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은 무진 매를 맞은 어혈로 인해 많이 퇴색된 기억들을 가까스로 더듬고 다듬어 써낸 글이다.

  
이런 탈북자의 인생살이를 누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한 많은 과거를 누가 어루만져 줄 것인가?
  
북한의 고통과 현실을 사실대로 알리고 싶고, 이 이야기를 진실로 믿어주고 받아 주기를 바라며, 지금도 이러한 처참한 지옥 생활이 북한 땅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알리고 싶다는 필자의 충정을 이해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남한에서는 평범할지 모르는 자유와 권리를 귀하게 생각한다. 북한 사람들이 자유를 찾다가 수십만 수백만이 죽었음을 안다. 그 자유라는 것이 오히려 사람을 잡아먹었다고 생각해야 더 맞을 것 같다. 그러한 자유를 찾았기에 솔직하게 알리고 싶을 뿐이며, 무딘 글이나마 너무도 소중한 자유가 밝혀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 무서운 참상들을 카메라에 담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고, 한을 품고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죽어간 수십만 수백만의 북한 동포를 생각하면 죄스럽기 그지없으며 고작 이 글을 통해 쓰고 말하겠다는 자신이 부끄럽고 사치스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책으로 출간된 많은 선배님들의 이야기로 인해 북한의 참상과 탈북자들의 애환에 대해 어지간히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 글을 통해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이 한 가지라도 더 밝혀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둔한 필치의 글이지만 절규와도 같은 이 글이 독자들을 향한 도전이 되었으면 하고 북한의 실상을 조금이라도 알게 된 독자들 중에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로, 지식인은 지식의 힘으로, 권력이 있는 사람은 권력의 힘으로 통일에 보탬이 되어 주었으면 한다.

 
남북통일이 시민운동을 통해 꼭 성취되리라 확신하고 고대하며, 북한에도 체코의 하벨, 폴란드의 바웬사와 같은 재야의 거인이 나오리라 믿는다.
 
우리는 북녘의 굶주린 동포를 반드시 구출해야 한다. 너무도 불쌍한 북한 주민의 굶주린 삶을 청산해 주어야 한다. 호랑이 모양인 우리나라의 백두산에 태극기를 휘날려야 하며, 멀고도 가까운 남북통일을 꼭 이루어야 한다.
 
하늘나라로 먼저 간 북한의 모든 영혼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으며, 그들을 대신해 그들이 다 못산 삶까지 살면서 남아 있는 북한 주민들을 구원하는 일에 힘쓰고자 한다.

  
지구상의 지옥과도 같은 지난 과거의 생활을 솔직히 고백한다. 정치학습은 인민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마약이었으며 이러한 참상을 기초로 다시는 그런 비극적인 일이 북한에서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똑같이 북한의 운명을 바로 잡을 사람들이 누구일까 찾고 있다. 이 물음에 답을 줄 주인공들은 바로 남한의 동포들이라고 생각한다.
 
쓰리고 아팠던 과거를 돌이켜보며 남한 생활에 감격하며 대한민국이 받아 주었음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지금은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딸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어 참으로 행복하다.
 
나의 보잘 것 없는 책을 읽어 주시고 추천사를 써 주신 개신대학원대학교 나용화 총장님,  유상준 님, 노정민 기자님께 진심으로 고개를 숙여 감사드리며, 이 책이 북한의 실상을 알리고 조국의 통일에 밑 걸음이 되고 작은 불씨가 되기를 소원한다.
 


2011년 6월
 
지 현 아
 
 
 

 



1장 _ 참혹의 현장


온성 보위부

할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젊은 엄마가 붙잡혀 들어오면서 왜 아이는 중국에 맡겨두지 않고 데리고 왔수? 아이고 고생이구먼!”

“그러게요.”

한 할머니가 안쓰러운지 조용히 이야기하니 주변의 사람들도 혀를 찼다. 아이 엄마는 40대였는데 계속 입에서 피를 토했다. 그런 엄마에게는 관심도 없는 철없는 아이는 보위부(남한의 국정원)에서 주는 배부르지 않은 국수 죽을 먹고는 또 배고프다고 아우성이었다.

“에구! 저걸 어쩌누!”

주변 사람들의 걱정은 아이 엄마의 아픔을 가셔주지 못했다.

아이 엄마는 그릇에 발라주는 죽도 먹지 못한 채 앉아만 있었다. 자리가 비좁기도 하지만 보위부에서는 누워 있을 엄두도 못 내는 것이 누워 있으면 규율 위반이기에 누우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배고파 울고 있었고 이 아이뿐 아니라 복도에 있는 몇 명의 아이들까지 함께 울어댔다.

“엄마, 나 배고파요! 으앙!”

아이들은 보위부 안을 뒤흔들어 놓았다. 보위부는 남한의 국정원과 같은 곳이다.

“야! 여기가 어디라고 배고프다고 난리들이야! 조용 못해? 중국에 가서 배부르게 처먹었으면 됐지, 뭐가 배고파 또 지랄들이야! 그치지 못해?”

우는 아이들에게 호통을 치는 보위부 지도원들의 목소리가 너무도 무서웠다.

아이들의 울음은 잠시 그쳤지만, 엄마들에게 또다시 칭얼댔다. 배고프다고 귀에다 대고 칭얼대며 조용히 엄마 품에서 소리 없이 울었다. 엄마들은 아이를 붙잡고 눈물만 흘렸다.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을까?

아이들의 울음소리, 엄마들의 흐느낌 소리, 심문을 하며 때리는 소리, 맞으며 우는 소리, 이 소리들이 온 북한 땅에 울려 퍼지고 있다.

북송된 사람은 보위부에서 혹독한 신문을 겪었다. 일단 격리 수용된 뒤 중국에서 체류한 기간만큼을 지내면서 그동안 하루하루 겪었던 일들을 일자, 시간대별로 고스란히 토해내야 했다.

탈출 경로, 머문 시설과 남측 접촉 관계자의 신상 등 듣고 본 모든 것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과정을 거쳤다. 몇 차례 정확도를 높이고 거짓 진술을 가리는 절차도 통과해야 했다.

이런 절차를 넘어선 뒤 이른바 자본주의 물빼기 작업이 시작되는데 자아비판과 김정일 혁명역사 교육, 사상교양 등의 프로그램이 이어지는 것이었다.

더 이상 인간은 없다



“선생님, 3호실요. 토변 보...보...올...”

“야! 이 개새끼야! 똑바로 말 못해?”

남자 감방에서 말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 있는 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선생님, 3호실요. 토변 보올수 있틉니...니...”

알고 보니 3호실에 중국 사람이 들어와 갇혀 있었다. 이 사람은 조선족이 아닌 한족이어서 조선말을 잘 못하고 감방에서 화장실 볼 때의 말을 억지로 배운 것이었다. 말을 제대로 못하면 화장실을 가지 못해 바지에 싸게 했다.

“선생님, 3호실요. 토변 뽀수 있틉니까?”

“저 개새끼, 아직도 말을 저렇게 하냐? 야, 반장. 너 뭐해? 어떻게 가르쳤기에 저렇게 해? 다시 가르쳐!”

매 감방마다 반장이 있었다. 한족이 있는 감방의 반장이 제대로 가르쳐 주지 못했다고 보위부 지도원에게 욕을 먹었다.

“야, 이 개새끼야! 너 왜 그렇게 가르쳐 줬건만 아직도 못해? 다시 해봐! 선생님, 3호실입니다. 소변 볼 수 있습니까? 해봐! 이 개새끼야!”

“선생님, 3호실입니다. 토변 뽈투 있틉니까?”

중국 사람을 발로 차면서 가르쳐 주는 반장과 발에 맞으면서도 어떻게든 말을 해보려는 한족이었다. 3호실 감방에서는 한족의 비명소리가 흘러넘쳤다. 겨우 선생님한테 말하는 데 성공해 문을 열고 나왔다.

나는 그를 보는 순간 놀랬다. 나이가 60세가 넘은 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얼굴에 멍이 들고 눈이 부어 있었으며 코에서는 코피가 났다. 자기 아버지뻘 되는 사람을 저렇게 해놓았다니 너무했다. 한족은 팬티 같은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짝이 맞지 않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저 사람이 여기 들어 온 지 3달이 됐다우! 중국 두만강에서 낚시를 하다가 경비대 군인들이 고기를 많이 줄 테니 담배와 바꾸자고 해서 담배를 들고 건너갔다가 붙잡혔다우. 올 때 입었던 옷과 신발은 군인들에게 빼앗기고 저런 헌옷만 입구 다니네. 불쌍하구먼! 빨리 중국에 가야 할 텐데….”

보위부 감방에 오래 있던 할머니가 이야기했다. 그랬구나! 우리가 아무리 중국에서 감옥살이를 했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대접을 받지는 않았는데 너무 했다.

며칠 뒤,

“3호실 5번 나와! 너 좋겠다. 이젠 집에 가게 되어서 좋겠다.”

드디어 한족이 중국 땅 고국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좋아하는 소리가 우리 감방까지 들렸다. 우리도 그 사람을 마음속으로 축복해 주었다. 그가 들어올 때만 해도 살이 붙어 있었는데 여기에 있는 동안 먹지 못해 많이 야위었다. 그래도 집에 간다고 생각하니 좋은가 보다. 우리는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눈인사를 하는 그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밖에 나가 본 지도 오래되었다. 이젠 제법 바람이 선선한 초가을로 들어선 요즘 여전히 부모들과 동생들 생각이 간절했다.

감방에서는 원래 두 명의 여자만 따로 밥을 주었는데 국수 죽을 먹는 우리와는 완전히 달라서 쌀밥에 반찬도 많이 주었다. 알고 보니 중국에서 한국으로 가는 길에 붙잡혀 북송되어 온 여자들이었다. 한국으로 가려다 붙잡힌 사람들은 무조건 정치범 수용소 아니면 사형하게 되어 있다. 그중의 대표적 수용소가 요덕수용소인데 생명까지 위협받는 강제 수용소로 악명이 높은 탄압의 현장이다.

정치범 수용소란 김일성, 김정일의 정치적 사상에 대한 반대나 조선 법을 어기거나 조국을 배반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으로써 한 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다시 나올 확률은 거의 없는 곳이다. 한국으로 탈출하는 것은 조국을 배반하는 것이었으며 김일성 사상을 부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여자들이 정치범 수용소로 갈지 사형하게 될지 모르기에 가기 전에 식사만은 우리보다 고급스럽게 주는 것이었다.

그들이 불쌍해 보였지만 다행히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았으며 슬픈 기색도 전혀 없었다. 그들에게 차려질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면 끔찍했다.

 

웃지 못 할 검사와 뽐뿌질

온성 보위부에서 많은 탈북자들이 돈 때문에 죽도록 맞았다. 중국 변방대에서 옷을 홀랑 벗고 돈 검사를 마쳤음에도 보위부에 들어오면 어디에들 감춰서 들어오는지 돈들이 많이 나왔다.

