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_ 참혹의 현장
온성 보위부
할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젊은 엄마가 붙잡혀 들어오면서 왜 아이는 중국에 맡겨두지 않고 데리고 왔수? 아이고 고생이구먼!”
“그러게요.”
한 할머니가 안쓰러운지 조용히 이야기하니 주변의 사람들도 혀를 찼다. 아이 엄마는 40대였는데 계속 입에서 피를 토했다. 그런 엄마에게는 관심도 없는 철없는 아이는 보위부(남한의 국정원)에서 주는 배부르지 않은 국수 죽을 먹고는 또 배고프다고 아우성이었다.
“에구! 저걸 어쩌누!”
주변 사람들의 걱정은 아이 엄마의 아픔을 가셔주지 못했다.
아이 엄마는 그릇에 발라주는 죽도 먹지 못한 채 앉아만 있었다. 자리가 비좁기도 하지만 보위부에서는 누워 있을 엄두도 못 내는 것이 누워 있으면 규율 위반이기에 누우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배고파 울고 있었고 이 아이뿐 아니라 복도에 있는 몇 명의 아이들까지 함께 울어댔다.
“엄마, 나 배고파요! 으앙!”
아이들은 보위부 안을 뒤흔들어 놓았다. 보위부는 남한의 국정원과 같은 곳이다.
“야! 여기가 어디라고 배고프다고 난리들이야! 조용 못해? 중국에 가서 배부르게 처먹었으면 됐지, 뭐가 배고파 또 지랄들이야! 그치지 못해?”
우는 아이들에게 호통을 치는 보위부 지도원들의 목소리가 너무도 무서웠다.
아이들의 울음은 잠시 그쳤지만, 엄마들에게 또다시 칭얼댔다. 배고프다고 귀에다 대고 칭얼대며 조용히 엄마 품에서 소리 없이 울었다. 엄마들은 아이를 붙잡고 눈물만 흘렸다.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을까?
아이들의 울음소리, 엄마들의 흐느낌 소리, 심문을 하며 때리는 소리, 맞으며 우는 소리, 이 소리들이 온 북한 땅에 울려 퍼지고 있다.
북송된 사람은 보위부에서 혹독한 신문을 겪었다. 일단 격리 수용된 뒤 중국에서 체류한 기간만큼을 지내면서 그동안 하루하루 겪었던 일들을 일자, 시간대별로 고스란히 토해내야 했다.
탈출 경로, 머문 시설과 남측 접촉 관계자의 신상 등 듣고 본 모든 것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과정을 거쳤다. 몇 차례 정확도를 높이고 거짓 진술을 가리는 절차도 통과해야 했다.
이런 절차를 넘어선 뒤 이른바 자본주의 물빼기 작업이 시작되는데 자아비판과 김정일 혁명역사 교육, 사상교양 등의 프로그램이 이어지는 것이었다.
더 이상 인간은 없다
“선생님, 3호실요. 토변 보...보...올...”
“야! 이 개새끼야! 똑바로 말 못해?”
남자 감방에서 말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 있는 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선생님, 3호실요. 토변 보올수 있틉니...니...”
알고 보니 3호실에 중국 사람이 들어와 갇혀 있었다. 이 사람은 조선족이 아닌 한족이어서 조선말을 잘 못하고 감방에서 화장실 볼 때의 말을 억지로 배운 것이었다. 말을 제대로 못하면 화장실을 가지 못해 바지에 싸게 했다.
“선생님, 3호실요. 토변 뽀수 있틉니까?”
“저 개새끼, 아직도 말을 저렇게 하냐? 야, 반장. 너 뭐해? 어떻게 가르쳤기에 저렇게 해? 다시 가르쳐!”
매 감방마다 반장이 있었다. 한족이 있는 감방의 반장이 제대로 가르쳐 주지 못했다고 보위부 지도원에게 욕을 먹었다.
“야, 이 개새끼야! 너 왜 그렇게 가르쳐 줬건만 아직도 못해? 다시 해봐! 선생님, 3호실입니다. 소변 볼 수 있습니까? 해봐! 이 개새끼야!”
“선생님, 3호실입니다. 토변 뽈투 있틉니까?”
중국 사람을 발로 차면서 가르쳐 주는 반장과 발에 맞으면서도 어떻게든 말을 해보려는 한족이었다. 3호실 감방에서는 한족의 비명소리가 흘러넘쳤다. 겨우 선생님한테 말하는 데 성공해 문을 열고 나왔다.
나는 그를 보는 순간 놀랬다. 나이가 60세가 넘은 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얼굴에 멍이 들고 눈이 부어 있었으며 코에서는 코피가 났다. 자기 아버지뻘 되는 사람을 저렇게 해놓았다니 너무했다. 한족은 팬티 같은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짝이 맞지 않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저 사람이 여기 들어 온 지 3달이 됐다우! 중국 두만강에서 낚시를 하다가 경비대 군인들이 고기를 많이 줄 테니 담배와 바꾸자고 해서 담배를 들고 건너갔다가 붙잡혔다우. 올 때 입었던 옷과 신발은 군인들에게 빼앗기고 저런 헌옷만 입구 다니네. 불쌍하구먼! 빨리 중국에 가야 할 텐데….”
보위부 감방에 오래 있던 할머니가 이야기했다. 그랬구나! 우리가 아무리 중국에서 감옥살이를 했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대접을 받지는 않았는데 너무 했다.
며칠 뒤,
“3호실 5번 나와! 너 좋겠다. 이젠 집에 가게 되어서 좋겠다.”
