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연백에서 중학교 선생님을 하다가 타이거 여단장으로 활약한 박상준씨.
유정·곽재우·신돌석….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급할 때 스스로 사람을 모아 싸웠던 의병(義兵)들이다. 유난히 외침을 많이 당했던 우리나라엔 의병 활동도 많았다. 6·25전쟁 때도 그랬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계급도, 군번도 없이 피를 흘렸던 유격군이 그들이다. 대부분 이북 출신으로 10대 후반에 총을 잡고 인민군과 맞섰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선 이렇다 할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6·25 62주년을 맞아 육군 특수전사령부의 전신으로 여겨지는 유격군을 조명해 본다.
미군에 배속돼 전투에 투입됐던 유격군은 8240부대(미 극동사령부 주한연락처), 즉 켈로(KLO)부대로 불린다. 엄밀히 보면 켈로부대는 미군이 공식적으로 양성해 북파한 정보 수집 부대다. 반면 유격군은 주로 북한 지역 출신들이 모여 자생적으로 활동을 펼치다 미군에 편제돼 고향 지역에서 유격 활동을 펼친 부대다. 그러다 보니 부대 성격이 다양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부대 소속과 이름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들은 정보 수집과 폭파, 요인 암살, 항공·함포 유도와 관측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현재의 특수전사령부와 정보사령부 역할을 한 것이다.
유격군의 시작은 미미했다. 8240부대로 더 유명한 미 극동사령부 주한연락처 타이거부대 여단장 출신인 박상준(88) 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 명예회장은 “배가 고팠던 피란 청년들이 조직화하면서 유격군이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한때 낙동강까지 밀렸던 전황이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역전되면서 군은 북한 지역으로 진출했다. 해방 직후 불안하던 치안을 안정시키기 위해 호국단·청년단 활동을 했던 청년들이 이때 다시 모여 치안 활동을 했다.
이것도 잠시 50년 말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연합군이 후퇴하면서 이들은 섬이나 산골로 피란해야 했다. 3~4주 정도면 유엔군이 북진할 것이란 판단이었다.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박 명예회장은 “금방 고향으로 돌아갈 것으로 예상했지만 공방이 거듭됐다”며 “식량이 바닥나자 식량을 구하기 위해 고향을 찾아 인민군과 교전했던 게 유격군의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서해안 지역 105개 섬 곳곳에 숨어 있다 주로 밤에 고향에 들어가 식량창고를 급습하거나 노동당에 입당한 주민집을 털었다고 한다. 혼자 힘으로 어려워 이전에 치안 활동을 함께했던 사람들이 점점 세를 모았다.
미군 통제에 들어가기 전 휴전선 인근에서 활동했던 유격군 부대는 현재 파악된 것만 35개다. 미군은 이들을 비공식적으로 활용했다. 이들이 식량 확보를 위해 유격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얻은 정보의 가치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켈로부대에 식량과 무기를 전폭 지원했던 미군은 이들의 정보나 이들이 잡은 포로의 가치에 따라 식량과 무기를 주곤 했다. 일종의 인센티브제도를 활용한 셈이다. 미국과의 ‘거래’가 이뤄지면서 배가 고파 시작한 유격전은 전투 공적을 통해 식량을 지급받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이들은 51년 3~4월 미군의 편제에 들어갔다.
미군은 유격군 개편을 통해 서해안에서는 ‘당나귀부대’로 알려진 동키부대와 울팩부대를 탄생시켰다. 동해안에는 커크랜드 특수임무부대를 만들었다. 동키부대라는 이름은 이들이 당나귀처럼 고집이 세다는 이유에서 붙여졌다. 실제로 이들은 휴전 전날(53년 7월 26일)에도 대장간에서 일하던 사람들로 구성된 속칭 ‘떼꾸니부대’를 투입해 북한군 연락장교를 생포하고, 휴전에 반대하며 전투를 벌여 미군이 이들에게 수여키로 했던 은성무공훈장이 취소되기도 했다. 또 항공기나 함포 사격 유도를 위해 보급됐던 무전기(angry nine)의 발전기가 당나귀 귀처럼 생겼다는 것도 동키부대가 되는 계기가 됐다.