보위부에 도착하자마자 몸수색을 하고는 주사기로 피를 뽑아 무슨 병 검사를 한다고 했다. 여자와 남자를 갈라서 여자 쪽은 여자 군의가 와서 고무장갑을 끼고 임신한 여자건, 처녀건 상관없이 자궁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항문에도 손가락을 넣었다. 또한, 머리에 손을 얹고 제자리에 서서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뽐뿌질을 100개씩 시키는데 그렇게 하면 돈이 빠져나오기도 했다. 벗어 놓은 옷은 솔기마다 숨긴 돈이 없는지 살펴보고는 감방으로 보내지고 임신한 사람이 있으면 보위부 밖으로 나가서 낙태를 시켰다.

옷섶에 감춰서 가져오고 항문에 넣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궁에 많이들 감춰가지고 들어오는데 돈을 삼켜 배에 감추고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돈을 돌돌 말아 비닐에 꽁꽁 싸서 약을 먹듯이 삼킨 뒤 나중에 대변을 보아 대변을 뒤져서 다시 씻어서 건사하곤 하는 것이었다.

감옥 안에 비운이 감도는 어느 날 나는 갑자기 불려 나갔다. 무슨 일인가 해 알고 보니 나를 포함한 몇 명의 사람들에게 화장실 뒤에 쌓인 대변을 처리 하라는 것이었다. 북한은 남한과 달리 아직도 개방 화장실을 쓰는데 개방 화장실도 남한에서와 달리 화장실 뒤에 변이 가득 넘쳐 있고 그 변을 가져다 농장 밭에 비료로 사용하기도 했다.

보위부 한편에는 경비 군대가 지켜보는 가운데 커다란 바가지에 나무로 된 긴 손잡이로 변을 퍼내는 여자들이 모여 있었다. 냄새가 지독하지만,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우리는 부지런히 변을 퍼냈다.

한창 퍼내고 있는데 “잠깐만!”하고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에 우리는 퍼내기를 멈췄다. 뒤를 돌아보니 보위부 지도원이 입에 손수건을 틀어막고 걸어오고 있었다.

“너희들 내 말 잘 들어. 여기에 비닐로 꽁꽁 싼 쬐꼬만 것이 있을 것이다. 너무 급하게 퍼내려 하지 말고 찬찬히 살펴보면서 해!”

나는 처음에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갔다. 그래서 옆에 있는 아줌마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보위부 지도원 말대로 우리는 아주 천천히 살펴보면서 퍼내는데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발견했다고 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모였다. 자그마한 것이 비닐에 돌돌 말려 있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꺼내야 할지 잠시 망설이던 차에 같이 일하던 한 아줌마가 나뭇가지를 꺾어 가지고 오더니 그걸로 건져 내었다. 우리는 경비군인이 안 보이는 사이에 그것을 조심히 풀어 보았다. 다름 아닌 중국 돈 200원(한국 돈으로 약 36,000원)이었다.

그 돈은 누군가가 삼키고 변에서 찾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북한의 사정은 먹지 못해서 사경을 헤맬 정도의 상황인지라 목숨 걸고 돈을 가지고 왔을 것인데 그렇게 쓸모없이 되어 버리고 말았으니….

그런 상황에서 그 돈을 가질 임자는 따로 있었으니 우리는 그 돈을 새로운 임자에게 주었다. 변 냄새가 진동하는 돈을 받아 든 보위부 지도원은 입에 웃음을 띠며 계속 찾아보라고 했고 그날 그렇게 11개인지 12개의 돈을 감싼 비닐들을 발견했다.

뙤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구원의 손길 같고 저녁에 들어오는 노을은 우리들의 복수의 피가 물들여져 있는 것 같았다.

 

 

 

[연재2] 자유찾아 천만리

탈북여성작가 지현아 씨의 수기

박영순기자2012.06.23 00:22:30
 

 

 

북한으로 온 아버지
 

 

우리 집안은 매우 평범한 계층으로서 계급으로 따진다면 중간쯤에 속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슬하에 내가 맏딸이고 두 살 아래인 여동생 명순이와, 나와 9살 차이인 남동생 명국이를 포함해서 식구가 모두 다섯이었다. 아버지는 중국이 고향인 조선족이었고 중국에서 고중까지 다녔으며 문화혁명 때 북한으로 귀환한 분이었다.
 
아버지가 늘 들려주시던 중국에서의 일들을 이야기하려 한다.
 
아버지는 고중에 다닐 때 기숙사 생활을 했다 하며 집안은 가난했고 또 아버지의 생모는 아버지 어렸을 때 돌아가시고 할아버지 혼자서 아버지를 키우시다가 새 할머니를 만나셨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새 가정을 이루시면서 아버지에게는 동생들이 줄줄이 생기게 되었다. 자식들이 많은 할아버지의 가정은 온통 가난으로 휩싸였다. 그런 와중에도 마음씨 고우신 새 할머니는 아버지만은 공부시켜야 한다며 아버지를 고중까지 보냈다. 남자는 여자와 달리 공부를 해야 한다며 삯일을 해가며 아버지를 공부시키신 새 할머니는 지극정성으로 아버지를 대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방학이 되어 집에 왔다가 개학 준비를 하느라 다시 고중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던 아버지는 버스 안에서의 승객들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는 가슴에 무언가 와 닿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들의 이야기인즉, 북한은 사회주의인지라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돈을 안 받고 공부를 시켜준다는 것이었다. 무료교육, 무상치료, 세금 없는 나라가 북한이라는 말에 아버지는 곧바로 도문으로 향했는데 그때 아버지의 나이는 16살이었다.
 
책가방을 매고 도문으로 가는 도중 할머니가 준 학교비로 밥을 사 먹으며 여러 사람에게 길을 묻고 물어 드디어 도문에 도착했다. 도문에 있는 두만강에는 많은 조선족들이 줄을 지어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북한에서 직접 중국까지 나와서는 한 사람 한 사람 검열을 해 가며 배에 오르게 했다는데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지를 향해 북한 검열관은 다시 중국으로 넘어올 수 있을 어린 나이라며 입국을 거절했다. 안 된다는 소리에 아버지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아느냐며 검열관에게 대들었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밤이 되자 배는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북한으로 향했는데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노 젓는 부분을 꽉 잡고 물밑에 몸을 숨겼다. 뱃사공이나 검열관이나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설마 물밑에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배와 노 젓는 부분의 사이에 손을 넣었기 때문에 손에 피가 나고 매우 아팠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 어느덧 북한에 도착했다.
 
그 이후 함북도 길주군에 위치한 학원에 다니게 되었는데 북한 학원의 교복이 여느 학교와 달리 군복이었으며 대우도 매우 좋았다고 했다. 아버지가 학원을 한 1년 정도 다녔을 무렵 설이 다가오자 다른 애들은 다들 친척 집에 간다고 야단법석이었는데 북한에 친척이 없었던 아버지는 중국에 있는 집에 잠깐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집에 도착하니 난리가 나 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어디에 갔었느냐며 네가 없어져서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며 아버지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것도 잠시 아버지가 또 북한에 가야 한다는 말을 꺼내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놀라며 안 된다고 했다. 아버지의 고집은 또다시 부모?형제와의 헤어짐을 면치 못했으며 학원을 졸업한 아버지는 자동차 학교에 다녔고 그곳에서 운전면허증을 취득했다.
 
고말산 수산사업소에 배치된 아버지는 기숙사에 기거하며 독학으로 바이올린을 연습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아버지는 편곡도 하고 지휘까지 하는 훌륭한 지휘자가 되었다. 그 시기에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고 나와 두 동생을 낳았는데 어머니의 집안은 공산당 집안으로서 외할머니는 20세에 화선에 입당했고 외할아버지는 도당 선전부장으로 일했으며 또 외가는 김정일과 사돈의 사돈이었다. 그 때문에 해마다 있는 신원조회를 받지 않은 적이 없었고 그렇다고 북한 정부로부터 별도의 선물이나 그 비슷한 것들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남부럽지 않게 살았으며 또한 중국에 계시는 고모가 다니러 오는 때에는 집에 더욱 활기가 넘쳤는데 고모는 중국에서 잘 사는 집안이었기 때문에 선물을 보내 주곤 했다.
 

어머니가 그리던 농촌
 

도시에서 평범하게 잘 살고 있던 어느 날, 하루는 어머니가 농촌으로 이사를 하자며 아버지를 졸랐다. 어머니가 농촌에 가려는 이유는 TV에서 나오는 사회주의 문화농촌에 대한 좋은 이미지에 빠져 있기 때문이었는데 텃밭에 예쁜 꽃도 심고 콩과 옥수수, 갖가지 채소들도 심으며 즐겁게 사는 것이 어머니의 농촌에 대한 생각이었다.
 
어머니의 농촌 이사에 응하지 않던 아버지는 말리다 못해 결국 기권을 하고 말았고 어머니의 소원대로 농촌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남동생 없이 나와 여동생만 있었지만, 농촌으로 이사 후 남동생을 낳았다.
 
이사하자마자 아버지는 임산사업소에서 일하게 되었고 그 사업소 바로 옆에 집을 배당받았다. 직접 농사를 짓는 그런 곳은 아니지만, 앞뒤가 산으로 막힌 농촌에 있는 직장이었다. 어머니의 아름다운 구상은 농촌에 가자마자 깨지고 말았으니, 도시에서 살 때 아버지의 직장에서 달마다 내주는 석탄으로 난방하며 편안하게 살림을 하던 어머니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지 않으면 밥도 못 해먹는 상황하며 앞뒤가 다 산으로 둘러막힌 기막힌 현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차마 이런 줄도 모르고 좋은 것들만 내보내는 북한 TV에서의 농촌 생활의 환경은 어머니를 너무도 많이 실망시켰다.
 
어린 나이였던 나 또한 깜짝 놀랄 일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학교는 멀고도 멀었고 눈은 또 왜 그렇게 많이 오는지. 또한, 아버지가 그때 거주 퇴거 때문에 호적을 떼어 오는 것이 워낙 힘들어 호적을 농촌에 붙이지 못했기 때문에 1년 가까이 배급이 나오지 않았고 우리는 그로인해 생활난을 겪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는 남동생까지 임신했다.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TV를 장터에 가져가 팔아서 그 돈으로 식량을 샀다. 그 때문에 해산 후 어머니는 부실한 음식을 면할 수가 있었지만 그 일로 인해 남동생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TV와 바꾼 애라는 우스갯소리를 두고두고 듣게 되었다.
 
그렇게 농촌의 가난을 알게 된 우리 가족은 그 후 아버지가 원료기지 사업소 자재지도원으로 다시 일자리를 옮기면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비록 산골이었지만 그래도 전에 살던 농촌보다는 살기 좋아서 감자와 옥수수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모든 것이 풍요로웠다. 농사 경험이 없었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옥수수와 감자, 갖가지 채소와 과일을 심어야 할 텃밭에 조찰을 심어서 오가는 사람들의 웃음을 사기도 했다. 그곳은 한창 개발을 시작한 곳이라 사람들도 얼마 없었고 앞으로 들어올 종업원들의 집을 짓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산에 있는 나무들을 베어 밭을 일궈 거기에 농작물들을 심었기 때문에 비료를 따로 주지 않아도 농사가 잘되었고 감자와 옥수수도 잘 되었다. 그때 그렇게 컸던 옥수수와 감자를 지금은 어디에 가서도 볼 수가 없다.
 
