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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악몽같던…" 스러져간 학도병 戰友를 기억하며 그는 10분간,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淸山에 2012. 6. 25. 06:22

 

 

 

 

 

"아… 그 악몽같던…" 스러져간 학도병 戰友를 기억하며 그는 10분간,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 광주광역시=김성현 기자
  • 입력 : 2012.06.25 03:09

    학도병과 北정규군의 첫 전투였던 '화개장터 전투' 참전 임종철씨

    6·25전쟁 당시 16세의 나이로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임종철씨가 22일 광주 동구 자택에서 62년 전 동료들을 잃었던 화개 전투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임씨는 후배들에게 6·25의 살아있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 지난 2006년‘학도병은 살아있다’를 썼다. /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1950년 7월 26일 오전 경남 하동 화개장터. 밤샘 행군 끝에 새벽녘 도착한 학도병 183명은 아침도 못 먹고 면 사무소 뒷산을 올랐다. 건너편 지리산 자락에 이미 인민군이 진입했다는 정보에 따라 연대장의 긴급명령을 받은 터였다.

    산 위에는 여순사건 때 파놓은 연결호와 움막형 벙커들이 있었다. 무명지를 깨물어 혈서를 쓰고 학도병에 지원한 임종철(당시 16세)군도 동료들과 서둘러 한 벙커로 뛰어들었다.

    그때 '따당' 하는 총소리와 함께 적의 기관총과 직사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6·25 전사(戰史)에 학도병과 북한 정규군 사이의 첫 전투로 기록된 '화개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빗발치는 총탄 속에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M1 소총으로 응사했다. 벙커 밖에서 비명이 들렸다. 나가 보니 순천 매산중 출신 학도병이 가슴 왼쪽에 관통상을 입어 걷잡을 수 없이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지혈이 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다가오더군요. 그러다 자리에 '퍽' 쓰러졌어요. 몸을 눕혀보니, 총알이 머리를 관통해 즉사한 상태였습니다."

    너무나 끔찍한 모습에 그는 정신을 잃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려워할 새도 없이 또다시 '펑' '펑'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학도병들이 숨어 있던 한 벙커에 포탄이 명중해 있었다. 한 전우는 온몸이 갈가리 찢겨 있었고, 다른 부상자는 왼쪽 상체 전체가 부서져 있었다. 지옥을 보는 것 같았다.

    "그때 그곳의 모습은…." 62년 전 전투를 회고하던 임종철(78·전 광주광역시의회 사무처장)씨의 목소리가 갑자기 떨렸다. 한동안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아수라장, 사람의 온몸이 갈가리 찢긴 모습을 뭐라고 표현하겠습니까…."

    당시 상대는 북한군 6사단. 직사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최정예 부대의 압도적 공세 앞에 처음 총을 쥔 학도병들은 속수무책이었다. 3시간여 전투 끝에 후퇴명령이 내려졌다. 이 전투에서 26명이 전사했고, 20여명이 부상했다. 그래도 학도병은 적의 전진을 10시간 지연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당시 보성중 3학년이던 그는 화개전투 보름 전인 7월 9일에 학도병에 지원했다. 순천에 주둔한 15연대에는 임군처럼 여수·순천·보성·고흥·광양 등에서 지원한 학생 183명으로 학도병 중대가 편성됐다. 6·25 전쟁 첫 학도병 중대였다. 훈련은 1주일간 목총과 죽창을 다루고, 제식훈련과 총검술, 각개전투를 익히는 것이 전부. 식사는 주먹밥, 잠자리는 시멘트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해결했다. 임씨는 지난 2006년 화개전투를 비롯, 학도병의 활약을 담은 증언집 '학도병은 살아있다'(대동문화)를 썼다. 그는 "일부에서는 맥아더가 침략군이라며 동상을 철거하려고 하던데, 맥아더가 침략군이면, 함께 참전한 나도 침략군이냐"며 몇번이나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그는 "나이 칠십 넘어 아무런 욕심이 없다. 6·25를 사실 그대로 후배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생각뿐"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