드디어 한족이 중국 땅 고국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좋아하는 소리가 우리 감방까지 들렸다. 우리도 그 사람을 마음속으로 축복해 주었다. 그가 들어올 때만 해도 살이 붙어 있었는데 여기에 있는 동안 먹지 못해 많이 야위었다. 그래도 집에 간다고 생각하니 좋은가 보다. 우리는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눈인사를 하는 그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밖에 나가 본 지도 오래되었다. 이젠 제법 바람이 선선한 초가을로 들어선 요즘 여전히 부모들과 동생들 생각이 간절했다.
감방에서는 원래 두 명의 여자만 따로 밥을 주었는데 국수 죽을 먹는 우리와는 완전히 달라서 쌀밥에 반찬도 많이 주었다. 알고 보니 중국에서 한국으로 가는 길에 붙잡혀 북송되어 온 여자들이었다. 한국으로 가려다 붙잡힌 사람들은 무조건 정치범 수용소 아니면 사형하게 되어 있다. 그중의 대표적 수용소가 요덕수용소인데 생명까지 위협받는 강제 수용소로 악명이 높은 탄압의 현장이다.
정치범 수용소란 김일성, 김정일의 정치적 사상에 대한 반대나 조선 법을 어기거나 조국을 배반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으로써 한 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다시 나올 확률은 거의 없는 곳이다. 한국으로 탈출하는 것은 조국을 배반하는 것이었으며 김일성 사상을 부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여자들이 정치범 수용소로 갈지 사형하게 될지 모르기에 가기 전에 식사만은 우리보다 고급스럽게 주는 것이었다.
그들이 불쌍해 보였지만 다행히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았으며 슬픈 기색도 전혀 없었다. 그들에게 차려질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면 끔찍했다.
웃지 못 할 검사와 뽐뿌질
온성 보위부에서 많은 탈북자들이 돈 때문에 죽도록 맞았다. 중국 변방대에서 옷을 홀랑 벗고 돈 검사를 마쳤음에도 보위부에 들어오면 어디에들 감춰서 들어오는지 돈들이 많이 나왔다.
보위부에 도착하자마자 몸수색을 하고는 주사기로 피를 뽑아 무슨 병 검사를 한다고 했다. 여자와 남자를 갈라서 여자 쪽은 여자 군의가 와서 고무장갑을 끼고 임신한 여자건, 처녀건 상관없이 자궁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항문에도 손가락을 넣었다. 또한, 머리에 손을 얹고 제자리에 서서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뽐뿌질을 100개씩 시키는데 그렇게 하면 돈이 빠져나오기도 했다. 벗어 놓은 옷은 솔기마다 숨긴 돈이 없는지 살펴보고는 감방으로 보내지고 임신한 사람이 있으면 보위부 밖으로 나가서 낙태를 시켰다.
옷섶에 감춰서 가져오고 항문에 넣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궁에 많이들 감춰가지고 들어오는데 돈을 삼켜 배에 감추고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돈을 돌돌 말아 비닐에 꽁꽁 싸서 약을 먹듯이 삼킨 뒤 나중에 대변을 보아 대변을 뒤져서 다시 씻어서 건사하곤 하는 것이었다.
감옥 안에 비운이 감도는 어느 날 나는 갑자기 불려 나갔다. 무슨 일인가 해 알고 보니 나를 포함한 몇 명의 사람들에게 화장실 뒤에 쌓인 대변을 처리 하라는 것이었다. 북한은 남한과 달리 아직도 개방 화장실을 쓰는데 개방 화장실도 남한에서와 달리 화장실 뒤에 변이 가득 넘쳐 있고 그 변을 가져다 농장 밭에 비료로 사용하기도 했다.
보위부 한편에는 경비 군대가 지켜보는 가운데 커다란 바가지에 나무로 된 긴 손잡이로 변을 퍼내는 여자들이 모여 있었다. 냄새가 지독하지만,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우리는 부지런히 변을 퍼냈다.
한창 퍼내고 있는데 “잠깐만!”하고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에 우리는 퍼내기를 멈췄다. 뒤를 돌아보니 보위부 지도원이 입에 손수건을 틀어막고 걸어오고 있었다.
“너희들 내 말 잘 들어. 여기에 비닐로 꽁꽁 싼 쬐꼬만 것이 있을 것이다. 너무 급하게 퍼내려 하지 말고 찬찬히 살펴보면서 해!”
나는 처음에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갔다. 그래서 옆에 있는 아줌마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보위부 지도원 말대로 우리는 아주 천천히 살펴보면서 퍼내는데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발견했다고 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모였다. 자그마한 것이 비닐에 돌돌 말려 있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꺼내야 할지 잠시 망설이던 차에 같이 일하던 한 아줌마가 나뭇가지를 꺾어 가지고 오더니 그걸로 건져 내었다. 우리는 경비군인이 안 보이는 사이에 그것을 조심히 풀어 보았다. 다름 아닌 중국 돈 200원(한국 돈으로 약 36,000원)이었다.
그 돈은 누군가가 삼키고 변에서 찾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북한의 사정은 먹지 못해서 사경을 헤맬 정도의 상황인지라 목숨 걸고 돈을 가지고 왔을 것인데 그렇게 쓸모없이 되어 버리고 말았으니….
그런 상황에서 그 돈을 가질 임자는 따로 있었으니 우리는 그 돈을 새로운 임자에게 주었다. 변 냄새가 진동하는 돈을 받아 든 보위부 지도원은 입에 웃음을 띠며 계속 찾아보라고 했고 그날 그렇게 11개인지 12개의 돈을 감싼 비닐들을 발견했다.
뙤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구원의 손길 같고 저녁에 들어오는 노을은 우리들의 복수의 피가 물들여져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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