그 당시 기업소에서는 다양한 공연을 했기 때문에 군에서 공연 경연에도 나갔는데 그때마다 공연지휘는 아버지가 맡았다. 그것은 기업소 내에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이 아버지밖에 없었기 때문으로 아버지는 다룰 줄 모르는 악기가 없었다. 바이올린이면 바이올린, 기타면 기타, 손풍금이면 손풍금, 나팔이면 나팔 등등. 아버지의 악기 다루는 능력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아버지는 직접 편곡과 지휘도 했으며 어디 가나 음악에서는 뒤지지 않았다. 나 또한 음악에 소질이 있어 학교에서 음악 소조에 다녔으며 바이올린을 배웠고 또 집에 와서도 아버지에게 바이올린과 기타를 배웠다.
 
북한에서는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 정전이 자주 되어서 저녁에는 집집이 기름등잔을 켰다. 저녁밥을 먹은 후 우리 가족은 음악에 취해 아버지는 바이올린을 켜고 어머니와 두 동생들은 노래를 부르고 나는 기타를 치면서 단란한 가족의 향수를 즐겼다. 아버지는 특별히 좋아하고 즐겨 부르는 노래가 있었는데 이 두 노래를 술을 마시고 술상에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며 가락에 맞추어 부르기도 하고 악기로 연주하기도 했다. 
 

1절 :고향이 그리워서 고향이 그리워서
 
밤하늘 별을 보며 갈 길을 물어 보네
 
고운 옷 입는다고 부자가 아니에요
 
배불리 먹는다고 호자가 아니에요
 
아, 내 고향 내 살던 고향 언제면 가볼까
 

 

2절 :고향이 그리워서 고향이 그리워서
 
밤하늘 별을 보며 갈 길을 물어 보네
 
파묻힌 부모?형제 그리운 내 친구들
 
네 이름도 잊었겠니 까맣게 잊었겠니
 
아, 내 고향 내 살던 고향 언제면 가볼까
 

나는 노래의 제목을 몰랐다. 아버지는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물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또 하나의 노래가 있었는데 그것 역시 제목을 몰랐는데 남한에 와서 보니 “희망가”였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가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 같도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가
 
담소화락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몰하랴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고향이 중국이었던 아버지로서는 그런 노래들이 감성에 맞았을 테고 “희망가”는 겉으로는 사회주의지만 너무도 힘들게 생활하는 북한 백성들의 현실에 걸맞은 노래이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아버지는 술을 들면 그런 노래들을 부르면서 그때마다 울었는데 어머니는 이런 아버지를 주정한다고 계속 잔소리를 하며 싫어했지만 어린 나이였던 나는 아버지의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고 또 그런 아버지가 측은하고 불쌍했다. 고향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부모와 형제가 얼마나 그리웠으면 그런 노래들을 불렀을까?
 
북한에서는 중국이 고향이라 해도 북한이 아닌 중국이기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었기 때문에 말은 못하고 그냥 노래만 부르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지금 너무도 보고 싶고 그립다.
 

고난의 행군
 

우리 가족은 탈북 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렇게 몇 년을 살다가 우리는 임시 여권을 떼서 중국의 친척 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여유 있는 시간이 된 것이었다. 아버지도 다녀오고 또 어머니도 다녀오는 등 우리 집은 그 산골에서 잘 사는 계급에 속한 것만 같았다.
 
자재지도원이라는 직책으로 출장을 많이 다니던 아버지는 워낙 마음이 어질고 고지식하며 자상한 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버지를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했다. 그만큼 아버진 사람들에게서 신용을 얻은 분이었기 때문이며 흠이라면 술을 좋아해서 가정보다는 기업소나 친구들에게 더 잘하고 가정 일에는 관심을 덜 쓰는 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에는 “고난의 행군”이라는 대기근의 시기가 닥쳐왔다. 국제적 고립과 홍수와 가뭄의 자연재해로 수십만에서 수백만에 이르는 아사자가 발생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우리 마을도 식량난이 절정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죽을 먹으며 직장에 출근했고 배급이라곤 아예 주지 않았으며 배급소조차 문을 굳게 닫은 상태였다. 배급이 끊기면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모두들 봄이 되면 언 감자를 주우러 다녔고 풀뿌리와 나무껍질, 나물을 캐러 산속을 누볐는데 나의 꿈이 음악가에서 문학가로 다시 바뀐 것이 이때부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음악가였던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부터 자신의 뒤를 이어 음악을 전공하라고 가르쳤고 나 스스로도 음악에 조금은 관심을 가져 왔는데 “고난의 행군”이 달려들면서부터 보이는 모든 현실을 기록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산을 누비고 다니면서까지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책 속의 주인공으로 실어주고 싶었다.
 
사람들은 정부에서 하지 말라는 장사까지 해가며 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어머니는 중국에서 도움을 받아 물건이나 쌀을 가지고 오면 그것을 팔아 생활을 했고 쌀이 없으면 또 여권을 떼어 중국에 가서 쌀을 가지고 오곤 했는데 그때까지 장사를 해 본 적이 없었던 어머니는 그걸 팔아서 장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반면 자재지도원으로 일하면서 직장의 물자들을 거래하는 일들을 했기에 장사를 너무도 잘 알았던 아버지는 장사를 못하는 그런 어머니를 항상 나무랬다. 하지만 장사를 할 줄 모르는 어머니로서는 아버지의 그 나무람을 그저 참고 들어줄 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중국의 친척들 덕분에 우리는 남들보다 옷도 잘 입고, 신발도 좋은 걸로 신고 다녔으며 학교에 다니고 먹는 것도 고급이었다. 몇 년을 그렇게 잘 살았지만, 우리 집에도 서서히 생활난이 시작되었다.
 
중국에 계시는 친척들이 다들 한국으로 돈 벌러 가버려서 중국에 가도 친척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나와 여동생 명순, 남동생 명국 이렇게 셋은 먹지 못해 배고프고 기운이 없어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남들이 하는 것처럼 산나물을 뜯으러 산에 올랐다.
 
어릴 때부터 다리에 골수염이 있던 어머니는 아무 일도 못했으며 아버지도 출장에서 돌아오면 우리와 함께 소나무 껍질인 송기를 벗기러 다녔다. 송기란 소나무 겉껍질을 낫 아니면 칼로 한번 벗겨 낸 그 속에 있는 얇은 껍질을 말한다. 그걸 한 배낭씩 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두 동생들은 산나물을 뜯고, 나와 아버지는 낫과 칼을 들고 산으로 올라가 송기를 벗기고 집으로 와서는 산나물은 끓는 물에 데쳐 내서는 죽을 쑤었다.
 
송기는 가마에 양잿물을 넣고 오래도록 끓인 후 물에 하루 동안 펴서 재워놓고 다시 방망이로 두드려서는 옥수수 가루 한 줌을 넣고 떡을 만든다.
 
당시 그 송기떡이 목에 넘어가지를 않아서 정말 속상했었는데 그렇게 못사는 것이 북한의 독재 정권 때문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서럽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한 달에 한 번씩 강연회를 하는데 그때마다 하는 강의 내용은 이러했기 때문이다.
 

 

산이 많고 논과 밭이 적은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서 쌀을 수입해 와야 한다. 하지만 수입하는 도중 쌀을 실은 배를 경제봉쇄 하는 미국에서 총질을 해 다들 희생된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미국 때문에 이렇게 생활난을 겪는단다.
 

이와 같은 사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을 우리의 철천지원수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기업소의 일 때문에 출장으로 집을 비우는 일이 많다 보니 그 가장의 자리를 내가 메워야만 했다. 땔 장작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이 기업소 소를 빌려서 나무를 하러 갈 때 나도 따라가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해왔는데 정말이지 매우 힘들었다. 나무를 톱으로 벤다는 게 어린 나에게는 힘에 부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없는 힘을 다해서 나무를 베면 그 나무가 내게로 넘어와 팔이나 발을 다치기 일쑤였고 너무도 힘들어서 쌓인 눈 위에 철퍼덕 앉아 울 때도 많았다. 닳아진 신발을 신고 장갑도 없이 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에 손을 호호 불며 나무를 베는 내가 미웠고 소로 나무를 해오는 동네아저씨들이 부러웠다. 나무가 무거워 힘에 부치니 밧줄로 질질 끌고 오면 동네 사람들은 ‘너, 힘들겠다….’하고 말만 할 뿐 도와주지는 않았다. 도움을 바란 건 아니지만 약간의 기대감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당시 내 나이 17살, 나무하기가 그처럼 힘든 만큼 나무를 아끼려 불을 조금씩 땔 수밖에 없다 보니 방바닥에 습기가 많아 불을 땔 적마다 연기가 나서 문을 항상 열어놓고 밥을 해야 했으므로 방안에서도 솜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북한에서는 온돌을 놓고 시멘트로 바르고 그 위에 장판지를 밀가루 아니면 옥수수 가루로 쑨 풀로 발랐는데 불을 때지 않아 습기가 많아지면 방바닥에 바른 장판지가 모두 들뜨고 일어나 시멘트를 바른 방바닥이 드러났다.
 
연기가 굴뚝으로 나가지 않고 아궁이로 나왔기 때문에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방바닥을 뜯어서 온돌 수리를 했는데 17살 소녀가 온돌수리를 한다고 해야 얼마나 잘하랴! 방바닥을 뜯어내려니 곡괭이질을 해야 했고 얼굴에 온통 숯검댕이를 묻히고 짧은 팔로 큰 돌 사이를 헤집으니 옷도 숯검댕이가 되어 버렸다. 굴뚝으로는 연기가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방바닥의 온돌과 온돌 사이에 그을음이 꽉 차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것을 다 꺼내야만 했다. 그래서 온돌에 놓인 돌들을 들어내고 그을음을 꺼내야 하지만 힘이 없는 나로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긴 쇠줄에 헝겊을 동여매고는 그것을 온돌 사이에 쑤셔 넣은 다음 그을음을 앞으로 당겨서 작은 삽으로 퍼냈는데 엎드린 자세에서만 이 작업이 가능했으니 여간 힘들지 않았다. 마무리로 뜯어낸 온돌을 다시 메우는 작업은 진흙으로 해야 했는데 엄동설한에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찬물에 진흙을 이겨 온돌 사이를 메우는 것이 당시 어린 나에게는 너무도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못하시지, 동생들은 어리지, 정말 나 혼자서 너무도 힘들었다.
 