유격군이 북한 지역 출신들로 구성돼 있다 보니 이들은 주로 고향에 가서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밤에 눈 감고도 논두렁을 휙휙 넘어다닐 정도로 지형지물에 익숙한 이들은 야간 정탐 활동을 어렵지 않게 해냈다. 때론 6개월간 산속에서 은거지(비트)를 구축하고 생활하면서 북한군의 보급 정보나 군사 활동을 파악해 보고하거나 시설물을 폭파하고 유엔군의 포격 좌표를 제공했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박충암(79) 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장은 “유격군은 정식 군사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스스로 생존하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전투에 임했다” 고 회고했다. 인민군에 쫓기다 볏짚을 주워 물속에 들어가 물대롱으로 쓰는가 하면 산속의 동물이나 나물로 연명한 적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이들은 소규모 병력으로 적진에 뛰어들다 보니 죽을 고비를 밥 먹듯 넘었다. 장마 때 비트가 떠내려가 물속에서 구렁이와 뒹구는 경우도 있었다. 쌀은 있으나 반찬이 없어 인민군이 뿌려 놓은 지뢰를 가져다 해안에서 터뜨려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배가 고파 민가에 들어가 장독을 핥았고 장독 속의 구더기를 먹는 일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북한 지역에 침투해 위조지폐를 사용하다 잡혀 사형당한 유격군도 있었다.
하지만 유격군은 어디까지나 정보 수집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파견 나온 미군 고문관이 정보 수집을 해 오라는 명령을 했는데 지뢰 매설 지역을 통과해야 하는 작전이었다. 박충암 회장은 “지뢰 때문에 침투가 불가능하다고 하자 그 고문관은 한 줄로 서서 침투하면 한 명만 목숨을 잃으면 된다고 하더라. 이 말에 격분해 몸싸움을 벌인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이들의 활용도가 높아지자 미군은 부대를 수시로 개편했다. 동일 지역 출신들을 중심으로 편성된 부대에서 작전에 따라 부대별로 2~3명씩 차출해 새로운 부대를 만들어 작전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평양 승호리비행장을 정찰해야 할 경우 평안남도 금천, 사리원, 황주, 평양 지역 출신들로 혼성부대를 만드는 식이었다. 각 지역에서 미미한 세력으로 시작된 유격군은 미군의 지원과 통제를 받으며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다 휴전 직후인 53년 8월 5일 한·미 간 유격군 신분에 관한 협약에 따라 한국군 8250부대로 재편됐다. 이들이 현재 특수전사령부(특전사)의 모체가 됐다.
활약은 컸으나
3만2200여 명 4445회 작전 참가
적군 6만9000명 사상, 교량 80곳 폭파
대접은 못 받아
군 복무 인정 안 돼 휴전 뒤 재복무
보상법안도 회기 만료돼 자동폐기
휴전 직전인 1953년 6월 6일 자신을 대신해 전사한 중대장을 애도하는 박상준 타이거부대 여단장과 부대원들. [사진 박상준씨]
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 에 따르면 1950년 12월부터 53년 7월 27일 휴전 때까지 6·25전쟁 기간 동안 활약한 유격군은 모두 3만2200여 명이다. 이들은 서해 5도에 설치된 기지를 중심으로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 등에서 모두 4445회의 작전에 참가했다. 직접 교전을 통해, 또는 유엔군의 함포 사격 유도를 통해 인민군과 중공군 6만9000여 명을 사살했거나 부상을 입혔고, 950명을 생포했다. 또 5000여 정의 총기를 노획하고, 북한 지역 후방에 침투해 80여 곳의 교량과 건물 2200여 동을 파괴했다.
특히 북한 지역 폭격에 참여했다 추락해 고립됐던 유엔군 조종사 10여 명을 구했고, 20만여 장의 전단을 살포하는 심리전에도 참여했다. 이런 활약을 하면서 피해도 적지 않았다. 전사자는 5194명에 달했고, 부상 인원은 집계조차 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전쟁 기간은 물론이고 휴전 이후에도 제대로 된 보상이나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전투에서 공적을 세운 이들에게 주어지는 훈장은 고사하고 존재 자체가 부정됐기 때문이다. 오히려 휴전 이후엔 군 복무를 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돼 5년간 더 복무해야 했다. 이들의 실체는 84년 비밀 해제된 미 국방부와 국무부 문서를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이 정리하면서 알려졌다. 지난해 국회에서 이들에 대한 보상을 위한 법률안이 제출됐지만 회기가 만료돼 자동폐기됐다. 그나마 2000년대 초반부터 월 12만원씩 지급되는 참전명예수당이 이들에겐 위안거리다.
이번 6·25전쟁 62주년을 맞아선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비록 미군에 배속돼 전투했지만 무공훈장이나 참전수당 등이 현실적으로 집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박충암 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장은 “유격군 활동에 대한 조명과 명예회복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