조금만 성숙한 나이였으면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을 텐데. 아직 엄마, 아빠의 그늘 아래 부모가 해주는 데로 생활해야 할 나이에 동생들을 챙기고 아프신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것이 나의 임무였고 내 어깨에는 점점 무거운 짐들이 쌓여만 갔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점점 가난에 쪼들리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기업소 일 때문에 지방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으며 봄이 되면 기업소의 비료 때문에 은덕군으로 가야만 했다. 비료 문제는 거의 해결되었지만 가난한 기업소에서는 거래 돈을 아버지에게 주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렇다고 그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으므로 집에 있던 녹음기며, 재봉기며 TV 등을 팔았고 그것도 모자라 잘사는 집에서 돈을 빌리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비료는 기차방통으로 기업소에 들어왔었고 비료 없어 헤매는 농장에 비해 기업소는 그해 농사 비료는 끄떡없게 되었지만, 결국 집의 살림은 쪼들리는데도 집의 재산을 기업소에 바친 셈이 된 것이었다. 더 이상 방법이 없었는지 아버지는 다시 여권을 떼어 중국으로 갔다. 중국에 사는 고모가 한국에 갔다가 돌아온 덕분에 아버지는 그곳에서 이것저것 많은 것을 가지고 오셨다. 그것으로 한동안은 어려운 생활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아버지가 빌린 돈 때문에 그 생활도 얼마 가지 못했다.
 
빚 꾼들은 아버지가 중국에 다녀왔다는 말을 듣고 매일 찾아왔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돈을 내주었다. 하지만 이자가 불어서 빌린 돈보다 더 많았기 때문에 그 이자만 갚는다 해도 아득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기업소에 찾아가 돈을 요구해 보았지만, 지배인이라는 사람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드디어 생각을 고친 모양이었다. ‘이렇게 하다가는 가족이 살아남지 못하겠구나!’하고 말이다. 북한 체재의 와해 조짐을 본 것 같았다. 북한 정권이 주민들을 노예로 담보 잡아 평양 주민들만 영화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북한 정권은 평양 주민 3백만 명을 살리기 위해서 나머지 2천만 명에게 노예나 다름없는 고된 생활을 시키고 있다.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식구들에게 중국으로 가자는 놀라운 말을 했다. 나는 물론 어머니와 두 동생들도 깜짝 놀랐다. 웬일로 중국으로 가려느냐고 묻자 아버지는 여기에서 이렇게 해서는 앉아서 굶어 죽는다며 하루가 멀다 하게 빚 꾼들이 오고 기업소에서는 나 몰라라 하는데 어떻게 살겠느냐고 했다.
 
중국에 가서 한국 방송을 들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남조선은 잘살고 있다고 했다. 우리의 생각에 남조선에는 거지만 있는 줄 알았는데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그런 아버지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나는 못 간다고 했다.
 
우리 가족의 고난의 그림자가 드디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연재3]자유찾아 천만리

탈북여성작가 지현아 씨의 수기

박영순기자2012.06.24 18:43:15
 


3장 탈북의 첫발을 내딛다.

 


드디어 시작된 탈북


“아버지, 전 못 가겠습니다. 전 죽어도 장군님과 조국을 배반하지 않으렵니다. 아버지, 우리가 왜 가야 합니까? 지금은 조금 힘들어도 나중에는 우리나라도 다 잘 살 겁니다. 조금만 견딥시다. 네~ 아버지….”

“순이야, 너 왜 그러니? 아버지도 그렇고 너의 엄마도 그렇고 다들 동의했다. 너만 응하면 돼. 여긴 앞날이 보이지 않아. 우리가 맨 날 풀죽만 먹으면서도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살아야 할 이유가 뭐니?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니? 아버지 말 들어라.”
 
“그래, 너의 아버지 말씀을 들어. 다들 가겠다고 하는데 넌 왜 그러니?”
 

우리 가족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주동적으로 중국으로 떠나려고 단단한 마음의 준비를 했다. 두 동생들도 동의한 상태였다.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왜 우리가 고향과 조국을 배반하고 배신자의 길로 가야 하는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다시 설득해 보려고 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동생들만이라도 설득해 보려 했지만 안 되었다. 할 수 없이 따라나서기로 하고 그날 밤을 지냈다. 아버지가 잠을 설치면서 뒤척였다. 엄마 역시 그랬고 나 또한 그랬다. 상황 파악을 못 한 두 동생들은 쌕쌕 잠만 잘 잤다. 이제 그 밤만 지나가면 우리는 북한 당국이 색출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의심의 행동들을 하게 될 것이었다. 소위 배반의 길이라고 하는 탈북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었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걸까? 다른 방법은 도저히 없는 것일까?
 
어머니가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도중 식사를 준비했다. 아버지도 함께 일어나서 부엌에서 어머니를 도와 불을 지폈다. 두 분은 말이 없었다. 부모님의 행동도 무거워 보였다. 화장실에 가려 문을 열었더니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그것도 솜처럼 푹신하게 내렸다. 먼 길을 가려면 오랜 시간을 걸어야 했기 때문에 도시락을 많이 준비했다. 집을 완전히 떠나기에 돈이 될 만한 물건(옷 등등)들을 죄다 팔아 쌀을 샀고 그것으로 도시락을 준비했다.

가족이 무리 지어서 함께 가다가는 발견될 것 같아서 아버지는 두만강 상류로, 우리는 두만강 중류로 건너기로 했다. 아버지가 먼저 떠날 준비를 했다. 뒤따라 우리도 준비를 하고 문을 열고 등을 돌려 서로 반대 방향 길로 걸어갔다. 뒤를 돌아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찼다. 순간 무언가 목구멍에서 울컥 치밀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당장에라도 아버지에게 뛰어가 ‘아버지!’하고 아버지 품에 안기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아버지는 그러는 나에게 빨리 가라고 손짓을 했다. 두꺼운 털모자에 수수한 옷차림에 헌 배낭을 메고 눈 속을 헤집으며 어린 자식들 생각에 발길을 떼지 못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알 것만 같았다. 걸으면서 팔소매로 눈물을 닦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나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다.
 
아버지는 일단 떠나려고 작정을 했기에 떠나기 전 기업소에 계속 돈을 요구하였지만 답은 없었다. 그로부터 아버지는 결심한 것 같았다. 성실하게 열심히 기업소 일을 해 왔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노릇이었고 이에 실망한 아버지의 결심은 탈북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었다.
 
어머니는 딸을 시집보낼 때 쓰겠다며 준비한 이불 등이랑 그릇 가지들을 모두 팔았다. 먹을 것을 장만하고 우리 삼형제는 건널 강 주변을 향해 걸어갔다. 언제까지 걸어가야 할지 몰랐다. 8살 되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손을 잡고 멀고 먼 길을 아장아장 걸어갔다. 밤새 쏟아져 내린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우리 네 식구는 그렇게 힘든 걸음을 걸었다. 아버지와의 약속은 이틀 안에 중국 땅에 들어가 약속된 집에서 만나는 것이었다.


국경경비대를 넘어
 

중국으로 가는 길은 국경지역이라 국경경비대 초소들이 줄지어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짐을 뒤지고 중국 물품이 나오면 꼬치꼬치 캐묻고 말을 제대로 안 하면 부대 안으로 끌고 갔다. 그때 우리는 중국에 친척이 있었던 덕분에 거의 중국옷을 입고 있었다. 턱 봐도 우리는 중국 사람들 같았다. 이런 우리를 순순히 보낼 것 같지 않았다.

걸으면 걸을수록 경비대 초소가 가까이 다가왔다. 도적이 제 발이 저리다고 마음이 떨리고 초조했다. 앞에 검열을 받는 사람들이 줄지어 나란히 서 있는 가운데 검열을 기다렸다.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어머니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동생들은 너무 꽉 쥐어 돌처럼 딴딴해진 눈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동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어머니가 나에게 다가왔다.
 
“이제 검열할 때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보면 중국에 있는 외할머니 진갑에 간다고 해라. 그리고 지금 빨리 동생들한테도 말을 해줘라.”
 
어머니가 깜짝 방안을 생각하신 것이다. 두 동생들에게 단단히 말을 해놓고 돌아서니 우리 차례가 되었다.
 
“등에 진 배낭들을 내려놓고 하나도 빠짐없이 다 꺼내놔!”
 
우리의 일행을 둘러보며 입은 옷들을 아래위로 훑어보던 경비대 군인이 우리에게 소리쳤다.
 
“예!”
 
나와 어머니는 군말 없이 메고 있던 배낭을 벗어 하나하나 꺼내놓았다. 꺼내어지는 것은 보기에도 엄청 많아 보이는 도중식사(도시락)와 중국 이불, 중국 세수수건, 중국 옷가지들이었다. 꺼내진 물건들을 바라보는 군인도 눈이 뎅그레졌다.
 
“너네 어디 가네?”
 
“아 네에. 중국에 있는 애들 외할머니 진갑에 갑니다.”
 
의심해하면서 물어보는 군인도 물건에 눈길을 떼지 못했다. 대답하는 어머니도 안절부절못하면서도 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다 걷어 넣고 따라와.”
 
드디어 걸려들었구나. 예상치 않았던 군인이 끝내 우리를 데리고 사무실 같은 데로 안내를 했다. 한 5평정도 되는 방에 의자와 책상이 있었고 책상 위에 책이 몇 권 있었다. 동생들도 잔뜩 겁에 질려 눈만 초롱초롱 뜨고 어머니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동생들의 두 손을 꼭 잡았다.

한 2분 정도 있었는지? 정치지도원 같은 사람이 들어와 책상에 앉더니 어디로 가는 도중이냐고 물어보았다. 우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때 내 나이 열아홉이 보기에도 잘 훈련된 사람이라고 짐작이 갔다.
 
“애들 외할머니가 중국에 계시는데 내일모레 진갑 잔칫날이랍니다. 그래서 친정집에 지금 가는 중이에요.”
 
어머니가 두려움이 담겨있는 가냘픈 목소리로 지도원의 질문에 대답했다. 어머니와 우리를 한동안 바라보던 지도원은 다시 남동생에게 물었다.
 
“지금 어디 가는 중이니?”
 
“외할머니네 집에 가요.”
 
“헌데 웬 중국옷들을 입었지? 니가 입은 중국 옷들은 어디서 난 거니?”
 
“우리 중국에 친척 있어서 아버지가 중국에 가셔서 가지고 온 옷들이에요.”
 
명국은 오돌차게 묻는 말에 대답을 했다.
 
“중국에 가서 옷을 가지고 와?”
 
“아 네에. 중국에 친척이 있어서 우리는 몇 년에 한 번씩 중국에 친척을 방문하러 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중국옷들이 많습니다.”
 
어머니가 질문을 잘 이해 못 하는 동생을 대신해 대답을 했다.
 
“음! 그래, 그럼 잠깐 밖에 나가 있으시오. 짐들을 좀 검사하고 들어오라고 하면 다시 들어오시오.”
 
“네에!”
 
우리는 검사를 해봐야 걸릴 것이 없을 건 뻔한 일이었기에 안심하고 복도에 나와 있었다. 5분 정도 지났을까? 문을 열고 들어오라는 지도원의 말에 들어가 보니 이젠 다 검사했다면서 짐을 싸고 갈 길을 가라고 했다.
 
천만다행이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세요!’하고 인사를 했다. 짐을 배낭에 다시 주워 담는데 수건 2개가 없어졌다. 보위부 지도원이 수건이 욕심나서 빼놓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저러나 별문제 없이 나왔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혹 철없는 동생들 입에서 실수의 말이라도 나올까 봐 두려웠었는데 동생들도 다행히 잘 대답을 해주었기에 천만다행이었다.


노부부의 민박집
 

어머니가 예상했던 곳에 거의 도착했다. 서울로 말하면 민박집이나 모텔, 여관 같은 집인데 북한에서는 그냥 길가는 사람에게 여기 하룻밤 묶어갈 집이 없는 가고 물어보면 가르쳐주는 정도이지 공개적으로 영업을 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 중 한 집을 찾아 들어갔다.
 
“계세요?”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니 웬 키가 너무 작은할머니가 나왔다. 한 눈에도 할머니는 난쟁이 같았다.

“누구슈?”

“아 네에. 여기서 하룻밤 지내려구요. 괜찮으시겠어요?”
 
줄줄이 늘어선 우리의 일행이 많은 걸 보더니 들어오라고 했다. 그 집에는 키 작은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이 살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기차가 자주 연착이 되기 때문에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그것도 자동차 길은 엇갈리기 쉬우니 기찻길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우리도 기찻길로 그곳까지 간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집에도 숙박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룻밤 숙박비가 얼마였던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저녁에 할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고 자리에 누웠다.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할머니네 집에서 조금만 가면 두만강이었다. 그것만 넘으면 중국이었다. 저 중국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아슬아슬한 두만강을 넘어야 한다. 아래 윗방으로 되어 있었는데 우리는 윗방에 잠자리를 잡았다. 아래 윗방 사이에는 벽이 아닌 미닫이로 된 문이 있었다. 미닫이 사이로 어머니가 할아버지,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할아버지, 값은 푼 하게 치르겠으니 어떻게 좀 도와주세요?”
 
“후~”

대통으로 담배 연기를 빨아 다시 내보내는 할아버지의 한숨 소리가 땅이 꺼질 듯 했다. 문제는 아버지와의 약속한 시간까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한순간이 무서울 판인데 아버지와의 약속이 끊기면 우리는 영영 만나지 못할 것인데 야단이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무엇을 어쩌겠는가? 그저 차분하게 기다리는 것이 최선인 듯했다.

별들이 초롱초롱 떠있는 것이 할아버지네 비닐 창문을 통해 보였다. 북한에서는 유리가 귀해 비닐로 창문 유리를 대용했다.
 
아버지는 잘 건넜을까? 많은 사람들이 중국에 갔다가 붙잡혀 와서 엄청난 고생을 했다는데 혹 아버진 붙잡히지 않았을까? 지금쯤 아버지는 어디서 무엇을 할까? 하는 생각만 머리에 꽉 차있었다. 제발 우리가 하고자 하는 목적이 무탈하게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빌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연재4]자유찾아 천만리

탈북여성작가 지현아 씨의 수기

박영순기자2012.06.25 01:01:40
 


3장. 탈북의 첫발을 내딛다.
   
성경과 노부부의 기도 
 

동생들은 지쳤는지 쌕쌕 잠이 들고 어머니도 힘들었는지 곤하게 잠을 청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자니 벌써 새벽 4시가 되었다. 갑자기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주무시는 방에서 소곤소곤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미닫이 사이로 가느다란 한줄기의 등잔 불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너무 궁금한 터라 좁은 틈 사이로 나의 오른쪽 눈을 가져다 대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등잔불을 켜놓으시고 무릎을 굻고 두 손은 모아 쥐고 머리를 숙인 상태에서 뭐라고 자꾸 중얼거렸다. 도대체 뭐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기도합니다.’ ‘도와주옵소서.’ 이런 단어들은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갑자기 뭔가 이상했다. 예전에 어머니가 동네 언니랑 함께 불법으로 도강을 해서 중국의 농촌에서 일해주고 하루에 돈을 10원 받고, 아니면 쌀을 한 배낭씩 메고 온 적이 있었다.
  
그때 한번은 어머니가 중국 조선족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으면 쌀을 한 배낭 주고 또 돈을 준다는 소리를 하신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나는데 ‘구약성경’을 작게 만들어서 어머니가 가지고 온 적이 있었다. 북한에서는 수첩이 너무도 귀한 때라 난 그것을 수첩처럼 사용하려고 펼쳐 들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했다….” ‘이건 무슨 책일까?’하는 생각에 대충 책을 펼쳐 보았지만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말이었다. 북한에서를 그런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꺼내기만 해도 죽음을 면치 못하기에 그냥 접어버리고 말았다. 난생처음 그때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성경책에서 보았다.
  
아버지는 그때 출장 중이었고 어머니는 그때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집에 없었다. 하루는 보위부 지도원이 나를 찾는다는 연락을 받고 지도원을 찾아갔다.
 
“너 할 말이 없니?”
 
뜬금없이 할 말이 없느냐고 물어보는 보위부 지도원의 말에 괜히 떨렸다. 혹시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것이 아닌지 궁금했다. 요 며칠 사이의 일들을 그 짧은 순간에 죄다 되돌려 보았다.
 
“없습니다!”
 
“없다고? 흠~ 너 거짓말을 하면 나한테 죽을 줄 알아라. 들었니?”
  
두 눈을 부릅뜨고 나에게 협박을 하는 것이 꼭 호랑이 같았다. 난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짐작했다.
 
“네!”

나지막하게 대답을 하는 나의 목소리는 두려움이 한껏 담겨져 있었다.
 
“정말 할 말이 없는 거지?”
 
“네! 없습니다.”
 
“없다! 너 남조선 안기부와 내통하지?”
 
의자에 앉은 나를 눈여겨보며 어지러울 만큼 빙빙 걸어 다니는 보위부 지도원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안기부라니요? 전 전혀 그런 적이 없습니다.”
 
“야! 그럼 이게 뭐야?”
 
책상을 쾅 두드리며 나에게 삿대질하며 꺼내놓은 것은 다름 아닌 그 수첩(구약성경)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저게 어떻게 여기에 있을까?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너 이래도 잘못한 것이 없어? 바른대로 말해. 너 오늘 솔직하게 말을 안 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으름장을 놓는 보위부 지도원은 목 단추까지 열어젖히며 땀을 뺏다. 난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저 수첩이 어떻게 되어 여기까지 날아오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최소한은 내가 살아야 했다.

  
“지도원 동지, 사실 저거 동굴 앞에서 주웠더랬습니다. 수첩이 없었던지라 그냥 주워서 옷 주머니에 넣고 집에 와보니 저런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도원 동지한테 신고하려고 했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했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야!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내가 모를 줄 알아? 너 남조선 사람하고 만나서 무슨 이야기 했어?”
 
정말 난감했다. 내가 무슨 대단한 인물이라고 북한 간부들도 생각 못하는 남조선사람을 내가 어떻게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그런 질문을 들이대는지 어이가 없었다.
  
“전 남조선 사람을 만난 적도 없고 이야기해 본 적도 없습니다. 전 그냥 그 수첩을 주웠을 뿐입니다. 정말입니다.”
 
“잘 생각하고 조금 있다가 내가 다시 왔을 때 그때까지도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넌 감옥이야!”
  
이게 웬 말인가? 그 수첩이 이렇게 사람 목숨을 살리고 죽이고 하는데 엄마는 저걸 왜 가지고 왔을까? 그 순간 어머니가 미워졌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1시간 정도 지나니 보위부 지도원이 들어왔다.

  
“다 생각핸?”
 
“지도원 동지, 저 정말입니다. 왜 제 말을 믿어주지 않으십니까? 정말 전 억울합니다.”

“흠! 정말 너 저걸 주운 거니?”
 
“예! 주웠습니다. 그것도 동굴 앞에서 주웠습니다.”
  
당시 우리 마을 아래에는 기찻길이 있었고 자그마한 기차 굴도 있었다. 우리는 그 기차 굴을 동굴이라고 불렀다.

  
“너 주었으면 신고부터 해야 할 거 아니야? 이게 뭔지나 알고 주워 들고 다녀? 하늘같으신 우리 장군님이 아닌 다른 신을 믿는다는 것이 말이나 돼?”
 
“잘못했습니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너 또다시 한번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때는 용서 못한다. 나가 빨리!”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몇 번이고 인사말을 하고는 무시무시한 보위부 지도원 사무실을 나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너무 낯설지만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어서 그런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걱정이 되었다. 만일 그 모습을 보위지도원들이 보았다면 어떻게 될까?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아마 죽였을 거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지금 생각하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하는 것은 기도였다. 하나님께 기도를 했던 것이었다.
 
똑 똑 똑…
 
“누기요?”
 
“아바이 납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기도가 한 15분 정도 시작됐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웬 아줌마 두 명이 들어왔다. 배낭에 뭔가가 가득 담겨져 있었고 그들의 옷은 흠뻑 젖어 있었다.

“어우, 힘들다. 아바이 잘 있었음두?”
 
“난 잘 있었소. 어떻게 일은 잘됐소?”
 
“예! 모든 게 잘 됐고 넘어올 때도 잘 넘어 왔으꾸마.”
  
할아버지와 아줌마들의 대화 속에서 난 이들이 중국을 다녀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도대체 할아버지네 집에서는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또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될까?

 

 

 

 

 

[연재5]자유 찾아 삼만리

탈북여성작가 지현아 씨의 수기

박영순기자2012.06.25 15:26:00
 


3장. 탈북의 첫발을 내딛다.
  
 
나는 늦게 잠든 덕으로 아침에 늦게까지 잠을 잤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씻고 나서 식사준비를 했다. 아줌마들이 하이얀 쌀밥을 솥에 해놓고 주걱으로 젓고 있었다. 오랜만에 맛있는 밥을 먹게 되는 것 같았다. 동생들도 좋은지 웃으며 밥을 먹었다.
  
갑자기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무서웠고 넉살 좋은 아줌마들이 무서워졌다. 어젯밤의 일로 모두가 이상한 사람들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마친 할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며 밖으로 나가더니 한참을 있다가 들어왔다.
  
“아, 내일 모레 저녁에 가야 한다. 헌데 돼지고기 1킬로 그람에 빵 10개, 술 두 병을 사서 강을 건너 보내주는 군인에게 가져다줘야 한단다.”
 
우리 식구 네 명이 건너는데 이 정도 뇌물은 너무도 싼 것이었다.
 
“네!”
 
당시만 해도 한창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이 많던 때라 군인들도 배고픔에 허덕이었다. 대아사가 발생하던 시기라 군대 식사도 말이 아니었다. 어느 군인은 머리카락이 노랗게 변해 거의 다 빠지고 몸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했다. 그렇다 보니 두만강을 건너게 해 주고 그 대가로 음식을 얻는 군인들이 생겨났다.
  
두만강 주변에 사는 주민들 또한 중국으로 가려는 사람들을 그 군인들에게 알선해 주고 알선비를 받으며 살았던 것이다. 당시 내 생각으로 거의 다 그렇게 하며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네 집에는 새벽이나 밤에 중국에 다녀 온 사람들이 등에 한 배낭씩 짊어지고는 들어와서 하룻밤 자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어머니와 동생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저녁에도 자지 않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또 무슨 행동을 하는지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새벽 4시가 되니 등잔불을 켜는 소리가 났다. 나는 재빨리 일어나 미닫이 문틈 사이에 눈을 가져갔다. 무릎을 꿇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어제와 똑같이 두 손을 모아 쥐고 눈을 감고는 무언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행동이 이해가 안 갔지만 좀 정신 나간 사람들이 아닐까? 아니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영화 “춘향전”에 나오는 춘향이 엄마처럼 물 한 사발 떠놓고 두 손으로 싹싹 비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하는 것일까? 나의 경험으로는 너무도 무서운 일이었다. 예전에 보위부 지도원한테 하나님이라는 세 글자 때문에 얼마나 혼났는데 저럴까?
  
우리는 할아버지 집에서 밥도 하고 청소도하고 물도 길었다. 북한은 상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다른 곳은 몰라도 내가 다니며 보았던 곳들은 거의 다 물을 길어 먹었다. 그리고 하수도 시설도 되어 있지 않으니 집 문 밖에 있는 터전에 물을 버리곤 했다.
  
터전이 없는 집들은 버릴 물을 따로 모아두었다가 도랑에 버리고 오곤 했다. 우리 집도 그렇게 살았다. 그 민박집 주변 주민들은 두만강이 가까웠기 때문에 두만강 물을 길어다 먹었다.
  

아버지와의 약속 장소
  

우리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친해졌고 동생들의 모습도 밝아졌다. 드디어 기다렸던 두만강 도강의 날이 왔다. 어머니는 장마당에 가서 돼지고기, 빵, 술을 사 들고 와서 할아버지께 드렸다. 그걸 받은 할아버지는 우리를 넘겨줄 군인을 만나고 와야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빨리 준비를 하라고 했다.
  
나와 동생들은 옷을 두툼하게 입고 떠날 준비를 했다. 난 몹시 떨렸다. 도대체 우리 앞에 무슨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문이 열리더니 할아버지가 총을 메고 털모자를 꾹 눌러 쓴 군인을 데려왔다.
  
“야가 자네들을 건너보낼 애네. 잘 상의하고 조심히 가게. 얼른 따라가게.”
 
“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어머니와 우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군인을 뒤따라갔다. 눈이 많이 내려 무릎까지 찼다. 우리는 눈 위에 생긴 작은 오솔길을 따라 갔다. 벼랑 같은 낭떠러지에 미끄러져 내려지더니 군인은 그곳으로 내려오라고 했다. 어머니와 나는 동생들을 꼭 잡고 조심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제부터 명심해 들으세요. 겨울이니 강이 얼었어요. 언 강에 들어서면 빨리 걸어가야 해요. 자, 건너가세요.”
 
“네! 고맙습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우리 식구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른 걸음을 걸었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오직 들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만 있었다. 들키면 그저 죽는다 하는 생각에 재빠르게 행동했다. 낮에 보았던 두만강 늪지대의 폭은 생각보다 넓었다. 들키지 않으려는 아슬아슬한 순간의 초조함 때문에 넓게 느껴졌는지는 몰라도 빨리 중국 땅에 도착하고 싶다는 생각에 더욱 그런 것 같았다.
  
우리는 무사히 중국 땅에 도착했고 아버지와 약속한 집을 향해 걸어갔다. 아버지와 약속한 집은 그곳으로부터 엄청 멀었다. 3~4시간 동안은 걸어야 했다. 나와 어머니는 괜찮지만 두 동생들이 걱정이었다. 그래도 걱정했던 동생들이 잘 따라 나서줘서 고맙고 대견했다.
 
찻길을 따라 가는데 그 야밤에 무슨 차들이 그렇게 많이 다니는지 알 수 없었다. 차가 멀리로부터 불을 밝히고 오는 것이 보이면 재빨리 옆에 있는 눈 무지에 엎드려야 했다. 길 주변에는 인가가 없기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없었다. 산에 길을 만들었기에, 또 중국 사람들도 한국처럼 차가 있으니 걸어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때문에 걸어 다니는 사람, 특히 밤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그 변경지역에서는 무조건 탈북자로 생각했다.
 
공안 차가 하루에도 몇 십번씩 변경지역을 다니면서 탈북자들을 색출하였기에 걷는 것도 조심해야 했다. 다행히 그다지 춥지도 않고 바람도 불지 않는 날씨라 동생들을 데리고 걷는 데는 그리 큰 문제가 없었다. 생각한 시간대로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어머니가 평소에 도강했을 때 알아둔 집이어서 찾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곧장 그 집을 찾아 문을 두드렸다. 불이 꺼진 상태고 또 한밤중이기에 옆집에서 알지 못하도록 조심해서 소리를 내야 했다.
  
“똑! 똑! 계세요?”
 
주인은 깊이 잠이 들었는지 몇 번 문을 두드리고 나서야 불이 켜지고 문이 열렸다.

“누구세요?”

“저예요! 알아보시겠어요?”
 
“아~ 네에. 얼른 들어오세요.”
  
주인은 여자였다. 그는 우리를 들여보내 놓고 주변을 살피더니 재빨리 들어와서는 문을 걸었다.

“저의 애들 아버지는 어데 계시는지요?”
 
“아~ 그게, 지금 그분은 안계세요. 어디 가셨는지 모릅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왜 약속된 날짜와 시간에 오지 않았습니까? 여기도 지금 공안들이 집집마다 조선에서 온 사람들이 있는지 확인하고 있어요. 들키면 벌금 5천원을 내야 하는데 어떻게 오랫동안 있겠습니까? 약속된 날짜까지도 숨어 살았습니다. 공안들이 너무도 많이 다니기에 먼저 떠났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와 헤어졌으니 이젠 어떻게 한단 말인가? 현관에 문이 없는 신발장에 아버지가 신고 가셨던 신발이 보였다.

 

 

 

 

 

[연재6]자유 찾아 천만리

탈북여성작가 지현아 씨의 수기

박영순기자2012.06.26 08:59:11
 


3장 탈북의 첫발을 내딪다.
 

 

“저거 우리 아버지 신발인데….”
 
“그래 아버지가 신을 바꾸어 신고 가셨어. 저 신발이 꿰졌기에 내가 집에 있는 신을 신겨 보냈다.”
 

그랬다 아버지는 집집마다 수색하는 공안들 때문에 숨을 조이며 이 집에 있다가 약속된 날짜가 되었는데도 우리가 오지 않자 주인에게 등을 떠밀려 떠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왕 이렇게 온 바에 우린 조선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우리를 시내까지 가게 해주세요. 중국에 친척이 있으니 한번 찾아도 보고요.”
 
불안과 공포의 시작
 

어머니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주인에게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집주인에게만 의지한 채 엄마의 질문에 대한 주인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던 주인이 기다리라며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접니다. 여기 지금 조선에서 온 사람들이 있는데 은신처가 없습니다. 시내까지 가게 해달라는데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요? 네…, 네…, 그리로요? 네에, 알겠습니다.”
 

무언가 좋은 소식이 있을는지 기대가 되었다.
 
“연길에 있는 교회 목사님에게 전화를 했더니 연길에 있는 한 농장에 콩밭이 있는데 거기에 집도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 잠시 있으라고 하면서 내일 연길로 오라고 하네요.”

 

다행히 우리에게 신경 써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네, 고맙습니다. 집사님!”
 

어머니는 집주인을 집사님이라고 불렀다. 당시만 해도 난 집사가 뭔지도 몰랐고 교회가 무언지도 몰랐다.
 
“여기서 주무시고 내일 떠날 마음의 준비도 하시구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주인은 우리에게 작은 방을 내주고 갔다. 지금 생각하니 방에는 침대와 예수님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벽에 옷가지들이 걸려 있었다.
  
“얼른 잘 준비들 하거라.”
 
우리는 잠자리를 준비하고 침대에 가지런히 누웠다. 내일 무사히 목적지까지 도착하게 해달라는 마음속의 바람을 어떤 신에게 이야기하고 잠이 들었다.
 

부엌에서 된장국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배가 고픈지라 음식 냄새를 금방 알아챘다. 눈을 떠보니 어머니가 일어나셔서 이불을 정돈하고 있었고 동생들도 어렴풋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옷을 입고 된장국 냄새를 따라 가보니 주인이 밥을 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탈북한 이후 중국에서의 첫 음식이었다. 동생들도 맛있는지 정신없이 먹었다.
 

“이젠 차 시간이 거의 다가오니 옷들을 챙겨 입고 갈 준비를 합시다. 그리고 버스에 앉아서 절대로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는 조선 사람이라고 하면 바로 고자질해 잡혀가게 합니다. 그러니 말을 절대로 하지 말고 무서워하지도 말고 그냥 태연한 척해야 합니다.”
 

버스 안에서 주의할 점들을 이야기하는 주인은 가는 길에 단속 초소가 몇 개 있는데 조선 사람들이 너무 많이 건너오기에 지나가는 차들을 세워 조선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잡아간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더욱 무서웠고 떨렸다. 하지만 가야 할 길이기에 일단은 떠나야만 했다.
 

식사를 마친 우리의 일행은 태연하게 웃으며 집 문 밖을 나와 사람들이 많은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누가 봐도 우리는 다정할 만큼 태연한 자세였다. 밤에 봤던 마을들이 새롭게 여겨졌다. 기와들의 색깔과 집주인들의 모습, 가로수들과 잘 정돈된 밭들이 지저분한 북한과는 비교되었다.
 

멀리서 버스가 오는 것이 보였다. 난 긴장했다. 동생들도 긴장한 모습이었고 어머니도 아까 나올 때의 태연한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뒤를 이어 버스에 올라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도와 달라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기도라는 것을 해보았다.
 

나의 기도는 너무도 간절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기도라는 것을 몰랐다. 간절한 그 마음이 기도인지는 몰라도 나의 마음속 우상은 그때 작은 수첩(구약 성경)에 쓰여 있는 하나님이었다.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부탁입니다!”
 

버스는 떠났다. 말이 많은 한족들의 수다 소리가 귓전을 시끄럽게 했다. 10분, 20분, 30분, 35분 시간은 흘러갔지만 그때까지는 일이 터지지 않고 순조로웠다. 조금 여유가 생겼지만 두려움으로 가득 찬 마음은 좀처럼 그 여유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40분, 45분이 지났다.

 

아!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드디어 무서웠던 그 단속 초소가 눈에 띄었고 버스는 세워졌다. 총을 멘 공안 두 명이 구둣발 소리를 울리며 열리는 버스 문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난 동생의 손을 꼭 쥐었다. 손에는 땀이 나고 심장은 너무도 빨리 뛰었다. 동생도 무서웠는지 얼굴 표정이 굳어지고 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우리 식구 앞에서 공안의 눈길이 멈춰 섰다. 끝났다! 올 것이 왔다.
 

공안은 나한테 다가와서는 중국말로 뭐라 뭐라고 물어보았지만 난 대답을 못했다. 버스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 쪽으로 쏠렸다.
 

“일어나시오! 갑시다!”
 
공안은 다름 아닌 조선족이었다. 주인아줌마는 눈길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럴 때는 주인아줌마를 모르는 척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는 척했다가는 주인아줌마까지도 다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줄줄이 공안을 뒤따라 내렸고 대기하고 있던 차에 실려졌다. 이렇게 아버지도 찾지 못한 채, 중국에서 하루 만에 붙잡히고 말았다.
 

추운 겨울 날씨는 차가운 우리 마음과 몸을 더욱 춥게 만들었다. 차 안에는 두 쌍의 부부가 있었다. 남자들은 여자들을 안고 여자들은 남자들의 품에 안겨서 한없이 울어댔다.
 

한 여자는 임신을 했는지 배가 불룩했다. 우리 식구도 맨 뒤에 있는 의자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고 어머니와 나는 각기 동생들을 안고 있었다. 운전대 칸에는 운전자와 높은 간부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이 변방대 군복을 입고 운전자와 무어라 중국말로 대화하면서 우리에게 중국 음식인 마화(밀가루를 반죽해 기름에 튀긴 중국음식)를 주면서 먹으라고 했다. 받긴 받았지만 먹고 싶지 않아 그냥 가방에 넣었다.
 
차는 계속 달리고 달렸고 지나가는 길옆에 드물게 보이는 중국 사람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차를 비켜섰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대로 북한으로 가는지? 아니면 다른 어디로 가는 건지 몰랐다.
 

 

 

 

 

 

[연재7] 자유 찾아 천만리

탈북여성작가 지현아 씨의 수기

박영순기자2012.06.28 00:34:10
 


4장. 참혹한 사랑
 
차는 한참을 쉬지 않고 달렸다. 달리던 차가 어느 큰 건물 앞에 서자 문이 열리며 내리라고 했다. 물론 한 쌍의 부부도 함께 내리라고 했다. 변방대 건물의 마당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눈이 덮인 건물의 정문 밖과는 달리 눈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감도는 기운은 죽음의 계곡처럼 음산했다.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부부의 기구한 이별
 
중국 변방대 군인들은 청사 안에 들어선 부부의 사이를 남녀로 갈라놓았다. 그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갈라지지 않으려고 서로 손을 잡고 울고 우는 부부에게 변방대 군인들은 곤봉으로 남자를 때리며 억지로 갈라놓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나의 눈에서도 눈물이 났다.
  
우리는 어떤 군인의 안내로 쇠창살로 된 창문 옆 출입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중국으로 들어오는 탈북자들을 수감하는 변방대였다. 그곳에는 어린아이부터 시작해 연세 높은 할머니까지 있었는데 그 수는 약 20~30명가량 되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그들은 일제히 우리를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은 뛰어놀고 있었고 어른들은 아직 그곳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에게 어떻게 해서 잡혀 들어오게 되었냐고 물었다.
  
어머니가 그들에게 열리지 않는 입을 열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안에는 뚜껑이 있는 빨간 큰 통이 있었는데 그것은 화장실 대용으로 쓰는 것이었다. 파아란 담요들과 분홍색 밥그릇들이 여기저기 널려져 쌓여 있었지만 그래도 방안은 춥지 않고 따뜻했다.
  
바로 앞방은 남자들을 수감하는 방이었는데 쇠창살로 된 창문에 우리와 함께 들어왔던 임신한 언니가 서서 쇠창살을 꼭 쥔 채 울고 있었다. 그 울음이 너무 처량해서 방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없이 울며 앞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잠시 후 “오빠~”하며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앞방 창문에서 그 언니의 남편이 내다보며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둘은 서로 잡지도 못하는 손을 내밀어 울었다. 그러기를 3분 정도 지났을까? 복도를 오가며 근무 중이던 변방대 군인이 남자를 향해 제자리로 돌아가 앉으라고 곤봉을 휘둘러 대며 소리를 쳤다.
  
부부는 눈으로나마 서로 바라볼 수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못 하게 되었다. 여자는 더더욱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한 할머니가 보다 못해 물어보았다.
  
“에그 쯧쯧. 거기 임신한 상태에서 몇 끼씩 먹지도 못했을 텐데 왜 그렇게 서 있소. 어서 앉소. 눈이 다 붓고 말이 아니구먼.”

언니의 눈에선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어떤 먼 사연이 있는지 좀 말해보오.”

 
안타까운 마음의 할머니는 또 말을 건넸다. 나도 궁금했던지라 그 언니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드디어 그녀는 입을 열었다.

청진이 집인 그녀는 하루아침에 부모들이 다 굶어 죽었고 하나밖에 없던 여동생은 장사한다고 나간 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역전에서 사탕 장사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누군가로부터 중국에 간다는 말을 듣고 따라나서 중국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두만강을 건너느라 다 젖은 옷을 말리려 아무 집이나 문을 두드렸다.
  
“여보세요, 계세요?”

“누구세요? 들어오세요.”

물창제비가 된 그녀는 부끄러웠다.
 
“어서 올라오세요.”
  
그 집에는 30살 되는 젊은 총각과 그의 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그 후 총각과 그녀 사이에 사랑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애도 낳고 옹기종기 잘 살려던 그들의 꿈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처럼 공안에 붙잡혀 감방에서 북송을 대기하고 있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었다. 그녀는 입술이 마르다 못해 피가 줄줄 나오고 하루 종일 울어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체네(처녀), 이젠 좀 앉소. 후~ 말을 들어보니 정말 기구한 운명이군. 하나님이 도우셔서 두 사람이 같이 살게 하면 얼마나 좋을꼬….”

할머니는 팔소매로 두 눈을 훔쳤다.

“제 거기 서서 노래나 한마디 불러보오.”
  
감방 안은 어느새 조용하고 슬픈 기운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출입문 창살을 꼭 쥐고는 앞에 있는 남자 감방을 바라보며 조용하게 맥없이 노래를 불렀다.
 
하얀박 꽃이 피는 내 집은 어데 일까
 
엄마 손잡고 노래 부르던 내 살던 고향 집은
 
높은 산 올라서서 어디를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아 보이지 않아
 
내 살던 고향 집은
 
그녀가 울면서 노래를 한 소절 한 소절 부르는 사이 두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순간 감방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우리를 다 나오라고 했다. 드디어 북한에 넘겨 보내질 시간이 된 것이었다.
 
 복도에 나가자 북한 여자들과 함께 살던 조선족 남자들도 풀려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많은 북한 여자와 조선족 남자들이 붙들고 울었다. 그 속에는 그 언니와 그녀의 남편도 있었다. 할머니랑 우리 가족이 울면서 차에 오르는 동안 한편에서는 변방대 군인들이 그들을 갈라놓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드디어 북녘 여자들은 차에 태워지고 조선족 남자들은 버스 창문을 붙들고 통곡했다. 그런데 유독 그 언니 부부만은 차에 타지 않은 채 그때까지도 서로 붙들고 떨어지지 않았다.
  
“안돼, 난 못 보내. 널 보내지 못 한다구….”

“오빠, 나 꼭 살아서 돌아올게…. 오빠~~”

족쇄에 묶인 언니의 두 손을 남편은 놓지 않았다.

“정희야, 안돼. 오빤 널 못 보내~ 못 보낸다구.”

  
변방대 사람들은 그들을 떼어 놓으려고 파리 떼처럼 달라붙었지만 힘이 장수인 남편은 언니를 놓지 않았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변방대의 한 군인이 몽둥이를 가지고 와 남편의 등을 내리치려 했다. 그러자 언니가 “안돼요~ 내가 차에 올라갈게요. 오빠, 나 갈게…. 힘들어 하지 마. 꼭 다시 돌아올게…. 애기도 건강하게 다시 함께 돌아올게. 기다려~”

  
그녀는 남편의 손을 놓고 차 안으로 올라왔다. 버스 안에서 바라보던 우리는 안타까웠다.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어쩔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말리는 변방대에도 불구하고 언니의 남편은 그를 물리치고 버스 안에까지 올라왔다. 갑자기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 족쇄를 채운 손을 하늘 높이 올리며 말했다.
  
“야, 이놈들아. 너희들도 사람이냐? 저렇게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걸 억지로 떼어 놓는 게 그리도 좋더냐? 이 체네를 풀어주면 안 되겠소?”
 
할머니가 울며 말하는 바람에 우리 모두가 일어나 간절히 그래 주기를 바랐건만 잔인한 중국 변방대 군인들은 거들떠보지도 듣지도 않고 버스에 올라 있는 남편을 발로 내팽겨 밖으로 내보내고 두 군인에게 언니를 양쪽에서 붙잡게 하고는 그곳을 떠났다. 남편은 떠나는 버스의 뒤를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그 언니는 자신을 붙들고 있는 두 군인을 뿌리치고 뒤쪽 창문에 앉아 울면서 창문만 어루만졌다.
  
“오빠, 미안해~ 꼭 기다려…. 흑흑….”

일주일 동안 단 한 끼도 먹지 않은 언니는 쓰러질 만큼 지쳐 있었다. 우리는 중국 변방대 군인들의 감시 하에 손에 수갑을 채운 채 중국 남평 세관으로부터 북한 칠성리 세관을 향해 갔다. 버스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나의 머리는 너무나 복잡했다.
  
이제 우리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우리한테 내려지는 처벌이 과연 어떤 것일까? 버스 안의 기분은 그야말로 위축되어 있었다. 남편과 갈라진 그 언니는 계속 울고 있었고 다른 탈북자들의 얼굴은 어두운 그늘과 두려움에 쌓여 있었다. 가슴 속은 다들 까맣게 타들어 가는 듯 했고 앞으로의 일들이 걱정되었다.
  
이 순간이 지나면 나의 인생은 아니 내 운명은 어떻게 될까? 과연 이게 현실일까?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고 오직 당과 수령에게만 충실해 오던 나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연재 8] 자유 찾아 천만리

탈북여성작가 지현아 씨의 수기

박영순기자2012.06.30 00:14:23
 


4장. 참혹한 사랑
  
다시 북한으로
 
이제 난 조국의 배신자가 된 것이다. 이것저것 걱정에 걱정을 거듭하던 나는 드디어 북한 칠성세관에 거의 도착했음을 느꼈다.
 
벌써 창 밖에는 군복을 입은 보위부 사람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주런히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고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 내리는 눈을 뚫고 맞받아 나가던 버스는 어느 긴 다리 위에서 멈춰 섰다.
 
버스 문 앞에는 군복을 입은 북한 군인들이 서 있었다. 북한 보위부에서 마중 나온 것이었다. 그 모습에 버스 안의 사람들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공포의 두려움이었다.
 
버스 문이 열리면서 한 명 한 명 버스에서 내리는 우리들의 수갑이 변방대 군인들의 손에 의해 벗겨지더니 곧바로 녹이 슨 북한 수갑으로 바꿔 채워졌다. 북한의 수갑이 반짝반짝 윤이 나는 중국의 수갑과 대비되었다.
 
나는 맥이 다 빠진 언니를 부축했다. 우리 중에는 남자들도 있었다. 세관 안에 들어가자 넉 줄로 서라고 하더니 주머니를 수색하겠다고 했다. 내가 언니를 부추겨 주머니 수색을 받았는데 한 남자가 담배를 감추고도 없다고 한다며 우리에게 건강 뽐프(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것)를 100번 하라고 시켰다.
 
내가 언니가 지금 임신한 상태이니 어떻게 좀 봐달라고 했지만 “야, 이 개 간나야! 똥떼 놈 종자를 배구 무슨 봐달라고 하냐? 뽐프 100번 해.”하는 날카로운 보위지도원의 말에 나는 언니의 손을 꼭 잡고 뽐프를 시작했다.
 
언닌 이제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 스물셋, 스물넷…. 마침내 언니가 정신을 잃었다. 버스를 같이 타고 온 아줌마들과 할머니도 달려와 정신 차리라고 했지만, 그녀는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언니 일어나…. 그래야 아저씨 보러 다시 가지. 아저씨가 기다리잖아~” 난 울며 언니를 흔들어 보았지만 끝내 일어나질 못했다. 며칠 동안 먹지도 못하고 임신한 몸으로 겨우겨우 버텨오던 언니는 입술도 마르고 두 눈 주변이 거멓게 되어 있었다.
 
갑자기 군용 담가가 오더니 언니를 싣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이게 바로 북한 탈북자들과 조선족들의 참혹한 “국경의 사랑”이다.
 
언니와 아저씨만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 변방대에 의해 갈라졌다. 부부가 함께 살고 싶어도 국경 때문에 이루지 못하고 끝끝내 갈라져야 하는 것이 국경의 사랑이었다.
 

 

 

 

 

[연재 9] 자유 찾아 천만리

탈북여성작가 지현아 씨의 수기

박영순기자2012.06.29 00:23:14
 


5장 생이별의 아픔
  
만날 수 없는 아버지
 

우리 가족의 이별에 대해 말하고 싶다. 아버지와 중국으로 도강하기 위해 헤어지고 나서 지금껏 아버지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북한에도 잡혀 들어오지 않았고 중국 땅에서도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중국에서 흑룡강에 있는 고모들을 찾는 데만도 몇 년이 걸렸다. 겨우 고모를 찾아 아버지 소식을 물으니 아버지는 술에 거의 절어 있었다고 했다. 청소하는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작은 셋집도 마련해 주었다고 하면서 고모는 말을 이었다.
  
“헤구~ 너희 아버지가 얼마나 답답한지 너희들과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어느 하루도 울지 않은 때가 없었다. 항상 밤이 되면 술에 취해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며 너희들의 이름을 부르며…, 얼마나 울어댔으면 그 집에서는 내게 전화를 해서 너희 아버지를 좀 데려가 달라며 너희 아버지의 울음소리에 너무 시끄러워 살 수가 없다고 했다. 너희 아버지는 너희들의 이름을 되풀이해 부르면서 정말이지 많이도 울었다. 흑흑….”
  
고모도 눈물을 훔쳤다. 그 후 아버지는 항상 쓰레기 밀차를 끌고 다니곤 했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모습이 보이질 않아서 이리저리 찾아보았지만 끝내 아버지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얼마나 가족이 그리웠으면 술을 마시고 남의 집 대문 두드리며 울었을까? 아버지가 너무 그립다. 사무치도록 보고 싶고 그립다.
  
아버지는 온갖 재주가 많아서 바이올린, 나팔, 기타, 피리, 북 등등 못하는 악기가 없었다. 북한에서 혼자 악기를 연습한 아버지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선동대에 들어가 연주자, 지휘자로 활동했었다. 수산사업소에서 아버지는 별로 힘든 일을 안 했던 걸로 알고 있다.
 
러시아에 공연을 자주 갔다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가끔 술을 마시고 어머니에게 주정은 부렸지만 그래도 그것이 어머니가 미워서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도 가족이 모두 중국에 있고 홀로 북한에 나와서 평생 그리움을 안고 살았으니 그 그리움의 화풀이를 어머니에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난 단 한 번도 아버지에게 “사랑합니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리했던 것이 너무도 마음에 걸린다. 지금 아버지가 있다면 아버지에게 무엇이든 다 해 드리고 싶다. 우리와 헤어질 때 눈물만 보이던 아버지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아버지와 이별한 것도 모자라 나는 어머니와 여동생, 남동생하고도 이별했다.
 
무산 보위부에서 이런저런 조사를 받은 우리는 어린 두 동생 때문에 관대히 용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큰 벌을 받을까 걱정했는데 그만하면 정말 다행이었다.
  
그 당시 중국으로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탓에 애들이나 가족들은 그래도 관대히 용서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 집까지는 한 150리는 족히 되는 거리였다.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는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근심이 가득한 어머니의 얼굴색은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어머니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의 벌어질 일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두 동생은 길 위에 쌓여진 눈을 가지고 눈싸움도 하면서 웃으며 걸어갔다. 어린 두 동생은 힘들다는 말 한번 안 하고 걸었다.
  
그렇게 이틀을 어린 두 동생과 어머니와 함께 걸어 도착한 우리에게 마을에서는 또다시 무서운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가 중국에 도강한 사실을 무산 보위부에서 우리 기업소에 알려주었기 때문에 여맹회에서 어머니를 찾았고 기업소 청년조직에서는 나를 찾았으며 학교에서는 두 동생을 전교 학생들 앞에 세워놓고 사상투쟁회를 벌였다.
  
우리 가족 모두가 조국의 반역자로 낙인이 찍혔기 때문에 마을의 어느 곳에도 발붙일 곳이 없었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우리의 눈에서는 한없이 한없이 눈물이 흘렀다. 고향에서 버림받은 가족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집안을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예전엔 중국에서 가져온 물건들이 조금 있었는데 그것마저 도둑이 다 가져가 버렸다. 우리가 중국으로 도강한 이후에 도둑을 맞은 것이다.
  
먹을 식량 하나 없고 옷마저 도둑이 다 가져가서 갈아입을 것도 몇 개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입고 있는 옷을 벗어주고 대신 쌀을 조금 얻어왔는데 우리의 옷은 다 중국제여서 꽤 인기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하루하루 겨우겨우 살아갔다.

 

 

 

 

 

 

[연재 10] 자유 찾아 천만리

탈북여성작가 지현아 씨의 수기

염미화기자2012.06.30 00:15:07
 


5장 생이별의 아픔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어느 날 어머니는 무거운 입을 열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렇게 산다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니 내가 명순이와 함께 중국의 교회에 가서 옥수수라도 조금 가져와야겠다. 그동안 맏이는 명국이를 데리고 잘 버티고 있어야 한다.”
 
다시 중국으로 갔다가 이번엔 또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그러느냐며 말렸지만, 어머니는 내 권유를 마다하며 명순이와 함께 중국으로 발길을 향했다. 이젠 집에 남동생과 나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기업소 초급당 비서라는 사람이 와서 어머니와 명순이가 어디 갔느냐고 물었고 세포비서가 와서도 같은 물음을 했다.
 
나는 어머니와 명순이가 먹을 것이 없어 지방에 빵 장사하러 갔다고 둘러댔다. 그렇게 한 보름정도 지났을까? 어머니가 왔다. 등 뒤에 무거운 쌀 배낭을 지고 말이다. 쌀 배낭만 보아도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옛날부터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는 말이 나온 것 같다. 명국이도 좋아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어머니와 함께 갔던 명순이가 보이질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대답에 깜짝 놀랐다. 동생이 중국의 생활환경을 경험한 뒤 그곳에서 살고 싶다며 오지 않겠다며 어머니 혼자 가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명순이가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다시 중국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하룻밤 어머니랑 함께 자면서 가지 말고 그냥 살면 안 되느냐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렇게라도 쌀을 가지고 와야 살지 그냥 어떻게 살겠냐고 했다. 이리해 어머니와 우리는 또 갈라졌다. 어린 명국은 울면서 어머니의 옷자락을 잡고 가지 말라고 했다. 어머니도 울면서 꼭 돌아오겠다고, 이번에만 갔다 오면 다시는 가지 않겠다며 명국을 어른다.
 
“엄마, 꼭 올 거지? 쌀 많이 가져오고 다시는 가지마…. 응?”
 
엄마의 확답을 받고서야 동생은 어머니의 선택에 응했다. 왠지 난 느낌이 별로 안 좋았다. 이러다 영영 갈라지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일 줄이야! 계속 기다려도 엄마와 명순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앞집의 할아버지가 굶어서 돌아가시고 옆집의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또 그 다음 날에는 뒷집의 아저씨가 굶어서 돌아가셨다. 그처럼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마을을 떠나는 사람이 생겼다. 한 명 한명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중국으로 간 것이었다.
  
먹을 것을 찾아 떠나가는 그들은 떠날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없어도 함께 웃어주며 집안 가득 꽉 차있던 식구들은 온데간데없이 달랑 명국이와 나만 남았다.
 
나라에서 주던 배급이 끊긴 지도 꽤 오래되었고 집집마다 언 감자를 주우러 다녔다. 언 감자를 줍는다는 것은 전해에 수확한 후 감자밭에 남아서 겨울을 지낸 감자를 이듬해 봄에 줍는 것을 말한다. 수확한 밭에 뭔 언 감자가 그리 많으랴. 하지만 행여 있을까? 하지만 호미를 들고 찾으면 그래도 언 감자가 나왔다.
  
그렇게 한 달을 넘게 살았다. 너무도 힘들었다. 장갑도 없고 솜옷도 없는 상태에서 겨울을 보낸다는 것이 정말 간단치 않았다. 나는 그럭저럭 지낼 수 있지만 명국이는 그때 나이가 겨우 10살이었으니…. 그래도 참고 견디는 모습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언 감자를 파던 명국이가 다 꿰진 모자를 눌러쓰고 눈물을 한 방울씩 떨구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누나, 쌀 가지러 간 엄마와 작은 누나는 언제 와?"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머리를 숙이고 호미로 언 감자를 찾았다. 그렇게 말하는 동생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했다.
 
“명국아, 이제 엄마가 쌀 많이 가지고 올 거야. 그때는 이런 언 감자 먹지 않아도 돼. 그러니 조금만 참자. 응?”
 
명국이를 조용히 안았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동생의 모자 위에 똑 똑 떨어졌다. 너무도 속상해 그 옆 숲 속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 어디에 계십니까? 저 너무너무 힘듭니다. 너무 힘들어 지쳐 쓰러질 것만 같습니다.’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나무 꼬챙이로 휘둘러도 걸릴 것이 하나도 없는 방안은 싸늘하기만 했다. 저녁이면 다섯 식구 오붓하게 모여 앉아 웃음 짓던 우리 가족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부모 형제가 보고 싶었다. 바이올린을 타던 아버지…, 언제나 보살펴 주던 어머니…, 항상 재롱을 떠는 여동생…. 모두 그리웠다. 그러나 왠지 만날 가능성이 없을 것 같았다. 그때 심정을 이 글로 제대로 표현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20살도 안 되었던 나이기에 그 무엇 하나 결정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자살을 하려고까지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명국이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있었다. 내가 죽으면 동생은 어이하랴. 9살인 동생이 나만 믿고 저렇게 있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였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지옥 같았다. 소금이 금값이라 먹어본 지가 오래 돼서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다. 명국이도 붓고 나도 붓고…. 기운이 없어 산에 언 감자를 주우러 올라갈 형편도 안 되었다. 그렇게 힘들게 살면서도 내가 사는 조선이 나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공산주의 독재라는 말도 한국에 와서 알게 되었다. 독재라는 단어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북한을 독재라고 부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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